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화
“혼자 먼저 찾으신 건 아니시겠죠? 치사하게 말입니다.”
키안이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왈칵 솟아난 감정으로 인해 세이란을 꼭 끌어안을 것만 같았다.
“당연하지. 난, 의리가 있거든. 그리고……. 너와 함께가 아니면 찾을 이유도 없었다.”
사실 구스타프 1세의 지도를 발견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 지도를 들고 함께 찾을 키안이 옆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그럼, 이번엔 꼭 찾아야겠네요.”
키안의 말 한마디에 세이란의 입가의 미소가 깊어졌다.
“키안, 나 때문에 네가 벌을 받는 건 원치 않아. 내가 잘 소명하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전, 기쁩니다. 전하께서 어떤 마음으로 절 금원으로 데려가셨는지 알 것 같거든요. 그래서 감동이었습니다.”
키안의 대답에 세이란이 말없이 키안을 응시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키안.”
“전하께선 제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주군이십니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상대라… 묘한 느낌이다. 그럼,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어?”
답답했다. 한 발짝 다가간 것아 안심한 순간, 키안은 세 발짝 이상 도망가 있었다. 처음부터 쉽지 않을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절 유일하게 믿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엔 친구라고도 했고요.”
“맞아. 난 널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키안. 그런데 좀 억울하군. 넌 날, 지켜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는 사실이 말이야.”
“하지만 전하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건, 신하 된 자로서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의무는 필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네 마음이거든.”
“…….”
“앞으로는 날 유스타나의 황태자가 아니라, 널 마음에 담은 남자로 봐야 할 것이다.”
키안은 당혹감에 입술만 달싹였다. 세이란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의무가 아니라 마음을 원한다는 말 역시 충격이었지만, 황태자가 아닌 남자로 보라니. 그런 절대 불가능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너 뭐야? 혹시 벌써 잊어버린 건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내 약혼녀가 된다고 했잖아. 내 약혼녀 노릇을 하려면 신하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날 남자로 봐야 하는 거잖아. 안 그래?”
“아, 네. 당연히 그렇습니다.”
키안은 그제야 세이란이 말한 마음이라던가, 남자로 보아야 한다는 뜻을 이해했다.
‘아, 창피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거야?’
키안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말을 오해하다니. 그런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하지만 세이란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진심 같았어.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세이란은 안도하는 키안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아직까진 충분히 빠른 진도야. 14년간 날 황태자로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남자로 보기 힘들 테니까.’
거기다 키안은 14년 동안 자신을 속여왔다는 죄책감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또 하나.
레녹스 공작가의 비밀 역시 키안 혼자 지켜야 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키안은 레녹스가엔 없는 존재였다. 오직 쌍둥이 오빠의 그림자로만 존재해야 했다. 그런데 쌍둥이 오빠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었다.
어린 키안에겐 그 사실만으로 충분히 상처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키안의 아버지인 레녹스 공작은 가문의 후계를 위해 키안을 레녹스가의 상속자로 만들었다.
일곱 살의 어린 키안은 레녹스가의 모든 비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했다.
‘등에 있는 검붉은 검상이 레녹스 공작이 만든 것이었다니.’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세이란은 분노했다. 아무리 제국법이 두렵고, 또 가문의 미래가 중요하다지만 자신의 어린 딸의 등을 직접 베어버리다니. 정말 잔혹했다.
‘어린 키안이 할 수 있는 건, 참는 것밖엔 할 수 없을 테지. 말을 삼키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테니까.’
세이란은 금원에서 신음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견디던 키안을 떠올렸다.
가녀린 몸이 사시나무 떨 듯 고통스럽게 떨리고 있었지만, 키안은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세이란이 키안의 입안에 천을 밀어 넣지 않았다면, 여린 입술이 깨문 상처로 엉망이 되었을 터였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며칠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키안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창백한 얼굴에 입술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때도 똑같았던 거야. 고열로 정신을 잃은 동안, 자신이 여자라는 비밀이 밝혀질 것이 두려워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견뎠던 거였어.’
