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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54화 (54/139)

제 54 화

아침 6시, 출근하던 키안 앞을 낯선 사내가 가로막았다. 키안이 고갤 들자, 장신의 사내가 고갤 숙였다.

‘누구지?’

사실 셀서스 궁에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황태자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딘지 남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죄송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테란국의 기사가 왜 날 찾아왔는지 모르겠군.”

남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갤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공주님께서 황실 기사단의 단장님이신 레녹스 공작님을 잠시 뵙길 원하십니다.”

“공주께서 날?”

키안은 뜻밖의 초대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타국의 공주를 개인적으로 만날 이유는 없었다.

“전하께 보고를 해야 한다.”

“죄송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공주님께선 개인적인 만남을 원하십니다.”

“내 주군께서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다. 신하로써 불가하다. 공주께도 그렇게 전하도록 해.”

키안이 테란국의 기사를 지나쳐, 황실 기사단의 건물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사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아마 조만간, 테란국의 공주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하의 눈을 피해 날 만나려 하다니. 무슨 일이지? 설마, 날 자신의 편으로 만들 계획인 건가?’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테란국에도 자신이 황태자의 최측근이란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일 테니까.

“단장님, 나오셨습니까?”

“스텐호프, 일찍 왔군. 팔을 어때?”

“처음부터 그리 많이 다치지 않았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지금은 멀쩡합니다.”

사무엘이 붕대가 감긴 팔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키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까진 무리하지 마. 꿰맨 상처가 터지면 안 되니까. 드레이크 경은?”

“지금 연병장에 계십니다.”

“벌써? 혹시 리치문트 공작님께서도 함께 계시나?”

사무엘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의외라는 듯 말했다.

“책만 보셨다고 하셔서, 얼마 못 가 그만두실 줄 알았는데. 놀라는 중입니다.”

키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법 강단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시절부터 끈기 하나는 끝내줬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하나에 미치면 끝까지 파고들던 고집 역시도.

“실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직접 가서 봐야겠군.”

키안이 사무실을 나와 연병장으로 향했다.

사무엘 역시 말없이 키안의 뒤를 따랐다. 이상하게 기분 좋은 아침이라고 사무엘은 생각했다. 황실 기사단의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단장님을 보다니. 왠지 하루가 즐거울 것 같았다.

그때 키안이 손을 들어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이른 아침, 푸른 여명에 키안의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그 모습을 사무엘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어엇!”

앞서 걷던 키안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창에 걸려 휘청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사무엘이 재빨리 키안을 붙잡았다.

“고맙다, 스텐호프.”

키안이 몸을 바로 하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창을 집어 들었다. 조금 전까지 훈련을 한 듯 창의 손잡이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훈련을 끝내고, 씻으러 간 건가?”

키안은 텅 빈 연병장 안을 둘러보며, 우물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세이란은 자신이 우물가에 가는 걸 유독 싫어했다.

‘대체 이유가 뭐지? 왜 그렇게 싫어 하셨던 거지? 쓸데없이 사무엘 스텐호프까지 들먹이면서 말이야.’

키안이 화를 내던 세이란을 떠올리며, 고갤 갸웃했다.

“단장님, 저기 오십니다.”

사무엘의 말에 키안이 걸음을 멈췄다. 씻은 게 아니라 물을 뒤집어썼는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단장님, 오셨습니까?”

드레이크가 키안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왔다. 에드윈 역시 키안을 알아보곤, 고갤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훈련을 끝낸 모양이군. 수고했다, 드레이크.”

“아닙니다. 저야 뭐, 한 게 없습니다. 훈련은 리치문트 공작님께서 하셨으니까요.”

드레이크의 말에 키안이 에드윈 쪽으로 고갤 돌렸다.

“앞으로도 계속 나올 생각이십니까?”

“우선은 그럴 생각이다, 레녹스 공작.”

“드레이크, 부탁하지. 대신 오늘 저녁 저녁을 살까 하는데. 시간이 되는지 모르겠군.”

“오늘 저녁이라면, 특별한 일 없습니다. 하지만 수고했다고 주시는 상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특별히 힘들 점이 없어서요.”

드레이크의 말에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시간이 된다면 함께했으면 좋겠다, 드레이크. 사실 로체 거리에 상단들이 들어와 밤마다 축제가 열리는 모양인데, 아키텐 공작부인께서 함께 가주었으면 하더군. 하지만 내가 그쪽으로 아는 게 없어서. 너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함께 가주겠나?”

“제가 함께 가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도움이 될 거야. 사실 아키텐 공작부인과는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라, 여동생과 같은 존재다. 함께 가서 축제 구경을 하고 싶은데, 내가 그런 쪽으로 경험이 없어서. 드레이크가 함께 가준다면, 아키텐 공작부인께선 기뻐할 것도 같거든.”

아키텐 공작부인이란 말에 드레이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역시 사교계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는 벨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함께 가겠습니다.”

“그럼, 아키텐 공작가에 전갈을 보내야겠군.”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에드윈과 눈이 마주쳤다.

“리치문트 공작님께서도 시간이 되신다면, 함께 가셔도 좋습니다.”

키안의 제안에 에드윈이 생각에 잠긴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가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가도록 하지. 어차피 나 역시 드레이크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거든.”

“그럼 로체 거리 앞에서 8시면 되겠군요. 그때, 뵙겠습니다.”

