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겨울의 끝 (21/24)

21. 겨울의 끝

아스텔은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이 떠난 뒤로는 조금 쓸쓸하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영지에 도착하셨을까?”

아스텔의 목소리에 드레스를 정리해 주던 한나가 고개를 들었다.

“무사히 도착하셨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연락을 보내실 겁니다.”

외조부는 돌려받은 영지를 살피기 위해 잠시 황궁을 떠났다.

진작에 가야 했는데 독약 사건으로 지체됐었다.

“너무 추워서 건강이 상하실까 봐 걱정이야.”

지난번 독살 사건과 그에 따른 소란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났다.

공작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약간의 의혹을 남기긴 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정을 잘 모르는 제국민들은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잃은 아스텔에게 동정표를 주고 있다고 했다.

“황후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시녀의 단정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스텔은 정원에 있는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들 참석해 줘서 고마워요.”

아스텔은 티 파티의 주최자로서 모여 있는 귀부인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귀부인들은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카이젠은 그때의 소란을 수습하면서 불순한 세력을 전부 골라냈다.

그 후 제국 안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가을의 풍요로움 속에 수확제도 끝나고 이제 겨울이 되었다.

모든 일이 안정된 느낌이다.

아버지의 일이 마무리되면서 아스텔은 평온한 분위기 속에 가을을 마무리했다.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선 지금은 평범한 황후들처럼 황궁을 관리하고 귀부인들의 사교 모임을 주선하며 하루하루 편안하게 지냈다.

“황후 폐하. 제가 북부에서 어렵게 구한 차를 가져왔답니다.”

“저는 남부에서 가져온 새로운 옷감을…….”

지난 사건 이후 문제가 될 만한 귀족들이 대부분 사라진 덕에 지금 남아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황후인 아스텔에게 공손했다.

귀부인들도 아스텔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다들 마음을 써줘서 고마워요.”

“황후 폐하, 이번에 동부로 순행을 가신다면서요?”

차를 마시던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귀부인들도 호기심을 담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조만간 카이젠과 함께 동부로 겨울 여행을 가기로 했다.

‘하필이면 겨울에 추운 동부에 간다니 의문을 품을 만도 하지.’

하지만 카이젠은 겨울이 아니면 늘 바쁘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틈이 없다.

이번 여행은 최소 인원으로 짧게 다녀오기로 했다.

“순행은 언제나 봄에만 나갔으니까요. 폐하께서는 겨울에 농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려고 하십니다.”

아스텔은 찻잔을 내려놓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농민들의 삶은 겨울이 제일 고되지요. 땔감이 부족해서 추위에 시달리고 식량도 부족하니까요. 동부의 열병이 제일 심해지는 시기도 겨울이랍니다.”

북부만큼은 아니지만 동부의 겨울도 몹시 추웠다.

겨울에는 눈 때문에 고립되는 낙후된 시골도 많았다.

“이번 여행에 앞서 각 지역에 식량과 겨울 용품, 상비약을 보낼 계획이에요. 약초와 함께 미리 식량과 양모까지 확보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 여행은 테오르가 동부를 그리워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이번 여행을 ‘농민들을 살피려는 동절기 순행’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괜히 추운 겨울에 병사들만 고생시키는 꼴이 되니까.’

실제로도 힘든 겨울을 이겨내는 농민들을 도와주는 건 좋은 일이다.

아스텔은 동부의 시골에서 6년간 살면서 겨울의 혹독함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 시기에 얼마나 많은 농민이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는지도 직접 목격했다.

가난에 시달리던 아스텔에게도 월동 준비는 힘겨운 일이었다.

“아……. 그런 깊은 뜻이 있으셨군요.”

아스텔의 말에 귀부인들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황후 폐하께서는 생각이 깊으십니다.”

절반 정도는 진짜로 감동하며 아스텔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나머지 절반은 아스텔의 뜻에 공감하지 못해도 이런 식으로 백성들의 환심을 얻는 황후에게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수도에 약초 학교를 세우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셨군요.”

“그렇지요.”

아스텔은 이미 그레텔에게 부탁해서 전국에 보낼 상비약들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덕분에 약초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 거의 물약 생산장처럼 되어버렸지만.

다행히 그레텔은 자신의 약을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어서 좋아했다.

“수도에서 필요한 약초를 더 재배하기 위해 남부에 재배지를 세울 계획이에요. 이미 위치를 결정해 두고 공사 중이랍니다.”

남부는 따뜻하고 평온한 지역이니 산에 재배지를 만든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공작님께서 그 일을 돕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위치를 정하는 건 프리츠 오빠가 도와줬어요.”

프리츠의 얘기가 나오니까 몇몇 귀부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공작님께서는 늘 바쁘셔서 저택도 비워두신다고 들었습니다. 공작저는 집사가 관리하고 있다지요.”

“일이 많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일 때문만이 아니라 프리츠 오빠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 돌아가는 게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공작 부인이라도 계시면 좋을 텐데요.”

그 말에 동조하는 귀부인들을 보며 아스텔은 흔치 않게 당혹감을 느꼈다.

“그건…….”

사실 아스텔도 오빠인 프리츠에게 결혼 상대를 물색해 주고 싶었지만 프리츠가 싫어하는 눈치라서 제대로 말을 꺼내 보지 못했다.

본인이 싫다는데 결혼을 강요할 수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온실의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아스텔.”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들어온 카이젠이 테이블로 걸어오고 있었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귀부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카이젠은 그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폐하, 어쩐 일로…….”

카이젠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스텔의 손을 잡았다.

“당신, 괜찮은 거야? 추워 보이는데.”

춥다니.

온실 안은 만연한 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따뜻했다.

티 파티에 참석한 귀부인들은 다들 봄에나 입는 얇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지난주엔 평범하게 겨울용 벨벳 드레스를 입고 왔다가 다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부채질만 하고 갔기 때문이다.

아스텔도 얇은 티 파티용 드레스를 입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하지만 카이젠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도 피곤해 보이는군. 이제 휴식 시간이 아닌가?”

테이블 위로 빠르게 시선들이 오가더니 차를 가져온 백작 부인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희가 황후 폐하를 너무 오랫동안 귀찮게 해드렸네요.”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 *

“왜 벌써 오셨어요?”

왜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손님들을 쫓아내는 건지.

아스텔은 약간 어이없어하는 말투로 카이젠에게 물었다.

카이젠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항변했다.

“저것들이 피곤한 사람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잖아.”

귀부인들은 아스텔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초과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굳이 쫓아낼 필요가 있나.

“저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피곤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젠은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당신 새벽부터 기침을 하던데.”

“……그랬나요?”

잠결이라 기억이 안난다.

방문 밖에서 잠을 자던 카이젠이 들었을 정도면 심했던 걸까.

“그래도 지금은 괜찮습니다.”

카이젠은 그녀를 바라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무리하지 마.”

몸이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굳이 찾아온건가.

강제적인 배려였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아스텔은 그냥 쓰게 웃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한 침실에서 잠을 잤다.

전과 다름없이 아스텔은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카이젠은 그 밖에 있는 소파에서 잤다는 소리다.

둘의 애정은 연인이라고 해야 될 만큼 발전했지만, 아직도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것보다는 경계선을 넘어설 만한 기회가 좀처럼 없었던 것 같지만.

“날이 추워서 그랬나 보네요.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이 온실은 아주 따뜻한데요.”

오히려 걱정되는 건 카이젠의 건강이었다.

물론 카이젠은 가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팔팔하게 지내고 있었다만.

“이곳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유리 벽의 바깥에 하얗게 서리가 맺혀 있다.

이곳은 카이젠이 황후궁에 만들어 놓은 커다란 온실이었다.

겨울이 됐는데도 이 안은 봄처럼 따뜻했다. 장작으로 끝없이 온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너무 사치스럽다고 만류했지만 카이젠은 테오르를 내세우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어린 테오르를 추운 정원에서 놀게 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정작 테오르는 눈이 내리자마자 블린을 데리고 매일 눈밭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눈을 가지고 노느라 바빠서 온실 안에 피어난 꽃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덕분에 이 온실은 아스텔의 전용 휴식실이 되었다.

“여행 준비는 다 끝났어.”

“빠르군요.”

며칠 뒤에 출발한 예정이긴 했지만 벌써 다 끝났다니.

“당신 외조부의 영지로 가면 되겠군.”

외조부의 영지는 동부에서도 동쪽에 치우쳐 있었는데 영지의 경계선은 아스텔이 살던 시골 별장 근처까지 걸쳐 있었다.

별장 주변엔 황제의 일행이 머물만한 성이나 저택이 없다.

외조부의 저택에 머물면서 별장에 다녀오는 정도로 해두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카이젠이 이쪽을 흥미롭게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왜 웃으시나요?”

“당신이 기뻐하는 것 같아서.”

얼굴에 티가 났나?

아스텔은 솔직하게 말했다.

“기대가 되긴 해요. 전부터 외가의 영지에 있는 저택에 가고 싶었거든요.”

칼렌베르크 영지에 있는 저택은 아스텔의 어머니가 자란 곳이었다.

외조부가 영지를 잃은 뒤에는 가보지 못했다.

“저희 어머니가 자란 곳이니까요. 아주 어릴 때 몇 번 가본 게 전부라서 궁금하긴 해요.”

어릴 때 그곳에 가면 어머니가 살던 방에 머물렀는데.

지금은 어머니의 물건은 별로 남아 있지 않겠지만.

칼렌베르크 영지는 그동안 황가의 직할지로 편입되어 있었다.

황제가 보낸 관리인이 관저에 부임해서 영지를 다스렸으니 영주의 저택은 크게 건드리지 않았으리라.

다시 한번 어머니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아스텔은 마음이 들떴다.

* * *

며칠 후, 두 사람은 테오르와 함께 동부로 떠났다.

카이젠은 아스텔과 테오르와 함께 마차에 탔다.

오랜만에 순행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아스텔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테오르와 단둘이 마차에 탔었다.

테오르는 마차가 황궁을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마차 창문에 매달려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엄마, 저거 봐! 강이 얼었어!”

테오르가 다리 밑에 얼어붙은 강물을 가리켰다.

“테오르. 너무 오랫동안 창문을 열고 있으면 안 돼.”

아스텔은 테오르를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테오르는 간신히 자리에 앉아서 모포를 깔고 누워 있던 블린을 쓰다듬었다.

“얼른 도착하면 좋겠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

“며칠 안에 갈 수 있을 거야.”

카이젠은 후작을 그리워하는 테오르를 보고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공작이 죽고 나서 며칠 뒤에 테오르도 외조부의 죽음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래도 자주 만나던 외조부라 슬퍼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레스턴 공작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테오르는 오히려 그를 만나지 않게 돼서 안도하는 것 같았다.