정말 미련스러울 정도로 답답했다. 차라리 레녹스 공작가에 연락이라도 했다면 마음이 덜 아팠을 것 같았다. 차라리 아프다는 핑계로 키안이 아버지인 레녹슥 공작에게 원망의 말이라도 한 번 뱉어냈다면, 이렇게 분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아이는 그 작고 가느다란 두 어깨로 혼자 버텨왔다. 아마 레녹스 공작 부처가 사고로 죽고 어린 카이우스를 책임져야 했을 때, 키안 역시 죽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어린 카이우스를 안고 울지도 못하고 있던 키안의 모습은 아직도 세이란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세이란이 그런 키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건. 마음이 쓰여서, 심장이 자꾸만 아려서 그 작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키안, 이건 진심이다. 네가 날, 의무가 아닌 마음으로 대해주길 원하는 건.”
세이란의 말에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행이었다. 또 한 발짝, 키안에게 다가설 수 있어서.
**
벨라는 마차에서 내려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교계에 데뷔한 후 수많은 파티와 무도회에 참석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만찬이 시작되기 세 시간 전에 초대장을 보낸 경우는 처음이었다.
“정말 예의가 없다니까. 레이디들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이 대략 얼마나 소요되는지 뻔히 알면서, 이렇게 급히 초대장을 보내다니 말이야.”
마음 같아선 이런 예의 없는 초대는 당연히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 하드윅 백작 부인이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거절도 할 수 없었다.
“쳇, 완전 코가 끼인 거야. 이젠 펫숍의 소개장 하나로 이번 사교 시즌 내내, 날 마음대로 주무르려 할 게 분명해.”
사실 하드윅 백작 부인의 속셈은 너무도 뻔했다. 이번 사교 시즌에 데뷔하는 하드윅 백작가의 첫 번째 영애인 비비안을 자신에게 떠넘길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키텐 공작부인. 만찬장에서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벨라는 만찬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하드윅 백작과 얘길 나누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가 익숙한 뒤통수라고 생각한 순간, 남자가 벨라의 시선을 느낀 듯 슬쩍 고갤 돌렸다.
‘뭐야, 저 사람은? 꽉 막힌 모범생이 만찬에 참석하다니. 별일이네.’
벨라는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을 흘끗 보고는 모르는 척 지나쳤다. 딱 한 번 파튬에서 다짜고짜 자신을 마차에 태운 후 집까지 데려다준 적은 있었지만, 리치문트 공작에게 인사를 건 낼 만큼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라, 무시하고 싶었다.
‘뭐, 공식석상에서 마주친 적이 없으니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고 예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니까.’
벨라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는 에드윈과 하드윅 백작 곁을 지나갔다. 에드윈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벨라는 옆에 서 있는 하드윅 백작에게만 고갤 숙여 인사를 건넨 후, 만찬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뭐야? 내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니고. 왜 또 벌레 씹은 표정인데?’
벨라는 자신을 바라보던 에드윈의 곱지 않은 시선에 불쾌감을 느꼈다. 두 번째 본 것뿐인데,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는 사람은 처음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 아키텐 공작부인. 마침 오셨군요. 여기 앉으세요.”
벨라가 만찬장 안으로 들어서자, 하드윅 백작 부인이 벨라를 알아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유난히 반가운 얼굴로 쪼르르 달려와 그녀의 팔을 붙잡곤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벨라는 유난스럽게 행동하는 하드윅 백작 부인의 태도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만찬은 제가 가장 좋아하시는 분들만 불렀답니다.”
그러고 보니, 뭐든 화려하고 큰 걸 좋아하는 하드윅 백작 부인이 이런 조촐할 만찬 자리를 만들다니 의외긴 했다.
만찬에 참석한 사람은 벨라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이었다. 아니, 조금 전 하드윅 백작과 얘길 나누고 있던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까지 합치면 여섯 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귀부인들만 참석하는 만찬에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 참석하다니. 그 조합이 조금 이상했다.
“그런데 조금 전 들어오다 보니, 손님이 오신 것 같더군요.”
