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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보복 (14/24)

14. 보복

테오르는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들어오는 작은 서재 안에 있었다.

아침에 한나가 물감을 가져다줬다. 테오르는 물감을 늘어놓고 하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잘 그리는구나.”

옆에 있던 아스텔의 외조부, 칼렌베르크 후작이 테오르의 그림을 보며 감탄했다.

그림 속에는 조그만 테오르와 아스텔, 그리고 후작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테오르 옆에는 블린과 곰 인형 레빈도 있다.

동글동글하게 그려놓은 아이들 그림이었지만, 다섯 살짜리 아이의 그림이라기엔 훌륭한 실력이었다.

블린의 금색 털과 아스텔이 입은 드레스의 세세한 부분까지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 테오르는 관찰력이 좋아.”

테오르는 다시 물감을 찍어서 한쪽 귀퉁이에 다른 사람을 그렸다. 검은색 옷을 입은 키가 큰 남자였다.

“이건?”

“이건 황제 폐하요.”

그림 속 남자는 카이젠처럼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림 속의 카이젠은 똑같이 흑발 적안으로 칠해진 테오르와 많이 흡사해 보였다.

후작은 쓴웃음을 삼켰다. 테오르는 나름대로 카이젠을 좋아하고 잘 따랐다.

‘피가 끌리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건가.’

아스텔을 닮은 면도 있지만 역시 카이젠을 많이 닮았다. 아마 어른이 되면 카이젠과 판박이로 자라날 것이다.

“테오르는 황궁에서 사는 게 좋으냐?”

“응. 난 좋아요. 여기는 넓고, 맛있는 과자를 계속 먹을 수 있고, 조랑말도 있고…….”

테오르는 좋은 점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꼽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왜 그러느냐?”

테오르는 기운 없이 손가락을 내렸다. 작은 얼굴에 시무룩한 기색이 서렸다.

“그런데 엄마는 여기가 안 좋은 것 같아요.”

“음?”

“엄마는 여기 온 다음부터는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

정말이지 관찰력이 지나치게 좋구먼.

슬픈 감탄이 새어 나왔다.

“엄마하고 다시 우리 집으로 가면 안 돼요?”

후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 네 어머니는 이제 황제 폐하와 결혼해서 황후가 됐으니까. 여기서 살아야지.”

아스텔은 카이젠과의 결혼 계약에 관해서 말해줬다.

하지만 후작은 아스텔이 계약 기간이 끝나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테오르를 황궁 안에 혼자 놔두고 시골로 가버릴 수는 없었다.

다행히 테오르는 금세 화제를 잊었다. 다시 붓을 집어 든 테오르는 종이 위에 나무와 꽃을 그리고 있었다.

후작이 조금 안도하는 사이에 테오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은 좋아해서 결혼하는 거죠?”

“그렇지.”

테오르의 맑은 눈동자가 깊은 의문을 담고 그를 바라봤다.

“엄마하고 폐하는 옛날에도 결혼했는데, 그 결혼은 왜 없었던 일로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엄마하고 폐하는 옛날 결혼을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결혼한 거라고 했어요.”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

테오르는 붓을 매만지면서 대답했다.

“나쁜 할아버지가.”

“…….”

테오르는 자기 외할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을 늘 저렇게 불렀다.

하긴, 애한테 그런 소리를 할 만한 인간은 녀석밖에 없겠지.

황후궁의 시녀들과 시종들은 아스텔이 분명하게 교육을 시켜서 테오르 앞에서는 항상 말을 조심했다.

후작은 레스턴 공작의 방문을 금지해 달라고 카이젠에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둘이 결혼했으니까 그다음에 네가 태어났지.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잠시…… 떨어져 있었던 거란다.”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가 없어서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했다.

그래도 이미 사실을 들었다는 애한테 거짓말을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텐데.

“으응. 그랬구나.”

다행히 테오르는 후작의 설명을 듣고 납득하는 것 같았다.

꽃잎을 다 칠한 테오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옛날엔 엄마도 폐하를 좋아했나요?”

“그게 무슨 소리냐?”

칼렌베르크 후작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테오르는 붓을 내려놓고 맑은 눈으로 후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잖아요? 그럼 예전엔 엄마도 폐하를 사랑했어요?”

“…….”

어린 테오르의 나름대로 논리 정연한 질문에 후작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럴 때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언젠가는 진실을 다 알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 모든 걸 알려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실 아스텔은 그때도 폐하를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결혼을 했냐고 물을 텐데. 그 물음엔 정말로 대답할 말이 없었다.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옛날에는 아스텔이 폐하를 많이 좋아했지.”

소녀 시절의 아스텔은 카이젠을 무척 좋아했다.

어린 외손녀가 귀여운 필체로 써 보낸 편지에는 언제나 카이젠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황태자 전하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선물을 줬는지. 그런 잡다한 얘기가 가득했다.

칼렌베르크 후작은 그때도 카이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로서는 귀여운 아스텔이 자신을 불명예스럽게 쫓아낸 주군의 손자와 결혼한다는 게 몹시 불쾌했다.

그리고 어릴 때 몇 번 봤을 뿐이지만 카이젠은 외모부터 자기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전전대 황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후작은 그때부터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아스텔의 편지를 보면 둘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제 할아비와는 다르겠거니 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약혼부터 막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정해진 약혼을 무를 수는 없었다.

당시 아스텔은 제국 안에서 가장 귀한 공녀였다. 어느 누구나 아스텔이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후작은 옛 기억을 털어내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오래전에 결혼했고 네가 태어난 거란다.”

“그랬구나…….”

다행히 테오르는 그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테오르는 잠시 자기가 그린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엄마는 왜 지금은 폐하를 싫어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

후작은 황급히 부정했다.

“네 엄마가 폐하를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싫어하는 건 아니야.”

“정말요?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

물론 아스텔은 카이젠을 무척 싫어했지만, 어린 테오르에게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테오르는 이번에도 순순히 납득했다. 후작은 테오르가 아직 어려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1, 2년 후에는 아이의 질문에 어떤 답을 해줄지 걱정스럽긴 했다만.

