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정리
세르벨은 정색하면서 벨리안의 말을 반박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황후 폐하는 이번 일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분은 황궁을 관리하고 황제 폐하를 간호하신 게 전부야.”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친구인 벨리안에게 면박을 줬다. 마음속으로는 조금은 당혹스러운 기분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황후 폐하를 보호해 드려야 하니까.’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였다.
이번 일을 절대 황후와 연관 짓지 않는 것.
‘그러려면 공작가와의 연관성을 최대한 감춰야 하고.’
그래서 황제 폐하는 이번 사건의 주범인 레스턴 공작도 감금해 두기만 하고 방치하고 있다. 아마도 사건이 조금 잠잠해지면 적당히 죽여서 없애실 생각이신 듯하다. 지금 갑자기 공작이 죽으면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세간의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하지만 너는 황후에게 보고하고 수도로 왔잖아?”
“그야 당연히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의 업무를 대행하고 계셨으니까.”
세르벨은 계속 벨리안의 말을 반박하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앞서 말했다시피 내가 수도로 돌아온 건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결정한 일이야. 돌아온 뒤에 황후 폐하께 먼저 보고한 건 황제 폐하께서 병환 중이셨기 때문이고. 그때도 황후 폐하께서는 수고했다는 말씀만 하셨어.”
사실 수도 근교에 함정을 파고 공작을 구슬린 건 전부 아스텔의 계획이었지만 세르벨은 차분한 눈빛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래도 벨리안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아니, 그럼 이번 일은 대체…… 늙은 공작님은 왜…….”
세르벨은 단호한 목소리로 벨리안의 말을 잘랐다.
“그야 당연히 황제 폐하께서 병석에 누워 계시니까 몇몇 귀족이 수도를 장악하려고 일을 꾸민 거겠지. 그리고 레스턴 공작님은…….”
세르벨은 폐궁에 갇혀 있는 늙은 공작을 생각하며 말했다.
“소란을 일으킨 귀족 중 몇 명이 레스턴 공작님과 친밀한 관계였으니까. 어쩌면 그분이 이번 일을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서 황궁 안에 모셔둔 거야.”
완전히 관계가 없다고 부정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이다.
원래 거짓말에는 약간의 진실을 섞어서 말해야 상대가 믿어주는 법이니까.
“당연하지만 그 공작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도 관련될 수 있으니까.”
세르벨은 미리 준비해 둔 대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괜한 소리를 못하게 황궁 안에 붙잡아두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 있으셨어. 대외적으로는 이번 일에 관해 증언하기 위해 모셔온 거라고 해뒀고.”
그런 것치고는 너무 심하게 감금해 두고 있었지만 세르벨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벨리안이 레스턴 공작을 만나러 갈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지 않나 싶었다. 벨리안은 세르벨의 설명을 멍하니 듣다가 다시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다. 세르벨은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엄중하게 경고했다.
“더 이상 황후 폐하에 관해 불경한 말을 하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겠어.”
“하……. 알겠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게.”
벨리안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세르벨은 그제야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아냐.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해서 미안해.”
“괜찮아. 나도 정신없이 바빴는걸. 그래도 이번 일이 무사히 지나가서 다행이네. 폐하께서도 무사하셔서 다행이고.”
안 그랬으면 황후가 섭정 황태후가 됐을지도 모르니까.
벨리안으로서는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사소한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벨리안은 뒤돌아서 떠나는 세르벨을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세르벨의 말은 충분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귀족들이 왜 갑자기 수도를 장악할 생각을 했는지.
물론 그 사람들은 요 근래 레스턴 공작과 친했으니까 공작에게 영향을 받아서 황제가 죽자마자 세르벨을 비롯한 황제 쪽 사람들을 없애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황제께서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그냥 덮어두려고 하는 걸 수도 있고.
‘하지만 젊은 공작이 가져온 꽃이나 황후의 곁에 붙어있는 약제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벨리안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무실로 걸어갔다.
어차피 그 약제사를 감시하라고 명령해 뒀으니까 괜찮겠지.
특히 그 여자가 레스턴 가문 사람과 접촉할 때는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엄중히 감시하라고 해뒀다.
* * *
“엄마, 뭘 보는 거야?”
서재에 찾아온 테오르가 테이블 끝에 매달려서 아스텔에게 물었다.
책을 정리하던 아스텔은 잠시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다.
“새로 가져온 책을 정리하고 있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는 두꺼운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전부 약초 재배법에 대한 책이었다. 간간이 산에서 채소를 기르는 법이나 고산지대 농법, 화전을 일구는 법 등의 책도 있었다.
그레텔에게서 약초를 재배하자는 말을 들은 뒤부터 새로 찾아다 놓은 책들이었다.
황후궁의 작은 서재에는 이런 농법에 관한 책은 별로 없었다. 아스텔은 일부러 황제궁의 서고나 외궁에 있는 도서관에 사람을 보내서 약초 재배와 관련된 책을 전부 가져오게 했다.
“이거 무거워…….”
조그만 목소리에 눈을 돌렸더니
반대편에서 테오르가 커다란 약초 재배 사전을 두 손으로 낑낑대며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스텔은 웃으며 얼른 책을 받았다.
“네가 들기엔 너무 무겁지. 이리 줘.”
아스텔은 테오르가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 끝에 올려놓았다. 테오르의 맑은 눈동자가 책의 표지에 적힌 단정한 필기체로 향했다.
작은 손가락이 표지의 글자를 쓸어내리다가 ‘약초’라고 적힌 글자에 멈췄다.
“아빠가 또 아플까 봐 이런 책을 보는 거야?”
“응?”
“이거. 약초책.”
“응. 다시 아프면 안 되니까 몸에 좋은 약초를 기르려고 하는 거야.”
그레텔의 구상은 조금 막연한 생각이긴 했다.
정원이나 온실에서 약초를 길러서 파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런 식으로 산에서 약초를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테오르는 약초책과 아스텔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엄마도 이제 아빠가 좋은 거지?”
“뭐?”
테오르는 어른처럼 한 손으로 턱을 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 아빠는 이제 사이가 좋아진 거 아니야? 엄마도 이제 아빠를 좋아하잖아?”
아스텔은 조금 당황했다.
그간 두 사람의 분위기가 좋아져서 테오르도 기뻐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하게 긍정해 버리면 여태까지는 카이젠을 싫어했다는 뜻이니.
“엄마는 폐하를 싫어하지 않았어.”
유리알 같은 붉은 눈동자가 아스텔을 말똥말똥 올려다본다. 마치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아스텔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동물과 어린아이에게는 본심을 숨길 수가 없다더니.’
동물과 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안다고 했다.
조금 다른 의미긴 했지만 아스텔은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자신도 아이 앞에서 본심을 숨기는 게 어려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르는 그동안 조금 더 자라서인지 점점 더 말을 잘했다. 눈치도 더 좋아진 것 같고 말이지.
