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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69화 (69/139)

제 69 화

유스타나 제국의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귀족들의 생활 패턴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대부분의 무도회나 파티가 저녁부터 새벽 시간에 열리는 관계로, 사교 시즌 동안엔 귀족들의 일과는 대개 11시에 시작됐다.

하지만 달라진 귀족들의 생활 패턴과는 별개로 귀족가의 하인들은 더 분주했다. 주인이 일어나기 전, 완벽하게 갖춰야 할 것들이 있던 것이다.

그중에서 하인들이 잊지 않고 챙겨야 하는 것이 바로, 로열페이퍼였다.

새벽 6시.

각 저택에 배포된 로열페이퍼는 집사의 손에 놓였다. 그러곤 아침 식사와 함께 가지런히 쟁반에 놓인 후, 주인의 침실까지 옮겨졌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신선한 우유와 빵을 먹으며 집사가 올려놓은 로열페이퍼에 어젯밤 올라온 소식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로열페이퍼엔 전날 밤 무도회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스캔들과 귀족들의 가십거리가 빼곡히 쓰여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 베로니카 아가씨!”

로열페이퍼를 쥔 젬마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6시밖에 안된 시각이긴 했지만, 1년 동안 수도원 생활이 몸에 밴 베로니카는 분명 일어나 있을 터였다.

젬마가 노크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베로니카가 한심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노크는 해야지. 아무리 너와 내가 격의가 없는 사이지만, 노크는 해줘.”

베로니카의 지적에 젬마가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러곤 똑똑! 노크를 했다. 하지만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열더니, 배시시 웃으며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

젬마의 모습에 베로니카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들어와. 그나저나 새벽부터 왜 그리 호들갑인 건데? 다시 전쟁이라도 났대?”

“전쟁보다 더 무서운 일이죠. 아가씨께서도 보셨나요? 레이디 릴리스라는 분이요?”

젬마가 로열페이퍼를 침대 위에 펼쳤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슬쩍 보더니 관심 없다는 얼굴을 했다.

“난 또 뭐라고. 당연히 봤지. 전하께서 홀딱 빠진 표정으로 아주 절절매셨거든.”

“농담 그만하시고요. 어서 사실대로 말씀 좀 해보세요.”

“농담이라니? 로열페이퍼의 기사에도 쓰여 있잖아.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레이디의 등장이라고.”

베로니카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젬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지더니, 호기심을 드러내며 베로니카 옆에 딱 들러붙어 앉았다.

“정말 전하께서 홀딱 빠진 표정이셨어요? 그분한테 절절매셨어요?”

“그렇다니까. 내가 더 놀란 건, 전하께서 레이디 릴리스가 발목을 삐었는데, 두 팔로 번쩍 안고는 상처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셨다는 거야.”

“네? 농담이죠?”

젬마가 또다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나는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소문엔 키스까지 한 모양이야. 두 사람이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전하의 입술에 붉은색 연지가 묻어 있었다고 했거든.”

베로니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하자, 젬마는 보기 흉하게 입을 떡 벌린 채 앉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까칠하고 냉정한 황태자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레녹스 공작님 말씀이 맞았던 것 같아.”

“레녹스 공작님이요? 혹시 어제 무도회에서 만나셨어요?”

젬마의 질문에 베로니카가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고갤 가로저으며 말했다.

“참석하지 않으셨어. 내가 레이디 플로라에게 슬쩍 물어보니 공작님께선 금원에 들어가신 벌로, 이번 시즌엔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신대.”

“세상에, 그럼 이번 시즌에도 레녹스 공작님을 뵙긴 틀린 거네요.”

젬마의 지적에 베로니카의 아름다운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러곤 골이 난 표정으로 젬마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다행이잖아. 레이디 릴리스의 등장으로 내가 황태자비가 될 확률을 현저히 줄었으니까. 난 그것만으로 충분해.”

사실 아버지께서 억지로 황태자와 결혼을 시키면 어쩌나 고민했었다. 베로니카의 말에 젬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그 소문 아직 못 들으셨어요? 이번 사교 시즌에 황태자 전하뿐만 아니라, 에버콘 공작가에서도 공작부인을 맞아들이실 계획이란 걸요.”

“뭐? 에버콘 공작가에서?”