다만 카이젠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엄마가 슬퍼할까요?”

“음?”

“그 사람은 엄마의 아빠잖아요.”

테오르가 맑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봤다.

“나는 아빠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면 슬플 것 같아서.”

“…….”

카이젠은 순간 자신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으면 어린 테오르에게 평생의 상처가 되었겠지.

어린 테오르를 지켜주지도 못했을 테고.

“글쎄.”

공작을 죽이면서 카이젠도 아스텔을 걱정했었다.

혹시라도 아스텔이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지만 다행히 아스텔은 공작의 죽음에 별로 동요하지 않는 눈치였다.

카이젠은 깊이 안도했다.

이제는 어떤 이유로든 아스텔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장갑 낀 손으로 테오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우리 두 사람이 잘 위로해 주면 괜찮아질 거야.”

일행을 태운 마차는 반나절 동안 얼어붙은 길을 달렸다.

저녁 무렵, 수도 근교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지만 무리하지 않기 위해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 가기로 정했다.

카이젠은 테오르와 함께 영주관으로 들어갔다.

아스텔은 잠시 근처 신전에 들리기로 했다.

커다란 상자를 든 시종들이 그녀를 뒤따랐다.

성 근처에 마을 사람들을 위한 작은 신전이 있었다. 영주관에서 작은 회랑을 통해 바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규모는 작지만 깨끗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중년의 신관은 감동한 얼굴로 달려 나와서 아스텔을 맞이했다.

“황후 폐하께서 들러주시다니 저희 신전에 너무도 과분한 영광입니다.”

아스텔은 작은 신전 내부를 둘러봤다.

신전 안은 아담하고 고요한 분위기였다.

전형적인 시골의 소신전이지만 단정하고 깔끔하다.

황제 일행의 방문 때문에 정성 들여서 준비한 듯했다.

신전에 안 들렸으면 미안할 뻔했네.

아스텔은 순수한 감탄을 전했다.

“정말 깨끗하고 정결한 곳이네요. 관리를 잘해뒀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감격스러워하던 신관은 시종들이 가져온 커다란 상자들을 보면서 물었다.

“황후 폐하, 이것은…….”

“이곳 사람들에게 나눠줄 겨울 용품과 상비약입니다.”

미리 준비한 겨울 용품은 이미 다른 지역에도 충분히 나눠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황제의 일행이 지나가는 동안 자선을 베풀면 일종의 미담이 될 것이다.

여행의 목적을 포장하기도 좋고.

그래서 일부러 준비하게 했다.

아스텔은 신전에 낼 기부금도 따로 가져왔다.

황제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다들 번거로운 준비를 했을 테니 이렇게라도 보답을 해주고 싶기도 했다.

그 정도로 해두고 돌아가려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온 건지 순식간에 입구 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기사들이 막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밖에 모여서 아스텔을 바라보고 있다.

“저 사람들은……?”

“아, 황후 폐하를 뵙고 싶어서 찾아온 마을 사람들입니다.”

아.

자세히 보니 대부분 낡은 옷을 입은 농민들이었다.

아스텔이 시선을 주자 어설프게나마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를 환영하러 와줬다니 고마운 일이군요.”

아스텔은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줘.”

시종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나눠주자 사람들은 당황하면서도 감격스러워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몇몇 마을 사람은 선물보다도 아스텔에게 더 관심을 갖는 것 같았다.

아스텔을 신전의 성녀처럼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마을에 사는 농민들이 황족, 그것도 황후를 가까이서 보는 건 꿈 같은 일이었다.

그때 기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카이젠이 회랑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스텔.”

“황제 폐하……!”

놀란 신관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마을 사람들도 갑자기 등장한 황제의 모습에 웅성거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아스텔도 몹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점잖은 황후답게 황제에게 차분하게 예의를 갖춰야 했다.

“폐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카이젠은 그 공손한 태도에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당신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길래 쫓아왔지.”

마을 사람들이 들으면 어쩌나 싶어서 슬쩍 시선을 돌려봤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은 신전 입구 쪽에 있어서 둘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들려서 선물을 전해주려고 왔어요.”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 있을 줄은 몰랐지만.

“테오르는요?”

둘이 같이 성으로 들어갔는데 테오르는 어쩌고 혼자 나왔지?

카이젠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곳 영주가 새끼 양들을 보여주니까 나한테는 관심도 안 주더군.”

카이젠의 서운한 목소리에 아스텔은 웃음이 나는 걸 참았다.

아기 양들에게 정신이 팔려서 카이젠을 무시하는 테오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저녁을 먹이고 재우려면 얼른 돌아가야겠네요.”

이쯤하고 돌아가려는데 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눈빛으로 카이젠을 보고 있었다.

하긴 잘생긴 얼굴이긴 하지.

“아스텔.”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스텔은 그의 손을 잡고 회랑으로 걸어갔다.

신전 안에는 그럭저럭 따뜻했는데 기둥이 늘어선 회랑으로 나왔더니 추위가 몰려왔다.

어째 방금 전보다 좀 더 추워진 느낌이다.

해가 지고 있어서 그런 듯했다.

아스텔이 얼핏 몸을 움츠렸을 때였다.

옆에 있는 카이젠이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아스텔은 조금 놀랐지만 굳이 뿌리치지 않고 그에게 끌어안긴 채 걸어갔다.

날이 추운데도 카이젠에게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회랑 밖에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기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황제와 황후의 다정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킨 모양인지 두 사람을 향한 시선에 부드러운 감탄이 섞여 있었다.

카이젠도 그걸 느낀 모양이었다.

“다들 신기하게 보는군.”

동물원의 동물이 된 기분이라며 그가 낮게 속삭였다. 아스텔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이 좋은 황제 부부는 흔하지 않으니까요.”

이혼했다가 두 번씩 결혼하는 부부도 흔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건 나쁘지 않았다.

옆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도 마음속을 평온하게 해줬다.

두 사람은 하얀 눈송이가 얇게 깔린 돌바닥을 걸어갔다.

하얗게 물든 판석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 * *

외조부의 영지에 도착한 건 출발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행 때는 여기저기 들려서 일부러 시간을 늦췄지만, 지금은 최대한 빠른 길로 달려왔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만.

“폐하, 제 저택을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은 두 사람을 맞이하러 나왔다.

“할아버지!”

테오르는 후작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품에 안겼다.

“우리 전하께서는 그사이에 많이 자라셨군요.”

테오르는 외조부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고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할아버지,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면 안 돼요?”

“이곳 일만 마무리되면 봄이 되기 전에 돌아가겠습니다.”

테오르는 그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

아스텔도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외조부가 황후궁에 계속 머물러 주기를 바랐지만,

모처럼 영지를 되찾은 할아버지를 강제로 수도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오신다니 다행이야.‘

대부분의 귀족은 영지는 관리인에게 맡기고 수도에 머문다.

아스텔은 외조부도 그렇게 지냈으면 했다.

연세도 있으신데 먼 영지에서 혼자 지내는 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황후 폐하, 저택을 둘러보시겠습니까?”

사람들 앞이라 후작은 아스텔에게도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그럼요. 이곳을 다시 보게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왔는데요.”

아스텔은 진심 어린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외조부는 시종을 불러서 뭔가를 전했다.

잠시 후, 시녀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나서 차분하게 예를 갖췄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노년에 접어든 깐깐해 보이는 부인이었다. 아스텔은 그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시에라군요. 예전에도 이곳의 시녀장이었죠?”

아주 오래전에 이곳의 시녀장이었던 사람이었다.

아스텔에게 한나가 그렇듯이 이 시녀장도 젊을 때는 외조모의 시녀였다고 한다.

시녀장의 마른 얼굴에 감동이 스쳐 갔다.

“황후 폐하께서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야 당연하죠. 어떻게 잊겠어요.”

시녀장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안내했다.

“저택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후작가의 저택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긴 해도 고상하고 우아한 저택이었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익숙한 침실이었다.

“아가씨께서 머무시던 곳입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의 아스텔은 이 저택을 방문할 때마다 언제나 이곳에 머물렀다.

아스텔은 침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제가 기억하는 그대로네요.”

어머니의 침실은 예전 모습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침대와 옷장, 화장대, 콘솔, 창문을 가린 베이지색 커튼까지 그대로였다.

시녀장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그동안 이 저택을 사용한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 그대로 있었습니다. 후작님께서 돌아오신 뒤에 낡은 가구는 새로 수리하고 아가씨의 물건들도 전부 제자리에 옮겨뒀지요.”

아스텔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가구들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외조부님도 어머니의 방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으셨구나.

옛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테오르는 방 안을 구경하다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여기서 자도 돼요?”

“여기가 마음에 드니?”

“응. 여기서 자고 싶어!”

아스텔은 시녀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하녀들에게 명해서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시녀장은 흔쾌히 대답했다.

하긴 어차피 비어 있는 방이니 안 될 건 없었다.

이곳은 영주의 딸들이 지내던 방이라 위치도 안전했다.

“그래. 이 방이 마음에 들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여기서 지내렴.”

테오르는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어머니도 같이 자면 안 돼요?”

“응?”

테오르는 아스텔의 소맷자락을 잡고 매달리면서 다시 부탁했다.

“여기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이젠은 그렇게 하라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에 엄마가 재워줄게.”

카이젠을 보니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텔은 지난 열흘간 본의 아니게 카이젠을 고생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두 사람은 겉보기엔 사이좋은 부부였으니 여행지에 나와서 다른 침실을 쓸 수는 없었다.

이곳에 오는 내내 아스텔은 카이젠과 같은 침실에서 잠을 잤다.

물론 언제나처럼 카이젠은 침실에 딸린 소파에서 잠들었지만.

대부분 근처 영주의 성이라 황후궁의 소파보다 훨씬 더 불편해 보였다.

아스텔은 카이젠을 그렇게 고생시키는 게 미안했다.

몇 번은 침대를 양보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아스텔은 오늘 하루만이라도 카이젠을 편안하게 쉬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테오르와 함께 이 방에 머물면 카이젠은 혼자서 편하게 잘 수 있겠지.

아스텔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녀장에게 눈짓을 했다.

하지만 시녀장은 아스텔의 눈빛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외람되오나 이 침실의 침대는 세  분이서 주무시기에도 충분한 크기입니다.”

음?

“아뇨, 폐하를 불편하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스텔은 황급히 대답했다.

‘그러니 폐하의 침실은 따로 준비하도록’ 하고 말을 이으려는 찰나였다.

조그만 손이 아스텔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테오르가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묻고 있었다.