아스텔을 빤히 바라보던 테오르가 시선을 내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으응. 알았어. 그래도 이제 사이가 좋아졌으니까.”
“…….”
사이가 좋아졌으니 아스텔의 거짓말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스텔은 손가락으로 테오르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
테오르는 놀라서 피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나는 엄마 아빠가 행복해서 좋아.”
“……그래.”
아스텔도 미소가 스며 나왔다.
어린 테오르는 부모가 사이가 좋아진 걸 보면서 행복해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의 상황을 더 자세히 파악하고 가족들과 얽힌 일도 알게 되겠지.
문득 걱정이 되었다.
언젠가 테오르가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일을 다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도 이렇게 카이젠을 좋아하니까. 나중에 진실을 알게 돼도 크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카이젠이 과거의 일로 테오르에게 미움받는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
카이젠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동안 아스텔은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열렬한 애정은 아닐지 몰라도, 아스텔 자신은 분명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 세르벨 경이 찾아오셨습니다.”
* * *
숙소로 돌아온 그레텔은 문을 잠갔다.
창문도 자물쇠도 몇 번이나 점검을 했다. 혹시 누가 들어왔다가 갔을까 봐 신경 쓰여서 여기저기 자신만 아는 표시도 해놨다.
다행히 누군가가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안도하면서 돌아서려는데 굳게 닫아 걸은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그레텔은 흠칫 놀라서 문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그레텔 양?”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공작님?”
그레텔은 허둥지둥 굳게 닫아걸었던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프리츠가 서 있었다.
“늦은 시간에 약속도 없이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프리츠는 궁정에서 입는 예복 대신 평범한 평상복을 입고 왔다.
“아니에요. 무슨…… 아, 아니 일단 들어오세요.”
그레텔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가 자신이 무려 공작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그를 안으로 들였다.
숙소 안은 여러 가지 책과 그림과 짐가방으로 어수선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차를 내올게요.”
그레텔은 부엌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춰 섰다.
“저는 항상 약초를 넣은 차를 마시는데 괜찮으신가요?”
“예, 괜찮습니다.”
그레텔은 부엌으로 쓰는 작은 방으로 가서 물을 데웠다.
찻잔이라고 할만한 예쁜 도자기 잔이 없어서 평범한 머그컵을 두 개 꺼냈다.
이런 잔으로 공작에게 차를 대접한다니…… 정신이 아찔할 만큼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 전하와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했다만.
찬장 아래에 있는 창문 너머로 이 건물의 입구가 보였다. 입구 앞에는 아무런 문양도 없는 마차가 서 있었다.
프리츠는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이곳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레텔은 불안한 마음으로 찻잎을 채웠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찻잔을 놓고 마주 앉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프리츠가 먼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레텔 양에게 사죄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네?”
“황후 폐하께 들었습니다. 이곳에 침입자가 있었다고요.”
그건 자신이 직접 황궁에 가서 말하긴 했지만.
“그, 그런데 왜 공작님께서 제게 사과를 하시나요?”
프리츠의 단정한 얼굴에 깊은 그늘이 서렸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이번 일은 저희 가문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아.
그레텔은 말없이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하긴 이번 일을 벌인 건 이 공작님의 아버지였다. 아들로서 책임감을 느낄 만도 했다.
부모가 나쁜 사람이라는 건 어떤 기분일까. 분명히 끔찍하겠지.
그레텔의 아버지는 평범한 약재상이었고, 어머니는 약제사였다. 두 분 모두 평범하고 선량한 분들이었다.
“황후 폐하께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오후부터 제 수하들이 이곳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아. 그, 그렇군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수상한 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프리츠는 말끝을 흐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레텔은 문득 깨달았다. 한밤중에 황후의 오빠인 공작이 평복 차림으로 몰래 이곳에 찾아왔다.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궁금해서라도 근처에 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레텔은 눈앞에 있는 이 젊은 공작님도 그걸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레텔은 프리츠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래서 날 만나러 왔구나.’
그레텔 자신에게 직접 사과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아마 보란 듯이 감시자들을 자극하려는 의도인 모양이다. 수상한 사람이 이곳을 감시하고 있다면 의혹을 느껴서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려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늦은 시간에 사과하려고 찾아온 것도 이해가 갔다.
그레텔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위치에서는 공작이 타고 온 마차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건물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이 주변에 공작가분들이 계신 건가요?”
찻잔을 들던 프리츠가 슬며시 시선을 들었다. 그레텔은 솔직하게 물었다.
“공작님이 오신 걸 보면 저를 감시하는 사람들도 근처로 다가올까요?”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프리츠는 그레텔이 두려워한다고 느꼈는지 얼른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제 수하들이 신분을 감추고 주변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손쉽게 붙잡을 겁니다.”
“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요.”
그레텔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를 납치하거나 해치려고 했다면 어젯밤에 했겠죠.”
아닌 게 아니라 그레텔 자신을 죽이려고 했으면 혼자 집 안에 들어온 어젯밤이 제일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집 안을 뒤져본 흔적은 있어도 그녀를 해치려는 괴한은 없었다. 그녀를 감시하는 사람들은 그냥 감시만 하고 있다.
프리츠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용감하시군요.”
그게 용감한 건가 싶었지만 프리츠의 진중한 목소리에는 놀리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레텔은 웃으며 말했다.
“용감한 건 아니에요. 사실 공작님의 사람들이 주변을 지켜준다니까 든든해서 겁이 안 나는 것도 있어요. 감사드립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레텔 양을 지켜드리는 건 저희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레텔 양은 저희 가문의 은인인걸요.”
프리츠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그레텔은 새삼 감탄했다. 그녀도 약제사로서 다른 귀족들을 만나봤지만 미천한 약제사에게 예의를 갖추는 귀족은 별로 없었다. 안전을 생각해 주는 사람들은 더더욱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아스텔과 프리츠 남매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레텔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차는 입맛에 맞으신가요?”
프리츠는 머그컵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더 맛보며 미소를 지었다.
“향이 정말 좋군요. 무슨 차인가요?”
“제가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해서 만들었어요. 머리를 맑게 해주는 약차랍니다.”
프리츠는 그 차가 마음에 드는지 몇 번 더 맛을 봤다.
‘마음에 드나 보네. 따로 챙겨줘야겠어.’
그레텔은 찬장에 남은 차의 양을 가늠하며 프리츠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프리츠는 아스텔과 많이 닮았다.
그레텔은 프리츠를 처음 봤을 때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쳐다봤었다.
아스텔도 단정하고 단아한 미인인데 친오빠인 이 사람은 선이 가늘고 점잖아 보이는 미남이었다.
‘폐하도 멋지긴 하지만 그쪽은 너무 분위기가 무서워서.’
아스텔 님은 어떻게 그런 분과 부부로 사는지 몰라.
그레텔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를 마셨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공작님!”
낯선 남자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프리츠의 수하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주변을 서성이던 자를 붙잡았습니다.”
