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 화
“키안, 날 봐.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아침에 눈을 뜬 후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부끄러웠다. 두 사람은 민망할 정도로 밤새 몸을 겹쳤다. 집요하게 그녀를 쾌락의 끝까지 몰아붙였고, 자신의 모든 곳에 입을 맞췄다.
그래서 사고가 정지된 모양이었다.
당연히 물어야 했다. 어떻게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말이다. 그것만큼 급한 게 없었다.
그런데 머릿속은 밤새 서로를 품고 가슴이 아릴 정도로 바라보던 그의 눈빛만 생각났다.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키안.”
그의 조급한 목소리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자신이 민망해 자꾸 시선을 피하는 이유를 그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눈을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좀 봐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세이란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키안을 보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불안했다. 자신이 성급하게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해 버린 것 같아서. 거기다 밤새 얘길 나누기는커녕, 미친 듯이 몸만 탐했다.
채우지 못한 육체적 쾌락이 먼저여서가 아니라, 말보단 몸으로 말하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할 것 같아서였다.
‘널, 미친 듯이 원한다고. 그러니 내 곁에 있으라고.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다고 말했는데, 알아들었겠지?’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외면하는 키안을 보자 초조해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더 그랬다. 그래서 성급하게 키안의 팔을 잡아끈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곤 힘껏 키안을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온전히 그녀를 안고 있는데도, 잃어버릴까 봐 미칠 것 같았다.
“하루 더 있을까? 네가 원한다면, 그럴 수 있는데.”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는 게 느껴졌다. 이내, 눈썹을 지나 눈꺼풀 위에도 닿았다.
“키안, 그럴까? 하루만 더, 응?”
그의 입술이 다시 귓불과 목덜미를 비벼왔다. 더운 숨결이 닿자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가 일었다.
키안은 입술을 깨물며, 재빨리 그를 밀어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몸을 겹쳐 올 것 같았다.
“지금까지 중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었습니다.”
키안의 대답에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곤 조금은 아쉬운 눈빛으로 키안을 놓아주었다.
“내가 좀 치명적이긴 하지.”
“풋!”
“뭐야, 지금 내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았다. 정색까지 하는 그의 녹색 눈과 마주하자, 아차 하는 마음에 서둘러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흥, 그럼 날 비웃은 것이군.”
이번엔 세이란이 표정까지 굳히자, 키안은 안절부절못한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뭐지? 말을 잘해야 할 거야. 내가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거든.”
키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 화가 나신 건가? 눈빛이 서늘해.’
긴장한 키안이 조심스럽게 할 말을 찾았다.
“전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당황했습니다.”
“그게 다야?”
“그리고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귀엽다는 말에 굳어 있던 세이란의 미간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또, 어떤 생각을 한 거지?”
이번엔 은근히 자신의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를 보자 발칙하게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러니까 치명적이라기보단, 카이우스와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여기서 그 맹랑한 꼬맹이가 왜 나오는 거지? 난 전혀 그 꼬맹이와 닮지 않았다. 내가 어딜 봐서…….”
“풋! 하하하, 하하하하! 정말 닮았습니다. 투정을 부리는 것 하며, 눈을 이렇게 올리곤 아니라고 하는 것까지도요.”
키안이 겁도 없이 손을 뻗어 세이란의 눈꼬리에 검지를 올려놓고는 위로 밀어 올렸다. 그러자 투정을 부리는 귀여운 모습이 됐다.
그 모습에 키안이 웃음을 터뜨리자,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이 풀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이 어렸다.
“그렇다는 거지?”
순식간에 그가 키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키안의 옆구리에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키안이 몸을 뒤틀며 죽는다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넌, 여기가 가장 약했었지.”
“전, 전하, 그만, 하십시오.”
옆구리를 간질이는 그의 손을 밀어내기 위해 버둥거렸다.
“겁도 없이 날 놀렸겠다?”
세이란이 키안의 옆구리를 지나 가장 취약한 배를 건드렸다. 그러자 키안이 그의 손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며 도망치려 했다.
“전하, 그만……. 더는 참을 수가…….”
“더 참아봐. 놀린 벌을 받아야지.”
“잘못했습니다, 전하.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읏!”
너무 간지러워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키안이 요리조리 몸을 피하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으읏, 전하. 그만…….”
“안 돼.”
“네?”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제야 몸을 간질이던 그의 손이 멈춰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바닥에 누워 몸을 겹치고 있었다.
“장난이었는데, 장난이 아니게 됐다.”
그가 고갤 숙여온 순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아랫배를 찌르고 있는 게 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잠깐, 전하……. 곧 사람들이 올 겁니다.”
키안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란 역시 알고 있었다. 오늘 새벽, 그가 직접 황실 기사단의 드레이크에게 이곳으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라고 신호를 보냈으니까.
“그래서 지금 후회 중이다.”
세이란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몸속에 이는 열기를 가라앉혀야 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게 죽을 만큼 힘들었다.
“키안, 아무것도 변한 것 없다. 키엘체로 돌아가도 넌 여전히 레녹스 공작이며, 내 약혼녀다.”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키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내내 자신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변한 건 없으니 쫄 것 없다고. 당당히 자신의 곁에 있으라고.