“아버지도 여기서 같이 자면 안 돼요?"

테오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텔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해서 대답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뭐?”

테오르는 여전히 반짝거리는 눈으로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안 되는 거야?”

“…….”

‘응. 너무 좁아서 안 돼. 한 침대에 세 명이서 잘 수는 없어’ 하고 달랠 수 있었겠지만, 방금 시녀장이 세 명이 자기에도 충분하다고 말했으니 그렇게 설득할 수도 없었다.

‘이걸 어쩐다…….’

아스텔이 고민하는 사이에 담담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세 명이 함께 자면 불편할 거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카이젠이 테오르를 설득했다.

하지만 테오르는 카이젠의 설득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의자에서 잘래요!”

“뭐?”

“옛날엔 겨울에 할아버지랑 엄마랑 다 같이 한방에서 잤었는데. 그때는 할아버지가 소파에서 잤어요.”

카이젠이 의아한 시선으로 아스텔을 보았다.

아스텔은 얼른 대답했다.

“장작을 아껴야 해서 그랬어요.”

동부의 겨울은 춥고 길었다.

겨울만 되면 장작을 구하는 것도 엄청난 돈이 들었다.

가끔 장작이 빠듯해지면 어쩔 수 없이 한방에서 같이 잠을 자곤 했었다.

어린 테오르는 오히려 한 방에 오며 자는 걸 무척 좋아했지만.

“우리는 다 같이 자면 안 되는 거예요……?”

테오르가 풀죽은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카이젠도 테오르가 너무 실망한 얼굴을 하니까 당황했다.

보다 못한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오늘 하루만 다 같이 잘까?”

한방에서 자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스텔과 카이젠은 이제 연인 같은 관계가 됐으니까.

아직 한 침대를 쓴 적이 없어서 민망하고 불편할 뿐이지.

이곳이라면 중간에 테오르도 있으니 민망하고 무안한 분위기는 없을 것이다.

“대신 정말 오늘 하루만이야.”

“응!”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시녀장은 하녀들을 불러서 세 사람이 쓸 침구를 새로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준비하는 동안 다른 방을 보여준다며 다시 복도로 안내했다.

앞서가는 테오르를 보며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 괜찮겠어?”

카이젠이 걱정스러운 듯 작게 물었다.

“어쩔 수 없죠.”

계속 안 된다고 우기는 것도 남들 보기에 이상하고.

“폐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아스텔 자신은 괜찮지만 카이젠은 어떨지 걱정스러웠다.

카이젠은 담담한 말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나는 어디서 자든 상관없어.”

“…….”

제국의 주인이 할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다.

그 말에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카이젠은 여태까지 아스텔을 편하게 해주려고 불편함을 감수해 왔다.

하루쯤은 가족답게 함께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스텔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낯익은 복도를 걸어갔다.

* * *

저택을 둘러보고 짐을 풀어놓다 보니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저녁은 아스텔과 카이젠, 테오르, 그리고 외조부까지 네 사람만 함께 하기로 했다.

다른 기사들이나 함께 온 보좌관들은 연회홀에서 따로 식사를 했다.

호사스러운 메뉴가 가득한 저녁상을 앞에 두고 네 사람은 함께 식사를 들었다.

“할아버지, 오늘 어머니 아버지하고 같이 잘 거예요!”

저녁을 먹는 동안 테오르가 외조부에게 세 사람이 한 침실에서 잘 거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외조부는 몹시 난감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황제 폐하의 침실을 미리 준비해 놨는데…….”

외조부는 걱정스러운 듯이 아스텔을 바라봤다.

외조부는 아직도 두 사람이 조금 불편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스텔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대답했다.

“오늘 하루만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하루만이라는 말에 외조부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근심 어린 눈빛이었다.

‘이제는 카이젠과 함께 있어도 불편하지 않다고 말씀드려야겠네.’

* * *

식사를 끝내고 침실로 돌아와서 테오르를 씻기고 아스텔도 몸을 씻었다.

어머니의 침실은 아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침대에는 깨끗한 새 침구가 준비되어 있고 벽난로에는 장작이 활활 타올랐다.

카이젠도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테오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웠다.

한 침대에 들면 민망하고 불편하지 않을까 했지만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긴 여정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해서일까.

침대에 눕자마자 긴장이 풀리면서 잠기운이 노곤하게 밀려왔다.

가운데에 있는 테오르 덕분에 불편함이 덜해서겠지.

단둘이 있었으면 분위기가 미묘했을 것이다.

“엄마, 옛날이야기 해줘요.”

테오르가 아스텔에게 몸을 돌리며 부탁했다.

아스텔은 잠기운을 떨쳐내려고 애쓰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말하는 고양이가 있었는데.”

“그 얘기는 알아.”

“우물 속에 사는 개구리가 밖으로 나왔는데.”

“그것도 다 알아.”

몇 개를 더 말해봤지만 이미 알고 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몇 달 동안 동화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황후의 업무가 바빠서 테오르를 재워주는 것도 외조부나 시녀들에게 맡겨놨었고.

아스텔은 졸린 눈으로 카이젠을 건너다봤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카이젠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건 양철 병정 얘기뿐인데. 테오르가 좋아할 내용은 아닌 것 같군.”

“나 그것도 알아요.”

“…….”

카이젠은 침묵을 지켰다.

아스텔은 다른 이야기가 있나 기억을 더듬어봤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다른 얘기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스텔은 잠기운으로 흐려지는 기억을 뒤지면서 이야기를 급조해 냈다.

“높은 성에 사는 소녀가 있었어. 소녀는 아름답고 화려한 방에 있었지만 함부로 밖에 나갈 수 없었단다. 그래서 매일 창문을 보면서 하루를 보냈지. 좋아하는 왕자님이 근처를 지나가는 걸 보려고.”

급조한 이야기에는 오랜 기억이 스며들어 있었다.

사춘기 무렵의 아스텔은 황태후궁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

황궁 일을 힘들어하는 황태후 전하를 돕기 위해서였다.

황태후궁에 있을 때면 아스텔은 자청해서 3층의 서재에서 일을 도왔다.

그곳에서는 황태후궁의 입구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아스텔이 기다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황태자 전하.

10살 때부터 아스텔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카이젠.

하지만 카이젠은 황태후궁에 자주 오지 않았다.

어쩌다 가끔 그가 찾아올 때면 아스텔은 서재의 창문 너머로 그가 오는 것을 보곤 했었다.

카이젠이 오는 걸 보면 그가 도착하기 전에 머리와 옷을 단장하고 그가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카이젠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아스텔을 보지 못하고 돌아갈 때도 많았다.

아스텔은 실망감을 감추고 미소를 지으며 미안해하는 황태후를 위로했다.

“왕자님은 소녀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몰랐어요?”

“그래.”

“왜요?”

왜였을까.

당시엔 몰랐지만 이제 아스텔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소녀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거든.”

아스텔 자신은 늘 착실하고 성실한 약혼녀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하지만, 정작 카이젠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스텔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자신의 야망 때문에 어린 딸을 이용하고 여차하면 황태자와 함께 친딸도 죽여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니 카이젠이 자신을 오해하고 싫어할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때는 어리고 어리석었어.”

카이젠의 목소리였다.

아스텔은 시선을 들고 카이젠을 향했다.

어두운 그늘 안에서 그가 아스텔을 직시하고 있었다.

“제대로 알았다면 기다리기 전에 먼저 찾아갔을 거야.”

붉은 눈동자에 쓰라린 감정이 흘러갔다.

“물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예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으니.

“…….”

아스텔은 그 눈빛에 담긴 절절한 회한에 말문이 막혔다.

“괜찮습니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니까요.”

아스텔은 차분하고도 담담하게 그를 위로했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두 사람은 함께 많은 일을 했고. 결국엔 행복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세월엔 우여곡절이 많았고 잊을 수 없을 만큼 아픈 기억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평온한 삶을 살게 되었다.

아스텔은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건너다보는 눈빛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주어가 빠진 이야기였지만 두 사람 모두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테오르는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재미없는 내용이네.”

“풉…….”

아스텔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건너편의 카이젠도 미미하게 웃고 있었다.

잠시 후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테오르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빠져든 모양이다.

“잠들었네요.”

아스텔은 테오르의 이불을 더 끌어당겨 주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춥지 않아?”

“저는 괜찮아요.”

카이젠의 손이 테오르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토닥였다.

아스텔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카이젠의 손을 잡았다.

벽난로에서 풍겨오는 훈훈한 기운보다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작은 온기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 * *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잠에서 깨어난 건 테오르였다.

환한 아침 햇살이 방 안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테오르는 엄마 아빠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침대 아래쪽으로 조심조심 내려왔다.

침대 아래에 내려서자마자 블린이 와락 달려들었다.

블린은 밤새 침대 옆에 있는 쿠션 위에서 자고 있었다.

“블린, 엄마 아빠는 아직 자고 있어.”

테오르는 블린은 데리고 침대 곁에서 멀어졌다.

침실 옆에는 작은 휴식실이 딸려 있었다.

방문을 조심조심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곁에 딸린 방에는 언제나 물과 음료, 침실 과자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에도 벽난로에 불을 지펴놓아서 아직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테오르는 블린과 함께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했다.

“컹컹!”

블린이 장식장 뒤를 보면서 낮게 짖었다.

“블린 조용히 해!”

테오르는 얼른 블린의 목을 끌어안았다.

블린은 장식장 뒤에 코를 들이밀고 낑낑거렸다.

테오르는 그 안으로 손을 넣어봤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을 빼내려는 순간 뭔가 딱딱한 물건이 잡혔다.

“이건 뭐지?”

손가락으로 잡고 간신히 꺼내봤더니 가죽 장정을 한 작은 책이었다.

보통의 책보다는 훨씬 얇고 가벼웠다.

“컹컹!”

블린이 물려고 해서 테오르는 그 책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안 돼. 이건 책이야. 물면 안 돼.”

블린이 이렇게 책에 관심을 가진 건 처음이네.

테오르는 조그만 손으로 가죽 표지를 쓸어봤다.

가죽으로 된 거라서 물고 싶은 걸까?

침실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서 엄마 아빠가 깨어난 모양이다.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아스텔이 테오르에게 다가왔다.

“테오르, 거기서 뭐 하고 있니?”

“엄마, 여기 이런 책이 있었어.”

테오르는 장식장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책이 있었다고?”

“블린이 찾았어.”

아스텔은 테오르가 건네주는 책을 받아 들었다.

표지에 작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제클린.

아스텔의 어머니 이름이었다.

어머니의 책인가.

슬쩍 펼쳐봤더니 정갈한 글씨체가 보였다.