프리츠는 그레텔과 시선을 교환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디 있지?”
“마차 안에 붙잡아뒀습니다만…….”
공작의 수하가 난처한 듯이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직접 만나보셔야겠습니다.”
* * *
카이젠을 다시 만난 건 한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자세한 말은 안 해도 그는 이번 일 때문에 몹시 바쁜 모양이었다. 서재에 있던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폐하.”
“테오르는?”
“벌써 잠들었어요.”
테오르는 카이젠을 기다리면서 졸음을 참다가 한나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잠들어 버렸다.
“이런. 늦을 것 같다고 말했는데.”
카이젠은 아이를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도 만나볼 날은 많은데요.”
“하긴 그렇지.”
카이젠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스텔은 책을 치우는 척하면서 살짝 뒤로 물러났다. 이곳에서 키스할 뻔했던 순간 이후 아스텔은 그와 너무 가깝게 있는 걸 피했다.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가깝게 밀착될 때마다 묘한 두근거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신은 또 이런 책을 보고 있는 건가?”
한 걸음 아스텔 곁으로 다가간 카이젠이 테이블에 있는 책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텔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다른 소식이 있어요.”
아스텔은 그레텔의 구상을 카이젠에게 전했다. 남부의 산맥에서 약초를 재배하고 싶다는 얘기를.
카이젠은 설명을 다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 그 약초는 어떤 식으로든 많이 재배하는 게 좋지. 독살 수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말대로 미래의 황족들을 위해서라도 해독초를 상용화하는 건 유용한 일이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보고 있던 책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남부에 가볼까?”
“네?”
아스텔은 그를 바라보며 멍하니 되물었다.
카이젠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어차피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내년에는 남부로 순행을 갈 생각이었어.”
“남부로요?”
또 순행을 가는 건가. 하긴 올해 봄에는 동부로 순행을 왔었지.
문득 지난 기억들이 눈앞에 선연하게 떠오른다. 순행 중이었던 카이젠과 만났던 일. 비에 젖은 숲. 테오르를 돌려보내기 위해 카이젠의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췄던 무도회까지.
올해는 그렇게 동부를 살펴봤으니 내년에는 남부로 갈 생각이었나 보다. 마침 황태후 전하의 유언 일이 마무리되면서 남부 영지가 공식적으로 그의 소유가 됐으니까.
“테오르는 다른 지역에는 가본 적이 없잖아. 자기가 다스릴 땅을 봐두는 것도 좋겠지.”
아스텔은 그를 물끄러미 돌아봤다.
카이젠의 목소리엔 희미한 기대감이 감돌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테오르를 데리고 함께 여행을 가고 싶은 모양이다.
이번 순행 때도 같이 다니긴 했지만 그때는 테오르가 자기 아들인 걸 몰랐으니까.
괜찮은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웠다.
“괜찮으시겠어요?”
아직 완전히 회복한 것도 아닌데. 먼 길을 가는 건 무리가 아닐까?
카이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어떤 표정인데요?”
아스텔은 그가 가까이 다가온 만큼 한 걸음 뒤로 물러날까 고민했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잖아.”
“걱정되니까 그렇죠.”
아스텔은 카이젠을 볼 때마다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카이젠이 아스텔 자신보다 더 건강해 보였지만.
그래도 언제 다시 건강이 나빠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카이젠은 씁쓸한 눈길로 아스텔을 달랬다.
“조금 더 지켜보면 되겠지. 내년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아스텔은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카이젠이 1, 2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건강한 상태라면 그녀도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그래도 역시 제일 좋은 건 그가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었지만.
‘함께 남부에 가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남부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땅이라고 들었다.
아스텔도 그곳에는 직접 가본 적이 없었다. 그 아름다운 땅에 세 가족이 함께 순행을 떠나면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될 것 같았다.
그때 한나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프리츠 오빠가?”
한나가 카이젠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아스텔은 카이젠을 남겨두고 응접실로 나갔다.
프리츠가 서성이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무슨 일인가요?”
“황후 폐하.”
프리츠는 급하게 왔는지 가벼운 옷차림에 코트만 걸친 차림이었다.
아스텔이 기억하기로 그가 이렇게 편한 차림새로 황궁에 온 건 처음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빠르게 다가갔다.
프리츠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예를 갖춘 뒤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명령하신 대로 그레텔 양을 감시하다가 수상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아스텔은 그레텔에게서 침입자에 대한 얘기를 들은 뒤 곧바로 프리츠에게 연락을 보냈었다.
“잘됐네요. 그 사람은 어디 있나요? 잘 붙잡아 뒀겠죠?”
“예, 그런데 그게…….”
프리츠는 난감한 낯으로 말끝을 흐렸다.
“황제 폐하의 조사관 중 한 명이었습니다.”
“황제 폐하의 조사관이라고요?”
아스텔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황제 폐하의 조사관이 그레텔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예상치 못한 결과가 당황하던 중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아스텔은 낮에 잠시 찾아온 세르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기본 화제는 이번 사건의 뒤처리였다. 황제의 조사관들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고, 일에 관련된 귀족들을 잡아들였다는 얘기였다.
세르벨은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조심스럽게 벨리안이 황후 폐하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일의 전말을 캐고 다니는 것 같다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나를 의심하는 사람이 벨리안만은 아니겠지.’
어차피 벨리안이 의심을 해봤자 뭘 할 수 있겠냐는 마음도 들었다.
아스텔은 말해줘서 고맙다고 하고 세르벨을 돌려보냈다. 지금 프리츠에게서 그레텔을 감시하던 조사관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니 제일 먼저 그 일부터 떠올랐다.
‘설마 벨리안이 시킨 건가?’
“그 조사관은 지금 어디 있나요?”
아스텔은 프리츠에게 물었다.
“일단은 제가 보호해 두고 있습니다.”
“혹시 그 사람이 누구 지시라고 말하던가요?”
황제의 조사관이라면 순순히 협조할 만도 한데.
수상한 사람도 아니고 상대는 황후의 친오빠였다. 애초에 공작을 감시하다가 붙잡혔으니 누구 지시인지 말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생각으로 물었지만 프리츠는 난감한 눈빛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이번 사건을 조사하다가 제가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는 걸 보고 쫓아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레텔 양을 감시했다는 점은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기겠다는 거군요.”
그레텔을 감시했다는 걸 숨기기 위해 그렇게 우길 생각인가 보다.
“평범한 감시자였으면 어떻게든 정보를 캐냈겠지만 상대는 황제 폐하의 조사관이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프리츠가 난감한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아스텔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벨리안이 시킨 걸까?’
황제의 조사관이 그레텔을 감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카이젠이 그런 짓을 시켰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린든이나 다른 사람이 카이젠의 명령도 없이 그레텔을 감시했을 리도 없다.
애초에 이번 일로 다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황후의 약제사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당연히 황제의 보좌관인 벨리안이었다.