붓끝을 만지작거리던 테오르는 다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주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그럼 할아버지는 왜 폐하를 싫어하세요?”

“…….”

후작은 입을 조금 벌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어려운 질문을 다 잘 넘겼는데, 이 물음에는 말문이 막혔다.

“왜…… 할아비가 폐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느냐?”

테오르는 맑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할아버지를 올려다봤다.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

똑똑.

그 순간 기적처럼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를 구원해 준 사람은 테오르를 돌봐주는 시종이었다.

“황자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이 옆으로 비켜서고 카이젠이 안으로 들어왔다.

칼렌베르크 후작은 난생처음으로 카이젠이 반갑게 느껴졌다.

“폐하!”

테오르가 붓을 내려놓고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후작도 일어서서 그에게 예를 갖췄다.

테오르를 안고 있는 카이젠은 누가 봐도 화목한 부자지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황제를 좋아하니 싫어하니 말했지만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뭘 하고 있었느냐?”

“할아버지하고 그림을 그렸어요.”

카이젠은 테이블에 있는 그림을 힐끗 쳐다봤다.

그림 속에는 아스텔, 테오르, 후작이 나란히 서 있고 카이젠은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떨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가 피곤하시겠다. 이제 내가 놀아주마.”

후작은 오랫동안 카이젠을 싫어했지만, 요즘은 이 젊은 황제를 볼 때마다 이따금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아는 한 어떤 황제도 이렇게 아들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황후에게 이 정도로 정성을 다한 황제도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냉랭했고 테오르도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지만 조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군.’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카이젠은 제 할아비와 달리 여색을 밝히지 않았다. 아스텔과 이혼한 뒤에도 정부나 후궁을 들이지 않고 6년 동안 혼자 지냈다.

후작은 문득 과거 카이젠은 아스텔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졌다. 그저 귀찮은 약혼녀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은 없었는지.

‘하긴,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만.’

테오르는 풀잎처럼 조그만 손으로 카이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오늘도 밤에 엄마 방에서 체스를 하고 놀면 안 돼요?”

“오늘은…….”

테오르의 천진한 질문에 카이젠은 말끝을 흐렸다.

순간 그의 잘생긴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카이젠은 후작을 슬쩍 돌아보더니 다시 테오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같이하자.”

* * *

나엔은 황후궁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황후궁은 황제의 궁전만큼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더 화려해 보였다. 나엔은 멍하니 시녀를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명도 없이 시녀를 따라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곳입니다.”

시녀가 복도 끝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작지만 깔끔하게 꾸며진 손님용 침실이 나왔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여, 여기서요?”

나엔은 침실 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작긴 해도 정갈하고 세련된 곳이었다. 아무리 봐도 죄인에게 주는 방은 아닌 것 같았다.

시녀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황후 폐하의 명령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시녀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갔다.

“…….”

나엔은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황궁에 들어온 이후 모든 것이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황후가 그녀를 처벌하겠다며 황후궁으로 끌고 왔을 때만 해도 나엔은 자기가 끔찍한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녀는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이곳으로 안내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걸까?’

아버지와 둘째 언니는 공작가의 일을 나엔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다.

나엔에게 황궁에 가서 자백하고 처벌을 받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녀는 첫 번째 임무부터 실패했다. 나엔의 거짓말은 황후의 느닷없는 질문에 손쉽게 밝혀지고 말았다. 일이 틀어지는 순간 더 큰 벌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후는 처벌하겠다면서 왜 이런 곳으로 나를 보낸 걸까?’

모든 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어머니나 큰언니가 있었으면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엔은 텅 빈 방 안에 혼자 있었다.

이곳은 황후궁이었고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한나는 시녀의 보고를 받고 나서 아스텔에게 다가갔다.

“레이디 나엔은 침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래. 잘 지내게 돌봐줘.”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아스텔은 나엔을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 소녀는 가문에서도 천대받는 입장인 모양인데.’

그러니 플로린 대신 저택 밖으로 떠밀렸겠지.

그 어린 소녀는 희생양에 불과했다.

그 애를 벌해봤자 아스텔은 악독하다는 비난만 들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황후궁에서 일하게 하면서 지켜보는 게 낫다. 아스텔은 나엔을 이곳에 머물게 하면서 잡일이나 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엔이 여기 있다는 걸 알면 플로린은 또 나엔을 이용해서 뭔가를 꾸미려고 할 것이다.

자기 친동생이 황후궁에 있는데 불안해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겠지.

한나도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레이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라고 하겠습니다.”

아스텔은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러 가지 일을 겪어서 피곤했다.

한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차를 가져다줬다.

“아스텔 님. 오늘은 일찍 쉬십시오.”

“응. 그래야겠어.”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저녁이 다 되었다.

“테오르는 어디 있어?”

“황자님께서는 폐하와 함께 서재에 계십니다.”

“…….”

카이젠이 벌써 왔구나.

할 일이 많았을 텐데. 빠르기도 하지.

카이젠은 평소에도 이곳에 오면 아스텔이 일을 끝낼 때까지 테오르를 봐주면서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배려가 아닌 것 같았다.

아스텔은 황제궁에서 말다툼을 벌인 뒤 그를 따로 만날 시간이 없었다. 두 사람의 논쟁은 나엔의 일로 끝을 맺지 못하고 중단됐다.

카이젠은 아직도 화가 났으려나. 평소에도 화목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오늘 저녁 식사는 더욱 불편한 자리가 될 듯했다.

한숨을 삼키며 식사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려는데, 시녀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테오르를 돌봐주는 시녀였다.

“황후 폐하.”

“무슨 일이지? 테오르는?”

시녀의 공손한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테오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놀라서 물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황자님은 황제 폐하와 황제궁으로 가셨습니다.”

“폐하께서 테오르를 황제궁으로 데려가셨다고?”

저녁을 먹이고 씻겨야 하는 시간인데 갑자기 황제궁에는 왜 데려간 걸까? 구경시켜 주려고?

