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 화
벨라는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곤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그분을 황태자비로 맞아들이실 것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드윈의 말에 벨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게 사실입니까?”
목소리 역시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에드윈은 벨라가 놀라는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됐다.
“저 역시 놀랐습니다. 전하께서 이른 새벽 절 찾아오셔서, 법적인 절차를 물어오셨을 때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혹시 법적인 절차라는 게, 귀족 회의를 말하는 건가요?”
“그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건, 보호자가 없는 레이디의 경우 혼약 절차를 어떻게 밟아야 하느냐였습니다.”
“아, 최근에 릴리스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거든요.”
벨라는 키안이 얘기했던 릴리스의 배경을 떠올리며, 기계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해. 분명 키안은 가짜 약혼이라고 했었어. 그런데…… 아니었나?’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새벽부터 찾아온 에드윈 리치문트가 자신에게 거짓말할 이유는 전혀 없던 것이다.
“이건 호기심에 묻는 겁니다. 혹시 릴리스가 황태자비가 되는데 문제는 없는 건가요?”
벨라의 물음에 에드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법적인 절차에선 다행히 보호자가 사망한 경우니, 명망 있는 귀족가에서 입양을 한다면 별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귀족 회의의 승인을 받는 건 어려운 문제입니다. 정치적인 이익이 얽혀 있으니까요.”
벨라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다시 물을게요. 리치문트 공작님께서 걱정하는 것이 정확히 뭔가요?”
빙빙 돌려서 묻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벨라가 직설적으로 묻자, 에드윈은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물끄러미 벨라를 응시했다.
안경 넘어 보이는 그의 푸른 눈동자엔 예리한 지성이 느껴졌다. 왠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벨라는 긴장이 됐다.
“전하께서 진심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뜻밖이었다. 벨라는 에드윈의 대답이 당연히 귀족들의 반발 때문에 황태자인 세이란의 입지가 위협을 받을 것이란 말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에드윈이 걱정하는 건, 세이란이었다. 진심인 세이란.
“리치문트 공작님께선 전하를 아끼시는 모양이군요.”
“제 주군이시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에드윈을 보며, 벨라는 왠지 안심이 됐다. 이런 자가 세이란과 키안의 편에 서준다면 든든할 것 같았다.
“혹시 말리고 싶으신 건가요? 전하께서 더 진심이 되기 전에 릴리스를 설득한다거나 그런…….”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어젯밤 황실 무도회장에서 뵌 전하는 너무도 생소한 모습이셨으니까요. 아마 귀족들 역시 저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랬을 테죠. 평소 전하와는 달리 굉장히 충동적으로 보이셨거든요.”
벨라 역시 놀랐다. 당연히 가짜 약혼 계획을 순차적으로 진행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이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키안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옆에 세웠다.
그걸로 인해, 한동안 사교계는 떠들썩한 소문으로 무성할 테지만 어젯밤 일을 계기로 릴리스의 가문이 한미하다고 해서 무시할 귀족들을 없을 터였다.
“그럼 앞으로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벨라가 허릴 세우곤 진지한 얼굴로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숨기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공작부인께선 스펜서 자작 부인과 자주 만나시는 것 같더군요.”
아마 지난번 하드윅 백작 부인의 만찬에서 글로리아 스펜서 자작 부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사교계에서 가장 친분이 돈독한 귀부인이십니다. 그런데 그건 왜?”
“스펜서 자작은 귀족 회의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은밀히 자릴 마련해 주십시오.”
에드윈의 말에 벨라는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분명 에드윈의 태도로 보아 릴리스가 키안 레녹스란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만약 그 사실을 안다면, 이렇게까지 나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세이란과 키안이 가짜 약혼이란 걸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벨라는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비밀로 해야 했을 뿐더러, 만약에, 아주 만약에…….
에드윈의 말처럼 세이란이 진심이라면……. 그래서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때를 위해, 키안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벨라는 키안이 어떤 형태로든 유스타나를 떠나는 일은 막고 싶었다. 벨라가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리는 제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만들겠습니다. 대신, 설득은 공작님께서 꼭 해주셔야 합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아키텐 공작부인.”
**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커튼이 바람에 흔들렸다. 기사단의 사무실 책상에 앉아 밀린 서류를 처리하던 키안은 목덜미로 쏟아지는 세이란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앞에 서 있는 드레이크에게 서류를 건넸다.
“검술 대회 준비는 이대로 계속 진행하면 될 것 같군.”
“며칠 후에 있을 황실 사냥 대회는 어떻게 할까요?”
드레이크의 질문에 키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작년엔 기사단이 전쟁터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행사는 황실 근위대에서 도맡아 준비했었다. 지금에라도 근위대에 사람을 보내 예산서를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번거롭게 느껴졌다.