‘딱 벨리안이 할 만한 짓인데.’
함께 순행에 다녀왔던 벨리안은 아스텔이 약초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순행 중에 약초와 관련해서 몇 차례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으니까.
그녀가 그레텔과 친밀한 관계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일이 의심스러워서 조사한 거겠지.’
이번 사건은 황제의 병환 중에 일어난 작은 소란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관리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해도 감히 직접 나서서 사건의 진상을 캐려고 하지는 않겠지.
황제가 덮으려고 하는 사건을 파헤쳐 봤자 좋을 게 없을 테니.
하지만 벨리안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스텔의 주변을 뒤지며 정보를 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언제 어느 때나 나를 의심했으니까.’
순행 중에 성에서 아스텔의 짐을 몰래 뒤져봤을 때부터 그랬다.
최근에는 나엔에게 아스텔의 일을 캐묻기도 했다.
그 일에 대해 경고한 게 겨우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생기는군.
‘실제로도 알려진 것과 달리 카이젠은 독살당할 뻔했으니까. 그 사람의 의심이 아주 근거 없는 망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다가 프리츠에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조사관이라면 어차피 우리가 손을 댈 수는 없겠죠.”
“그 말씀은…….”
“제가 황제 폐하께 이번 일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마침 카이젠은 이곳에 와 있었다.
아스텔의 말을 듣고 프리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폐하의 판단에 맡겨두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프리츠는 조사관을 황궁으로 보내겠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아스텔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카이젠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카이젠은 여전히 서재 안에서 아스텔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자 책을 보고 있던 카이젠이 고개를 들었다.
“당신 오빠는?”
“저택으로 돌아갔어요.”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카이젠은 약간 근심 어린 눈길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한밤중에 프리츠가 갑자기 이곳에 다녀갔으니 걱정할 만도 했다만.
“아뇨,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만…….”
아스텔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레텔의 집에 침입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부터 프리츠가 수상한 감시자를 잡았다는 얘기까지.
“내 조사관이 그런 짓을 했다고?”
카이젠은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화를 냈다.
“그자는 지금 어디 있지?”
“프리츠 오빠가 그 사람을 황궁으로 데려오겠다고 했습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석연치 않은 표정을 보고 뭔가를 눈치챈 듯 다시 물었다.
“당신은 뭔가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군.”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아스텔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벨리안의 짓인 것 같아요.”
“벨리안이 그랬다고?”
아스텔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카이젠에게 모두 털어놨다.
순행 중에 있었던 일부터 이번에 나엔의 일까지.
이야기를 다 들은 카이젠은 또다시 화를 냈다.
“그걸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좋은 반응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첫머리에 나온 벨리안이 아스텔의 짐을 뒤져봤다는 내용에서부터 붉은 눈에 노기가 감돌았다.
아스텔은 한숨을 쉬면서 그를 달랬다.
“그 사람은 폐하의 보좌관이잖아요. 대수로운 일이니 그냥 경고만 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카이젠은 화를 내려다가 그냥 참는 것 같았다.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짐을 했다.
“우선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해 봐야겠지만 정말 벨리안의 짓이면 이참에 그 녀석을 제대로 처벌하겠어.”
아스텔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괜찮으시면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세요.”
“당신에게? 어떻게 하려고?”
“너무 엄하게 처벌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어쨌든 벨리안이 한 짓은 카이젠을 위한 일이었다.
황제 폐하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 때문에 한 짓인데 너무 엄한 벌을 주는 건 불합리했다.
물론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고 호기심과 아스텔에 대한 적대감도 좀 섞여 있었겠지만.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생각을 듣고 잠시 못마땅한 눈빛이었지만 결국 허락했다.
“그래, 당신 뜻대로 해.”
“감사합니다, 폐하.”
카이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내일 그레텔 양을 황궁으로 불러야겠어.”
“네?”
뜬금없는 말에 아스텔은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그녀를 불러서 그간의 일에 대해 포상하고 직접 사과하고 싶어.”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아스텔은 잠시 그를 멍하니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네, 폐하께서 그렇게 해주시면 그레텔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할 겁니다.”
아스텔은 그가 다정해진 것 같아서 좋았다.
과거의 카이젠이라면 이런 세심한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니 불러서 포상은 했겠지만 조사관에게 감시당한 일을 직접 사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 일은 사람을 보내서 보상해주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말았겠지.
아스텔 자신도 세월이 흐르면서 변했듯이 카이젠도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조금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음 날 오전에 아스텔은 온실에 나가서 차를 마셨다.
정식 업무를 시작하기 전, 잠시 그날 할 일을 정리하면서 갖는 휴식 시간이었다.
아침 식사를 끝낸 테오르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머니.”
“뭐?”
어머니라는 호칭에 아스텔은 놀라서 테오르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부르는 거니?”
테오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턱 끝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를 거야. 그게 예법이래.”
“그렇긴 하지만.”
아스텔은 쓴웃음을 지으며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테오르는 몇 달 전보다 조금 더 자랐지만 여전히 작았다.
“그럼 이제 엄마라고 부르지는 않을 거니?”
“으음…….”
테오르는 아스텔을 돌아보며 잠시 고민했다.
유리창에서 스며들어온 아침 햇살에 붉은 눈동자가 맑은 빛을 냈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엄마라고 부를게.”
아스텔은 웃으면서 테오르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온실 문을 열고 시녀가 들어왔다.
“황후 폐하. 벨리안 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벨리안이?
시녀는 난처한 말투로 물었다.
“알현 시간을 기다려 달라고 할까요?”
“아냐, 잠시 만나볼게. 들어오라고 해.”
지금쯤이면 황제궁에 있어야 할 그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건지 궁금했다.
잠시 후 벨리안은 숨을 헐떡이며 온실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
아스텔은 여전히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벨리안 경? 여기는 무슨 일인가요?”
“그, 그게…….”
벨리안은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자기 자신도 왜 여기 왔는지 몰라서 할 말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일이 잘못됐다는 말을 들었다.
‘약제사를 감시하던 조사관이 잡혀갔다니.’
그것도 황제 폐하께서 직접 이번 일을 조사하신다니.
오늘 안에 벨리안 자신의 짓이라는 게 밝혀질 것이다.
조사관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자마자 벨리안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스텔뿐이었기 때문이다.
“안녕, 백작.”
테오르는 오랜만에 벨리안을 보니까 반가운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테오르. 한나에게 가서 차를 내오라고 전해주겠니?”
테오르는 아스텔과 벨리안을 돌아보더니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어머니.”
“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가 있든 없든 가볍게 엄마라고 불렀는데.
벨리안이 나타났다고 저렇게 예의를 차리는 걸 보니 귀엽기도 하고 조금 웃기기도 했다.
아이가 커가는 게 느껴져서 약간 아쉬운 기분도 들었고.
아스텔은 테오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벨리안을 향했다.
“그래서 벨리안 경. 무슨 일인가요?”