오늘은 정원에 나가서 산책을 했고, 리본을 주문했고, 저녁에는 손님들이 방문하고 등등의 간결한 기록들이 날짜별로 쓰여 있었다.

일기장이라고 하기엔 내용이 짧았다.

‘하루의 일상을 기록한 메모장 같은 건가.’

근데 왜 숨겨놓은 거지?

아스텔은 책을 덮어서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리 어머니라지만 다른 사람의 일상 기록을 꺼내보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것도 어린 테오르가 보고 있는 앞에서 할 짓은 아니었다.

“이건 외할머니의 책인가 봐. 소중한 거라서 숨겨놓은 거니까 만지지 말고 잘 놔두자.”

“응.”

소중한 거라고 하니까 테오르는 쉽게 동의했다.

아스텔은 웃으면서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이제 우리 집에 가보자.”

아스텔은 테오르를 데리고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갔다.

일행은 전부 외조부의 저택에 남겨두고 근위 기사 몇 명과 함께 간소한 일행으로 출발했다.

예전에 살던 집은 외조부의 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출발했더니 점심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게 이어진 오솔길 끝에 작은 3층 저택이 있었다.

저택이라기엔 좀 규모가 작았지만 한때는 나름대로 화려한 별장이었다고 한다.

익숙한 지붕이 보이자마자 테오르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우리 집이야!”

일행을 태운 마차는 저택의 작은 앞마당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테오르는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테오르. 천천히 가야지.”

아스텔이 그런 테오르를 쫓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남은 카이젠은 천천히 낡은 저택을 둘러봤다.

살펴볼수록 충격적이었다.

‘여기가 아스텔이 살던 집이라니.’

낡은 별장이라는 건 들었지만 이건 상상한 것보다 더 심했다.

벽에는 금이 가고 한쪽 탑은 아예 허물어져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정문 앞에 있는 판석은 전부 깨지고 금이 가 있었다.

깨진 판석 사이로 마른 잡초가 발에 밟혔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던 건가.’

힘들게 살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마음이 아팠다.

아스텔은 이곳에서 걱정 없이 편안했다고 말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어린아이를 기르는 건 상상도 못 할 만큼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카이젠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테오르는 집에 돌아와서 몹시 좋아했다.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블린에게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더니 마당에 나가서 마른 풀을 밟고 다녔다.

‘여기 돌아와서 좋은 모양이네.’

아스텔도 집 안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아스텔이 떠나기 전에 외조부는 이곳을 정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 짐들은 정리해서 이곳으로 가져왔다만. 너와 테오르의 짐은 그곳에 놔뒀단다.”

외조부는 그렇게 설명하면서 가만히 덧붙였다.

테오르가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예전 모습 그대로 두고 싶었다고.

아스텔은 외조부에게 감사를 표했다.

“잘하셨어요.”

집에 돌아갔는데 집 안이 텅 비어 있으면 테오르는 무척 서운해했을 것이다.

다행히 외조부의 배려로 집 안은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낡았지만 익숙한 가구들. 소박한 장식들.

생각보다 훨씬 깨끗했다. 오랫동안 비워놓았던 집인데.

부엌에 들어간 아스텔은 집이 깨끗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부엌은 아스텔이 쓸 때보다 더 깨끗했다.

가재도구들이 반짝반짝 윤이 날 만큼 깨끗하게 닦여 있다.

식품 저장고에도 치즈와 쿠키, 빵과 절인 고기부터 채소까지 신선한 식재료가 가득했다.

종류별로 다양하게 조금씩 준비되어 있다.

일행의 식사는 미리 저택에서 다 준비해 왔지만.

하루 이틀 정도는 이곳에서 놀고 싶을 테니까.

예전처럼 음식을 꺼내 먹고 놀 수 있게 미리 준비해 놓은 모양이다.

아스텔은 외조부의 세심한 배려에 감탄했다.

‘의외로 세심하시다니까.’

창문 너머로 마당에서 뛰어다니는 테오르가 보였다.

아스텔은 부엌문을 열고 마당에서 놀고 있는 테오르를 불렀다.

“테오르.”

블린과 함께 마른 낙엽을 밟고 다니던 테오르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테오르, 배고프지 않니?”

“조금.”

테오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허기도 잊은 모양이다.

집에 간다고 들떠서 아침도 대충 먹었으면서.

아스텔은 테오르와 블린을 보면서 말했다.

“둘 다 뭐 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점심때가 지났다.

함께 온 병사들도 굶게 놔둘 순 없었다.

“테오르. 혹시 이곳에서 살 때 먹던 음식 중에 먹고 싶은 게 있니?”

“여기서 먹던 거?”

테오르는 작은 손을 턱 끝에 대고 잠시 고민했다.

“음…… 감자 샐러드하고 샌드위치.”

“정말? 그걸 먹고 싶어?”

너무 간단한 메뉴가 나와서 놀라서 다시 확인했다.

“응. 지금은 점심이잖아.”

“하긴 그렇구나.”

점심이니까 간단한 점심 메뉴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 금방 만들어줄게.”

아스텔은 함께 온 하녀를 불렀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중에 짐꾼으로 따라온 사람이었다.

외조부는 시녀들도 보내준다고 했지만, 일행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아서 거절했다.

“부르셨습니까, 황후 폐하?”

젊은 하녀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점심을 가져왔겠지?”

“네, 저택에서 준비해 왔습니다.”

“그럼 폐하의 식사를 준비하고 병사들과 기사들에게도 저택에서 준비해 온 식사를 나눠줘.”

명령을 듣던 하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

“저,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는…….”

“나는 괜찮아. 여기 있는 걸로 만들어 먹으면 되니까. 대신 빵을 하나만 가져다줘.”

“네, 황후 폐하.”

아스텔은 부엌에 들어가서 감자를 꺼내고 양상추와 햄도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녀가 빵을 가져왔나 하고 돌아봤더니 카이젠이 서 있었다.

“아스텔.”

“폐하?”

카이젠은 부엌으로 들어오면서 의아한 듯이 물었다.

“당신은 왜 식사를 안 해?”

“오랜만에 테오르에게 점심을 만들어주려고요.”

아스텔은 웃으며 설명했다.

오랜만에 옛날 집에 돌아왔으니 여기서 먹던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다.

황궁에서는 언제나 맛좋은 음식을 먹지만 한 번쯤은 옛날 추억이 서린 걸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설명을 듣던 카이젠이 불쑥 말했다.

“나도 도와주지.”

“네?”

햄을 자르던 아스텔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저를 도와주신다고요?”

“그래.”

카이젠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아스텔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카이젠이 음식을 만든다니.

부엌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을 것 같은데.

“폐하의 식사는 따로 준비해 드리라고 했는데요.”

“당신과 테오르는 여기서 만들어 먹고 나만 혼자 저택에서 가져온 걸 먹으라고?”

카이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아스텔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야…….”

물론 그런 소리였다만.

아스텔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

“제 솜씨가 그리 좋지는 못합니다.”

6년 동안 음식을 만들어 먹느라 이것저것 요령을 터득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간단한 수프나, 스튜, 빵을 만드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황제 폐하의 식사를 만들기엔 엄청 부족했다.

“상관없어.”

무심한 대답과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이 주는 거라면 뭐든지 좋으니까.”

“…….”

그릇을 꺼내던 아스텔은 멈칫하며 그를 돌아봤다.

카이젠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자기도 낯간지러운 소리인 건 아는지 조리대에 꺼내놓은 채소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아스텔도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얼른 그릇 쪽으로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고기에 꿀을 바른 이상한 음식을 주면 어쩌려고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음……. 그럼 감자를 씻어주시겠어요?”

아스텔은 불편한 침묵을 깨고 바구니에 담겨 있던 감자를 몇 개 꺼내서 카이젠에게 넘겨줬다.

카이젠은 물을 퍼다가 감자를 하나씩 깨끗이 씻었다.

울퉁불퉁한 감자를 하나 쥐고 작은 먼지도 남지 않게 열심히 씻어냈다.

그 모습이 몹시 진지해서 아스텔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카이젠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웃는 거야? 이렇게 하면 안 돼?”

“아니에요. 잘하시네요.”

하녀가 병사들의 식사를 나눠준 뒤 빵을 가져왔다.

아스텔은 빵을 잘라서 그 안에 양상추와 햄과 치즈를 넣고 소스를 발라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한쪽에서는 감자를 삶았다.

잘 삶아진 감자를 으깨서 버터와 우유를 조금 넣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했다.

포슬포슬하게 부서진 감자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감자 샐러드로 변했다.

부엌 옆에는 작은 식탁이 놓인 식당이 있었다.

원래는 하녀들이 쓰던 식당인데 이 저택의 만찬장은 창고로 변해버린 지 오래라서 세 가족은 언제나 부엌 옆에 있는 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아스텔은 그곳에 음식을 차려놓고 테오르를 불렀다.

“맛있어!”

“정말 괜찮니?”

“응.”

테오르는 샌드위치를 야금야금 베어먹으면서 대답했다.

“옛날에 먹던 거랑 똑같아.”

오랜만에 만든 거라서 좀 걱정했는데 괜찮았나 보다.

감자를 맛보던 카이젠도 조용히 감탄했다.

“맛있는걸.”

“그건 그냥 샐러드인데요.”

“그래도 맛있어.”

어쨌든 먹어주는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었다.

아스텔도 자기 앞에 놓인 음식을 먹었다.

“나 오늘부터 여기서 자면 안 돼? 여기서 자고 싶어.”

테오르는 샌드위치를 하나 먹어치운 뒤 아스텔을 졸랐다.

아스텔은 난감한 얼굴로 테오르를 달랬다.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아스텔은 집 안을 둘러봤다.

“지금은 겨울이라. 여긴 밤이 되면 너무 추울 거야.”

이 낡은 저택은 겨울이 되면 옷을 껴입어도 몸이 떨릴 만큼 추웠다.

게다가 테오르를 여기서 재우려면 시녀들과 병사들까지 이곳에 머물게 해야 한다.

모두들 멀쩡한 저택을 놔두고 이렇게 낡은 곳에서 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구나…….”

테오르는 몹시 실망한 눈치였다.

그걸 보던 카이젠이 말했다.

“그럼 여기 머무는 며칠 동안이라도 매일 이곳에 와서 놀게 해줘.”

테오르는 그 말에 다시 기운을 차리고 아스텔을 붙잡고 물었다.

“그래도 돼?”

어차피 며칠 동안 외조부의 영지에 머물기로 했으니까.

그동안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이곳에 와서 추억을 새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면 언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 그럼 밤에는 할아버지 저택에 가서 자고 내일 다시 오자.”

