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7 화
“출근이 빠르십니다, 단장님. 사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반갑게 말을 걸어오는 사무엘 스텐호프의 목소리에 마구간지기에게 말고삐를 건네던 키안이 돌아보았다.
“스텐호프, 내가 없는 동안 황제궁엔 아무 일 없었겠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창백합니다. 사냥이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사무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뻗어왔다. 이마를 손끝으로 살짝 만져 본 그가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열은 없어 다행입니다.”
“내가 걱정만 끼치는 사람인 모양이군.”
“그래서가 아니라…….”
사무엘이 키안의 눈치를 살피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정색하고 그래?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새삼 느껴 하는 말인데. 고맙다, 스텐호프.”
“어, 아닙니다.”
사무엘 스텐호프가 놀란 표정으로 머릴 긁적였다.
“나는 황제궁에 갈 건데.”
“저는 어제부로 황제궁의 호위에서 빠졌습니다. 드레이크 경께서 검술 대회 준비를 도우라고 하셨거든요.”
그러고 보니 한 달 뒤가 검술 대회였다. 이제 며칠 후면 대회에 참가할 용병들이 본격적으로 수도인 키엘체로 몰려들기 시작할 터였다.
“요즘도 시합이 열리나?”
키안의 질문에 사무엘은 바로 알아채고는 대답했다.
“가끔 열립니다. 하지만 블랙이 나오지 않아 실망하던 차입니다.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가보고 싶군.”
“시합이 잡히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단장님.”
“부탁하지, 스텐호프.”
키안이 황제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바쁘셨으니, 참가하지 못하신 모양이군.’
키안은 세이란이 블랙이란 이름으로 용병 시합에서 싸우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다음에 여쭤봐야겠어. 어떻게 블랙으로 용병 시합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어떤 이유로 블랙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와 함께 갔던 바레나 거리도 또 같이 가고 싶었다.
어느새 황제궁에 도착한 키안은 보초병들과 눈인사를 한 후, 서둘러 황제의 침전 쪽으로 향했다.
며칠 전 대신전에 갔을 때, 도미니크 대신관이 황제궁의 엘렌에게 전해주라는 물건이 있었다. 황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느라 늦어졌지만, 서둘러 전해야 했다.
“엘렌 시녀를 찾고 있다. 레녹스 공작이 만나길 청한다고 전해주겠나?”
키안이 침전 앞에 멈춰 서서,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시녀가 얼굴을 붉히곤, 재빨리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고 엘렌이 나왔다.
“레녹스 공작님, 찾으셨습니까?”
“전할 게 있어서 왔다. 대신전에 갔었는데, 대신관께서 이걸 그대에게 전해달라고 하더군. 황제 폐하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엘렌은 키안에게서 재빨리 작은 상자를 받아 들었다.
“밤에 공기를 정화하기 위해 피우는 허브의 일종입니다. 신전에서만 만든 것이라, 제가 종종 받으러 갔었는데 지난번에 갔을 땐 제가 경황이 없어서 가져오지 못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가끔 대신전에 가는 모양이군.”
“전엔 폐하께서 이 허브를 좋아하셔서 받으러 갔었지만, 아프신 후론 쾌차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러 가곤 합니다.”
키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진 엘렌은 분명 시녀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인의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혹시 폐하를 마음에 품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눈앞에 서 있는 엘렌이 시녀장이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시녀장도 아닌 일개 시녀가 황제궁의 모든 책임을 맡고 있다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시는 모양이었다. 엘렌이 폐하의 연인이란 사실을.
“여기에 있었군, 레녹스 공작.”
“전하.”
세이란의 등장에 키안은 물론, 엘렌이 재빨리 예를 갖췄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갤 들자, 말끔한 모습의 세이란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온 거지, 레녹스 공작?”
“대신관의 부탁을 받고, 엘렌에게 물건을 전하러 왔습니다.”
“대신관이라면, 대신전에 간 것이냐? 무슨 일로?”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가 대신전에서 자신과 도미니크 대신관 사이에 있던 일에 대해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입술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폐하의 쾌유를 기원하는 기도이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그런 이유로 대신전을 찾습니다, 전하.”