벨리안은 대답 대신 애처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황후 폐하, 무슨 일인지 알고 계시잖습니까?”
물론 무슨 일인지는 뻔히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는데 그대가 왜 여기 왔는지는 모르겠군요.”
“황후 폐하, 지금 제 처지를 아시면서 일말의 동정심도 안 드십니까?”
아스텔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내가 왜 당신을 동정해야 하나요?”
“그, 그건…….”
벨리안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힘없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할 얘기는 없었다.
아스텔이 그를 동정해 줄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그동안 제가 황후 폐하께 너무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벨리안은 그간의 일을 사과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그동안 제가…….”
거기까지 말하던 벨리안은 다시 침묵했다.
‘그래도 제가 황후 폐하를 위해서 그동안 이렇게 노력을……!’ 하는 식으로 말을 꺼내려던 모양인데.
딱히 아스텔을 위해 해준 게 없다 보니 이어갈 말을 찾지 못한 듯했다.
아스텔은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어떤 의도로든 죄 없는 그레텔을 감시하게 한 건 충분히 잘못한 일이잖아요?”
그레텔을 감시한 건 잘못이 아니냐고 묻는 아스텔의 말에 벨리안은 억울한 기분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황후 폐하와 젊은 공작님께서 수상하게 행동하신 건 사실이 아니냐?’라고 쏘아붙일 뻔했지만 억지로 참았다.
“황후 폐하, 저를 도와주십시오.”
벨리안은 수치심과 굴욕감을 참고 아스텔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아스텔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대를 도와줄 이유가 없는데요.”
“황후 폐하, 제발…….”
벨리안은 거의 울먹이면서 애걸복걸했다.
“저도 황후 폐하께 이런 부탁을 드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걸 알면서 왜 왔죠?”
아스텔은 지극히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벨리안이 자신을 찾아올 줄은 아스텔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벨리안은 그녀의 상상보다 더 뻔뻔했다.
그가 애달픈 표정으로 말했다.
“일이 너무 커져서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이번 일의 전말을 아시면 저를 죽이실 거라고요.”
아스텔은 대답 없이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카이젠이 벨리안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화풀이 겸 심하게 처벌할 것 같기는 했다.
안 그래도 카이젠은 요즘 밀린 일거리를 처리하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으니까.
“그래요. 사정이 안타깝기는 하네요.”
아스텔은 그의 말에 동조했다.
“내가 폐하를 설득해서 벨리안 경을 북부의 하급 관리로 보내달라고 부탁하겠어요. 이 정도면 괜찮겠죠?”
“북부라고요?”
“네, 밀슈태드 영지에는 실력 있는 관리가 많이 필요하다더군요.”
벨리안은 멍한 눈빛으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거기는 북부 끝이잖습니까?”
“벨리안 경은 북부의 지리도 잘 알고 있네요. 분명 그곳 영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아스텔은 감정 없는 말투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벨리안은 넋을 잃고 그녀의 말을 듣고 서 있다가 진저리치며 화를 냈다.
“저는…… 저는 절대 싫습니다! 그건 유배나 다름없다고요!”
“정말로 유배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죄인으로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그래도 관리로 부임하는 건데.
아스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묻자 벨리안은 그녀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시골에 보내서 노예처럼 부려먹으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벨리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물론 반란이 진압된 지 얼마 안 된 북부에, 그것도 하급 관리로 가면 온갖 자질구레한 일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을 것이다.
심지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도 싫다니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마음대로 하세요.”
아스텔은 무관심한 태도로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사실 그가 어떻게 되든 아스텔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아스텔로서는 카이젠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조금 도와줄까 했던 것뿐이지.
벨리안도 뒤늦게 그걸 깨달았는지 다시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애원하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 그게 아니고…….”
하지만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온실의 문이 열리고 근위 기사들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벨리안 경을 찾으러 왔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벨리안이 다급하게 아스텔에게 매달렸다.
“황후 폐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북부든 남부든 어디로든 갈 테니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알겠어요.”
아스텔은 그를 데려가라는 듯이 근위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폐하께서 찾으신다니 얼른 가보세요.”
“예, 황후 폐하.”
벨리안은 끌려가는 내내 아스텔을 돌아봤지만 아스텔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차만 마셨다.
* * *
벨리안은 잠시라도 시간을 벌고 싶었다.
아스텔에게 도움을 청했으니 이번에는 세르벨이나…… 린든에게도 도움을 좀…….
하지만 근위 기사들은 지체 없이 그를 황제에게 끌고 갔다.
잠시 후 벨리안은 황제의 집무실 안에 서 있었다.
카이젠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왜 황후에게 갔었지?”
벨리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도와줄 사람을 찾았지만 슬프게도 집무실 안에는 그와 근위 기사 몇 명밖에 없었다.
다른 대신들이나 린든은커녕 친구인 세르벨조차 없었다.
‘왜 다들 필요할 때는 없는 걸까?’
벨리안은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화, 황후 폐하께 용서를 빌려고 했습니다.”
그 뻔뻔스러운 대답에 카이젠은 대놓고 비웃음을 보였다.
“들키니까 이제야 용서를 비는 거냐.”
카이젠은 싸늘한 냉소와 함께 정곡을 찔렀다.
“용서를 빌려는 게 아니라 도와달라고 매달리러 갔었겠지.”
“…….”
벨리안은 반박하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사실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감히 내 허락도 없이 황후를 감시해?”
“폐, 폐하. 잘못했습니다…….”
벨리안은 열심히 빌고 빌었다. 그래도 몇 년 동안 곁에서 열심히 일했던 것을 생각해 주시길 간절히 기원했다.
하지만 카이젠의 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벨리안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을 차갑게 바라보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죽이고 싶지만.”
카이젠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벨리안은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카이젠은 그런 그를 한심스럽게 보면서 말을 이었다.
“황후가 네게 선처를 베풀어 주라고 했으니 황후에게 고마워하거라.”
“가, 감사합…….”
“대신 작위를 박탈하고 북부의 하급 관리로 임명한다.”
벨리안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였다.
“너그러운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 * *
“잘 처리돼서 다행이네요.”
아스텔은 저녁 무렵에야 일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
그 정도면 본인을 위해서도 좋은 결말인 것 같다.
아스텔에게 결과를 말해주던 카이젠은 약간 불만스럽게 물었다.
“왜 그 녀석을 거기에 보내자고 했지?”
카이젠은 더 엄하게 처벌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스텔도 벨리안을 동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벨리안은 지금까지 황제의 곁에서 열심히 일하던 최측근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 대신들이 절반 정도 죽거나 쫓겨났는데 곁에 있던 보좌관까지 죽이면 카이젠의 명성에도 해가 될 것이다.
사실 이번 일만 놓고 보면 벨리안의 의심은 정당한 것이기도 했고.
“북부는 반란을 진압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일도 많고 일손도 부족할 것 같아서요.”
