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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72화 (72/139)

제 72 화

사무엘이 재빨리 훈련장을 나가자, 키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

“아레오, 스텐호프가…….”

“단장님, 별궁에서 나오시는 저분 에버콘 공작님 아니십니까?”

“뭐, 에버콘 공작이?”

키안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아레오의 말처럼 제임스 에버콘이 별궁에서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을 보지 못한 듯 황급히 황실 마구간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제임스 에버콘이 테란국의 공주를 만나다니.’

그의 의도는 너무도 빤했다. 테란국과의 국혼을 돕는 조건으로 뭔가 요구를 했을 게 분명했다.

‘뭐, 헬로이즈 공주 역시 눈치가 빠른 것 같으니, 이미 제임스가 어떤 자인지 알겠지.’

하지만 걱정은 됐다. 분명 헬로이즈 역시 제임스를 이용하려 들 테지만, 그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자였다.

어쩌면 헬로이즈가 제임스 에버콘과 손을 잡은 것 자체가 그녀에겐 지독한 덫이 될 수도 있었다.

“에버콘 공작님께서도 헬로이즈 공주님께 첫눈에 반하신 모양입니다.”

키안이 아레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잔뜩 실망한 얼굴로 별궁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정치적 관계를 잘 모르는 아레오에겐 제임스 에버콘의 방문이 그런 식으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아레오, 헬로이즈 공주님께선 곧 테란국으로 돌아가실 거야.”

상처가 될 수 있으니 너무 깊이 마음을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아레오를 보자, 키안은 괜스레 미안해졌다.

감정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자신 역시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바보처럼 좋습니다. 당연히 끝이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아레오의 한마디에 키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러니 끝날 때까진 마음이 가는 대로 더 열심히 해보려고요.”

**

파티는 역시 지루했다. 사교 시즌 동안 황태자비를 뽑겠다고 귀족들에게 선언해 놓은 상태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명분도 없는 상황이었다.

세이란은 파티장에 도착한 이래, 레이디들이 자신의 눈에 들기 위해 연신 바닥에 부채를 떨어뜨리는 걸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다 간혹 대범한 성격의 레이디들은 가슴골이 훤히 드러내 보이며, 노골적으로 허릴 숙여 부채를 들어 올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육감적으로 흔들렸다.

세이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벽에 걸려 있는 시계의 초침을 쏘아보았다.

“전하, 인상 좀 펴십시오. 그러다 파티장이 다 얼어붙겠습니다.”

파티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내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이란을 보며, 에드윈이 슬쩍 말을 걸었다.

“지금 당장 파티장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다.”

세이란이 인내심을 발휘 중이라며 이죽거리자, 에드윈이 알 만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계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시비를 거는 건가, 리치문트 공작?”

세이란이 마땅찮은 얼굴로 에드윈은 쏘아보았다. 그러자 어떻게 감히 황태자에게 시비를 걸 수 있느냐는 얼굴로 고갤 가로저었다.

“제가 어찌 감히. 다만, 너무 티가 나서 걱정하는 중입니다. 파티에 참석하셔서는 레이디들께 춤 한 번 신청하지 않으시다니. 분명 귀족들은 오늘 이 일을 두고, 입방아를 찧을 겁니다.”

사실 그 역시 고민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잡음 없이 이 파티장을 벗어날 수 있는지.

“상관없다. 오히려 마음에도 없으면서 기계적으로 춤을 추는 게, 레이디들에게도 무례한 행동일 테니까.”

지루한 듯 창문 쪽을 바라보는 세이란의 서늘한 옆모습을 보며, 문득 머릴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전하께서는 그분과만 춤을 춰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단순히 춤을 추기 싫어서가 아니라, 다른 레이디와 춤을 추는 것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묻고 있는 겁니다.”

에드윈은 질문을 하면서도 세이란이 그런 생각을…….

‘맙소사! 했군, 했어.’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는 세이란을 보며 에드윈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흠, 흠!”

당황한 에드윈이 헛기침을 하며 옆에 놓여 있던 차가운 음료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음료를 마시는 척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세이란은 평소와 다름없는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착각이었나? 하고 생각한 순간……. 에드윈의 시선이 그의 귓불로 향했다. 붉었다.

“당연히 하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콜록, 콜록!”

음료를 마시던 에드윈이 기침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전하의 귓불이 새빨개지셨어.’

그저 태연한 척한 것이었다. 하지만 귓불이 붉어지는 건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콜록, 콜록. 죄송……. 콜록.”

에드윈이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린 채 기침을 했다. 입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가린 그를 보자, 세이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너?”

“음료수……. 콜록콜록. 사레가, 콜록콜록. 맞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바보……. 콜록콜록!”

여전히 고갤 들지도 않은 채 기침하는 에드윈이 의심스러웠다. 마치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쳇! 눈치 하나는 빨라서는.’

세이란 역시 벌레 씹은 표정으로 에드윈에게서 고갤 돌렸다. 사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순정적이었다. 마치 순진한 처녀처럼 굴다니.

사실 전쟁터에서 자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잔혹한 성격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별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키안에게 의리를 지키느라 다른 레이디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옆에 있는 눈치 빠른 녀석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곤 비웃고 있었다.

세이란이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기침을 핑계 삼아 웃고 있는 에드윈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

“아, 네, 전하.”

에드윈이 서둘러 눈가를 훔치며 고갤 들었다. 그 모습에 세이란은 마지막 남아 있던 인내심의 끈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기! 침! 은 멈춘 것 같으니, 나머진 리치문트 공작이 알아서 하면 되겠군.”

