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화
키안은 현관으로 들어가는 대신, 레녹스 저택의 담장을 넘었다. 사실 레녹스가의 사람들은 키안이 아파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키안이 아픈 몸을 이끌고 밤 외출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집사인 가브리엘을 비롯해 유모인 에리스 모두 뒤로 까무러칠 게 분명했다.
“두 번 놀라게 할 순 없지.”
셀서스 궁으로 출근했던 키안이 창백한 얼굴로 황실의 마차를 타고 저택에 도착한 순간, 가브리엘은 너무 놀란 듯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에리스는 키안의 시선을 피해가며 몰래 눈물까지 훔쳤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알기에 키안은 오늘 밤의 외출을 비밀로 했다.
“휴우-”
천천히 숨을 내쉰 후 키안은 가볍게 담장을 넘었다. 그러곤 정원을 가로질렀다. 14년 동안 남자로 살아오며, 피를 토할 만큼 검술을 연마했다. 그 결과 키안은 인기척을 없애며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벽을 타고 방으로 올라가며, 키안은 펫숍의 주인인 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애완용 펫이라니.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법이란 말을 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어.’
키안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열려 있는 창문을 열고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의자 아래 자릴 잡고 앉아 있던 새끼 늑대가 고갤 번쩍 들더니, 키안을 알아보곤 다가왔다. 키안이 돌아오길 기다린 모양이었다.
“착하네. 주인이 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기다리다니.”
키안이 새끼 늑대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늑대의 보드라운 털을 쓸어주기 위해 손을 든 순간, 그대로 굳어졌다.
“전하, 여긴 어떻게?”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쉬라고 휴가를 줬더니, 대체 이 밤에 어딜 다녀오는 거지? 설마 그사이 애인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마치 자신의 방인 것처럼 의자에 기댄 채 편하게 앉아 있던 세이란을 보며 키안은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괜스레 제 발이 저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순간 키안은 긴장했다. 평소와 달리 자신을 쏘아보는 세이란의 분위기가 서늘했던 것이다. 화가 난 듯도 보였다.
“아얏!”
키안의 긴장이 새끼 늑대에게도 전해졌는지 키안의 손에서 버둥거리더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곤 애교라도 부리는 듯 세이란의 발에 얼굴을 비벼댔다.
“쳇, 치사하게. 배신하다니.”
키안은 주인인 자신이 아니라, 세이란에게 꼬리를 흔드는 새끼 늑대를 보며 미간을 접었다. 하지만 세이란은 새끼 늑대의 복종이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네가 새벽이슬을 밟고 다니는 걸 아는 거지. 그리고 이 행동은 널 배신한 게 아니라, 나를 진정시키는 것이다. 널 혼내지 않게.”
순간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키안을 보았다.
“너, 뭐야? 설마 맹수를 다루는 능력이 사라진 건 아니지?”
“아닙니다. 그저 저보다 전하께 살갑게 구는 게 조금 질투가 난 것뿐이었습니다.”
“질투는 저 늑대가 아니라, 나에게 해야지.”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심장이 또 뛰고 있었다. 세이란은 마치 바람난 연인을 책망하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두렵기는커녕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어딜 다녀온 거지?”
세이란의 질문에 순간 키안은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 조금 전 다녀온 펫숍에 대해 솔직히 말을 할 순 없었다.
‘특히 세이란 님께 욕정을 느껴서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갔다’라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었다.
“바레나 거리에 갔었습니다. 벨라와 함께요.”
“아키텐 공작부인과 바레나 거리에? 이상하군. 둘이 그곳에 갈 일이 없을 텐데 말이야.”
“급히 살 물건이 있었습니다.”
“물건? 그게 뭔지 말해봐.”
세이란은 키안의 대답을 경청하려는 듯 침대에 편안히 자릴 잡았다. 그 모습에 키안은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니까…….”
“왜 머뭇거리는지 모르겠군. 설마 나에게 말하지 못할 뭔가를 사려 했던 건 아니겠지? 예를 들자면…….”
