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 화
술에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이런 얘길 아무렇지 않게 사무엘에게 하다니. 사실 키안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존재가 가장 가까운 드레이크가 아니란 사실에 놀랐다.
아니, 어쩌면 가깝지 않은 사이라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드레이크에게 말했다간, 분명 자신이 마음에 담은 상대가 황태자 세이란 사실을 금방 눈치챌 터였다.
키안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이상했다. 말을 하고 나니, 가슴을 내리누르던 답답함이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분도 단장님이 첫사랑이실 겁니다.”
키안이 고갤 들어 사무엘을 보았다. 그저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 분명했다. 하지만 믿고 싶었다.
“그럴까?”
감정을 숨기려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술을 마신 탓인지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차고 넘치는 걸 키안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네, 그럴 겁니다.”
사무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내 두근거리던 심장이 서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실망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였다. 강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상관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자정이 넘었습니다.”
“가야지, 집에. 카이우스는 벌써 잠이 들었겠군.”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키안은 술잔에 남아 있던 술을 마저 다 들이켰다.
“스텐호프, 너는 귀족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게 억울하지 않느냐?”
키안의 물음에 사무엘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억울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에 키안이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뜻밖의 말에 키안이 고갤 들어 사무엘을 보았다. 그러자 흔들림 없는 갈색 눈동자가 키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좋은 눈빛이야.’
신념이 가득 찬 맑은 눈이었다.
“어째서? 둘째 아들은 작위도, 재산도 받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라 치부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쓸모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얻게 되는 게 있더군요. 누이들의 다정함이라던가, 또 제 손으로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권한 같은 것 말입니다. 아마 제가 스텐호프가의 후계자였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포기했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사무엘 스텐호프의 말에 키안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 역시 그랬다. 어깨를 짓누르는 비밀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죽음을 기다리며, 아침에 눈을 뜨지 못했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기사단에 들어와 단장님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내가 정말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
키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나 어렵고 힘든 상황은 있었다. 경중의 차이가 존재했지만, 자신처럼 모두가 벽을 세우며, 절망하진 않았다.
"하지만 바보처럼 좋습니다. 당연히 끝이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그 순간 아레오의 말이 떠오르자, 키안은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세이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후, 도망칠 생각만 했었다.
‘이제 자정이 넘었으니, 파티는 끝났겠지?’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술을 마시니 이성이 통제를 잃은 듯 감정이 봇물같이 흘러넘쳤다.
“스텐호프, 이제 돌아가야겠다.”
“제가 댁까지 모시겠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단호한 표정에 고갤 끄덕였다. 이런 곳에서 실랑이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오늘은 자신이 셀서스 궁으로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결심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럼, 부탁하지. 그리고 스텐호프, 내일부터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
“네? 정말이십니까?”
사무엘이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빛냈다. 그의 표정을 보며, 키안은 한숨이 나왔다. 지금까지 드레이크와 아레오 외엔 기사단의 기사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그것이 키안에겐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레녹스 공작가도.
하지만… 지금 바뀌었다.
“그래, 지금은 끝이 아니니까.”
**
세이란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레녹스 공작가를 쏘아보았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라, 저택은 현관을 밝히는 등외엔 모두 꺼져 있었다.
‘돌아가야겠지? 벌써 잠들었을 테니까.’
파티장을 박차고 나올 때의 기세와는 달리 세이란은 평소처럼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 서 있었다.
이젠 시도 때도 없이 레녹스 공작가의 담장을 넘는 거야, 이젠 통제할 수도 없는 감정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이 상태로 키안의 방으로 들어간다면, 욕망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레녹스 공작가의 현관문이 열리더니,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집사 가브리엘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세이란이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 순간, 멀리서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마차가 레녹스 공작가 앞에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리고,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기사 두 명이 내리는 것을 본, 세이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키안이었다. 그리고 그 옆엔 사무엘 스텐호프가 서 있었다.
제길! 욕설과 함께 세이란이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그때 키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기에 젖은 듯 나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세이란은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텐호프가 돌아갈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스텐호프 앞에서 키안을 끌어당기는 추태는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텐호프, 고마웠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난 너의 누이들이 아니다. 내 몸은 내 스스로 지킬 수 있다.”
키안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웠다. 그러자 사무엘 스텐호프가 고갤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는 단장님께서 한 번도 약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단장님께선 기사단의 자부심이십니다. 제가 믿고 따르는 단장님께서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행동입니다.”
차분하게 말하는 사무엘을 보자, 키안은 발끈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생각이란 건 쉽게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군.”
키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여인의 몸으로 기사단에서 자신보다 더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사내들과 경쟁을 하다 보니, 약하게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유독 약해 보인다는 말에 예민했다.
“지금까지 내 스스로 눈을 가려 보지 못한 게 많았던 것 같군.”
키안이 혼잣말을 했다.
“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듣질 못해서.”
“아무것도 아니다. 혼잣말이었다.”
“그럼, 새벽에 연병장에서 뵙겠습니다.”
“누구 맘대로, 새벽에 본다는 거지?”
갑작스럽게 들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키안과 사무엘이 동시에 고갤 돌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세이란이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곤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오신 거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세이란이 이곳에 있었다.
“저, 전하?”