“언제 돌아오신다고 하셨지?”

“그것이…….”

아스텔이 묻자 시녀는 더욱 난감한 눈빛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께서 오늘은 황자님과 황제궁에서 머무신다고 하셨습니다.”

“…….”

아스텔은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시녀를 바라봤다.

시녀가 전해준 이야기는 간단했다.

카이젠이 테오르와 놀아주다가 아이를 데리고 자기 궁으로 가버렸다는 얘기였다.

잠시 다녀오는 게 아니라 거기서 둘이 함께 자겠다고 했단다.

“테오르를 황제궁에서 재운다고?”

“예,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카이젠이 느닷없이 테오르에게 황제궁을 보여주겠다고 함께 가자고 했단다.

황제궁을 보여준다는 말에 테오르는 좋아하라며 따라나섰고.

카이젠은 황후에게 알리라는 말만 남겨둔 채 테오르를 안고 가버렸다고 한다.

사냥개 블린이 테오르를 따라붙으니까 블린까지 함께 데려갔다고.

‘왜 이런 짓을…….’

아스텔은 기가 막힌 눈빛으로 한나를 돌아봤다.

한나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아스텔과 시선을 교환했다.

말도 없이 갑자기 아이를 데려가서 재운다니.

문득 황제궁에서 밀서의 일로 다퉜던 것이 떠올랐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서 일을 처리했다는 것에 화를 냈다.

그래서 여기서 저물지 않고 돌아가 버린 모양이다.

‘그럼 혼자서 가면 될 일이지. 테오르는 왜 데려갔는지.’

아스텔은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참았다.

설마 화가 났다는 걸 알려주려고 테오르를 데려가 버린 건 아니겠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날 정도였다.

옆에 있던 한나가 조용히 제안했다.

“황후 폐하, 제가 가서 황자님을 돌봐드리겠습니다.”

아스텔은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황제궁에는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황제궁에는 수많은 시종이 있었지만, 아스텔은 아직 황제를 시중드는 시종들의 안면을 익히지도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데려오고 싶지만…….’

황제가 황자를 자기 궁으로 데려갔다는데 굳이 쫓아가서 아이를 빼앗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스텔은 한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갈아입힐 잠옷과 곰 인형을 가져가.”

아스텔은 짜증스러운 감정을 눌러 참았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스텔 님. 제가 황자님 곁에서 머물겠습니다.”

한나는 아스텔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아스텔은 별로 안도감이 들지 않았다.

괜히 한나만 고생시킨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화가 났다.

“고마워, 한나.”

* * *

“우와…….”

테오르는 눈을 빛내며 웅장한 알현실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방들을 구경했다.

지금 살고 있는 황후궁도 눈부실 만큼 화려했지만 이렇게 크고 장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거냐?”

“정말 멋져요! 이렇게 멋진 곳은 처음 봐요.”

카이젠은 아이의 솔직한 감탄에 웃음을 흘렸다.

“나중에는 네가 이곳에서 살게 될 거야.”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지만 어린 테오르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럼 폐하는 어디 살아요? 엄마하고 황후궁에 살 거예요?”

카이젠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럴 수 있으면 좋겠구나.”

테오르는 멈춰 서서 조그만 주먹으로 무릎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왜 그래? 다리가 아픈 거냐?”

“조금요.”

너무 많이 걸었나.

하긴 궁전 여기저기를 둘러봤으니 다리가 아플 만도 했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자기 침실로 데려갔다.

침실 안에는 이미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카이젠은 푹신한 실크 이불이 깔린 침대 위에 테오르를 내려놓았다.

테오르는 침대 위에 있던 베개를 끌어안고 뒹굴거렸다.

“침대가 좋으냐?”

“푹신푹신하고 좋은 냄새가 나요.”

카이젠은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테오르를 여기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혼자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테오르와 놀아주다 보니 아이를 떼놓고 가기가 싫어졌다.

그동안 카이젠은 저녁마다 황후궁에 가서 아스텔을 만나고 테오르와 놀아주다가 셋이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어느새 그렇게 두 사람과 함께 지내는 삶에 익숙해졌다.

비록 아스텔과의 관계는 여전히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지만.

“블린, 이거 봐.”

테오르는 캐노피에 달린 끈을 블린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데려왔지만 다행히 테오르는 무척 즐거워했다.

새로운 곳으로 놀러 온 기분인 듯했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테오르가 양팔로 베개를 꼭 끌어안고 카이젠을 올려다봤다.

“우리 여기서 자고 가는 거예요?”

“그래. 오늘은 이 침대에서 같이 자자.”

카이젠은 금제 장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푹신한 침대를 바라봤다.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결혼식 날부터 매일 밤 아스텔의 침실 앞에 있는 소파에서 잠을 잤다.

매일 밤 함께 있었는데도 아스텔은 그를 믿지 못했다.

카이젠은 그 부분에서 제일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스텔은 조금도 그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

‘…….’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배신감이 너무 커서 오늘은 아스텔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배신감을 느낄 자격도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카이젠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테오르의 옆에 걸터앉았다.

테오르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엄마는 여기 안 오나요?”

“아스텔은 황후궁에서 자야지.”

시종장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알렸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시녀를 보내셨습니다.”

그의 뒤로 익숙한 갈색 머리 시녀가 보였다.

“한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던 테오르가 벌떡 일어났다.

한나라고 불린 시녀는 차분하게 무릎을 굽혔다.

“황후 폐하께서 황자님을 돌봐드리라고 보내셨습니다.”

한나는 테오르에게 낡은 곰 인형을 건네줬다.

‘나를 못 믿어서 그새 시녀를 보냈나.’

그런 생각을 하던 카이젠은 테오르가 낡아빠진 곰 인형을 소중하게 끌어안는 걸 보고 생각을 고쳤다.

하긴 익숙한 사람이 돌봐주는 게 좋겠지.