“응!”

테오르는 기뻐하면서 다시 블린과 함께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잘됐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 * *

아스텔은 식사를 끝내고 나서 식기를 치우고 부엌을 정돈했다.

어느새 창문 밖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일행은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쯤 문제가 발생했다.

“눈이…….”

창문 너머로 하얀 눈송이가 보였다.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새하얀 눈꽃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아스텔은 놀라서 황급히 짐을 챙겼다.

“이런, 빨리 출발해야겠어요.”

카이젠은 그녀가 서둘러서 출발 준비를 하는 걸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눈이 내려도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어.”

“아뇨.”

그건 수도나 따뜻한 서남부의 이야기지.

이곳은 동부였다.

동부의 눈은 내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허리춤까지 쌓여 버린다.

일행은 최대한 빨리 출발했다.

원래는 방을 정리하고 짐도 챙겨갈 생각이었지만 눈을 보는 순간 짐이고 뭐고 단념하고 옷만 걸쳐 입고 마차에 올랐다.

짐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눈이 그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까.

카이젠은 아스텔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아스텔의 요구대로 즉시 일행을 출발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하지만 아스텔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문 너머를 살폈다.

눈이 좀 그치면 괜찮으련만 불행히도 가면 갈수록 눈발이 거세졌다.

‘이대로면 도착하기 전에 눈 때문에 길이 막힐 것 같은데.’

얼마 달리지 못하고 예상대로 문제가 생겨났다.

길이 얼어붙어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시야도 문제였다.

어두운 밤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눈송이가 시야를 가렸다.

새카만 밤길이 온통 하얗게 뒤덮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폐하. 이대로는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책임자로 따라온 근위 기사가 난처한 낯으로 보고했다.

“눈이 이렇게 심하니 어쩔 수 없겠지.”

카이젠도 낭패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잠시 멈추고 눈이 그치고 날이 새길 기다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굉장히 고생스러운 방법이 될 것이다.

병사들이 눈 속에 파묻혀서 동상에 걸릴 수도 있고.

‘이미 한밤중인데.’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테오르가 이미 마차 안에서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노느라 피곤했는지 출발하고 얼마 못 가서 곤히 잠들었다.

이 상황을 인지했으면 겁을 먹었을 텐데 차라리 잠들어 버려서 다행이었다.

“근처에 머물 곳이 있어요.”

아스텔은 창문을 조금 열고 카이젠에게 말했다.

“이 주변에 지주의 집이 있어요. 농가지만 튼튼한 집이고 마구간도 있으니까 잠시 들려갈 수 있을 거예요.”

이 일행이 모두 묵어가기엔 좁을 것 같지만 지금은 선택지가 없다.

이 근처에 제일 가까운 곳은 그 집뿐이었다.

한밤중에 찾아가서 주인에게 폐를 끼치는 게 미안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 그리로 가지.”

아스텔은 길을 말해줬다.

마차는 몇 분 더 대로를 달려가다가 샛길로 빠졌다.

샛길의 끝에 다다르자 마구간과 축사가 딸린 작은 이층집이 나왔다.

일행이 도착하는 순간 조용하던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스텔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던 늙은 주인이 황제 일행을 맞이하러 달려 나왔다.

“제, 제 집에 들려주셔서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눈이 너무 심해서 잠시 신세를 져야겠군.”

집 안에는 늙은 주인과 일꾼 두 명이 전부였다.

주인은 허둥지둥 일행의 잠자리를 마련했다.

병사들과 하녀를 위한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비어 있는 방을 전부 치웠다.

방이 부족해서 창고를 치우고 담요와 짚단으로 침대를 만들었다.

아스텔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우리 때문에 수고가 많네요.”

“아, 아닙니다. 황후 폐하.”

주인은 황제 부부와 황태자를 위해서 침실 옆에 딸린 작은 창고 안에 아이들용으로 만든 조그만 침대를 가져다 놓았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그곳에 눕혔다.

테오르는 침대에 눕히는데도 눈을 뜨지 않고 칭얼거리기만 했다.

“완전히 잠들었어.”

테오르를 토닥여서 다시 재운 뒤, 아스텔은 옆에 있는 침실로 들어왔다.

작은 방이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작은 침대와 간소한 나무 옷장. 테이블과 의자까지.

벽난로에는 장작이 가득해서 방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그런데 유일하게 문제가 있었다.

‘소파가 없네.’

침대 말고는 잘 수 있는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그…….”

아스텔은 잠시 고민하다가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반응을 오해한 주인이 아스텔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방이 너무 누추해서…….”

방이 안 좋다고 불평을 하려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방은 괜찮아요.”

아스텔은 황급히 그를 달랬다.

“방이 아늑하군요. 세심하게 살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여, 영광이옵니다. 황후 폐하.”

주인은 칭찬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긴장해서 버벅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소파를 가져다 달라고 하면 정말 이상하겠지.

아스텔은 소파를 단념하고 외투를 내려놓았다.

‘테오르와 함께 자겠다고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침대 크기를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방 안에 있는 침대는 둘이 자기에도 불편할 만큼 작았다.

테오르가 잠든 침대보다 겨우 두 배쯤 될까.

테오르가 누워 있는 침대는 주인의 아들이 어릴 때 쓰던 침대라고 했다.

아스텔은 주인을 내보내고 하녀가 데워온 물로 몸을 닦고 드레스 대신 주인이 가져다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주인의 아내가 입던 평범한 하얀 튜닉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엔 시중을 들어준 하녀를 내보냈다.

“너도 피곤할 텐데 방에 가서 쉬렴.”

잠시 후에 카이젠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테오르는?”

“옆방에요. 완전히 잠들었어요.”

테오르의 침대 밑에는 블린이 담요를 깔고 누워있었다.

둘 다 지친 건지 차분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밖으로 나갔던 하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따뜻하게 데운 술과 고기 파이입니다.”

하녀는 두 사람 옆에 있는 테이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술잔과 투박한 나무 그릇에 담긴 먹음직스러운 파이를 내려놓았다.

“주인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 별로 허기가 생기지 않았다.

점심때 남은 샌드위치를 다 먹어서 그런가.

카이젠은 음식 대신 술잔을 들었다.

아스텔도 술잔을 입에 댔다. 따뜻하게 데워진 술이 추위를 녹여주었다.

카이젠은 그녀를 보면서 웃었다.

“이런 경험을 하니까 정말 여행을 온 것 같군.”

“괜히 평범한 농민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데요.”

물론 카이젠이 충분히 보상은 해주겠지만.

그래도 민폐는 민폐였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어두운 밤하늘이 보였다.

밖에는 여전히 끊임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일행이 달려온 샛길은 눈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내일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군. 이대로 갔으면 정말 눈에 가로막혀서 길에서 밤을 새울 뻔했어.”

아스텔은 카이젠의 말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카이젠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파이와 창문가를 배회하다가 다시 아스텔에게 돌아왔다.

“여기는 매년 이랬어?”

“눈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내년 이 정도로 많이 내립니다.”

가끔은 세 식구도 집 안에 고립될 때가 있었으니까.

다행히 매년 겨울 준비를 열심히 해놓아서 장작을 태우면서 기다릴 수 있었다.

어린 테오르는 오히려 집에 눈에 파묻혀서 갇히는 걸 재미있어했고.

“오늘 당신이 테오르와 함께 살던 집을 보고 놀랐어.”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의 아늑한 침묵을 깨뜨렸다.

아스텔은 술잔을 내려놓고 그를 향했다.

카이젠은 벽난로에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었다.

“힘들게 산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다 지난 일인데요.”

아스텔은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나름 즐거웠어요.”

가난하고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편안한 삶이었다.

공녀로 살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여러 가지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이곳에 돌아오고 싶어?”

아스텔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카이젠의 진중한 시선이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가끔 이곳에 오고 싶으면 그렇게 해. 황후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아도 돼. 그 집을 수리하고 증축해서 별궁으로 만들고 황가의 휴양지로 삼으면 되니까.”

“여기는 외조부님의 땅인데요.”

“내가 후작에게 부탁하지.”

외조부님한테 부탁해서 영지 일부를 사겠다는 뜻인가 보다.

“괜찮습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어떠했든 과거일 뿐이다.

추억은 추억으로 놔두는 게 좋다.

“이곳이 그리우면 가끔 외조부님의 영지를 방문하면 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공사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이제는 황궁에서 남은 삶을 살기로 했으니까.

팔걸이 위에 놓인 아스텔의 손에 굳은살이 박인 따스한 손이 내려앉았다.

아스텔은 시선을 들고 카이젠을 향했다.

타오를 듯이 강한 눈빛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카이젠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열 살 때의 첫 만남 이후 16년.

카이젠을 만난 지 벌써 그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 남자와의 관계도 부서진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는 행복했던 기억도 있고 슬프고 힘겨웠던 일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 아스텔은 모든 기억을 놔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폐하.”

아스텔도 손을 들어서 그의 단정한 뺨에 손을 댔다.

벽난로에서 나온 따스한 불빛이 단호한 선을 그려내는 뺨과 턱선에 가벼운 온기를 더했다.

아스텔을 바라보는 어둑한 눈빛에 위태로운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아스텔.”

카이젠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아스텔은 그의 붉은 눈동자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천천히 다가온 카이젠이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첫 키스는 아니었다.

이미 두 사람은 첫날밤도 지냈으니까.

약혼 기간에도 생일날에 가볍게 키스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키스는 난생처음이었다.

조용한 방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스텔은 한참 동안 카이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창밖에서 내리는 눈이 밤새 창틀을 소복하게 채웠다.

* * *

날이 밝기도 전에 일행을 찾아온 기사들이 농가에 도착했다.

외조부의 저택에 남아 있던 근위대 기사들과 병사들이었다.

일행이 밤늦도록 도착하지 못하자 외조부가 구조대를 보낸 모양이었다.

아스텔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하얀 새벽빛이 방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창틀에 쌓인 눈이 아침 햇살을 받아 맑게 빛을 냈다.

옆에 누워 있던 카이젠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제 돌아가야겠군.”

익숙한 온기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아스텔은 가만히 미소 지으면서 그에게 몸을 돌렸다.

“네, 폐하.”

이제는 정말 돌아갈 시간이었다.

아스텔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카이젠이 손을 들었다.

그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돈해 주었다.

“……당신 괜찮은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에 걱정과 함께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스텔은 귓가에 닿는 그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면서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아요.”

일행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외조부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온통 눈 천지였다.

병사들이 일찍부터 눈을 치워놓지 않았으면 마차도 움직이지 못할 뻔했다.

저택의 마당에도 병사들과 하인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폐하!”