키안이 몸을 돌려 연병장을 나왔다. 사실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벨라에게 좋은 사람이 생겼으면 싶었다.

키안은 돈에 팔리듯 아키텐 공작과 결혼을 한 벨라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길 원했다.

‘벨라가 드레이크 경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포기하실 테지.’

키안은 에드윈이 최대한 빨리 마음을 접기를 바랐다. 그것이 에드윈에게도, 그리고 벨라에게도 가장 좋은 일이었으니까.

**

“테란국의 기사가 레녹스 공작을 찾아갔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선 그를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래? 그런 다음엔 어디로 갔지?”

“레녹스 공작님과 헤어진 뒤, 바로 별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니, 레녹스 공작 말이야.”

세이란의 말에 책상 앞에 서 있던 카일이 고갤 들었다.

“아, 레녹스 공작님 말씀이시군요. 그게, 기사단 건물로 들어가시다가 키가 큰 갈색 머리카락의 기사를 만나셨습니다. 그러곤 연병장으로 함께 가셨습니다.”

“키가 큰 검은 머리 기사? 혹시 스텐호프를 말하는 건가?”

“레녹스 공작님께서 그렇게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제길!”

세이란의 입술 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순간 카일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세이란을 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 별일 아니다. 너는 가서 패트리샤에게 이걸 전하도록 해. 그리고 셀서스 궁에서 레녹스 공작을 지켜볼 땐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레녹스 공작은 눈치가 빠르거든.”

카일이 긴장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아참, 그러고 보니 데칸 공작의 정보원이 조만간 키엘체에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카일의 말에 세이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루시타니아 상단에서 보낸 정보원은 아직인 모양이군.”

“중간에 온 밀서에 의하면, 테란국의 정세가 심상찮은 모양입니다.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카일의 보고에 세이란이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카일, 데칸 공작의 정보원을 우리가 빼돌려야겠다.”

세이란의 말에 카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데칸 상단 역시 자신의 정보원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붙여놓았을 터였다. 키엘체에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데칸 상단의 정보원을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빼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너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그럼 평소처럼 검은 깃발을 달아놓겠습니다.”

“그들에게 전해, 패트리샤의 전갈을 기다리라고.”

세이란이 말에 카일이 고갤 끄덕였다. 사실 세이란이 말하는 그들이란, 용병 경매를 통해 세이란이 사들인 비밀 기사단인 ‘블랙’을 이르는 말이었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카일이 집무실을 나가자, 시종장인 아이크가 재빨리 들어왔다.

“전하, 조금 전 루시타니아 상단에서 명단을 보내왔습니다.”

“그래?”

아이크가 작게 접힌 쪽지를 세이란에게 건넸다. 펼쳐 내용을 확인한 세이란의 입가가 싸늘하게 굳어졌다.

“황실 소속 의사 중 한 명이었군.”

세이란이 쪽지를 재빨리 벽난로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화르륵 소릴 내며, 불에 타 재로 변했다.

“어떻게 할까요?”

“당분간 모른 척하도록 해. 대신, 황제궁에 있는 엘렌에겐 알리도록 해. 황제궁으로 들어오는 약재며 음식을 철저히 관리하라고.”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따로 의사에겐 사람을 붙여놓겠습니다.”

아이크에게 집무실을 나가자, 세이란은 창가로 걸어가 밖을 응시했다.

이제 막 여명을 밀어낸 아침의 태양 빛이 셀서스 궁을 비추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세이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헬로이즈 공주가 키안을 만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라…… 설마, 그렇게 된 건가?”

어느새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살기로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7장. 질투

“키안, 리치문트 공작님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드레이크 경만 나오는 것 아니었어?”

벨라는 드레이크와 함께 걸어오는 에드윈 리치문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어쩔 수 없었어. 드레이크 경을 초대하는 자리에 리치문트 공작님이 함께 계셨거든.”

“아무리 그렇더라도, 눈치 없이 따라 나오다니. 책과 친구라고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거야.”

벨라는 들고 있던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키안은 그 모습을 보며, 부채가 레이디에게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 새삼 깨달았다. 표정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고,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는 도구였던 것이다.

“벨라, 너는 리치문트 공작님이 싫어?”

“그걸 말이라고 해? 난 너처럼 책하고는 친하지 않은 사람이야. 그저 무식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지식과 유쾌함만 있으면 된다고. 그리고 난 나를 가르치는 스승을 원하는 게 아니라, 애인을 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 레이디에겐 기사의 맹세만큼 로맨틱한 건 없다는 것도.”

그때 에드윈과 드레이크가 두 사람 앞에 도착했다.

“벌써 와계셨군요. 늦어져 죄송합니다, 단장님. 그리고 아키텐 공작부인.”

드레이크가 키안과 벨라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벨라의 아름다움에 놀란 듯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첫 반응으로 꽤 괜찮은 듯했다.

“아닙니다, 드레이크 경. 저희도 조금 전에 도착한 참이거든요. 제가 저녁 식사 대신, 바로 축제 구경을 하길 원했는데 혹여 실수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벨라가 드레이크를 향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드레이크의 옆에 서 있던 에드윈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빛 역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리치문트 공작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오던 길이었습니다.”

드레이크가 옆에 서 있는 에드윈을 돌아보자, 벨라는 그제야 그를 발견한 것처럼 놀란 표정을 했다.

“어머, 리치문트 공작님께서도 오셨군요. 이런 북적거리는 곳은 싫어하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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