“폐하, 허락하신다면 주방에 가서 황자님의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황후궁에 있을 때도 시녀가 주방에 가서 테오르의 음식을 준비시키고 만드는 과정을 감독했다.

테오르는 아직 어린아이니까.

아이들을 위한 영양가 있는 메뉴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이 테오르의 안전을 생각해서 시녀들을 보내서 조리 과정을 감독한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이곳 시종들을 전혀 못 믿나 보군.’

한나는 공손하게 예를 갖추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카이젠은 한나를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잠깐.”

한나가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카이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스텔이 혹시 다른 말은 없었는지.

자신에게 전해달라는 말은 없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래봤자 부질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면 진작에 말했겠지.

아니면 찾아왔든가.

카이젠은 자신이 아스텔의 방문을 내심 기대했다는 걸 깨달았다.

테오르를 데려오면 그걸 핑계 삼아서라도 한 번쯤은 찾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아스텔은 오지 않았다.

그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자 아스텔의 시녀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폐하, 하문하십시오.”

“아무것도 아니다. 그만 나가봐라.”

* * *

다음 날 아침, 벨리안은 수선스러운 분위기 속에 업무를 시작했다.

어제 크로이첸 가문의 일이 있었으니 분위기가 뒤숭숭할 만도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전해진 새로운 소식이 크로이첸 가문의 일을 가려버렸다.

지난밤, 황제 폐하가 황후와 크게 다퉜다는 소식이었다.

“그게 사실인가?”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내무대신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벨리안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얘긴지 다 알면서도 벨리안은 모르는 척 되물었다.

“폐하께서 황후 폐하와 다투셨다고 들었네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벨리안도 어제 접견실 안에서 둘이 말다툼을 하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둘이 뭔가 의견 차이가 있어서 그러는 건가 했는데.

바로 그날 밤에 황제가 황후궁에 갔다가 다시 황제궁으로 돌아와 버렸다.

심지어 어린 황자님까지 데리고 왔단다.

‘무슨 집 나온 남편도 아니고.’

황자님은 왜 데려오셨담?

벨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는 예전부터 아스텔 님과 연관된 일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짓을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무슨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긴, 큰 소리가 났다고 하는데. 결혼하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거참…….”

중년의 내무대신은 안타까운 듯이 탄식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폐하께서 얼마나 상심이 크실지.”

옆에 있던 다른 대신이 그렇게 말하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자작님의 조카분은 수도로 돌아오셨습니까? 그동안 시골에 계셨다고 들었는데요.”

“얼마 전에 돌아왔지요.”

“이제 성년이 지났을 텐데. 정혼은 안 했다고 하셨지요?”

벨리안은 대신들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 인간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군.’

어제는 황후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더니 하루 만에 다들 눈을 반짝이며 남의 조카딸 얘기를 하고 있다.

“저는 소용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벨리안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느릿느릿 말했다.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께 푹 빠져 계십니다. 자꾸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시면 폐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대신들은 그 말에 찔끔했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지금이야 그렇지만 부부관계라는 건 언제고 멀어질 수도 있으니. 지금이라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무슨 준비 말입니까?”

내무 대신이 진지한 낯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께서는 너무 큰 권한을 갖고 있네.”

“황후 폐하께서는 황궁에 들어오신 지 겨우 한 달 정도 되셨는데요.”

“하지만 오래전부터 폐하의 곁에 계시면서 황궁 일에 관여하셨지.”

내무 대신은 목소리를 낮췄다.

“황후께서는 한 달여 만에 벌써 크로이첸 가문을 몰락시켰어. 황후께서 권력을 쥐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그야 물론 레스턴 공작이 다시 권세를 얻겠지.

“우리는 황후를 견제할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

확실히 폐하께서 너무 빠져 계시니까 견제할 상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아스텔은 황후가 되자마자 다시 부친인 공작과 협력해서 적들을 없애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레스턴 공작가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벨리안도 그건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폐하께 애첩을 만들어 드리자는 말씀이십니까?”

벨리안의 노골적인 표현에 내무대신은 인상을 찌푸렸다.

“선대에는 후비라고 불렀네.”

그거나 그거나.

귀족들과 평민들은 공식적으로 측실을 둘 수 없었지만, 황제는 법적으로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워낙 황가의 자손이 귀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상대라.’

별로 가망이 있어 보이는 일은 아니었지만.

대신들 말대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긴 했다.

두 분이 다투고 사이가 벌어졌을 때 다른 여자를 들이밀면 황제께서 홧김에 한눈을 팔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황후 폐하 말고 폐하가 관심이 있던 여인이 있었던가?’

역시 불가능한 일인가.

벨리안은 문득 어제 무례하다고 화를 내면서 자신에게 선을 긋던 아스텔이 떠올랐다.

“그래서 마땅한 후보가 있습니까?”

* * *

카이젠은 햇살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려고 몸을 뒤척이는데 웅크리고 누워 있는 작은 몸이 보였다.

테오르가 그의 팔을 베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마에 드리워진 새카만 머리카락과 젖살이 남은 통통한 뺨이 보였다.

잠들어 있는 테오르는 천사같이 귀여웠다.

‘자는 얼굴은 아스텔을 닮았군.’

차분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스텔과 판박이였다.

비록 그가 잠들어 있는 아스텔을 본 건 딱 한 번뿐이었지만.

곤히 잠든 테오르를 보니까 어젯밤의 기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 * *

간단하게 저녁 식사와 목욕을 끝내고 난 뒤 테오르는 카이젠의 침실로 돌아왔다.

아스텔이 보낸 시녀, 한나가 테오르를 씻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혀서 데리고 왔다.

“폐하, 저 잠옷 갈아입었어요.”

“훗. 그래, 이쪽으로 와라.”

테오르는 낡은 곰 인형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침대로 올라왔다.

이불 속으로 들어와서 카이젠의 옆에 누웠다.

테오르를 따라온 블린도 침대 옆에 마련된 쿠션 위에 냉큼 올라앉더니 배를 깔고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폐하. 황자님. 두 분 모두 편히 주무십시오.”

