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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132화 (132/139)

제 132 화

그제야 패트리샤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서 다음 말은 없었고? 진짜 대신관에 대한 정보 같은 것 말이야.”

“정확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짜 대신관이 전하라는 쪽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뭐지?”

“그러니까 그대로 전하자면, ‘파르마, 도망쳐라. 그들이 어둠의 나락으로 끌어들이기 전에’. 그 말을 검을 든 검은 고양이의 주인에게 전하라고 했답니다. 그 대가로 그 가짜 대신관은 카일이 살 방법을 알려준 모양입니다.”

패트리샤의 말에 세이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브게니아에게 영매의 힘이 있나 보군.”

“에브게니아요?”

패트리샤가 놀란 표정으로 세이란을 보았다. 그러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패트리샤를 보았다.

“아는 자인가?”

“그게, 이름이 같습니다. 제 친구의 할머니 이름과.”

“에브게니아는 테란의 사람이다. 그렇다는 건 네 친구 역시 테란의 첩자겠지. 알고 있었나?”

“의심 중이었습니다. 좀 더 분명해지면 보고드릴 생각이었고요.”

패트리샤의 표정이 어두웠다. 세이란은 그녀가 이 일을 두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패트리샤, 네가 힘들다면 이 일에서 빠져도 된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진은 자신에겐 혈육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만약 그녀가 첩자라면, 자신이 직접 붙잡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래, 너에게 맡기겠다. 그리고 진짜 대신관은 내가 알아보지. 짐작 가는 이가 있거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카일과 함께 국경을 넘어온 용병들의 대부분이 테란의 기사인 모양입니다.”

“몇 명이나 되지?”

“스무 명 남짓이라고 했습니다.”

패트리샤의 말에 세이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살수들인 모양이군.”

“살수라면……. 설마 테란에서 암살을 시도할 계획이라는 뜻입니까?”

알베르트 루칸 백작이 창백해진 얼굴로 세이란을 보았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대체 누굴……?”

패트리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알베르트 루칸 역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세이란을 보았다.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세이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당연히 나겠군,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

**

키안이 레녹스 공작가에 도착하자마자, 집사인 가브리엘에 뛰어나왔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주인님.”

창백해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가브리엘을 보자, 키안은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졌다.

“빨리 돌아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아닙니다. 전하께서 연락을 주셔서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유모인 에리스에게 전갈이 왔습니다. 무사히 영지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다행이야.”

키안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공작가에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에리스에게 연락이 왔을 것 같아서였다.

“주인님, 잘 해결된 겁니까?”

가브리엘이 키안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분명 황태자인 세이란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소문엔 레녹스 공작이 제국법을 어겼다며, 곧 공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귀족회의에서 황태자 전하와 함께 검술 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요구를 해왔어. 아마, 제국민이 모인 자리에서 날 황태자비로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게 할 모양이야.”

“하지만 신탁입니다. 만약 제국민이 거부한다면…….”

“그렇게 되면, 나는 재판을 받게 될 거야.”

“주인님!”

가브리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키안을 불렀다.

“걱정할 정도로 큰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안심해, 가브리엘.”

“전하께서 지켜주실 겁니다. 제게 약속하셨습니다. 주인님과 레녹스 공작가를 지켜주시겠다고요.”

언제 또 그런 약속을 한 걸까? 키안은 가브리엘의 말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약속하셨으니 지키실 거야. 이제 그만 들어가 쉬도록 해.”

가브리엘이 별채로 향하자, 키안 역시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따라 걷는 키안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내가 아니야. 전하시지.”

자신을 살린 대가가 세이란의 목숨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운명 따윈 믿지 않았다.

세이란이 자신을 살린 것이라면, 자신 역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정해진 운명 따위 없어. 모든 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바뀔 뿐.”

자신이 천 년 전 대륙의 주인이었던 대마법사의 환생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 어떤 힘도 없었다.

그러니 운명 역시 바뀌어야 했다. 그때와는 달리, 평범한 인간인 자신의 의지대로.