저택에 도착하자 외조부가 세 사람을 맞이하러 달려 나왔다.

“할아버지!”

아스텔과 카이젠이 후작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테오르가 먼저 활기차게 뛰어가서 외할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외조부는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두 사람을 살폈다.

셋 다 무사한 걸 보고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 분 모두 무사하시군요. 밤새 소식을 알아보면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해요. 눈이 너무 심해서 연락을 보낼 수가 없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라도 연락을 보내고는 싶었지만.

눈 속에 연락병을 내보냈다가 길을 잃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근처에 농가가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길에서 밤을 새울 뻔했어.”

아스텔도 카이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농가의 주인에게는 떠나기 전에 몇 차례 감사 인사를 하고 사례금을 주고 왔다.

외조부는 아스텔을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황후 폐하, 피곤해 보이십니다.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해 놨으니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피곤해 보인다는 말에 아스텔은 조금 당황했다.

외조부의 눈에는 눈 속에서 고생하느라 지친 것처럼 보이겠지만.

‘…….’

아스텔은 슬쩍 카이젠을 돌아봤다.

카이젠의 무덤덤한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지친 사람은 아스텔 혼자뿐인 듯했다.

어젯밤의 일을 상기하자 저절로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아스텔은 간밤의 기억을 잊어버리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때 테오르가 외조부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활기찬 얼굴로 물었다.

“집에 가서 재미있었어. 오늘도 또 가면 안 돼요?”

“눈 때문에 무섭지 않으셨습니까?”

아스텔이 얼른 외조부의 말을 받았다.

“테오르는 잠들어서 눈 오는 걸 못 봤어요.”

“또 가도 돼요? 또 가서 놀고 싶어.”

“오늘은 안 돼. 눈을 치워야 가지.”

카이젠이 외조부에게 매달리는 테오르를 두 팔로 뜯어냈다.

외조부는 그런 테오르를 보며 잔잔히 웃었다.

“대신 저택 뒤에 있는 연못에 갈까요? 얼음낚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근처에서 썰매를 타도 되고요.”

“썰매를 탈래요!”

외조부는 테오르를 다시 받아서 안고 두 사람에게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제가 황태자 전하를 돌볼 테니 두 분은 편히 쉬십시오.”

“고마워요, 할아버지.”

저택에 돌아온 뒤에는 외조부의 말대로 편해졌다.

아스텔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하고 아침 식사를 했다.

카이젠도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휴식을 취하려는 것 같았다.

예전 집에 다녀오는 사이에 외조부는 아스텔과 카이젠의 침실을 따로 준비해 놓았다.

저택에 도착한 첫날밤은 함께 지냈지만 이제는 각자 다른 방에 머물 수 있었다.

테오르는 아침을 먹자마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눈 때문에 멀리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니 오늘은 저택 안에서 여유롭게 보낼 생각이었다.

아스텔이 머무는 방은 외조모가 쓰던 후작 부인의 침실이었다.

당연히 저택 안에서 제일 화려한 거처였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가구들이 휴식실부터 침실까지 이어졌다.

아스텔은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침실을 구경하다가 창문가로 다가갔다.

창문 너머로 눈 덮인 마당과 병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카이젠도 보였다.

언제 씻고 갈아입었는지 다른 옷을 입고 있다.

문득 어젯밤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일 이후 카이젠은 은연중에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아스텔은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충동적이긴 했지만 행복했던 순간이었으니까.

소설에서나 보던 달콤한 신혼 첫날밤 같았다.

‘이미 아이까지 있는데 이런 느낌이라니 우습긴 하지만.’

곧바로 테오르가 깨어나고 함께 이곳으로 오느라 자세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카이젠은 일이 끝나면 이곳으로 오려나.

오늘은 왠지 그와 마주하는 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정신을 돌릴 수 있게 할 일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이것저것 살피고 있는 카이젠과 달리 아스텔 자신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피로가 쌓여서인지 몸이 나른했다.

침실에서 휴식을 취할까 하고 돌아서는데 화장대 위에 놓인 작은 책이 보였다.

“이건?”

방 안에 대기하던 시녀가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의 침실에 있던 물건리라 이곳에 옮겨두었습니다.”

아, 그랬지.

테오르가 어머니의 침실에서 발견한 일기장이었다.

어제 이곳으로 짐을 옮길 때 같이 옮겨두라고 하고 떠났던 기억이 난다.

‘읽어봐도 될까?’

어제는 아무리 친어머니라고 해도 남의 일기를 엿보는 게 미안해서 안 읽고 넣어두기만 했었다.

다시 보니까 궁금하긴 했다.

아스텔 자신은 어머니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으니까.

‘어차피 결혼 전의 일이겠지.’

어머니는 결혼 후에 이곳을 떠났다.

이 일기는 후작 영애 시절의 기록일 것이다.

대단히 비밀스러운 내용이 있지는 않겠지.

정말 숨겨야 할 비밀이 있었으면 일기를 태워 버렸을 테니까.

그 정도로 비밀이면 애초에 일기에 적지도 않겠지만.

‘음…….’

아스텔은 고민하다가 첫 장을 넘겼다.

어제도 몇 군데 훑어봤지만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드레스를 사고 다과회에 다녀오고 수도에서 장신구나 생활용품을 주문하고 저녁 식사에 누가 방문했고…… 하는 얘기가 끝없이 반복되었다.

몇 장을 읽으면서 아스텔은 어머니를 동정하게 되었다.

‘정말 지루하셨겠네.’

시골 귀족 영애의 삶이란 무료하기 짝이 없군.

하긴 레이디들은 이런 시골에서는 정말 할 일이 없다.

남자 귀족이라면 숲을 돌아다니기라도 할 텐데.

다행히 그런 지루한 생활은 시골 영지를 떠나 수도로 가면서 달라졌다.

수도에 간 뒤에는 무도회나 사교계의 이런저런 사건이 일기에 담겼다.

사건의 주인공들은 아스텔이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대부분 연애나 결투, 불륜 사건 등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간간이 새로운 이름이 나왔다.

에클렌.

“그리 가까워 보이지는 않는데…….”

결혼 전의 연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에클렌 백작의 이름은 정말로 간간이 지나가듯 언급되고 있었다.

‘생각만큼 친했던 관계가 아닌가?’

하지만 곧이어 아스텔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수도를 떠났다.]

다음 페이지에는 그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그리고 며칠 내내 아무런 기록도 없었다.

그동안은 매일매일 한 줄씩이라도 일기를 적어놨는데.

그 문장 이후로는 아무런 얘기도 없다.

길게 적힌 글보다도 그 쓸쓸한 공백에서 혼란과 슬픔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와의 관계는 일부러 일기에 자세하게 적지 않으셨구나.’

어머니는 누가 이 일기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실제로도 아스텔이 지금 읽어보고 있으니까.

어머니의 생각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한 달여가 지나서 다음 내용이 나왔다.

[없음.]

음? 뭐가 없다는 거지?

또다시 며칠간의 공백.

열흘쯤 뒤에야 다음 내용이 나왔다.

이어지는 문장은 전과 달리 무척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모두를 지킬 수 있을까?]

“…….”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그 부분은 필체도 마구 휘갈겨 써 놓았다.

어머니가 힘들어했던 기록을 보니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그다음부터는 평범하게 하루하루의 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마음을 다잡고 일상에 복귀한 걸까?

아스텔은 천천히 종이를 넘기다가 멈칫했다.

몇 장 뒤에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에스테반이 내게 말했다. 내가 사령부의 기록을 훔친 걸 알고 있다고.]

뭘 훔쳤다고?

아. 에클렌 백작은 전투 중의 문제로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

어머니는 그의 결백을 밝히려고 기록을 훔친 모양이다.

짧은 문장이 이어졌다.

[그가 내게 청혼했다.]

……뭘 했다고?

[그와 결혼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반대하지만 결국엔 허락하실 거다.]

“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정리하자면 어머니는 에클렌 백작을 위해 군부의 자료를 훔쳐낸 건가.

그런데 그 일을 가지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협박했고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결혼한 거고.

‘그렇다고 결혼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느껴졌지만 아스텔은 이내 이해했다.

하긴 걱정됐겠지.

사교계에서 손가락질당하고 외조부도 수치스러워했을 테니까.

게다가 상대는 재상의 아들인 젊은 소공작이었다.

어린 후작 영애가 상대하긴 힘들었으리라.

‘안타까운 일이네.’

이런 선택을 해버린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뒤에는 평범하게 결혼식 준비 얘기가 나와 있었다.

아버지가 외조부에게 잘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뭐 그런 내용도 나왔다.

아스텔은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멈칫했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도. 그 사람도 연녹색 눈이니까]

일기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아스텔은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었다.

그 사람도 연녹색 눈이라고.

얼핏 보면 헤어진 연인과 비슷해서 정감이 간다는 뜻처럼 보인다.

‘단순히 눈 색이 비슷하다고 자기를 협박해서 결혼을 강요하는 사람에게 정감을 느낄 리는 없잖아?’

조금 이상하다.

아스텔은 어머니의 일기를 다시 천천히 넘겨봤다.

문득 앞 페이지의 기록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없음.]

그리고 그다음 이어진 당황스러운 문구.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모든 걸 지킬 수 있을까?]

단순히 연인이 쫓겨나서 곤란해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조금 느낌이 미묘했다.

‘마치…… 임신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인데.’

하지만 아스텔은 물론이고 프리츠 오빠도 분명히 아버지의 자식이다.

무엇보다 프리츠 오빠는 분명히 결혼 이후에 생긴 아들이었다.

“아스텔?”

익숙한 목소리에 아스텔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카이젠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카이젠은 어이없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노크 소리도 못 듣고.”

일기장에 집중하고 있다가 못 들은 모양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스텔은 일기를 덮어서 화장대 서랍에 넣어두었다.

‘약점을 잡고 결혼을 강요하다니.’

딱 아버지가 할 만한 짓인 것 같긴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죽어버려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신 괜찮아? 피곤해 보이는군.”

카이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아스텔은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스텔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혹여라도 독이…….”

카이젠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수만 번쯤 대답한 것 같지만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하긴 이곳에 오는 내내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남부의 산맥에 있는 재배지는 아직도 준비 중이었다.

이제 곧 약초를 재배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카이젠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고 언제나 건강해 보였다.

그래도 아스텔은 카이젠이 걱정스러웠다.

“아스텔.”

카이젠은 머뭇거리다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새 두 사람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깝게 밀착되었다.

아스텔은 귓가가 붉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카이젠의 근사한 외모와 강인해 보이는 단단한 체구를 마주하고 있으니 뒤늦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의 기억 때문이었다.