한나는 테오르를 침대에 눕혀 준 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테오르가 이불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한나도 잘자.”

문이 닫히고 단둘이 남겨졌다.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넓은 침실이었지만 방 안은 따뜻했다.

벽난로의 불빛이 실내에 훈훈한 기운을 더했다.

테오르는 두툼한 이불을 덮고 풀잎 같은 조그만 손으로 곰 인형을 조몰락거렸다.

아이를 옆에 재운 건 처음이었지만,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자신이 아이를 좋아하게 될 줄 몰랐는데.

카이젠은 푹신한 이불 속에 파묻힌 테오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거 더 필요한 건 없느냐?”

그 말에 테오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옛날이야기?”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요.”

‘동화라.’

테오르만큼 어릴 때는 자신도 그런 걸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20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이제는 동화 같은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카이젠은 6, 7살이 될 무렵부터 미래의 황제로 교육받기 시작했다.

산처럼 쌓인 책들을 머릿속에 구겨 넣느라 아기자기한 옛날이야기 같은 건 전부 머리에서 지워져 버렸다.

“동화는…… 잘 모르겠다.”

“왜 몰라요?”

테오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사람이 동화를 모를 수가 있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왜냐니. 어른이 되면 그런 건 잊어버리는 거야.”

테오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엄마는 다 기억하는데. 할아버지도.”

“…….”

“나쁜 할아버지도 옛날이야기를 해줬어요.”

“누가 뭘 해줬다고?”

테오르는 레스턴 공작을 항상 저렇게 불렀다.

“나쁜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해줬어요. 옛날 황제 폐하의 이야기에요.”

“우리 아버지 얘기인가 보군.”

카이젠은 레스턴 공작이 자꾸 테오르 곁에서 알짱대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 전에 아스텔은 공작은 자기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결혼을 결정하면서 한 약속이니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사고사로 위장해서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래. 동화를 얘기해 주마.”

공작도 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까.

그는 어릴 때 봤던 동화책의 내용을 떠올리려고 기억을 쥐어짜 냈다.

머릿속에서 곰이나 토끼, 왕자, 공주, 드래곤 등의 온갖 이야기가 다 뒤섞였다.

이 얘기가 저 얘기 갖고 저 얘기가 이 얘기 같았다.

‘어쩔 수 없군.’

대충 이것저것 조합해서 아무 얘기나 하나 만들어야겠다.

테오르는 5살밖에 안 됐으니 아무 얘기나 만들어서 들려주면 열심히 듣다가 잘 것 같았다.

그가 즉석에서 동화를 급조하기로 결정한 순간,

가만히 기다리던 테오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불을 턱밑까지 뒤집어쓰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럼 엄마하고 폐하 얘기해 주세요.”

“나하고 아스텔? 우리 두 사람의 어떤 이야기가 궁금한 거냐?”

“으음…….”

이불 속에서 테오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푹신한 이불 위에 빼꼼히 나와 있는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엄마하고 폐하는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어요?”

테오르는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어린아이다운 순진한 의문이었다.

“흠.”

카이젠은 아스텔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내가 아스텔을 만난 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공식적으로 공작가의 무도회 날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카이젠은 공작가의 무도회가 있기 전에 아스텔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스텔이 처음으로 황궁에 왔던 날이었을 것이다.

레스턴 공작은 황태후에게 인사를 시키려고 아스텔을 황궁에 데려왔다.

아마도 황태자의 약혼녀가 될 만한 자질이 있는지 심사받는 자리였을 것이다.

황태후궁의 정원에서 말을 타고 놀던 카이젠은 정원의 연못가에 있는 작은 소녀를 발견했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아스텔이었다.

허리까지 닿는 백금발에 새싹 같은 연녹색 눈.

어린 아스텔은 사랑스러운 요정 같았다.

‘정말 귀엽긴 했지.’

잠깐 마주쳤을 뿐이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이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찰나의 호감은 아스텔이 레스턴 공작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린 카이젠은 공작이 너무 싫어서 아스텔도 싫었다.

얼마 후 카이젠은 공작가의 무도회에 강제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해진 대본대로 아스텔에게 청혼했다.

황가의 보물인 푸른 보석을 목에 걸어주면서.

“청혼은 결혼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그래. 결혼하자는 요청이지.”

대답을 들은 테오르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다시 물었다.

“엄마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둘의 약혼은 정해져 있었다.

아스텔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행복한 척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카이젠이 황제의 명령으로 목걸이를 건네주며 청혼했듯이, 아스텔도 어른들의 명령대로 행복한 모습을 흉내 냈을 뿐이다.

‘우리 관계는 첫 단계부터 잘못됐지.’

카이젠은 또다시 쓰라린 감상을 느꼈다.

반면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테오르는 청혼 얘기를 재미있어했다.

“청혼하는 장면을 더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그 얘기가 마음에 드는 거냐?”

“엄마하고 폐하가 조그만 건 상상이 안 되지만 이 이야기는 좋아요. 동화 같아요.“

카이젠은 무도회에서 청혼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물론 아이가 알 필요가 없는 것은 전부 뺐다.

테오르는 카이젠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었지만 점점 눈꺼풀이 잠겼다.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등을 토닥였다.

“졸리면 그만 자라.”

“폐하.”

테오르가 베개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엄마는 싫다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예전에 엄마가 폐하를 많이 좋아했대요.”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느냐?”

“할아버지가요.”

테오르가 말하는 ‘할아버지’는 아스텔의 외조부다.

“우웅……. 저 조금만 잘게요.”

테오르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고 잠들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텔이 나를 좋아했다고?’

카이젠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냥 어린 테오르에게 그렇게 말해준 거겠지.’

아스텔이 자신을 좋아했으면 그렇게 쉽게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

다시 만난 뒤에도 아스텔은 일말의 온정도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연애 감정 같은 건 없었겠지만 어린 아스텔도 황태자의 약혼녀로 사느라고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스텔은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일방적으로 아스텔을 버렸지.’