어차피 내쫓을 거면 일손이 필요한 곳에 보내서 일이나 하게 만드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벨리안이라면 나름대로 황제의 곁에서 일하던 유능한 관료니까.
어디 가서든 자기 몫은 충분히 하겠지.
‘벨리안의 성격상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라도 굉장히 열심히 할 테고.’
물론 카이젠이 이렇게 화가 난 걸 봐서는 몇 년 안에는 절대 못 돌아오겠지만.
낮에 벨리안이 불만스럽게 소리치던 말이 떠올랐다.
시골에 보내서 노예처럼 부려먹으려고 한다고 했었나.
이제 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여전히 별로 동정심은 안 든다만.
“미안해.”
아스텔은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복잡한 감정이 서린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제게 사과를 하세요?”
카이젠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동안 여러모로 힘들게 한 것 같아서.”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착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순행 때의 일을 괜히 끄집어냈나.’
벨리안을 확실히 내쫓으려고 꺼낸 말인데 괜히 카이젠이 자책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아스텔은 순행 중에 이미 그걸 구실로 벨리안에게 티 파티를 열도록 강요했으니 충분히 갚아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스텔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카이젠의 손을 잡았다.
“제게 미안하다는 말씀은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지난 몇 달.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묵은 감정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어느 정도 희석되어 버렸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지난 6년 동안 당신과 테오르를 돌봐주지 못한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남은 평생 당신과 테오르에게 사죄할 거야.”
“오랫동안 사죄하셔야겠네요.”
아스텔은 미소와 함께 조용히 대답했다.
“당장 남부에 갈 수는 없어도 조만간 일이 정리되면 테오르를 데리고 동부에 다녀올까?”
“동부에요?”
“당신이 살던 곳에 가서 테오르도 그곳을 그리워하더군.”
“테오르가 그랬어요?”
“그래. 당신에겐 말 안 했어?”
아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테오르는 언젠가부터 시골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그런 말을 들으면 슬퍼할까 봐 그랬나 봐.”
아스텔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황궁에 들어왔을 때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다시는 동부의 시골에 갈 수 없다고 했었다.
테오르는 무척 실망하고 슬퍼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말을 전하는 아스텔 자신의 얼굴에도 슬픔이 감돌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고 싶은데도 말하지 않았구나.
어린 테오르가 자신을 배려해서 감정을 숨겨왔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배려심은 당신을 닮았어.”
카이젠의 지적에 아스텔은 미미하게 웃기만 했다.
“순행처럼 거창하게 가지는 못하겠지.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하지만 잠시 다녀오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정도면 괜찮겠네요.”
순행은 규모도 크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하지만 잠시 동부에 갔다 오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이번 일이 끝나고 정리된 뒤에 가려면 겨울쯤은 되어야 출발할 것 같다만.
“황제 폐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이 문을 열자 린든이 문가에 서 있었다.
“황제 폐하. 공작님과 관련해서 일이 생겼습니다.”
그 한마디에 훈훈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어떤 공작?”
카이젠의 무거운 물음에 세르벨이 아스텔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폐궁에 계신 전대 공작님의 일입니다.”
‘폐궁에 갇힌 공작님’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어두운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카이젠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스텔을 돌아봤다.
아스텔은 싸늘할 만큼 표정 없는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지난 며칠간 아스텔은 일부러 아버지의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죽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안도감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들어서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냐?”
“그게…… 공작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카이젠의 물음에 린든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쓰러져?”
“며칠 동안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폐궁에 계시느라 쇠약해지신 것 같습니다.”
린든은 그렇게 답했지만 별로 자신 없는 말투였다.
그는 아스텔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스텔은 오히려 린든의 대답을 듣고 마음 깊이 안도했다.
혹시라도 감금된 아버지가 무슨 문제를 일으키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친아버지가 아프다는데 안도하는 지금 상황에 씁쓸한 기분이 들긴 했다만.
‘진짜 아픈 걸까?’
아프다는 말을 들어도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아스텔이 만나주지 않는다고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은 지난 며칠간 몇 번이나 아스텔에게 만나달라고 연락을 보냈었다.
번번이 무시했더니 이번에는 병자 흉내를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이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의사는 불렀느냐?”
“예, 이미 보냈습니다.”
린든은 걱정 가득한 눈길로 아스텔을 잠시 돌아봤다.
“그런데 공작님께서 황후 폐하를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황후 폐하를 뵙지 못하고 치료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
카이젠이 징글징글하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스텔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고 만나자는 건지는 뻔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조용히 살해당할 판이니 어떻게든 자신을 구해달라는 거겠지.
아스텔은 아버지를 구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난번에도 작위만 빼앗은 조건으로 남겨줬다가 이 사달이 났는데 또 아버지를 풀어주라고?’
절대 그럴 수는 없다.
특히 이번 일은 개인적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카이젠이 독을 먹고 죽어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진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카이젠을 보고 있으니 아버지의 행태가 더욱더 괘씸했다.
아스텔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만나보지 않을 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아스텔은 최대한 무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많이 편찮으시다면 의사를 만나시면 될 일이지요. 제가 가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너무 매정한 말인가 싶었는데 카이젠은 오히려 안심했다는 얼굴로 그녀를 다독였다.
“당신 뜻대로 해.”
아스텔은 고맙다는 의미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린든을 향했다.
“아버지의 소식은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규정대로 처리해 주세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후 폐하.”
린든도 약간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린든은 지난번 사건의 전말을 대강 눈치채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스텔이 혈육의 정을 못 이기고 레스턴 공작을 만나러 가서 또다시 문제가 생길까 봐 내심 걱정했던 모양이다.
무거운 대화를 끝으로 린든은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카이젠은 아스텔의 손을 감싸 쥐며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당신 괜찮은 거야?”
아스텔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젠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끌어당겼다.
아스텔은 익숙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저희 아버지 때문에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그런 소리 하지 마.”
카이젠은 그녀를 다정하게 감싸안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당신 잘못이 아냐. 내게 사과할 필요 없어.”
다정한 위로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스텔은 혹시 카이젠이 아버지에게 독을 먹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카이젠은 원래 공작을 황궁 안에 가둬두고 조용히 죽이겠다고 했었다.
어떤 방법으로 죽일 것인지는 아스텔도 알지 못했다.
‘혹시 이런 식으로 서서히 쇠약해지게 해서 죽이려던 걸까?’
궁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아스텔은 그런 의문을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다.
굳이 그 사실을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카이젠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말했다.
“당신 피곤해 보이는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
“예, 폐하.”
아스텔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 계속 이곳에 있으면 피곤만 더 쌓일 것 같았다.
* * *
카이젠은 아스텔이 침실 쪽으로 간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린든을 불러와라.”
복도 끝에 있던 시종이 그의 명령을 듣고 빠르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에 황후궁 밖으로 나갔던 린든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
카이젠은 얼마 전부터 공작의 음식에 서서히 병들어 죽게 만드는 약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은 폐궁에 가는 음식을 담당하는 시종뿐이었다.