“허락하신다면…….”
“허락이 아니라, 너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이건 황태자인 세이란이 아니라, 너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내로 네 마음을 구걸하는 것이다.”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구, 걸이라니.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인 그가 나에게 마음을 구걸하다니. 대체 내가 뭐라고. 거짓말투성이에, 겁쟁이인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의리 때문인 건가? 아니면, 몸을 섞다 보니 정이 들어서? 서로에게 첫정이다 보니, 집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진 비밀은 너무도 치명적이고, 그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저는…….”
“흠, 흠!”
그때 동굴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키안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키안의 몸 위에서 비키는 대신, 턱을 붙잡곤 자신을 보게 했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흔들림 없는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안은 초조했다. 언제 그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쓰지 못한 가발과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신경이 쓰였다.
“기다려. 곧 나가겠다!”
키안이 초조한 이유를 알았는지 세이란이 동굴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됐지? 그러니 대답해. 네 대답 여하에 따라 저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반협박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돌아가겠습니다, 제자리로.”
당분간은 키안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제안이 고마웠다.
“하아, 정말 내 속을 태우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죄송합니다, 전하.”
“사과를 받으려는 게 아니야. 단지 기억하라는 뜻이다. 날 쥐고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너란 사실을.”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인기척이 들리더니, 짐 가방을 든 벨라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아? 다친 덴 없고?”
짐 가방을 내려놓은 벨라가 서둘러 키안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등을 다쳤는데, 괜찮아. 별것 아닌 상처였나 봐. 하룻밤 자고 나니 멀쩡해졌어.”
“그래? 다행이다.”
사실 키안은 벨라가 괜찮으냐고 물어보기 전까지, 자신이 호랑이의 발톱에 등을 긁혔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있었다.
“전하께서 네가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다고, 드레이크 경에게 신호를 보낸 모양이야. 그래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어.”
“다행이야. 그렇지 않아도 이 모습으로 드레이크 경과 리치문트 공작님을 어떻게 볼지 걱정이었거든.”
두 사람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가발을 쓰고, 얼굴에 화장하자, 키안 레녹스는 순식간에 아름다운 릴리스 프로필리아의 모습이 되었다.
“기다리겠다, 그만 나가자.”
두 사람이 동굴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키안이 잠시 머뭇거리자, 세이란이 그녀를 불렀다.
“뭐해? 이쪽으로 오지 않고.”
“어서 가봐.”
벨라가 키안의 등을 살짝 떠밀자, 세이란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키엘체로 돌아가면, 그녀가 넘어야 할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테지만 누군가 자신의 비밀을 나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숨 쉬는 게 한결 수월했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든, 끝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두려워 도망치는 대신, 직접 부딪히고 넘어볼 생각이었다.
‘지금도 똑같이 두려워. 하지만 해보고 싶어.’
키안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보며, 그렇게 결심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껍질 밖으로 한 걸음 내딛을 용기가 생겼다.
“네 자린, 언제나 여기야.”
키안을 끌어안은 그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말 위에 태웠다. 그러곤 그 역시 말에 오른 다음 한 팔로 키안의 허릴 단단히 휘감았다.
그의 행동에 벨라를 비롯해 드레이크와 에드윈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사람들이 봅니다.”
“볼 테면 보라지.”
상관없다는 듯 말하며 그가 이번엔 키스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그리고 막 고갤 숙이려는 순간, 에드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내일 올까요? 시간이 필요하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제발 애정행각은 사람들이 없을 때 해달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고 있다, 에드윈. 그러니 흔들지 마.”
그의 대답에 에드윈이 이젠 질렸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키안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변했음을 느꼈다. 격의가 없어진 느낌이랄까? 뭔가 더 친밀해져 있었다.
“드레이크, 내가 명령한 건 어떻게 됐지?”
세이란이 키안의 턱을 놓고는 드레이크를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
“북쪽 숲에 찍힌 발자국과 숲을 지나온 흔적들을 살펴본 결과, 두 방향에서 접근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발자국의 크기가 북쪽 숲의 것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찍힌 것이 달랐고요.”
그 말은 북쪽 숲에 약을 놓아둔 자와 북쪽 숲에서 막사가 있는 남쪽 숲에 약을 놓아둔 자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뜻은 같지만, 방법이 다른 건가? 아니면 뜻도 방법도 다 다른 건지도 모르겠군.”
혼잣말처럼 말하는 세이란의 입가가 차갑게 비틀렸다. 만약 그의 생각이 맞는 것이라면, 북쪽 숲에 약을 놓아둔 자는 자신이 맹수인 호랑이를 사냥하는 걸 막기 위해 벌인 단순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죽이려 한 것이다. 더 악의적이고, 더 감정적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 알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막사에 호랑이가 나타난 순간,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자 세이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냥 대회에 참석한 레이디들 중, 내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지 알아내려 했던 모양이었다.
‘쳇, 서둘러 알베르트 루칸 백작과 패트리샤를 만나야겠군.’
세이란은 어느새 말에 오른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키엘체로 돌아간다.”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은 말고삐를 당겨 빠른 속도로 키엘체를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