자신이 아스텔에게 신뢰를 못 준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얀 달이 침실의 유리창에 푸른 빛을 비췄다.

문득 10살 때 아스텔에게 걸어줬던 푸른 목걸이가 떠올랐다.

이혼이 결정된 날.

아스텔은 그 목걸이를 황태자궁의 자기 침실에, 두 사람이 첫날밤을 보냈던 그 방 안에 남겨두고 떠났다.

그 당시에는 아스텔이 어떤 마음으로 그 목걸이를 벗어놓고 떠났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카이젠은 주인을 잃는 보석을 다시 국고에 넣으라고 명령했었다.

‘…….’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그 보석을 다시 전해줄 수 없었다.

반강제로 청혼하고 계약을 빌미로 성대한 결혼식까지 했지만, 그 보석을 다시 건네줄 수 있을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스텔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지금까지의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스텔에게 자꾸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

* * *

아스텔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테오르가 이곳에 없다는 것 때문에 밤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한나가 함께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평상시대로 일어나서 씻고 단장을 하고 황후의 업무를 시작했지만, 신경은 잔뜩 날카로워져 있었다.

“황후 폐하, 황자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다행히 테오르는 일찍 돌아왔다.

“엄마!”

“테오르. 잘 잤니?”

아스텔은 환하게 미소 지으면서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아스텔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뒤이어 카이젠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폐하, 편히 주무셨습니까?”

카이젠은 말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한나도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텔과 마찬가지로 밤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지 얼굴이 까칠해 보였다.

“나 폐하랑 같이 잤어.”

“그랬구나. 재미있었나 보네.”

아스텔은 불편한 속내를 숨기고 다정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테오르. 이제 할아버님께 가보렴. 너를 기다리고 계셨단다.”

“응!”

테오르가 나간 뒤 이번엔 한나를 내보냈다.

“한나. 피곤할 텐데 오늘은 좀 쉬어.”

한나도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한나의 눈짓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도 함께 따라 나갔다.

“폐하.”

방 안에는 아스텔과 카이젠 단둘만 남았다.

아스텔은 카이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제국의 주인이시니 무엇이든 뜻대로 하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분노 때문에 저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황자를 돌보는 건 제 책임입니다. 앞으로는 황자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시기 전에 제게 미리 알려주십시오.”

화풀이 삼아 테오르를 자기 궁으로 데려가다니.

둘의 감정싸움에 테오르를 이용했다는 것부터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황제여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말했는데.

“미안해.”

카이젠은 담담한 목소리로 사죄했다.

아스텔은 순간 조금 당황했다. 자기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카이젠은 멍하니 서 있는 아스텔에게 다시 사과했다.

“당신에게 미리 허락을 구했어야 했는데 내가 경솔했군. 사죄하지.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거야.”

“…….”

지금 고도로 비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카이젠의 표정은 진지했다. 화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래도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카이젠이 이렇게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다니. 평소의 행동을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스텔은 오늘 아침에 카이젠과 대판 싸우게 될 줄 알았다.

하루 전만 해도 카이젠은 플로린이 보낸 밀서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처럼 화를 냈었다.

그러나 지금 카이젠은 담담한 낯으로 아스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분간 일이 많아서 여기서 머물지 못할 것 같아. 일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아스텔은 또 한 번 놀랐다.

‘그동안은 매일 밤 이곳에서 자고 가더니 왜 갑자기……?’

물론 황제가 매일 밤 황후궁에서 잘 필요는 없다.

애초에 자기 궁에도 침실이 있으니까.

이제 결혼한 지 한 달이 넘었으니 잠시 떨어져 지내도 남들 보기에 이상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다. 특히 바로 어제 밀서 때문에 다퉜다는 걸 생각하면 당연히 그 일의 연장선으로 보였다.

‘역시 화가 안 풀려서 그러는 걸까?’

하지만 카이젠은 여전히 담담한 눈빛이었다. 울분에 찬 기색은 조금도 없다.

“알겠습니다, 폐하.”

아스텔로서는 카이젠이 이곳에 머물지 않는 게 좋았다. 침실 소파에 황제를 재우는 것은 아스텔에게도 불편한 일이었으니까. 밀서 일이 일어난 직후에 이런 변화가 생기면 남들이 이상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만.

황제 폐하가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여기서 자고 가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스텔이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하자 카이젠의 붉은 눈에 어두운 그늘이 생겼다.

그는 아스텔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덧붙였다.

“그래도…… 저녁에 들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않는데.

하긴 완전히 발길을 끊으면 사람들의 소문이 부풀려질 게 뻔했다.

저녁에라도 잠시 들리면 쓸데없는 소리가 좀 줄어들겠지.

“저녁에 다시 오지.”

카이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화해라고 하면 화해였지만. 뭔가 좀 찝찝한 화해였다.

* * *

카이젠은 그날 이후로 저녁마다 황후궁에 왔다가 밤이 되기 전에 돌아갔다.

테오르와 놀아주는 걸 보면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스텔에게도 평소와 다름없이 대했다.

테오르와 놀아주고 아스텔과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자기 궁으로 돌아갔다.

아스텔은 귀찮지 않아서 좋았지만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황제궁의 시녀들이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시녀들 사이의 소문을 전했다.

“뭐라고들 하는데?”

한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두 분께서 다투셨다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엔의 일이 있었던 날 황제궁에서 다투는 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날부터 카이젠은 자기 궁에서 잠을 잤다. 누가 봐도 그 일로 다퉈서 각방을 쓰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신경 쓸 것 없어. 이곳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겠지?”

“황후궁의 시종, 시녀들은 절대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잘 가르쳤습니다.”

“그럼 됐어.”

밖에서 떠들어대는 건 어쩔 수 없다. 테오르가 괜한 소리를 듣게 하지만 않으면 된다.

어차피 황제 부부가 싸웠으니 화래를 했느니 떠들어대도 더 이상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소문도 사그라들 것이다.

“황후 폐하, 레이디 나엔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시녀가 문을 열자 평범한 드레스를 입은 나엔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엔은 겁먹은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레이디 나엔.”