카이젠은 말없이 아스텔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흰 눈처럼 창백한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가 걱정스럽게 눈가를 찌푸렸다.

“장작을 더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당신 추워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아스텔은 그의 지나친 염려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불을 더 지피긴 해야겠네요. 테오르는 분명히 눈에 푹 젖어 돌아올 테니까요.”

테오르는 외조부와 함께 저택 뒤편으로 놀러 나갔다.

마당은 병사들이 눈을 치워서 괜찮지만 뒤뜰에는 온통 눈 천지일 것이다.

보나마나 눈에 푹 빠져서 돌아오겠지.

“후작이 고생하겠군.”

카이젠도 같은 생각인지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잠시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보며 미소만 주고받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카이젠은 아스텔의 손등 위에 살짝 입술을 댔다.

차갑게 식은 손등 위에 메마른 입술이 따뜻하게 와 닿았다.

“어제 일을 후회해?”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당장에라도 사그라들 것처럼 가느다란 떨림을 담고 있었다.

카이젠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였다.

어제 일을 겪고도 계속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니.

조금 어이없기도 하고 그 정도로 확신을 주지 못했나 미안하기도 했다.

하긴 결혼 후 한참 동안 남보다 못한 사이였으니 카이젠이 불안할 만도 했다만.

아스텔은 가만히 웃으며 두 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넓은 품 안에 안기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카이젠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여러 가지 복잡한 기분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감정이 애정이라는 큰 틀 안에 점차 하나가 되었다.

아스텔은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대면서 가장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결국 그게 정답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아스텔 자신은 이제 카이젠을 사랑하는 걸 후회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을 들은 카이젠이 아스텔의 몸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차갑게 식은 목덜미에 따스한 숨결이 닿았다.

“사랑해, 아스텔.”

아스텔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카이젠이 한 손으로 아스텔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창백한 피부에 연분홍색의 홍조가 감돌았다.

봄의 새싹 같은 연녹색 눈이 진심 어린 애정을 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붉은 입술에 키스했다.

사탕처럼 가볍고 달콤한 짧은 키스였다.

* * *

작은 썰매가 눈 덮인 평평한 들판을 쏜살같이 내려왔다.

눈 위를 미끄러지던 썰매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더니, 언덕을 반쯤 내려올 때쯤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뒤집혀 버렸다.

썰매에서 떨어진 테오르는 눈밭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테오르!”

곁에 있던 후작이 놀라서 달려갔다.

눈덩이 속에서 작은 머리가 튀어나왔다.

“할아버지 나 괜찮아요!”

테오르는 눈을 뒤집어쓰고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다행히 옷을 두껍게 입어서 조금도 다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연하게 일어나 앉아서 장갑 낀 손으로 머리에 묻은 눈을 툭툭 털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하얀 눈이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이런……. 조심해야지.”

후작은 고개를 내저으며 테오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두꺼운 옷에 묻은 눈을 손으로 털었다.

“저택으로 돌아갈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지만 옷이 눈에 조금 젖었다.

저택에 가서 옷을 갈아입자고 설득하려는데 테오르가 애처롭게 애원했다.

“조금만 더 놀고 싶어요. 할아버지, 나랑 조금만 더 놀아요.”

“네 어머니가 기다릴 텐데.”

“엄마는 아빠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테오르는 큰 썰매를 낑낑대며 끌고 왔다.

“엄마 아빠는 이제 화해했어요.”

“그래?”

후작은 테오르의 썰매를 대신 끌어주면서 저택 쪽을 힐끔거렸다.

“요새는 사이가 좋긴 하지.”

가을에도 아스텔과 황제는 사이가 좋았다.

그때는 갓 연애를 시작해서 서로를 위해주는 연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반면 지금, 한두 달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진짜 부부 같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시 만난 아스텔도 그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카이젠을 보는 아스텔의 눈빛 속에는 진정 어린 애정이 감돌았다.

“너는 여전히 폐하가 좋으냐?”

후작이 조용히 묻자 테오르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엄마 아빠 둘 다 좋아요.”

후작은 웃으면서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눈밭에 뒹굴고 옷이 눈에 푹 젖은 뒤에야 후작은 테오르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녀들이 테오르를 따뜻한 물로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히러 데려갔다.

후작도 자신의 침실로 돌아와서 눈이 묻은 옷을 갈아입었다.

새 옷을 입고 다시 나가려고 하는데 아스텔이 미안한 낯으로 후작의 방에 찾아왔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테오르 때문에 고생하셨죠?”

아스텔은 시녀에게 따뜻한 차를 내오게 하고 외조부와 마주 앉았다.

“아니야. 오랜만에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외조부는 남들이 볼 때는 깍듯하게 대했지만 여전히 단둘이 있을 때는 말을 편하게 했다.

아스텔도 그편이 훨씬 좋았다.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황후가 아니라 그냥 조부와 손녀로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테오르가 기다릴 텐데.”

외조부가 창문가를 내다보며 말했다.

아스텔은 웃으면서 할아버지를 달랬다.

“테오르는 걱정 마세요. 폐하께서 밖에 데려가시려나 봐요.”

카이젠은 할아버지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으니 오후에는 자기가 테오르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했다.

이를테면 교대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둘이 얼음 연못을 보러 간다고 했으니 저녁 먹을 때쯤이나 돌아올 듯했다.

“따뜻한 차를 준비해 놨어요.”

아스텔은 시녀가 가져온 찻잔에 차를 따랐다.

하얀 찻잔에 독특한 향을 풍기는 따뜻한 약차가 가득 찼다.

차를 맛본 외조부가 감탄하듯 말했다.

“향이 정말 좋구나. 이건 처음 보는 차인데.”

“그레텔이 새로 만든 약차예요. 할아버지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건강에 좋은 약차를 새로 개발했다고 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가져왔다.

그레텔의 얘기가 나오자 재배소에 대한 얘기도 조금 나왔다.

두 사람은 수도의 일에 대해 이런저런 화제를 주고받았다.

찻잔을 반쯤 비웠을 때쯤 아스텔은 조용히 외조부에게 물었다.

“저, 할아버지.”

“음?”

“혹시 어머니가…….”

물어보지 않는 게 좋을까?

그래도 아스텔은 막연하게라도 진상을 파악하고 싶었다.

“혹시 어머니가 프리츠 오빠를 낳기 전에 아이를 가지신 적이 있었나요?”

외조부는 눈을 크게 뜨고 아스텔을 바라봤다.

“그걸 어디서 들은 거냐?”

“일전에 어머니의 일기를 우연히 봤어요.”

어디서 봤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일기에 그런 내용도 적혀 있었어?”

“자세히 적혀 있지는 않았는데 그런 암시가 있어서요.”

“흐음.”

외조부는 잠시 시선을 내리고 무거운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결혼 직후 임신했는데 안타깝게도 달을 채우지 못하고 유산됐다.”

아스텔은 충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미 예상한 대답이긴 했지만 직접 확인하니 나름대로 충격적이었다.

“좋은 일이 아니라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예전에는 그런 일을 부인의 책임으로 봤으니까.”

“그랬군요.”

아스텔은 어머니가 왜 아버지와 결혼했는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아이를 임신한 채 아버지하고 결혼했구나.’

임신한 걸 들키면 아이는 물론이고 에클렌도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사생아를 낳는 게 죄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명문가의 영애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남녀와 아이, 그리고 주변 가족들까지 모두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외조부도 에클렌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결혼해서 남편의 아이로 속이는 방법밖에 없었겠지.’

부도덕한 일이지만 어머니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눈 색이라도 비슷해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던 것이리라.

애초부터 공작가의 아이로 속일 마음을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는 유산된 거고.’

그리고 얼마 후에 에클렌 백작은 누명을 벗고 수도로 돌아왔다.

아이를 지키려고 아버지와 결혼했던 어머니는 결국 아이도 잃고 사랑하는 연인도 잃고 말았다.

안쓰러운 감정과 함께 동질감이 느껴졌다.

어머니와 자신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아이를 지키려고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는 점에서.

그러나 슬프게도 어머니의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에클렌 백작에게 말해줘야 하나.’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갔지만 아스텔은 스스로의 생각을 일축했다.

그것은 감히 제삼자인 자신이 할 일이 아니었다.

에클렌 백작은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머니가 일부러 말하지 않았겠지.’

알아봤자 슬퍼하고 자책할 뿐이다.

굳이 말해줘서 상처를 남겨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아스텔은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어머니도 말하지 않은 걸 자신이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외조부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다가 다시 물었다.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 일기는 공작가의 저택에서 본 거냐?”

프리츠가 공작이 됐으니 그곳에 갔다가 본 건가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네, 궁금해서 할아버지한테 여쭤보고 싶었어요.”

마찬가지로 외할아버지에게도 이 일을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머니도 외조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못한 것일 테니.

어머니의 뜻을 존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스텔은 창문으로 시선을 주면서 말을 돌렸다.

“테오르가 여기를 정말 좋아하네요.”

“테오르는 원래 여기를 좋아했지.”

“할아버지는 겨울이 지나면 수도로 돌아오실 거죠?”

“그래. 돌아가기로 약속했으니까 가야지.”

겨울에는 영지를 관리하느라 이곳에 머물겠지만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는 소리였다.

외조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스텔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는 진짜 부부처럼 살게 된 거냐?”

차를 마시던 아스텔은 당황해서 찻잔을 놓칠 뻔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외조부는 아스텔이 당황하는 걸 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나도 눈치가 있다.”

아스텔은 민망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괜히 다른 방을 준비했구나.”

“놀리지 마세요.”

외조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젓다가 다시 아스텔을 향했다.

그러고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너는 정말 행복한 거냐?”

전에도 이런 비슷한 질문을 받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정말 확신을 갖고 대답할 수 있었다.

지난 16년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일을 잊을 수 있을 만큼 행복했으니까.

“네, 저는 행복해요.”

일행은 보름 가까이 외조부의 저택에 머물렀다.

아스텔도 무척 즐거웠지만 나중에는 너무 오래 있어서 할아버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외할아버지는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고 황제의 일행을 부족함 없이 대접했다.

다행히 그 후로는 첫날처럼 폭설이 내리는 일은 없었다.

테오르는 길에 쌓인 눈을 치우자마자 매일 예전 집에 가서 놀았다.

아스텔도 저택에서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테오르를 따라 카이젠과 함께 날마다 그곳을 방문했다.

세 사람은 익숙한 마당에서 함께 놀면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떠나기 전 마지막 날에도 세 사람은 함께 예전 집에 갔다.

그날은 외조부도 함께 왔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이대로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은데.”

“너무 오래 폐를 끼쳤는데요. 이제 돌아가야지요.”