**

“어딜 다녀오는 거야? 이 새벽에 말이야.”

어둠 속에서 들려온 패트리샤의 목소리에 진이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잖아.”

손으로 심장을 꾹 누르며, 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패트리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왜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군. 마치 숨기는 게 있는 것처럼 말이야.”

패트리샤의 지적에 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것 없어. 갑자기 나타나 놀랐을 뿐이야.”

진이 패트리샤의 눈치를 보며, 변명했다. 그러다 패트리샤는 진의 눈가가 붉게 변해 있는 걸 보았다.

“너, 울었어?”

“울긴. 그런 적 없어.”

진이 고갤 돌리며, 부정했다.

“그런 적 없긴. 눈가가 붉잖아. 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이 새벽에 울고 다니는 건데? 얼굴 이리 내.”

패트리샤가 진의 팔을 붙잡곤 자신이 서 있는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거친 말과는 달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었다.

“패트리샤, 그게…….”

진이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패트리샤는 그런 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진,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널 도울 거야. 위험이 뒤따른다 해도 말이야.”

패트리샤의 말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진의 입매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자신이 입을 열면, 패트리샤까지 위험해진다.

‘도저히 말할 수 없어.’

진은 이고르의 요구로 황실 사냥터에 렌스터 공작가에서만 제조되는 독을 풀었다.

북쪽 숲에서 막사가 있는 남쪽 숲까지 독을 풀어 황태자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던 것이다.

‘거기다 내가 테란의 첩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황태자 전하의 편에 있는 패트리샤까지 의심을 받을 거야.’

차라리 모르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검술 대회는 나가지 마, 패트리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유는 묻지 마. 하지만 나가면 안 돼.”

“진!”

패트리샤가 진의 팔을 붙잡고는 자신을 보게 했다. 그러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갤 가로저었다.

“미안해. 하지만 모르는 게 너에게 좋아. 그래서 이러는 거야.”

진이 입술을 깨물며 패트리샤의 손을 밀어냈다.

“나랑 같아 가자. 내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알지? 그러니…….”

“그래서 이러는 거야. 네가 위험해져서.”

그 말과 함께 진이 자릴 뜨려 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순간 패트리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진의 팔을 잡고는 낮게 속삭였다.

“진, 누군가 네 뒤를 밟은 것 같아.”

“뭐?”

진이 놀라 고갤 돌려 주위를 살피려 하자, 패트리샤가 재빨리 덧붙였다.

“태연하게 행동해.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말이야.”

“알았어. 이제 어쩌지?”

진이 불안한 눈빛으로 패트리샤를 보았다.

“내가 전에 말했던 오두막 기억나?”

“오두막이라면, 그 황실 소유…….”

“쉿! 거기 가 있어. 거긴 안전해.”

“하지만 그곳은…….”

“얼른 가, 이 길로 바로.”

“하지만 뒤쫓는 자가 있다며? 어떻게 하려고?”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그러니 넌,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 내 말 명심해. 넌, 무조건 그곳으로 가는 거야.”

패트리샤가 기민하게 인기척을 살폈다.

“이제 가.”

패트리샤가 손을 놓자, 진이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패트리샤 역시 자연스럽게 진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진의 뒤를 쫓았던 자가 방향을 틀어 자신을 뒤따라오고 있었다. 패트리샤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패트리샤가 사내의 목에 검을 겨눴다.

“움직이지 마.”

서늘한 단검의 끝이 사내의 목에 닿자,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뒤를 돌아보려는 듯 고갤 돌리려 했다.

“더 움직였다간 죽는다.”

“패트리샤, 나다. 당장 검을 치워.”

익숙한 목소리에 패트리샤가 재빨리 단검을 거둬들였다. 그러곤 검은 외투를 입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카일 님!”

어스름한 새벽빛에 카일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얘기하겠다. 우선은 이곳을 피하는 게 좋겠다.”

패트리샤는 단검을 넣은 후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카일과 함께 그곳을 떴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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