벨라가 슬쩍 질문을 했다.
“세상에나, 아키텐 공작부인. 정말 저분을 모르시는 건가요? 이번에 황태자 전하를 도와 법무대신을 맡으신,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님이시잖아요. 우리 바깥양반 역시 이번에 공작님의 보좌관 업무를 맡아 진행 중이랍니다. 호호호호!”
하드윅 백작 부인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지적이 썩 유쾌한 건 아니었지만, 그가 초대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드윅 백작 부인의 잘난 척을 참아낼 수 있을 만큼.
“그럼 만찬에 초대되어 오신 건 아닌 모양이군요. 사실 모르는 분이 계셔서 돌아갈까 하던 참이었거든요.”
“그건 걱정 마세요. 오늘은 개인적인 일로 방문하셨거든요. 그리고 우리 바깥양반이 저녁 식사를 권할 테지만, 분명 거절하실 겁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러셨거든요.”
하드윅 백작 부인의 말에 벨라는 안도했다. 다시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을 볼일은 없었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벨라가 인사치레를 했다.
“이런 아기자기한 분위기도 좋군요. 좀 더 얘길 나눌 수도 있고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드윅 백작 부인이 고갤 주억거리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아기자기한 분위기, 좋네요. 뭔가 귀엽고 다정한 느낌이에요. 그러고 보면, 아키텐 공작부인께선 의외로 센스가 있으시다니까요. 그런 칭찬의 말을 해주시다니 말입니다. 사실 만찬에 여러분을 초대한 이유는 따로 있거든요.”
“혹시 그 소문 때문 아닌가요?”
그때 시기적절하게 스펜서 자작 부인이 끼어들며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만찬장의 분위기가 바뀌며, 사교계에 떠도는 가장 핫한 소문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혹시 스펜서 자작 부인께서도 그 소문 들으신 건가요?”
하드윅 백작 부인이 눈을 빛내며, 스펜서 자작 부인을 보았다.
“네, 저도 그 소문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사실 어젯밤에 우리 바깥양반께서 어디서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이번 사교 시즌 동안 약혼녀를 정하실 것이라고 하셨다더군요. 그래서 지금 키엘체의 유명 의상실이나, 보석상은 주문이 가득 차 웃돈을 얹어주어야 한다고요.”
“사실 급히 모임을 주선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랍니다.”
만찬장에 있던 귀부인들이 동시에 하드윅 백작 부인을 보았다.
“세상에나,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그저 이번에도 떠도는 소문이라고만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황태자인 세이란은 무도회나 파티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거기다 레이디들에겐 관심조차 없었던 황태자가 갑자기 이번 사교 시즌 동안 신붓감을 정하겠다고 공표하다니. 누가 봐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렌스터 영애에게 반하지 않았었나요? 그런 비슷한 소문이 돈 것도 같은데 말입니다.”
벨라가 하드윅 백작 부인에게 비비안은 가능성이 없으니, 꿈 깨라는 말을 하기 위해 넌지시 지난 소문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만찬장에 모여 있던 귀부인들의 시선이 벨라에게 향했다.
“그 소문 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렌스터 영애는 성 캐서린 수도원에 있는 것 아닌가요?”
“렌스터 공작께서 당연히 키엘체로 불러들이실 테죠. 소문엔 렌스터 영애를 성캐서린 수도원에 보낸 이유가 황태자 전하께서 전쟁터에 나가셨기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황태자비가 목표인데, 전하께서 없는 동안 눈에 차지도 않는 귀족과 렌스터 영애가 눈이라도 맞으면 큰일일 테니까요.”
“세상에, 그래서 수도원에 보낸 것이었군요. 난 또, 갑자기 파티를 좋아하는 렌스터 영애가 수도원에 간다고 해서 어리둥절했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렌스터 공작님께선 용의주도하신 분이신 것 같아요. 그런 걸 예상하고 행동하시다니 말입니다.”
“그러게요. 호호호호!”