“돌아간다고 하니 섭섭하구나.”

아스텔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곳에서 떠나는 것도 아쉽고 외조부와 잠시 동안 이별하는 것도 아쉬웠다.

그래도 아스텔은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봄에 다시 만날 텐데요.”

그리고 이 집도.

이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아스텔은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해서 마차에 싣고 난 뒤, 마당에서 놀고 있는 테오르와 카이젠에게 돌아왔다.

“둘 다 너무 무리하네요. 잠시라도 좀 쉬세요.”

카이젠과 테오르, 그리고 블린까지 셋이서 눈이 쌓인 마당에서 공을 차고 놀고 있었다.

“테오르가 힘들어하면 잠시 쉬려고 했는데.”

도통 힘들어하질 않는다고 카이젠은 고개를 내저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테오르는 블린과 함께 마당 뒤편으로 뛰어가 버렸다.

“가끔은 나보다 테오르가 더 건강한 것 같군.”

“많이 피곤하세요?”

아스텔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카이젠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당신은?”

아스텔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고 손수건을 꺼냈다.

카이젠의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을 닦아주었다.

“피곤하긴 해도 이곳에서는 워낙 편안하고 즐겁다 보니 힘든 것도 모르겠어요.”

이래서 다들 밖으로 놀러 나오나 보다.

즐거울 때는 피곤한 것도 힘든 것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비록 저택에 돌아가면 셋 다 피곤해서 뻗어버리지만.

저녁 무렵이 되자 어느새 해가 산자락 너머로 기울어졌다.

노을이 지는 작은 정원엔 두 사람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지붕에 쌓인 하얀 눈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아스텔은 노랗게 물든 눈송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 끗만 잘못됐으면 이런 행복은 없었을 것이다.

외조부와 그레텔의 도움과 아스텔 자신의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이곳에서 6년은 버텨냈지만,

그 후에도 이렇게 잘 풀어낼 수 있었던 건 카이젠의 인내와 애정 덕분이기도 했다.

석양이 저무는 걸 바라보던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돌아갈까?”

아스텔은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네, 폐하.”

이번에는 정말 기쁘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 *

수도의 봄은 동부보다 훨씬 빨랐다.

아스텔이 수도에 돌아온 지 한 달쯤 지나고 나자 얼음이 녹고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그해 봄은 유난히 평온한 행복 속에 지나갔다.

“테오르. 다른 데를 보지 말고 조심해야지.”

아스텔은 창문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의 마당에서 조랑말을 타고 다니던 테오르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 난 괜찮아요. 내 말은 아주 착해.”

“그래도 고삐를 꼭 잡고 있어야 해.”

테오르는 추위가 가시자마자 본격적으로 승마 연습을 시작했다.

테오르를 지켜보던 세르벨이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의외로 조심성이 있으셔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요?”

하긴 여태까지 말에서 떨어진 적은 없다만.

“활달하게 움직이셔도 늘 크게 다치지는 않게 조심하시는 게 보입니다. 신중한 성격을 타고나신 것이지요.”

세르벨은 테오르가 아스텔을 닮아서 그렇다는 듯이 말했다.

‘하긴 카이젠은 자신의 몸이 다치는 것도 개의치 않는 성미지.’

어쨌든 테오르가 신중한 성격을 타고났다면 좋은 일이었다.

세르벨은 지난번 사건 이후로 아스텔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카이젠은 여전히 조금 불편한 눈빛이었지만 굳이 뭐라고 하진 않았다.

아스텔은 미소를 지으며 세르벨에게 물었다.

“백작님께선 건강하시죠? 요즘 못 뵈었네요.”

“예, 겨울 동안 기사단의 새로 편성하는 일로 바쁘셨습니다. 조만간 황후궁에 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겨울에 외가에 가서 봤던 일기가 잠시 기억 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스텔은 그 기억을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어떤 일들은 그냥 시간의 벽 너머에 덮어두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잠시 테오르를 바라보던 아스텔은 문득 생각나서 다시 세르벨에게 물었다.

“혹시 벨리안 경은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받은 적이 있나요?”

“그 친구는…….”

세르벨은 잠시 간격을 두고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힘들다고 매번 기나긴 편지를 보내옵니다만,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군요.”

아스텔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쫓겨 간 거긴 해도 관리로 갔으니 먹고사는 데 문제는 없겠지.

일이 힘들긴 하겠지만.

별일 없으면 된 거지 뭐.

* * *

어느새 봄의 끝 무렵이 지나고 여름의 초입에 들어와 있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좋은 소식도 수도로 돌아왔다.

남부에 나갔던 그레텔도 수도로 돌아온 것이다.

말에서 내린 테오르가 쏜살같이 안으로 달려왔다.

“그레텔 이모!”

그레텔은 테오르를 끌어안고서는 무겁다는 듯이 끙끙댔다.

“황태자 전하, 못 보던 사이에 정말 많이 자라셨네요.”

“그레텔 이모, 보고 싶었어.”

테오르는 그레텔에게 매달려서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레텔은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가지고 온 약병들을 꺼내놓았다.

남부 산맥에 약초 재배지가 완성된 뒤, 그레텔은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다행히 재배는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의외로 금방 꽃이 피어나서 다행이에요.”

그레텔은 그렇게 말하며 겨우내 재배한 해독초로 만든 약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산맥에서 약초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레텔은 남부에 가 있는 동안 많이 힘들었는지 살이 쪽 빠지고 피곤한 모습이었다.

아스텔은 약병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그레텔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그레텔.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어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게다가 황제 폐하를 치료하는 일인데요.”

그레텔은 손사래를 치며 밝게 웃었다.

아스텔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빠도 같이 온 거죠?”

“네, 공작님께서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프리츠는 재배지를 확인하기 위해 얼마 전에 그레텔을 찾아갔다가 함께 돌아왔다.

“폐하께서는 좀 어떠세요?”

“예전하고 똑같아요.”

카이젠은 여전히 멀쩡해 보였다. 아픈 데도 없고 딱히 피로를 느끼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스텔은 곧바로 카이젠에게 이곳으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잠시 후에 카이젠이 도착했다.

그도 그레텔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레텔 양, 오랜만이군.”

“폐하를 뵙습니다.”

카이젠은 그레텔이 가져온 약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레텔은 카이젠에게 매일 한 병씩 약을 마시게 했다.

일주일 동안 일곱 병을 마신 뒤에야 그레텔은 카이젠을 진찰했다.

다행히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진찰한 결과 독이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어요.”

“그게 정말인가요?”

“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대로 계속 치료하다 보면 조만간 독성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사라질 것 같네요.”

아스텔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폐하, 정말 다행이에요.”

아스텔이 너무 감동해서 눈물까지 글썽이자 카이젠은 오히려 당황하면서 그녀를 달랬다.

“전부 그레텔 양과 당신 덕분이야. 그레텔 양에겐 뭐든 사례를 해주고 싶군. 원하는 걸 말하게.”

“가,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 그럼 일단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스텔은 정말 깊이 안도했다.

카이젠은 그녀의 눈가에 스며 나온 눈물을 닦아주면서 핀잔을 줬다.

“나보다 당신이 훨씬 걱정이야. 당신은 매일 피곤해 보여. 몸도 나날이 말라가고 있다고.”

아스텔은 눈물을 훔치고 얼른 말을 돌렸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일이 많아져서 그런가 봐요.”

“행사 준비 같은 건 한나에게 맡기라니까.”

아스텔은 웃으며 그를 살짝 밀어냈다.

“괜찮으니 이제 그만 황제궁으로 돌아가세요. 아직 업무가 안 끝나셨잖아요.”

카이젠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그레텔도 곁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지 결국 물러났다.

아스텔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저녁에 돌아올게.”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스텔은 그를 돌려보낸 뒤 짐을 챙기고 있는 그레텔에게 다가갔다.

“그레텔. 잠시 내가 부탁할 일이 좀 있어요.”

“네? 무슨 일인데요?”

아스텔은 그녀에게 조용히 사정을 말했다.

그레텔은 흔쾌히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침 제게 확인할 수 있는 약이 있어요.”

문득 아스텔은 그레텔이 왜 그 약을 가지고 다니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또 뭔가 실험하려는 건가 싶어서 굳이 묻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레텔은 돌아갔다.

아스텔은 창문가에 가만히 앉아 화초로 가득 찬 정원을 바라보았다.

향긋한 꽃과 푸른 잎사귀들이 정원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6년 전, 처음으로 테오르의 존재를 알고 혼란과 두려움을 느꼈던 순간.

아이를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시골로 도망쳐야 했던 기억들이.

당시에는 테오르의 존재에 감사하고 기뻐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스텔은 자신의 아랫배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아직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없이 기쁘게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뻐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카이젠이 다시 돌아온 건 해가 저문 뒤였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테오르를 찾으러 갔다.

테오르는 오늘도 정원에 나가서 놀고 있었다.

테오르를 보고 난 뒤 카이젠은 아스텔을 찾았다.

“황후 폐하께서는 서재 안에 계십니다.”

“이 시간에 아직도?”

해가 저물었는데 왜 아직도 서재에 있는 걸까.

아침부터 피곤해 보이던데 좀 쉬라고 했건만.

카이젠은 아스텔을 만나러 서재로 들어왔다.

방문을 열자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 아스텔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스텔?”

카이젠은 아스텔을 의아하게 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텔은 천천히 그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카이젠이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걱정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인데?”

아스텔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아이가 생긴 것 같아요.”

카이젠이 걸음을 멈췄다.

아스텔은 미소를 지으며 아랫배에 손을 댔다.

몸의 이상을 느낀 건 며칠 전이었다.

의사를 불러보려고 했는데 마침 그레텔이 와서 그녀에게 부탁할 수 있었다.

아스텔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시의의 진찰을 받기 전에 그레텔에게 먼저 검사를 받았어요. 임신이 확실하다고 해요.”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그녀는 카이젠의 시선을 피했다.

괜히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카이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긴 했다.

‘기뻐하겠지?’

두 사람은 깊은 애정을 나누고 있었다. 카이젠은 테오르도 무척 사랑했다.

분명 카이젠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차가운 붉은 눈동자가 멍하니 굳어져 있는 게 보였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지?’

의문을 느끼려는 찰나에 카이젠이 두 팔로 아스텔을 와락 끌어안았다.

“폐, 폐하?”

당황한 아스텔이 그를 불렀다.

그 순간 가볍게 떨리는 낮은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고마워, 아스텔.”

그 짧은 한마디에는 절절한 진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그녀를 소중하게 감싸 안는 손길에서 깊은 애정과 애틋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스텔은 말없이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행복한 순간을 공유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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