세이란이 키안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짧은 침묵과 날카로운 눈빛에 키안은 긴장했다. 그가 자신이 펫숍에 가서 남자들의 물건을 본뜬 모형을 만지작거렸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지만, 그의 시선에 자꾸만 긴장이 됐다.
“예를 들자면, 뭡니까?”
키안이 마른침을 삼키며, 슬쩍 물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피식 웃더니, 자신이 그걸 어떻게 알겠냐는 얼굴을 했다.
“그거야 당연히 모르지. 그건 내가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 뭘 사러 간 거지?”
“아, 그게……. 레이디들을 위한 물건이라, 구체적으론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키텐 공작부인과 연관된 아주 사적인 것이라서.”
키안은 일부러 말하기 난처하다는 얼굴로 세이란을 보았다. 그런 키안을 보며, 세이란은 속으로 웃었다. 어디에 갔었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앙큼하게 거짓말을 하는 키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왜 그런 곳에 갔는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인들은 참 복잡한 것 같아. 남자들은 금방 표시가 나는데 말이야.”
이건 마음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욕망을 느끼면 신체에 확연한 변화가 일었다. 그리고 욕망을 느낀 상대에게선 눈을 떼지 못하는 것 역시 본능이었다. 하지만 키안은 달랐다. 아주 복잡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이 많거든요.”
분명 서로 다른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뭔가 묘하게 아귀가 맞는 구석이 있었다.
“부끄러움은 네가 많겠지. 지금도 네 얼굴, 빨게. 굉장히 야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말이다.”
“네? 제 얼굴이요?”
키안이 놀라 재빨리 두 손으로 양쪽 뺨을 가렸다. 하지만 웃고 있는 세이란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만 놀리십시오.”
키안이 두 손을 내리며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세이란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게 비밀이 생긴 것 같아 심술이 났을 뿐이야. 아키텐 공작부인에게 의리를 지키는 건 좋지만, 너무 그러면 화가 날 것 같거든.”
세이란의 말에 키안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사실 자신 역시 그랬다. 세이란이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인 레이디 베로니카에게 반해 참석하지도 않던 파티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것 같아 서운했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저에게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전하시니까요.”
순간 세이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키안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카이우스보다 더?”
“네? 여기서 갑자기 카이우스가 왜 나오는 겁니까?”
“뭐야? 그럼, 카이우스보다는 아니라는 것이냐?”
“그건 비교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카이우스는 혈육이고, 또 제 손길이 필요한 어린아이입니다.”
“쳇, 난 그 꼬맹이 녀석보다 더 오랫동안 네 곁에 있었다. 그런데 어리다는 이유로 순위에서 밀리다니. 난 네가 어린놈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어린놈이라니. 이제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카이우스에게 어린놈이라고 표현하는 건 어폐가 있었다. 무엇보다 키안은 세이란이 카이우스에게 경쟁심을 느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린놈을 좋아하긴 하죠.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맛이 있거든요.”
키안의 농담에 세이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세이란 역시 키안이 농담을 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쾌했다. 입을 내밀곤 퉁명스러운 얼굴을 한 세이란을 보며, 키안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기분이 좋았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이 느낌을 뭐라고 정의할 순 없었지만.
“대신…….”
세이란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키안의 팔을 붙잡곤 확 끌어당겼다.
“어엇-”
순식간에 세이란의 단단한 가슴에 안긴 키안이 놀라 고갤 들자,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대신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이런 장점이 있지.”
그 말과 함께 그가 고갤 숙여왔다. 자, 잠깐만! 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세이란의 입술이 키안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뜨거운 혀가 키안의 입술을 핥더니 이내 깊숙이 혀를 묻어왔다.
그의 혀가 키안의 혀를 얽고는 힘껏 빨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젖은 입술이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었다.
“하아-”
놀랐다. 키스 한 번으로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다니. 키안은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지독한 열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입술을 그에게 맡긴 채, 그의 옷자락을 붙드는 것만으로 벅찼다.
그러는 동안에도 밀어내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의 키스에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하지만……. 열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시작된 격정이 키안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하아, 키안.”