벨라는 자신을 제외한 네 명의 귀부인의 수다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도착한 것뿐인데,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만찬장 안으로 하드윅 백작과 에드윈 치리문트 공작이 들어왔다. 그러자 수다를 떨던 귀부인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처음으로 저 남자의 등장이 고맙게 느껴지는군. 어라, 근데 리치문트 공작은 저녁을 함께 먹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벨라는 조용해진 만찬 테이블을 보며 안도했지만, 에드윈의 갑작스러운 만찬 참석은 의외였다.
‘뭐, 오늘은 집에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배가 고팠나 보지.’
벨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애드윈의 등장으로 만찬이 끝날 때까지 조용했다. 그저 하드윅 백작이 음식이 입에 맞느냐는 질문을 에드윈에게 간간이 하는 소리가 소음의 전부일 정도였다.
만찬이 끝나자, 벨라는 하드윅 백작 부인에게 두통을 핑계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벨라의 말에 하드윅 백작 부인은 굉장히 아쉬운 얼굴을 했다.
“아키텐 공작부인, 우린 다음에 시간을 내 따로 얘길 했으면 해요.”
벨라가 펫숍에서 뭘 구입했는지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눈치였다.
“시간 나실 때 연락 주세요, 하드윅 백작 부인. 그런데 레이디 비비안께서 이번 사교계에 첫 데뷔를 하는 건가요? 한 달 동안 준비를 하시려면, 바쁘시겠네요.”
“사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새벽부터 의상실에 가야 한답니다. 늦게 갔더니 예약이 밀려서, 새벽밖에는 시간이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것마저 거절하면, 작년에 입던 드레스를 입고 사교계에 데뷔할 수밖에 없어서 예약을 했거든요.”
“저런, 오늘 저녁은 일찍 주무셔야겠네요. 그래야 좋은 컨디션으로 최고의 드레스를 맞출 수 있을 테니까요.”
“사실 비비안은 일찍 재웠답니다.”
“저녁도 먹지 않고요?”
“살이 너무 쪄서, 예쁜 드레스를 입으려면 좀 빼야 하거든요.”
하드윅 백작 부인이 비비안이 음식을 너무 좋아한다며, 푸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로 보아, 하드윅 백작 부인은 비비안을 황태자비로 만들 생각인 듯했다.
뭐, 생각은 자유니까.
“저기, 아키텐 공작부인, 부탁이 하나 있답니다.”
“말씀하세요, 하드윅 백작 부인.”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아키텐 공작부인께서 참석하는 파티에 우리 비비안이 동행을 할 수 있을까요? 공작부인껜 매 시즌마다 초대장이 넘쳐 나, 참석하지 못하는 파티가 수두룩한 걸로 알고 있거든요.”
벨라는 순간 어의가 없었다. 동행이라고 했지만, 아무런 연관도 없는 자신과 비비안이 함께 파티에 참석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하드윅 백작 부인은 자신이 초대된 파티에 비비안이 대신 가도 되냐고 돌려 묻고 있었다.
“뭐, 전 상관없답니다. 초대장이 오면, 그 일부를 하드윅 백작가로 보내겠습니다.”
벨라의 대답에 하드윅 백작 부인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오늘 벨라를 초대한 목적을 이뤘다는 표정이었다.
‘쳇, 그 소개장을 받는 게 아니었어. 욕심 많게 내 다이아몬드 팔찌를 꿀꺽 삼켜놓고는, 이번엔 내 초대장에까지 욕심을 내다니.’
후회가 되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 더는 하드윅 백작 부인과 얽히지 않는 게 최상일 것 같았다. 벨라는 하드윅 백작 부인을 비롯해 귀부인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서둘러 만찬장을 빠져나왔다.
현관을 나오며, 벨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자신의 마차가 오길 기다리기 위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걸음을 멈췄다.
에드윈 리치문트였다. 그 역시 돌아갈 마차를 기다리는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에드윈 역시 벨라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곤 조금 놀란 듯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돌아갈 줄을 미처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흐음, 흠.”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벨라는 어색함을 떨쳐 내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 그날 밤 자신을 비난하던 에드윈의 모습이 떠오르자, 불쾌감에 자꾸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날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