아스텔은 이 소녀를 황후궁에 데려온 뒤 며칠 동안 그냥 방치했다. 나엔은 한동안 황후궁에서 멍하니 책이나 보면서 지냈다. 벌을 준다고 끌고 와 놓고 아무 말도 없으니 그동안 많이 심란했겠지.

아스텔은 창백하게 질린 나엔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서 지내는 건 어때? 불편한 점은 없나?”

“괘,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그래. 불편한 점이 있으면 시녀들에게 말해.”

나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스텔의 눈치를 살폈다.

“……저, 저, 황후 폐하?”

“왜 그러지?”

나엔은 아스텔의 담담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시녀가 배정해준 방에서 쥐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다.

황후는 분명히 자신을 처벌하겠다며 이곳으로 끌고 왔다. 공식적으로 나엔의 잘못은 공작가를 감시하고 가짜 밀서를 진짜인 것처럼 황궁으로 보냈다는 것뿐이었다.

사형을 당할 만큼 큰 죄는 아니었지만 사소한 오해였다고 넘어갈 만한 일도 아니었다.

‘수녀원 같은 곳으로 가게 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황후가 자기 마음대로 처벌하겠다며 그녀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황후가 언제쯤 자신을 불러서 벌을 줄지 무서워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아스텔은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화가 난 것 같지도 않고 그녀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제는 무서운 걸 넘어서 궁금했다.

‘대체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나엔은 용기를 내서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저를 처벌하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스텔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순순히 대답했다.

“물론 나엔 양은 이곳에서 처벌을 받아야지.”

“…….”

역시 그렇구나.

이제 무슨 벌을 줄 건지 말하겠지. 나엔은 어떤 처벌이 내릴지 두려웠다. 잔뜩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아스텔은 상상도 못 한 말을 했다.

“나엔 양의 처벌은 황후궁에서 일하는 거야.”

“네……?”

생각지도 못한 소리였다. 나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 여기서요?”

아스텔은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귀족 영애가 황후궁에서 일하는 것은 과거에는 흔한 일이었지.”

옛 시대에는 황후궁에서 일할 수 있는 건 귀족 영애들에게 몹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황후 곁에서 일하면서 궁정 예법도 배우고 대저택의 살림을 관리하는 법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그런 관습은 조금씩 사라졌지만, 지금도 가난한 귀족 집안 딸들은 황궁에서 시녀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녀처럼 일하는 건 아니야. 시녀들은 봉급을 받고 정해진 시간만 일하니까. 나엔 양은 내가 부를 때마다 와서 내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해.”

“무, 무슨 일을……?”

“내 일을 도우면서 잡일을 하는 거지. 서류를 정리하는 것도 돕고. 장부를 보고 계산하는 법은 배웠겠지?”

“네, 네. 배웠습니다.”

결혼하면 저택의 살림을 맡아서 해야 하니까. 귀족 영애들은 예법이나 교양과목과 함께 숫자를 계산하고 장부를 정리하는 법도 배웠다.

“그럼 충분히 도움이 될 거야. 모르는 건 내가 알려줄 테니까.”

“그게…… 전부인가요?”

이게 벌이라니?

나엔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스텔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세우며 물었다.

“왜? 다른 벌을 받고 싶나?”

“아, 아뇨, 아닙니다.”

나엔은 황급히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스텔은 그 모습이 웃긴지 작게 미소 지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나엔 양은 실수를 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나엔은 조금 얼떨떨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지 두려웠지만. 지금으로서는 고맙다고 납작 엎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늘부터 시작해. 서재에 가서 내가 말하는 것들을 찾아와.”

나엔은 아스텔이 적어준 쪽지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쪽지에는 몇 권의 책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뭔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다른 분이네.’

황후는 무척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엔이 생각한 아스텔은 마리안 언니를 모함해서 감옥에 집어넣고, 어머니에게 누명을 씌워서 수도로 쫓아 보낸 악녀였다.

무섭고 사악한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인 후작 부인이 매일같이 아스텔을 욕해서 나쁜 이미지가 더 강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차분하게 미소 짓는 황후 폐하에게선 침착한 기품이 느껴졌다. 단정한 외모에는 나엔이 상상하던 사악한 악녀의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나엔은 손에 든 쪽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마른 종이의 감촉에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황후궁의 시녀는 나엔에게 필요하면 후작가의 저택에서 옷과 소지품을 가져와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갈아입을 옷을 보내달라고 집에 연락을 보냈다. 그런데 저택에서 보내온 드레스 안에 작은 쪽지가 있었다. 둘째 언니가 보낸 편지였다.

플로린은 나엔이 황후궁에 머물게 됐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달라고 연락을 보냈다.

‘거기 있는 동안 뭐든 보고 들은 것들을 알려줘.’

그러면서 외궁에서 허드렛일 하는 시녀 중 한 명의 이름을 적었다. 쪽지를 적어서 그 여자에게 전하라고 했다.

나엔은 플로린의 쪽지를 황급히 불에 태워버렸다.

* * *

벨리안은 복도 모퉁이에서 서성이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얼른 반대편으로 나갔다.

“아, 시종장님.”

“백작님.”

복도로 나오던 시종장이 그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벨리안은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요즘도 많이 바쁘시죠? 지난달에는 국혼 때문에 정말 힘들었잖아요.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괜찮습니다.”

중년의 시종장은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벨리안은 흔들림 없는 미소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좀 있습니다. 제 친척 중에 사정이 좋지 못한 아가씨가 있는데 황궁에 시녀로 일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 애를 이곳에 고용해 주시면 안 될까요?”

“황제궁의 시녀로 말입니까?”

귀족 가문의 방계 일족이 황궁에서 시녀나 시종으로 일하는 일은 흔했다.

시종장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쉽게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해 두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벨리안이 시녀로 부탁한 여자는 대신들과 논의한 끝에 결정한 황제 폐하의 측실 후보였다.

귀족이긴 해도 높은 가문의 영애는 아니었다.