뜨거운 숨결이 키안의 귓불을 스쳤다. 거친 숨소리가 세이란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내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하나처럼 얽혔다.
“하아, 세이란……. 흣!”
이번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핥고 빨았다.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만나길 반복했다. 젖은 입술이 하나처럼 얽힐 때마다 나른한 숨결이 섞여 더욱 농밀해졌다.
“하아, 으흣-”
키안이 나른한 신음을 뱉어내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 순간, 털썩하고 두 사람의 몸이 침대 위로 눕혀졌다. 등 뒤로 느껴지는 푹신함에 키안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가 더 길어지면, 분명 그를 원할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지만 키스만으로 키안의 아랫배가 저릿했다. 그 나른하고 기분 좋은 감각에 하마터면 세이란의 남성에 대고 다리 사이를 비빌 뻔했다. 키안은 이것이 몸의 신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이란 님을 원하고 있어. 내 몸이, 원하고 있어.’
농밀하게 혀를 얽고 다급하게 입안을 헤집는 키스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리고 좀 더 짙은 갈증에 몸이 떨려왔다. 그 순간 세이란이 입술을 뗐다.
“헉, 헉!”
그의 거친 숨결이 뺨에 닿았다. 그 짙은 열기에 키안 역시 알게 됐다. 세이란 역시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걸. 그런 생각이 들자, 키안은 정신이 확 들었다.
‘말도 안 돼. 전하께선 날, 남자로 알고 계셔. 그런 나에게…….’
키안이 화들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 세이란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숨결은 거칠었다. 욕망을 통제하느라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별 의미 없는 사고입니다. 키스를 하다 몸이 부딪혔고,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한 것일 뿐입니다.”
키안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변명하기 바빴다. 최대한 별일 아니라는 걸 강조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있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같은 남자끼리라, 본능적인 반응이 일어난 것 사고 같은 것이죠.”
“넌 그래?”
그의 목소리가 열기로 잔뜩 쉬어 있었다. 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 전 거칠게 숨을 내쉬던 그 목소리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네?”
“너는 다른 남자와도 이렇게 키스를 하면, 별 의미도 없는데 이렇게 반응하는 거냐고 물었다.”
키안은 커다란 망치로 머릴 세게 맞은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었다. 지금까지 누군가와 키스를 해본 적도 없지만, 키스를 한다고 해서 이렇게 되진 않을 게 분명했다. 오히려 불쾌할 것 같았다.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키스를 해본 사람이 전하밖에 없어서요.”
키안은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잔뜩 찌푸렸던 세이란의 얼굴이 펴지더니, 손을 뻗어 키안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나도 그래. 너밖에 없다. 키스하고 싶은 사람도, 그리고…….”
세이란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생각해 봐야겠다.”
“뭘 말입니까?”
“내가 왜 네게 반응하는지 말이야.”
“아마, 착각 때문일 겁니다.”
“무슨 착각을 내가 했다는 거지?”
“전하께서 시험을 하시겠다고 한 것이랑 똑같은 겁니다. 가짜 약혼녀인데, 절 진짜 약혼녀라고 착각을 하신 거죠. 귀족들 모두를 속여야 하니까, 그 생각이 진실처럼 느껴진 겁니다.”
“자기 암시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이냐?”
“네. 그리고 간혹 사람은 이성이 감성을 지배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그런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키안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이란이 키안이 여자란 사실을 몰랐을 때 발생할 일이었다. 한마디로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네 말처럼 내가 자기 암시에 빠졌더라도, 너에게 욕망을 느낀 건 변하지 않아.”
세이란이 손을 뻗어 키안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가져다 댔다. 뜨겁고 딱딱한 그의 남성이 키안의 손바닥 안에서 뛰고 있었다. 그 생생한 느낌에 화들짝 손을 뗐다.
“키안, 오늘은 쉬도록 해. 되도록 밤 외출은 하지 마.”
세이란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그가 방을 나가자, 혼자 남겨진 키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혼란스러웠다. 아직도 들끓고 있는 몸속의 열기도. 그리고 세이란의 말도.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