굳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린든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텔은 공작 때문에 여전히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친아버지라는 인간이 저러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원래는 천천히 진행되게 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위해서 이 귀찮은 문제를 빨리 끝내버리기로 했다.
“의사를 보내서 레스턴 공작을 강제로라도 치료하게 해라.”
“폐하, 그 말씀은…….”
카이젠은 아스텔이 있는 방 안을 잠시 돌아본 뒤 대답했다.
“병에 걸린 사람은 갑자기 죽을 수도 있지.”
얼른 조용히 없애라는 뜻이었다.
린든은 황제의 뜻을 알아듣고 묵묵히 허리를 굽혔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침대에 누워 있던 레스턴 공작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보려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작은 촛불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새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창밖에는 새카만 하늘이 보였다.
공작은 다시 침대 위에 몸을 누였다.
온몸에 기운이 없고 열이 나서 으슬으슬 추웠다.
아프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런 먼지 구덩이에 갇혀 있으려니 시간이 갈수록 기운이 빠지고 온몸이 여기저기 아팠다.
미열도 조금 나는 것 같았다.
‘설마 누가 음식에 약을 탄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독인지, 화병인지, 아니면 가벼운 감기에 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레스턴 공작은 몸이 안 좋아진 김에 진짜로 앓아누웠다.
일부러 젊은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쓰러지는 척 연기도 했다.
의사가 달려왔지만 황후를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스텔을 만나야 해.’
그는 아스텔을 협박할 생각이었다.
자신을 구해주지 않으면 공작가에서 주도했다는 황제의 독살을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그렇게 되면 레스턴 공작가는 멸문당하고 아스텔과 황태자도 난처한 입장에 놓이겠지만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목숨이 제일 중요했다.
“공작님 약을 가져왔습니다.”
젊은 시종이 그에게 다가왔다. 공작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필요 없다니까.”
“폐하의 명령입니다.”
“글쎄, 명령 따위…….”
그러나 공작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시종이 손수건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 * *
그 후 이틀간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전대 레스턴 공작의 죽음이 알려진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아스텔은 이른 아침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난번 일로 황궁 안에 머물던 전대 공작이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한나는 담담한 시선으로 그 소식을 전하며 예법에 따라 고개 숙여 조의를 표했다.
“상복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어쨌든 친아버지가 죽은 것이니 상복을 입기는 해야 한다.
다행인 점은 이런 경우 친자식인 황후만 상복을 입을 뿐, 황자녀들은 상복을 입을 의무가 없다는 점이었다.
테오르에게 검은 옷을 입히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았다.
“괜찮은 거냐?”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은 공작의 소식을 듣자마자 아스텔을 찾아왔다.
“그럼요, 저는 괜찮아요.”
아스텔은 외조부의 근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 오히려 할아버지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인데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후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움과 안도감이 반반씩 뒤섞인 한숨이었다.
물론 사위인 공작에 대한 안타까움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잃은 프리츠와 아스텔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래도 네 아비의 일이 그렇게 마무리됐다니 다행이긴 하구나.”
아스텔도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이제 아버지 때문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이번 사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으니 이제 카이젠의 독만 치료하면 아무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텔의 업무를 돕고 있는 나엔이었다.
“저…… 황후 폐하.”
“나엔? 무슨 일이지?”
나엔은 평소보다 더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 그게…… 공작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나엔은 동정심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푹 숙였다.
레스턴 공작의 소식을 듣고 아스텔을 위로해 주러 온 모양이었다.
“나엔 양. 고마워.”
아스텔은 그녀에게 미소를 보이며 부탁했다.
“괜찮으면 오늘은 간단한 일만 처리할 수 있게 중요한 업무만 선별해 주겠어?”
“네, 황후 폐하. 지금 정리해 놓겠습니다.”
나엔은 얼른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추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이 괜찮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스쳐 갈 무렵, 옆에서 외조부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저 아가씨의 아버지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더구나.”
“네?”
아스텔은 나엔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봤다.
하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요 며칠간은 이번 일을 생각하기에도 바빠서 크로이첸 가문에 대해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나엔의…… 크로이첸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겼는데요?”
아스텔은 예전에 만났던 플로린을 생각하면서 물었다.
그 어린 레이디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 크로이첸 후작이라는 사람이 네 아비와 자주 왕래했던 모양이다.”
“네, 그 얘기는 이미 아버지에게서 들었어요.”
그쪽과 연관이 있는 귀족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지.
아버지는 이번 독살 음모에서 크로이첸 후작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와 손을 잡았었다.
아버지와 크로이첸 후작이라니.
상상도 못 한 조합이라서 그 말을 듣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도 잡혀 왔나요?”
아버지에게 도움을 줬으니 조사하다가 연관성이 밝혀져서 황궁에 끌려오기라도 한 걸까?
아직 그런 얘기를 전해 듣지는 못했는데.
“아니, 크로이첸 후작이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다고 하더구나.”
“병에 걸렸다고요?”
“많이 위독한 모양이야.”
“낯선 곳에서 지냈을 테니 병이 날 만도 하죠.”
얼핏 듣기로는 크로이첸 가문은 수도에서 쫓겨난 뒤 낡은 성채에서 힘들게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냥 조용한 시골에 가면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후작이 굳이 수도 근처에 머물기는 고집해서 허물어져 가는 성채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었나?
대충 그런 얘기를 전해 들은 기억이 난다.
“병이 워낙 위중해서 황제가 그를 그냥 놔두라고 했다는구나. 조사한 바로는 크로이첸 후작은 네 아비와 몇 번 만났던 걸 제외하면 특이한 행동도 없었던 모양이고.”
“그렇군요.”
나엔을 위해서라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로이첸 후작이 이번 일에 엮어서 처형당하기라도 하면 나엔의 입지는 더 안 좋아질 테니까.
황후궁에서 계속 일하기도 어려울 테고.
“다른 딸들도 조사를 받은 모양이다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더구나.”
“다른 딸들도 조사를 받았대요? 왜요?”
아스텔은 마리안과 플로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크로이첸 후작이 아버지와 손을 잡은 건 이해가 가지만 플로린을 비롯한 딸들까지 이번 일에 관여한 걸까?
“그 아가씨들이 네 아버지를 만났다더구나.”
“플로린과 마리안이요? 무슨 일로요?”
“그게…….”
외조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네 아버지가 크로이첸 가문의 딸과 결혼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뭘 하려고 했다고요?”
아스텔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크로이첸 가문의 세 딸 모두 아스텔보다 한참 어렸다.
장녀인 마리안도 성년을 간신히 넘긴 나이였다.
아버지가 그 자매 중 한 명하고 결혼하려고 했다고?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들으면서 느꼈던 약간의 복잡한 감정도 싸그리 증발되었다.
“우리 아버지지만 정말 끔찍한 사람이에요.”