키안 대신 엘렌이 대답했다. 안도감과 함께 키안은 문득 엘렌이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고맙군, 신경 써줘서.”
“제국민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키안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레녹스 공작,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 폐하를 뵙고 나올 테니까.”
그가 황제궁의 침전으로 들어가자, 엘렌 역시 키안에게 인사를 건넨 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 키안은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어떻게 하지? 전하께서 나의 비밀을 알았으니, 신탁의 내용 역시, 말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자신이 여인이란 사실은 그가 눈감아주면 그만일 일이었지만, 신탁의 내용은 달랐다.
아직 어떻게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문이 열리고 세이란이 밖으로 나왔다.
“갈까?”
“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표정이 어둡습니다.”
하루 사이 그의 눈가엔 그늘이 져 있었다.
“며칠 자릴 비운 사이에 일이 많아졌더군. 지금도 법무대신에게 가던 길이다. 로체 거리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모양이야.”
로체 거리의 사건이라면, 자신과 벨라가 목격한 것을 두고 하는 말하는 모양이었다.
“살인 사건이었습니까?”
“벌써 알고 있는 모양이군.”
“저와 아키텐 공작부인이 처음으로 목격해 컨스터블에 알렸습니다. 저 역시 증인입니다. 전하와 함께 가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사건이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놀랐겠군.”
세이란이 키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놀라기도 했지만, 그건 잠들어 있던 공포를 깨우는 경험이었다.
꿈에서만 보던 해묵은 기억이 현실에까지 스멀스멀 기어 나와 그녀의 의식을 옭아매었다. 그날 대신전에서 대신관을 만나지 않았다면, 밤새 그 섬뜩하고 잔혹한 기억 때문에 몸부림쳤을지도 몰랐다.
“이젠 괜찮습니다.”
세이란 때문에 괜찮아졌다. 여전히 자신 때문에 오빠가 죽었다는 죄책감은 남아 있었다. 가문에 대한 의무와 그 무게 역시도. 하지만 두렵진 않았다.
“다행이군. 잠깐, 에드윈에게 가기 전에 너와 먼저 할 일이 하나 있다.”
그가 키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곤 뭔가 큰일이라도 있는 듯 재빨리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할 일이라니, 그게 뭔…….”
지 묻지 않아도, 키안은 곧 알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데려간 곳은 인적이 드문 건물 뒤였다. 순식간에 벽에 밀어붙여졌고, 그가 고갤 숙여왔다. 참을 수 없는 성급함으로 입술을 비벼왔다.
“전하, 잠시만 기다……. 누가 볼지도…… 흡!”
밀어내려 했다. 셀서스 궁은 지켜보는 눈이 많았고, 언제나 소문이 빨랐다. 이젠 걷잡을 수 없는 소문이…….
“딴생각하지 마.”
입술을 떼지 않은 상태로 말을 하자, 습기를 머금은 그의 숨결이 입술을 간질였다.
“난 욕심이 아주 많다. 네 생각까지도 질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뜨겁고 촉촉한 혀가 입술을 쓸었다. 그러곤 다시 한 번 깊숙이 혀를 묻어왔다. 망설이던 그녀 역시 이번엔 입술을 열며, 키스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이곳이 셀서스 궁이란 사실도 잊고 열중했다.
“으흠-”
잠시 후 하나처럼 녹아내리던 입술이 떨어졌다. 세이란이 손을 뻗어 자신의 타액이 묻어 있는 키안이 입술을 쓸어내렸다.
“이제 소문은 기정사실이 되겠군. 너와 내가 좋아 죽는 사이라고 말이야.”
세이란은 재미있다는 듯 눈까지 빛내며 말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으십니까? 그건 추문일 뿐인데요.”
“너와 나에 관한 모든 건 추문이 아니라, 우리의 연애사다. 시간이 흘러 즐거운 마음으로 곱씹고 곱씹을.”
