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7화 (17/139)

제 17 화

“됐다. 이제 갈까? 너무 늦었다.”

세이란 역시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성적 긴장감을 느낀 듯 턱에서 손을 뗐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테이블에 금화 하나를 놓고는 키안의 손을 잡고 가게를 나왔다.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다음에 와서 하면 돼.”

그러고 보니 세이란이 테이블에 올려놓고 온 돈은 로라가 내온 음식값보다 훨씬 많았다. 아마 로라가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기 전에 세이란이 먼저 가게를 나온 것 같았다.

“구경할래?”

세이란의 물음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이리 와.”

두 사람은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가게들을 천천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키안은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에 마음을 빼앗긴 듯 눈을 빛냈다. 그런 키안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짙어진 녹색 눈동자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키안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가게들을 구경하기 바빴다. 그러다 신기한 물건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자, 뒤에 서 있던 세이란은 ‘사줄까?’ 하고 물어왔다.

“처음 보는 것이라 구경한 것뿐입니다. 저에겐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키안은 여인용 장신구를 내려놓으며 고갤 가로저었다. 그러곤 다른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행동은 얼굴이 붉어질 만큼 달콤하게 보였다.

야시장의 모든 가게를 구경한 키안이 아쉬운 듯 걸음을 멈췄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잠깐, 구두끈이 풀어졌다.”

말릴 새도 없이 세이란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풀려 있는 키안의 구두의 끈을 묶어주었다.

“…….”

놀라 말을 잇지 못한 것도 있지만, 세이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키안은 혼란스러웠다.

음식을 먹는 순간에도, 야시장을 구경하는 동안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모르는 척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무릎을 꿇은 세이란을 보고 있자니 억눌러 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펑 하고 터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돌아갈까? 시간이 너무 늦었다.”

세이란이 갑자기 고갤 들자, 키안은 당황했다. 자신이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켜 버렸다.

“어,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당혹감에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세이란을 남겨둔 채 앞서 걷기 시작했다.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야. 아니, 내가 세이란 님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몰라.’

키안은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곤 빠르게 걸어갔다.

“기다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키안은 멈추지 않고 골목을 따라 계속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걷던 키안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낯이 익은 여인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 있었다.

누구더라……?

“패트리샤?”

키안의 입을 통해 불쑥 튀어나온 이름을 패트리샤가 들은 듯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패트리샤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내 고갤 돌리고 주인에게 값을 치른 후 자릴 떴다.

“어, 저기…….”

키안이 패트리샤가 걸어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패트리샤의 걸음이 너무 빨라, 그녀의 모습은 벌써 인파 속으로 사라지려 했다. 급한 마음에 키안이 달리기 시작했다.

“위험하잖아.”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강한 힘이 팔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놀라 고갤 드니, 이미 키안은 세이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마치 자신을 보호하듯 끌어안고 있었다.

“부딪혀 다칠 뻔했어.”

패트리샤를 쫓아가는 것에 정신이 팔려 가게에서 나오던 덩치 큰 남자를 보지 못한 것이다. 키안은 멋쩍은 얼굴로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숨을 삼켰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이 남자와 부딪혀 바닥으로 처박힐 뻔했다.

“무슨 일인데?”

“그게 아는 얼굴이 있는 것 같아서.”

“아는 얼굴이라고? 대체 누군데?”

“그게 누구냐면…….”

키안은 순간 머뭇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조금 전 패트리샤를 보았다는 말을 그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잘못 본 모양입니다.”

그때 키안의 뺨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옵니다. 어쩌죠?”

“어쩌긴, 뛰어야지.”

세이란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더니 키안에게 씌워주었다. 놀란 키안이 외투를 벗으려 하자,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둘러, 다 젖고 싶지 않거든.”

그 순간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빗방울이 거세졌다. 키안은 어쩔 수 없이 외투를 뒤집어쓴 채로 뛰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비가 내려 공기는 차가웠지만, 얼굴은 뜨거웠다. 그리고 외투에서 나는 체향 때문인지 자꾸만 심장이 간질거렸다.

“안 되겠어. 잠시 비가 그치길 기다려야겠다, 키안.”

어느새 두 사람은 말을 묶어둔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빗방울이 굵어져 곧바로 말을 타고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를 피할 수 있는 헛간이란 사실이었다.

“금방 그쳐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키안이 세이란이 씌워준 외투를 벗었다. 그러곤 세이란에게 건네주려다 말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자신에게 옷을 내어주느라, 세이란은 비에 젖어 있었다.

“다 젖으셨습니다.”

키안이 손수건으로 세이란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머리카락이며, 어깨에 묻어 있는 빗물도 닦아냈다.

처음엔 물기를 닦아내는 데만 집중하느라 세이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키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세이란의 뜨거운 눈빛 때문에 자꾸만 손이 더뎌졌다.

시선 역시 어디에 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 다 됐습니다. 추우실 테니, 외투를 입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키안은 최대한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자꾸 평소와 달리 말을 더듬었다. 의식적으로 세이란의 시선을 피하며 그에게 옷을 건넸다. 하지만 세이란은 받아 들지 않았다.