베로니카의 미간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무도회장에서 몇 번 보았던 제임스 에버콘은 겉모습은 굉장히 잘생긴 편에 속했다. 얼굴은 물론, 장신의 키에 적당히 근육이 붙은 몸은 레이디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베로니카에게는 아니었다. 왠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온몸에 뱀이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친절하고 예의 발랐지만, 꺼림칙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절대 싫어.”

“아가씨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아시잖아요. 주인님께서 결정하시면 아가씨는 꼼짝없이 에버콘 공작과 결혼해야 한다고요.”

“나, 사고를 칠까? 아니, 수도원으로 다시 가야 할까 봐.”

베로니카가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젬마를 보았다. 그러자 젬마가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듯 베로니카의 팔을 붙잡았다.

“베로니카 아가씨, 앞으로 제 말 새겨들으셔야 해요. 아가씨께서 에버콘 공작님이 싫다면, 방법을 찾아야 하거든요.”

“방법이라고?”

“네. 그 냉정한 황태자 전하께서도 마음에 드는 레이디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하는 마당에 당연히 아가씨께서도 움직이셔야죠.”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공작님께서 날 봐주시기나 할까? 어차피 무도회에도 참석하지 못하는데 말이야.”

“그럼 꽃미남 공작님께서 참석하시는 행사에 가시면 되죠.”

젬마의 지적에 황태자인 세이란이 레이디 릴리스에게 했던 초대가 떠올랐다.

“황실 사냥 대회가 있었어. 그건 매년 황실 기사단에서 주최했던 행사야.”

“그럼 사냥 갈 준비를 하셔야겠네요. 제가 가장 값비싼 여우 털로 승마복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가장 아름답게 보이실 수 있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냥터에서 꼭 공작님을 사로잡으셔야 해요.”

젬마의 말에 베로니카의 눈빛이 반짝였다.

“알았어. 전하께서 쓰신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 봐.”

“그게 뭔데요?”

“공개 키스.”

**

“마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고? 이 새벽에?”

응접실에 앉아 아키텐 공작가로 보내온 수백 장의 초대장을 정리하고 있던 벨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그러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벽시계를 노려보았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른 시각에 무례하게 방문한 사람이 있다니.

“모셔와. 대체 누군지 얼굴 좀 보게.”

“알겠습니다, 마님.”

집사가 나가자 벨라는 초대장을 정리해 함에 넣었다. 키안에게 참석 여부를 물어보겠지만, 아마 당분간은 파티나 무도회에 참석할 것 같진 않았다.

‘황실 사냥 대회에 초대한다니. 그 말은 그때까지 파티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겠지?’

어젯밤 무도회장에서 키안을 바라보던 세이란의 표정이 떠오르자, 벨라의 입가에 미소가 깊어졌다.

그가 키안의 비밀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그건 키안에겐 좋은 징조였다.

황태자인 세이란은 키안에게 소유욕과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벨라가 손님을 맞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드레스 자락을 정돈한 후 고갤 들자, 놀랍게도 에드윈 리치문트가 서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왜 이 남자가 날 찾아온 거지?’

벨라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금방에라도 발톱을 드러낼 것처럼 털을 잔뜩 세운 벨라의 반응에 에드윈은 집사가 방문자가 자신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신 모양이군요.”

“아, 너무 뜻밖이라. 우선 앉으세요, 리치문트 공작님.”

에드윈이 소파에 앉자, 벨라 역시 맞은편에 앉으며 하녀장에게 명령했다.

“차를 내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님.”

하녀 나가고, 응접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벨라가 허릴 꼿꼿이 세웠다.

에드윈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초대장으로 시선을 줬다. 그러자 자동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늘 아침에 도착한 초대장입니까?”

“아침에 일어나 문 앞에 쌓인 초대장을 보곤 저도 놀라던 중이었습니다.”

벨라의 말에 에드윈이 손을 뻗어 초대장 하나를 집어 들었다. 초대장엔 벨라 아키텐과 함께 릴리스 프로필리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굳은 얼굴로 초대장의 이름을 확인하는 에드윈을 보며, 벨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에드윈이 초대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레이디 릴리스 님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릴리스란 말에 벨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설마 리치문트 공작님께서도 추종자의 대열에 합류하신 건가요?”

“그런 게 아닙니다.”

재빨리 부정하는 에드윈의 태도로 보아, 사실인 모양이었다. 왠지 조금 전 느꼈던 불쾌감이 사라졌다.

‘불쾌감이라고? 내가 왜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 레이디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 불쾌감을 느껴야 하는 거지?’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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