시간이 흘러 곱씹게 될 그들의 연담이란 말에 심장이 뛰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제 갈까? 요즘 에드윈이 뭐가 그리 초조한지, 벌에 쏘인 곰처럼 행동하고 있거든. 연애가 마음처럼 되지 않는 모양이야.”
“연애요? 리치문트 공작님께 여인이 생기셨습니까?”
“나도 놀라는 중이다. 평생 책만 끼고 살 줄 알았는데, 여인에게 홀딱 마음을 빼앗겨 실수를 연발하다니 말이다. 그런데 상대가 누군지 말을 하지 않는단 말이야. 키안, 혹시 넌 알고 있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결국 에드윈 리치문트는 벨라를 마음에 담아버린 모양이었다.
“글쎄요. 알 것 같기고 하고. 하지만 의외입니다. 편한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다니.”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뭘 모르는 모양이군. 키안, 사낸 한 번 마음을 빼앗기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존재다. 남들이 보기엔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지만, 본인에겐 그렇지 않거든. 가슴 떨리도록, 행복한 선택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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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르, 이걸 그분이 줬다고?”
“황실 사냥터에서 만났습니다. 곧, 연락을 다시 해올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고르가 건넨 편지봉투를 받아 든 헬로이즈의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보지 않아도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이고르 역시 그것을 아는 듯, 재빨리 고갤 숙였다.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시킬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이고르가 나가고 헬로이즈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편지봉투를 봉인한 붉은색의 인장은 루틴 가문의 상징이었다.
문득 헬로이즈는 루틴 가문의 상징을 보자, 로렌스 루틴 공작을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새벽이었고, 헬로이즈 역시 승마를 끝내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때 왕실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하고 있던 그를 보았고, 헬로이즈는 그를 평범한 하급 기사로 착각해 이곳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며 그를 쫓아내려 했었다.
그러다 그의 검에 새겨진 이 문장을 보곤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대체 이런 유치한 그림을 왜 새기고 다니냐고.
사실 정말 무식한 질문이었다. 공주인 자신이 테란국의 공작 가문인 루틴 가문의 상징을 몰랐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렌스 루틴은 그녀를 비웃는 대신 정중하고 진중한 모습으로 대답했었다.
자신의 가문은 예언의 별과 함께 이어왔기 때문에 용맹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자신은 이 문장에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었다.
“첫 만남부터 그는 이상한 사내였어.”
헬로이즈는 손끝으로 천천히 루틴 공작가의 문장을 마음에 새기듯 훑어 내렸다. 그러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울컥 뜨거운 감정이 치밀었다.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군요, 로렌스 루틴 공작. 테란국을 위해 꼭 내게로 돌아오겠다고 했으면서.”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헬로이즈는 서둘러 감정을 갈무리하곤, 편지 봉투를 나이프로 잘라 내용을 확인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그는 지금 마지막 전투를 앞둔 상태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쓰여 있었다. 곧 테란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 역시.
하지만 이 편지를 헬로이즈가 아닌 유스타나로 보낸 이유는 최악의 경우를 위한 대비책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편지가 결코, 공주님의 손에 들어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일 테고, 공주님의 미래 역시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은 헬로이즈는 편지지를 내려놓았다. 대신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봉투를 집어 든 다음, 촛불로 가져갔다.
투둑, 사륵!
어느새 초의 불꽃이 붉은 인장을 녹이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책상 위로 손톱 크기의 은색의 동전이 툭 떨어졌다.
“생각 대로군.”
헬로이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곤 동전을 집어 표면에 묻어 있는 것들을 깨끗이 닦아냈다.
깨끗해진 은색 동전을 엄지와 검지로 들어 올려 동전 안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검을 든 검은 고양이.”
그녀의 말처럼 앞면은 루틴 공작가의 문장인 검을 든 고양이가 양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전의 뒷면을 확인하기 위해 뒤집은 순간, 로렌스 루틴 공작이 새롭게 새겨 넣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헬로이즈는 로렌스 루틴 공작이 새긴 글귀를 천천히 읽었다.
“은빛 늑대, 운명의 수레바퀴.”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