“네?”

“난 바보같이 정조를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세이란의 싸늘한 목소리에 에드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이지? 라고 생각한 순간, 세이란이 주위에서 배회 중이던 레이디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 잠깐, 전하.”

당황한 에드윈이 서둘러 세이란을 불렀다. 하지만 이미 세이란은 레이디들을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나가더니, 악마처럼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그대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전하. 저희가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세이란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뒤에 서 있는 에드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 리치문트 공작이 아름다운 그대들과 춤을 추고 싶다는군. 하지만 지금까지 책 속에 파묻혀 지내왔던 탓에 그대들에게 춤을 신청하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야. 만약 공작과 춤을 추고 싶은 레이디가 있다면, 먼저 말을 걸어줬으면 하는데…….”

세이란이 일부러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레이디들은 얼굴을 붉히며, 잘생긴 에드윈 리치문트를 흘끗거렸다.

사실 냉미남인 황태자가 레이디들 사이에 가장 인기가 많긴 했다. 하지만 그의 서늘한 분위기 때문에 말을 거는 것조차 어려웠다. 반면 지적인 외모의 리치문트 공작은 부드러운 인상이라 훨씬 다가가기 편했던 것이다.

“그런 부탁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저희 댄스 목록에 잊지 않고 리치문트 공작님의 이름을 올려놓을 테니까요.”

주변에 있던 레이디들이 수줍은 얼굴로 에드윈을 보며, 댄스 카드를 꺼내 드는 게 보였다.

“그것참 고맙군. 리치문트 공작, 레이디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난 파티에 참석하기 전까지 책상에 앉아 밀린 서류를 처리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세이란이 과장되게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자 레이디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두통이라니, 끔찍하시겠어요.”

“전하, 어서 돌아가셔서 쉬세요. 저희도 두통을 겪은 적이 있어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 알거든요.”

다가서기 힘들기만 하던 황태자가 먼저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온 것도 모자라, 두통이 있다고 호소까지 하자, 레이디들의 동정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이해해 주다니, 고맙군.”

세이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에드윈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이란이 파티장을 떠나기 전, 그에게 고갤 숙였다. 그러곤 작게 속삭였다.

“밤새 춤을 춰야겠군, 리치문트 공작.”

“전, 전하! 잠깐만…….”

하지만 세이란은 이미 파티장을 나간 후였다.

‘제길, 기침 한번 잘못했다가 꼼짝없이 레이디들에게 붙잡히다니.’

그때 에드윈의 눈에 붉은 머리카락의 벨라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에드윈이 이 파티에 참석한 이유는 세이란의 요청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벨라가 스펜서 백작 부인이 이 파티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설마, 지금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본 건 아닐 테지?’

에드윈이 몸을 바로하곤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 저는…….”

“레이디들의 댄스 카드 목록에 공작님 이름이 빼곡하네요. 밤새 춤을 추시려면, 체력을 아끼셔야 할 것 같군요. 그럼.”

벨라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리는 것을 보며, 에드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젠장! 에드윈은 멀어져 가는 벨라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 미치겠어.’

**

자정이 가까워지자, 떠들썩하던 렌슬롯의 분위기가 서서히 변했다. 여전히 술을 마시며 유쾌하게 얘기하는 기사들이 태반이긴 했지만, 술시중을 들던 창녀와 은밀히 눈길을 주고받던 자들이 하나둘씩, 2층으로 자릴 옮기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선 어깨와 가슴을 훤히 드러낸 창녀가 기사의 품에 안겨 금방이라도 몸을 섞을 것처럼 입술을 비비고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라는 듯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키안과는 달리 사무엘은 얼굴을 붉혔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자리가 불편하시면 다른 곳을…….”

키안이 술잔을 마저 비우며, 사무엘을 올려다보았다.

“난 괜찮아.”

그때 기사의 손이 창녀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더니, 여인의 속옷을 끌어내리는 게 보였다. 그러곤 자신의 바지 지퍼를 슬쩍 끌어내리곤 그 자리에서 여인의 밀부 안으로 자신의 남성을 밀어 넣는 듯 엉덩이를 들썩이는 게 보였다.

“하앙- 하읏! 제발 위로 올라가요.”

여인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자지러지는 신음을 흘리며 허릴 비틀었다. 그러자 기사가 유혹을 이기지 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창녀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2층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사의 허리에 감긴 여인의 새하얀 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에 사무엘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순진하군. 아직 여인과의 경험이 없는 건가?”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무엘이 고갤 들었다.

“다음에 기사단의 기사들과 함께 왔을 땐, 표정을 잘 숨기도록 해. 분명히 놀림감이 될 테니까.”

“아, 네.”

사무엘은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들어 올리는 척하며 키안을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사무엘에게 날아들었다.

두근. 평소와 달리 나른하게 풀린 하늘빛 눈동자가 몹시도 색스러웠다.

“나도 있다.”

“네, 네?”

사무엘의 유난스러운 반응에 키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 놀랄 일이라고. 설마 너, 동정은 아닐 테지?”

“아닙니다.”

사무엘이 얼굴을 붉히며 고갤 숙이자, 키안이 피식 웃었다. 그러곤 술잔을 잔을 채우곤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었지? 네 첫 상대 말이다.”

키안의 질문에 사무엘이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착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예뻤고요.”

“내 상댄, 굉장히 아름답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최근에서야 첫사랑이란 걸 알았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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