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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55화 (55/139)

제 55 화

벨라의 노골적인 행동에 키안은 낯이 뜨거워졌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에드윈이라도, 벨라가 그를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게 분명했다.

‘어?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거지?’

분명 벨라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도, 에드윈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들어 책 외 다른 것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에드윈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로체 거리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평소의 그라면, 소란스러운 것엔 질색했을 테지만 이상하게 벨라와 함께 있자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조금 들뜨기까지 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드레이크 경, 제가 이런 곳은 처음이라 그러는데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벨라의 청에 드레이크가 키안 쪽을 보았다. 승낙을 구하는 눈치였다.

“부탁하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공작부인, 이쪽입니다.”

드레이크가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벨라가 편하게 걷을 수 있도록 팔을 뻗어 공간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벨라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드레이크 경은 남자인 제 눈에도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리치문트 공작님?”

키안의 뼈 있는 말에 에드윈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에드윈 역시 아침 훈련을 받는 동안, 드레이크가 얼마나 괜찮은 사내인지 알 수 있었다. 무뚝뚝하고 엄격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따뜻했다. 표현이 서툴 뿐, 다정한 구석도 있던 것이다.

“괜찮은 사람이더군, 나보다 훨씬 더.”

에드윈의 말에 키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에드윈 역시 벨라에 대한 호기심을 버릴 수 있을 테니까.

“공작님께선 저와 천천히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에드윈은 멀어져 가는 벨라와 드레이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키안의 제안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혹시 날 부른 이유가 이건가? 아키텐 공작부인께는 관심도 두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런 뜻도 있습니다.”

에드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키안을 보았다. 벨라 역시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은 벨라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시선이 벨라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쫓고 있던 것이다.

“아키텐 공작부인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레녹스 공작은 왜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제 솔직한 답변을 바라시는 겁니까? 아니면, 형식적인 답변을 해드리길 원하십니까?”

키안의 질문에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진심이라면, 키안 역시 진심으로 대하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솔직한 답변을 원한다, 레녹스 공작.”

“리치문트 공작님께선 미망인인 아키텐 공작부인과 결혼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그의 침묵에 키안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대답하시기 힘드실 겁니다. 특히 명망 있는 리치문트 공작가의 결혼은 공작님 혼자서 정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에드윈은 주먹을 꼭 쥐었다. 키안이 하는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사실 아키텐 공작부인께선 재혼할 마음이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다릅니다. 드레이크 경이라면, 가문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도…….”

“그만. 더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으니 말하지 않아도 돼. 한마디로 각오를 하라는 것이겠지.”

에드윈의 말에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저는 각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묻고 있는 겁니다.”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진심이라고? 사실 에드윈은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뭔지 아직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했을 때처럼 반짝이는 호기심인지. 아니면 더 깊은 감정인지 에드윈은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그때 드레이크와 함께 앞서가던 벨라가 뒤를 돌아보며, 키안에게 손짓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 에드윈의 눈엔 오직 벨라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희를 부르는군요. 가봐야겠습니다.”

키안이 에드윈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펑, 퍼펑!

검은 하늘에 축포가 터졌다. 키안은 무심히 밤하늘을 수놓는 축포의 불꽃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답네요. 수도에서 이런 축제가 열리고 있다니, 놀랐습니다.”

옆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키안이 고갤 휙 돌렸다. 그러자 사무엘이 멋쩍은 얼굴을 하곤 키안의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온 거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키안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사무엘이 재빨리 대답했다.

“조금 전 축포가 터지기 직전에 왔습니다. 단장님을 불렀지만, 소리 때문에 듣지 못하신 것 같았습니다. 제가 불편하시다면,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던 것뿐이야. 갈 필욘 없다.”

사무엘이 이해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사무엘은 키안의 옆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키안의 옆에 서서 검은 하늘에 축포가 터지는 걸 구경했다.

“우리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사무엘의 말에 키안이 벨라와 드레이크 쪽을 흘끗 보았다.

“잠깐만 기다려.”

키안이 벨라와 드레이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드레이크 경, 아키텐 공작부인을 저택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해 주겠나?”

키안의 말에 드레이크가 벨라를 돌아보았다. 벨라가 고갤 끄덕이자, 이내 대답했다.

“제가 안전하게 공작부인을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단장님.”

“부탁하지. 아키텐 공작부인,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키안이 벨라에게 인사를 건넨 후, 사무엘 스텐호프가 있는 곳으로 왔다.