“제 작년과 동일한 규모로 준비하면 될 것이다. 예산은 충분하니,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해. 그리고 이번 사냥 대회에서 우린 참가한 귀족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기사단은 황태자 전하와 함께 사냥 대회에 참석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드레이크가 의아한 표정으로 한 시간 전부터 유리창에 기대 서 있는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팔짱을 긴 채, 키안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평소 무뚝뚝하던 드레이크의 목덜미가 붉어지는 게 보였다.
‘미치겠군.’
키안은 세이란의 노골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사냥 대회는 황실 근위대가 황태자 전하와 함께 참석할 거야. 전쟁터에서 이제 막 돌아온 기사단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면 된다.”
키안의 말에 드레이크가 실망한 얼굴을 했다.
“이번에도 보란 듯이 우승을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우린 사냥 대회보다, 검술 대회 준비에 치중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키안에게 고갤 숙인 드레이크는 문을 나서기 전, 창가에 서 있는 세이란에게도 고갤 숙였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전하.”
세이란이 손을 들어 보이자, 드레이크가 사무실을 나갔다. 그제야 세이란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던 키안이 그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갤 휙 돌렸다.
“바쁘신 것 아니셨습니까?”
“당연히 바쁘지,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말과는 달리 창가에 서 있던 그는 무척이나 한가해 보였다. 키안이 한숨을 내쉬자, 그가 자신이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은 휴식 시간이거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더니, 책상 위에 팔을 괴곤 본격적으로 키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 있던 키안의 눈매가 아래로 내려왔다.
“피곤하시면, 들어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키안의 제안에 세이란이 고갤 가로저었다.
“괜찮아. 이게 내 휴식이거든. 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일하도록 해.”
신경 쓰지 말라면서, 세이란은 키안이 서류를 처리하는 동안 책상에 팔을 괸 채 자신을 지켜볼 모양이었다.
‘설마 어젯밤 키스하다 혼자 잠들어 버린 것에 대한 복수인 건가?’
사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숙면한 자신과는 달리 세이란은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이란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누군가가 날 곁에 두고, 마음 편하게 잠들어 버렸거든. 분명, 굉장한 강심장일 거야, 코까지 골고 잠든 걸 보면. 난 그 덕에 한숨도 못 잤거든.”
키안이 고갤 들자, 세이란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넌 신경 쓸 것 없다. 혼잣말이었거든.”
키안은 세이란의 혼잣말에 고갤 들 수가 없었다. 깃펜을 들어 서류에 사인하려다, 그의 시선이 또다시 자신에게 향해 있는 걸 느끼며 결국 펜을 내려놓고 말았다.
“전하께선 혼잣말이시겠지만, 제가 신경이 쓰여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키안이 사정 좀 봐달라는 듯 부탁을 하자, 그가 마땅찮은 얼굴을 했다.
“한 시간 동안 그렇게 쳐다봤는데, 내 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기에 내가 유령이라도 된 줄 알았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긴 했던 모양이군.”
그의 지적에 키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이라니. 순 억지였다.
그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느라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 뻔했다. 거기다 기사단에서 가장 눈치가 없는 드레이크조차도 세이란의 시선을 느끼곤 얼굴은 물론, 목덜미까지 붉혔다. 분명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죄송합니다. 급히 서류를 처리하느라,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는지, 세이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그 모습에 키안은 결국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키안 레녹스?”
그의 눈썹이 위로 확 치며 올라갔다. 그러자 키안이 웃음을 터뜨리며 항의했다.
“민망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앞으론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기사단에 이상한 소문이 돌 겁니다.”
키안의 한마디에 잔뜩 찌푸려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펴지더니, 의외라는 듯 말했다.
“너, 장난도 칠 줄도 알게 됐군.”
세이란의 말에 키안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최근 들어 자신이 많이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감추고 있는 비밀을 언제 들킬지 몰라 매 순간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유가 없었다.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장난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걸 말입니다.”
“키안…….”
세이란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 사무실 안으로 은빛 털의 늑대가 뛰어들어 왔다.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반가운 듯 은빛 늑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뭐야? 이 사고뭉치를 기사단에 데려온 것이냐?”
“슬슬 훈련을 시켜볼까 해서 데려왔습니다.”
키안이 손을 내밀자, 세이란에게 어리광을 부리던 은빛 늑대가 키안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괜찮은 생각이군. 어차피 처음부터 널 지킬 목적으로 주어온 것이니까.”
“네?”
“난 이만 가봐야겠다. 파티에 참석하기 전에 처리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
“아, 네.”
키안이 세이란을 따라 일어섰다.
“키안, 너는 황실 사냥 대회까지, 그 어떤 파티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네가 파티에 참석했다간, 너만 피곤해질 거야.”
“알겠습니다.”
세이란이 사무실을 나가자, 키안 역시 은빛 늑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세이란이 했던 말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분명, 날 지킬 목적으로 주어왔다고 했었어.’
키안은 자신의 옆에서 걷는 은빛 늑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다음번에 세이란을 만나면, 그 의미가 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