‘어떡하지? 숨이 막힐 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을 감싼 공기는 더 어색해졌고, 결국 키안은 그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기다렸다는 듯 키안의 손목을 붙잡더니,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세이란 님, 놓아주십시오.”

자신을 향해 놓아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이란은 놓지 않았다.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 역시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자신은 키안의 혼란스러움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키스해도 돼?”

“네?”

“허락한다면, 눈 감아.”

“…….”

그 말에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지 몰랐다. 아니, 기대감에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절대 눈을 감아선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연신 되뇌었건만, 키안은 그의 명령을 따랐다. 복잡한 감정을 담고 흔들리던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

그것과 동시에 그의 손이 키안의 턱을 붙잡더니, 고갤 숙여왔다. 입술이 닿았다. 나른한 숨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두 입술이 하나처럼 얽혀들었다. 뜻밖의 농밀함에 키안은 놀랐다.

하지만 밀어낼 수가 없었다. 뜨거운 혀를 얽고 삼킬 듯 밀어붙여 오는 그 열기에 키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키안의 손에 들려 있던 외투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랫배가 뜨거웠다. 그의 혀가 깊숙이 혀를 얽어올 때마다 자꾸만 다리 사이의 예민한 속살이 흠칫흠칫 떨려왔다. 키안은 나른한 열기에 자신도 모르게 허릴 비틀며 그의 하체 아랫배를 문질렀다.

“하아, 제길.”

멍해진 의식 저 멀리서 세이란이 욕설을 뱉어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지붕 위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컸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키안의 귓가엔 입술이 부딪히며 나는 젖은 숨소리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

미친 게 틀림없었다. 세이란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키안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두 손에 얼굴을 묻고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새벽이라 집사는 물론, 하녀들조차 모두 잠들어 있어, 새벽의 외출에 대한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온 키안은 그래도 침대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밀어냈어야 했다. 세이란의 키스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게 아니라, 거부해야 했다.

“하아-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거야.”

키안은 오늘 아침 황실 기사단의 임명식에서 세이란을 볼 생각을 하자, 걱정이 됐다. 대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키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갤 들었다.

“다 그 꿈 때문이야.”

키안은 며칠 전 꾼 꿈을 떠올렸다.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건 전혀 없었지만, 야릇한 꿈이란 건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꾼 후부터 이상하게 온몸이 예민해졌다.

패트리샤는 자신이 마셨다던 음료에 수면제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꿈은 물론, 그날의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분명히 기억나는 하나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몽정의 대상이 세이란이었다.

‘눈동자가 붉은색이었지만, 분명 세이란 님이었어.’

그래서인지 세이란과 눈이 마주친다거나 몸이 스치기라도 하면 자꾸만 온몸에서 열이 났다. 그리고 조금 전 키스는 거부하고 싶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가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고 키스를 했다는 사실조차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음란해. 몽정을 한 후, 내 몸이 완전 음란해진 게 분명해.”

키안은 서둘러 머릿속에 떠오른 망상을 떨쳐 냈다. 지금도 그와의 키스를 떠올리자, 온몸에 열기 나고 아랫배가 이상하리만치 아릿했다. 자꾸만 다리 사이가 간질거리며 열이 났다. 남자들이 욕망을 느끼면 자신의 것을 손으로 붙잡고 쓸며 자위를 한다고 하더니, 키안 역시 손을 뻗어 그곳을 만지고 싶었다.

생각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손가락을 그곳에 넣고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해질 때까지 벅벅 긁고 싶었다. 그러면 아랫배에 가득 찬 저릿한 열기가 사라질 것 같았다.

“하아, 정말 안 되겠어.”

키안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있다간 함께 훈련을 받던 기사들처럼 자위라도 할 태세였다. 서둘러 욕실로 걸어간 키안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몸 안에 들끓는 음란한 열기를 식혀야 할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이러다간 정말 세이란을 덮칠 태세였다. 옷이 젖도록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키안은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평소보다 짙어진 눈동자며, 키스로 인해 부풀어 오른 입술이 묘하게 섹시했다.

“벨라라면 알지도 모르겠어.”

키안은 지금껏 남자들과 함께 생활해 왔기 때문에 남자들의 성에 관해 주워들은 지식은 많았다. 하지만 정작 여인들의 성에 관한 얘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욕망이 정상적인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세이란이 자신의 변화를 눈치챌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비밀 역시 드러날 게 분명했다.

“하아-”

한숨과 함께 키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들떠 있던 감정 역시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얼어붙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운 감정들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뭘 숨기고 있는지도.

‘레녹스가의 저주받은 아이. 불행을 불러들이는 불길한 예언의 아이.’

“그게 나야.”

키안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잠시나마, 세이란을 떠올리며 설레고 들떠 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 때문에 쌍둥이 오빠는 물론, 부모님도 죽었다.

그런 자신이 잠깐이나마 행복해하며 설레다니. 키안은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았다. 자신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었다. 가장 소중한 혈족의 죽음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신은 그 대가로 그 어떤 것도 누려선 안 됐다.

“위험해. 최대한 빨리 벨라를 만나, 방법을 찾아야 해.”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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