“이제 단장님께선 집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다.”

키안의 말에 사무엘 스텐호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저와 광장에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곳의 집시 무희가 굉장하다는 소문입니다.”

집시 무희라면, 세이란과 구경을 했던 그곳인 모양이었다.

“나는…….”

키안은 이미 보았다고 거절하려는 순간, 사무엘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가 한껏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휴우, 좋아. 딱 거기까지만이다.”

키안의 대답이 떨어지자, 사무엘의 얼굴에 안도의 감정이 떠올랐다.

“다행입니다. 저는 단장님께서 거절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무엘에게 용병인 블랙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아름다운 집시 무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지.”

“단장님께서도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사무엘이 의외라는 듯 바라보자 키안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과장되게 말했다.

“당연히 나도 남자니까. 기사들 사이에서 내 외모를 갖고 말이 많은 모양이지만, 생김새와 욕구는 다르거든. 그렇지 않나, 스텐호프?”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사무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렇죠. 하지만 단장님께서는 너무 금욕적으로 생기셔서. 그런 욕구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실 금욕적으로 생긴 것도 있었지만, 키안의 외모가 아름다운 탓도 있었다. 특히 하늘빛 눈동자는 너무도 신비롭고 깨끗해, 사내들의 욕구라던가 욕망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배덕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스텐호프, 안 오면 놓고 가겠다!”

언제 갔는지 앞서가던 키안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사무엘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재빨리 키안의 뒤를 따랐다.

“왜 이렇게 늦어?”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키안은 주변에 더 많아진 사람들을 보며, 고갤 끄덕였다.

세이란과 함께 왔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많…….

순간, 키안이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뒤따라오던 사무엘이 키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았다.

“스텐호프, 미안하지만 먼저 가야겠다.”

“네?”

사무엘이 놀란 표정으로 키안을 보았다.

“급한 일이 생각났거든. 대신 다음에 내가 술을 사겠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내일 기사단에서 보도록 하지.”

키안이 사무엘을 남겨둔 채, 로체 거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하셨어. 분명, 전하께서 날 보고 계셨어.’

하지만 이상했다. 당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세이란은 키안에게 오는 대신 몸을 돌려 자릴 뜬 것이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눈빛 역시 서늘했다.

“대체 어디로 가신 거지?”

키안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헤치고 세이란이 사라졌던 곳으로 걸어갔다.

“제길.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왜 이렇게 초조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쏘아보던 세이란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을 지나자, 골목이 나왔다. 축제가 열리는 광장과는 달리 골목길엔 등이 켜져 있었지만 어두웠다.

하지만 키안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흡-”

키안이 놀라 걸음을 멈췄다. 골목 입구에 서 있던 세이란이 키안을 발견하곤,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전하셨군요.”

“왜 따라왔지?”

“그건, 당연히 전하께서 보이셔서…….”

키안은 세이란이 보여, 무작정 따라왔다고 말했다.

“당연히란 말이지?”

세이란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다. 키안은 그의 차가운 눈빛에 긴장했다. 그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지 걱정이 됐다.

“그렇습니다.”

“그럼, 앞으로 아무도 안 돼.”

키안이 놀라 고갤 들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한 발짝 다가서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곁에 서는 건 사내든 여인이든, 아무도 안 돼. 이제부터 너의 모든 시간, 모든 눈빛, 모든 감정은 다 내 것이다.”

억지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구속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세이란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망설이고 있었다.

아니, 말하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시간, 모든 눈빛, 그리고 모든 감정은 이미 그의 것이라고…….

“저는…….”

입술이 달싹였다. 해야 할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 목을 꽉 조여 아렸다.

“흣-”

세이란이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는 키안을 어두운 골목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키안을 벽에 밀어붙이곤, 입술을 겹쳐 왔다.

심장이 뜨겁게 타고 있었다. 지독한 분노가,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소유욕이 그의 심장을 거세게 할퀴었다.

만약 키안의 곁에서 웃고 있던 사내가 있다면, 그의 목을 당장에라도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파괴적이고 지독한 소유의 감정은 질투였다. 잔혹하게 그를 집어삼키는 질투의 감정.

“키안, 허락하지 않겠다. 네 곁에 그 어떤 사람도 허락하지 않겠다.”

“흐흣-”

대답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세이란이 깊숙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열고 농밀하게 혀를 삼켰다.

명백한 욕망이었다. 키안은 떨리는 손으로 세이란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그러곤 입술을 열고는 혀를 얽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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