죽은 아버지를 더 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혐오감이 솟구쳤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뻔했다.
프리츠 오빠가 아버지를 배신했으니 이참에 새로운 아내를 들여서 아이를 낳으려고 했던 거겠지.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외조부도 동의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똑똑.
그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짧은 노크 소리에 끊어졌다.
황제궁의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든 시종 두 명이 보였다.
“황후 폐하.”
시종장은 조심스러운 낯으로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요?”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의 상심을 위로해 드리고자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아.
황후의 친아버지가 죽었으니 황제가 위로 겸 선물을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스텔은 뒤늦게 자신이 상중인 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상복을 입고 있기는 했다만 하나도 슬퍼하지 않고 외조부와 티타임을 하는 중이었다.
아스텔은 얼른 침통한 표정을 가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의 세심한 배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감사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옆에 앉은 외조부가 슬쩍 고개를 내저었지만 아스텔은 묵묵히 무시하며 황제의 선물을 받았다.
상자 안에 담긴 건 보석이었다.
진주와 다이아몬드, 흑요석 등을 베이스로 은과 백은을 가공해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였다.
전부 상중에 지닐 만한 장신구였다.
상중인 귀부인은 이렇게 하얀색이나 검은색, 은색의 보석으로 장식한다.
‘그러고 보니 이런 무채색의 보석은 준비하지 못했네.’
지금 가지고 있는 보석은 죄다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호사스러운 것들뿐이었다.
그걸 생각하고 미리 이런 것들을 보내준 모양이다.
황제가 보낸 선물답게 색깔만 점잖을 뿐 전부 최고급품이었다.
진주나 다이아몬드 같은 건 상중이 아니어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사이가 좋아졌구나.”
시종장이 돌아간 뒤, 외조부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놀리지 마세요.”
아스텔은 상자를 닫으며 담담하게 내뱉었다.
“놀리는 게 아니다. 그래도 보기 좋다는 소리야. 계속 사이가 안 좋은 것보다는 낫겠지.”
외조부의 말에 아스텔도 쓰게 웃었다.
카이젠과 가까워지면서 평온한 일상을 찾았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테오르에게 나중에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버지인 카이젠이 아스텔을 버렸다가 테오르의 존재를 알고 다시 결혼했고.
외조부인 공작 때문에 아버지인 황제가 죽을 뻔하고.
반대로 황제가 외조부인 공작을 죽이고.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테오르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반 칼렌베르크 후작은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 말거라. 테오르는 영리하니까 다 이해할 거야.”
“그럴까요?”
“그래.”
칼렌베르크 후작은 확신 어린 대답을 한 뒤 약간 난감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황제에게 조금 복잡한 마음을 갖긴 하겠지만.”
아스텔도 한숨을 내쉬며 동의했다.
“나중에도 둘이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일도 이해하고 받아들여 준다면 좋겠지만 그건 테오르가 판단해야 할 문제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칼렌베르크 후작은 아스텔을 다독이며 다시 말했다.
“황제가 지금처럼 그 아이를 사랑한다면 다 괜찮을 거다.”
* * *
프리츠는 마차에서 내려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저물어가는 석양이 저택의 담장 아래에 긴 그림자를 그렸다.
그가 공작가의 저택에 돌아온 지 이게 겨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은 아버지를 피하기 위해저택에 돌아오지 않고 관저에서 지냈다.
오전에 프리츠는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스텔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안도하는 것 같았지만 프리츠는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수 없었다.
안도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죄책감이 들었다.
공작가에 도착하자 모두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프리츠는 시종들에게 짧은 지시를 내리고 서재로 들어갔다.
아버지 대부터 저택을 관리하던 늙은 집사가 그를 쫓아왔다.
“선대 공작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부탁이 많이 오고 있습니다.”
“장례식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니 조금 의외였다.
물론 선대 공작의 장례식이니 거창하게 치르는 게 순리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수도 안의 상황도 복잡한 데다, 아버지의 죽음도 은연중에 세간의 의혹을 사고 있었다.
아버지와 친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황궁 안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는 상황이기도 했고.
이런 상황에 굳이 조문하려는 사람이 많을 리가 없는데.
프리츠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늙은 집사는 주저하는 눈빛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대부분 가족분과 함께 참석하고 싶다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가족들이라고?”
“그, 그게 대부분 레이디와 함께 오고 싶으시다고…….”
“…….”
프리츠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프리츠 자신은 공작위를 계승했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그동안은 안주인이 없어서 이곳에서 사교 모임이 열린 적도 거의 없었다.
프리츠 자신이 일에 전념하느라 다른 사교 모임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이참에 조문을 빌미로 공작가에 찾아와서 딸들을 인사시키고 싶다는 뜻인가 보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우리 가문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 골라서 적당히 초대해.”
프리츠는 차갑게 대답했다.
아무리 세상 이치가 그렇다지만 좀 너무하지 않나.
세상인심에 환멸이 들 지경이었다.
“레이터스 님께서 공작님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프리츠는 처음에 그게 누구인지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 이름을 가진 가문이 있었나 하고 잠시 고민한 뒤에야 그게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 그레텔 양의 성이었지.’
그레텔 레이터스.
얼마 전에 찾아가서 대화할 때 그렇게 들었다.
특이한 성씨라서 그 이름을 들으며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레이터스는 달달하고 상큼한 맛이 나는 잎채소였다.
프리츠도 어려서부터 그 채소를 무척 좋아했다.
그레텔을 깔깔대고 웃으면서 괜찮으니 웃어도 된다고 말했다.
‘약제사의 성씨가 채소 이름을 닮았다니 웃기죠?’
하지만 프리츠는 웃지 않았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프리츠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집사에게 다시 물었다.
“그레텔 양이 어떤 선물을 보냈지?”
“찻잎이 담긴 상자와 꽃다발이었습니다.”
“꽃?”
찻잎은 낯설지 않았다.
전에 만났을 때도 차를 대접받았으니까.
분명 그녀가 만든 특별한 약차라고 했었다.
그날 프리츠 자신이 차를 좋아하는 걸 보고 선물로 보내준 모양이다.
그런데 꽃은 뭘까?
“하얀 히스꽃이었습니다.”
“히스꽃?”
집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이 꽃은 동부에서는 위로의 의미로 보내는…….”
“나도 알고 있어.”
동부에서는 슬픈 일을 겪은 사람에게 보내는 위로의 꽃이라고 들었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약차와 함께 위로의 꽃을 보내준 모양이었다.
‘세심한 성격이로군.’
겉보기엔 약간 정신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의외로 세심한 성격인 건가.
하긴 약초를 기르고 정확히 개량해서 약을 만들려면 섬세한 면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답례를 해야겠군. 초대장을 준비해.”
“지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프리츠는 그레텔을 저택에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답례할 겸 잠시 초대하면 괜찮겠지.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는 나중에 아스텔에게 따로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