사무엘이 세이란의 등장에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그런 사무엘과는 달리 키안은 그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파티가 끝나자마자, 그가 자신을 보러왔다. 셀서스 궁으로 돌아가기 전,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다.
“파티가 지금 끝난 겁니까?”
“아니, 중간에 빠져나왔다. 지루해 미치는 줄 알았거든. 하지만 넌 내가 파티장에서 개고생을 하는 사이 흥청망청 술이나 마신 모양이군. 그것도 일행과 함께 말이다.”
세이란의 지적에 키안은 옆에 서 있는 사무엘을 돌아보았다.
“함께 술을 마신 건 맞지만, 흥청망청하진 않았습니다. 얘길 나누었거든요.”
키안의 대답에 세이란의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곤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사무엘 스텐호프를 쏘아보았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스텐호프. 이제부턴 내가 레녹스 공작을 데리고 갈 테니까.”
“아, 네, 전하.”
다행히 사무엘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마차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키안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러다 키안의 손에 감아져 있는 손수건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뭐지?”
“검술 훈련을 하다, 살짝 긁혔습니다. 별것 아닙니다.”
“조심했어야지. 어디, 보여줘.”
세이란이 손수건을 풀고는 상처를 확인하려 하자, 당황한 표정으로 재빨리 손을 뒤로 감췄다.
“정말 별것 아닙니다.”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붙잡더니, 손에 감겨 있는 손수건을 풀었다. 그러곤 마차에 올라선 사무엘에게 건넸다.
“네 것인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이 손수건을 받아 들며 대답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손 내밀어.”
세이란이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키안의 손에 감아주었다. 그러곤 반대쪽 손을 잡더니 저택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하, 공작님.”
그때까지 현관 앞에 서 있던 집사 가브리엘이 창백해진 얼굴로 두 사람에게 고갤 숙였다.
“가브리엘, 걱정할 것 없다. 이제 들어가 쉬도록 해.”
키안의 말에도 가브리엘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올라가던 키안이 집사인 가브리엘의 시선을 의식해 세이란에게 붙잡힌 손을 슬쩍 잡아 뺐다.
“손은 놓아주십시오.”
계단을 오르던 그가 휙! 하고 돌아서더니,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한 마디만 더하면, 널 품에 안고 계단을 오르겠다. 그 모습을 가브리엘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면, 잔말 말고 따라와.”
낮게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키안은 두렵기는커녕, 심장이 뛰었다. 마치 그가 질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그를 보며, 키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어느새 계단 위로 다 올라간 세이란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키안을 쏘아보았다.
“사무엘 스텐호프를 말입니다. 조금 전 늦게 왔다고 타박하신 것도 그렇고, 손수건을 건넨 것도 그렇고……. 질투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럼 뭐겠어? 질투가 아니면.”
그 말과 함께 그가 복도로 걸어가 버렸다. 보지 않아도 자신의 침실로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난번에도 스텐호프에게 질투하셨던 거였어.’
키안이 서둘러 자신이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세이란을 찾았다. 하지만 방엔 아무도 없었다.
“전하!”
놀라 세이란을 불렀다. 그러자 욕실에서 약상자를 든 그가 나왔다.
“이리 와. 상처부터 치료하게.”
그가 약상자를 들지 않는 손으로 키안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곤 침대 위에 앉힌 다음, 옆에 약상자를 내려놓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키안이 상자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항상 거절만 하는군. 스텐호프의 호의는 군말 없이 받아들였으면서 말이다.”
“그게 아니라…….”
“나에겐 항상 이유가 필요했다. 네 손을 잡을 때도, 너를 방문할 때도 넌 내게 이유를 물었지. 그리고 너를 오랫동안 바라볼 때도, 나는 항상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어야 했다.”
“…….”
“뭐, 상관없었다. 난 그 이유를 찾으며, 매 순간 설레어 했으니까. 나는 너에게 손을 내밀 때도, 수십 번 고민했고 그만큼 또 설렜다. 하지만 결국엔 고민이 무색할 만큼, 매번 설레는 마음에 져 네 손을 붙잡아 버렸지만.”
매번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말하는 그를 보며, 키안 역시도 그와 똑같은 마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전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키안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고갤 들어 자신을 바라보았다.
“너에게 화가 난 게 아니야. 그저 조급한 나에게 실망했을 뿐이다.”
그가 다시 키안의 손을 떼어내곤, 약상자를 열었다.
“손을 치료한 후, 돌아가겠다.”
그러니 더는 거절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키안이 상자에 닿아 있는 세이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치료는 필요 없습니다.”
그 순간 세이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 키안 레녹스.”
“거절이 아닙니다. 제가 부탁하는 겁니다.”
“부탁이라고?”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던 그의 눈꼬리가 그제야 살짝 내려왔다. 그러곤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자신의 손을 잡은 키안의 손이 뜨겁다는 것도.
“뭘 부탁하려는 거지?”
그의 물음에 키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 가십시오.”
순간 세이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여기서 자고 가시라고 했습니다. 어젯밤처럼 말입니다.”
키안이 민망함에 고갤 돌렸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뺨이 불이 나는 것 같았다.
“키안!”
세이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걸 참아내느라,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후회하지 마, 내가 뭘 해도.”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