그러니 시녀로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황제와 만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공식적으로 안건을 올리면 황제가 반대할 게 분명하니, 시녀로 두면 크게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만약 잘 안되면 다시 돌려보내면 되고.’

벨리안으로서는 크게 아쉬울 게 없었다.

* * *

아스텔은 길게 적힌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내무부에서 이번 황궁 행사의 예산안을 적어 보낸 보고서였다.

긴 글을 세세하게 검토한 뒤 아스텔은 서류를 한나에게 건넸다.

“예산은 이대로 하면 될 것 같아.”

“예, 황후 폐하.”

황궁 연회가 며칠 뒤로 다가왔다.

이번 황궁 연회는 아스텔이 처음으로 황후로서 귀족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황후로서 처음 준비하는 황궁 행사이기도 했다.

결혼식은 카이젠이 직접 준비해서 별로 할 일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황후인 아스텔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주관했다.

황후가 되어 맞이하는 첫 행사인 만큼 빈틈없이 완벽하게 준비해야만 한다.

“남은 서류도 정리해서 내무대신에게 보내.”

한나에게 지시를 끝낸 뒤, 아스텔은 한쪽 구석에 초조하게 서 있는 나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엔 양. 내가 명령한 건 가져왔나?”

”예, 예. 황후 폐하. 준비해 뒀습니다.“

나엔이 두툼한 서류철을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엔은 그동안 아스텔의 명령대로 황후궁에서 일을 했다.

일이라고 해도 간단한 심부름이나 메모를 받아 적는 정도의 단순한 업무였다.

아스텔은 나엔에게 현재 사교계의 정보나 각 가문의 관계에 대해 아는 대로 적어오게 했다.

‘초대장을 보내는 데 필요하니까.’

그렇게 이유를 댔지만 그보다는 현재 수도의 사교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아스텔은 지난 6년간 수도를 떠나 있었고, 가족은 아버지인 공작과 오빠 프리츠뿐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영애들은 대부분 가문이 몰락해서 수도를 떠났다.

각 가문의 공식적인 정보는 다 외우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사교계라면 더욱 그렇지.’

몇 번 질문을 던져본 결과 나엔은 의외로 사교계의 귀부인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어머니인 후작 부인이 사교 모임에 갔다 올 때마다 나엔을 붙잡고 그날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털어놨다고 한다.

아스텔은 가문별로 적어놓은 긴 설명문을 훑어보고 나서 나엔의 불안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엔은 여전히 아스텔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이건 의외의 수확이네.’

귀부인들의 관계와 세력 판도를 알아야 사교계를 휘어잡을 수 있고, 사소하게는 이번 연회도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나엔은 머리가 나쁘진 않았지만 어수룩한 면이 있어서 이런 상황에도 아스텔이 요청한 일은 거짓 없이 해왔다.

“잘 정리했네. 수고했어.”

“가,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아스텔은 나엔의 보고서를 밀어놓으며 말했다.

“그래. 이번 행사에는 레이디 플로린에게도 초대장을 보내도록 해.”

“네, 네?”

나엔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저희 언니에게요?”

아스텔은 다정한 미소를 가장하며 설명했다.

“후작 부인의 일로 후작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플로린 양은 죄가 없지. 이대로 두면 혼삿길도 막힐 테니 내가 도와주고 싶군. 젊은 영애들을 보호해 주고 혼처를 마련해 주는 것도 황후의 의무니까.”

“아…….”

설명만 들으면 타당한 말이었다.

원래 황후는 가문이 몰락하거나 보호자가 없는 귀족 영애들을 돌봐주고 후원해 줘야 한다.

나엔은 이해한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순해 보이는 눈망울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감돌았다.

플로린은 아스텔을 해치려고 했는데, 왜 도와주려는 건지.

혹시 뭔가 음모가 아닌지 무서운 모양이다.

‘분명 플로린은 이 어리숙한 동생에게 황후궁의 정보를 알아오라고 했겠지.’

나엔을 감시하던 시녀는 나엔이 몰래 어떤 하녀와 만나는 걸 봤다고 했다.

혼처 얘기를 들으면 플로린은 아스텔이 자신을 강제로 결혼시켜서 보복하려는 줄 알고 또다시 하찮은 음모를 꾸밀 것이다.

시녀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와서 알렸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이젠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젠은 안으로 들어서다가 나엔을 보고 멈춰 섰다.

그는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나엔에게 불쾌한 눈빛을 던졌다.

아스텔은 얼른 나엔을 내보냈다.

“나엔 양. 이제 그만 물러가서 쉬어.”

“네, 황후 폐하.”

나엔이 조심조심 뒷걸음질 쳐서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카이젠이 툭 내뱉었다.

“저 아이는 왜 처벌하지 않고 곁에 두는 거지?”

“성년도 안 된 소녀이니 자비를 베풀어주고 싶습니다.”

물론 그런 천사 같은 마음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카이젠도 별로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아스텔은 플로린을 함정에 빠뜨릴 계획이었다.

카이젠은 테이블에 있는 서류들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행사 준비를 하느라 힘들어 보이는군.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일이 너무 많으면 무리하지 말고 시종장에게 시켜.”

“…….”

다정한 염려가 담겨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카이젠은 매일 찾아오지만 여전히 밤에는 자기 궁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만나면 평소와 다름없이 아스텔을 대했다.

벌써 한 달 넘게 이러고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예전엔 싫어해도 매일 밤 이곳에서 자고 가더니만.

아스텔로서는 카이젠이 강압적으로 행동하던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편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오해할 게 뻔했다.

모르긴 몰라도 밖에서는 슬슬 말이 나오기 시작했으리라.

황제 부부가 다시 사이가 멀어졌다고.

‘뭐라고 떠들어대든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괜한 오해를 하면 쓸데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무슨 일이 생겨도 테오르가 위험해지지만 않으면 상관은 없지만.

“테오르는 어디 있지?”

“아직 수업 중입니다. 곧 끝날 겁니다.”

테오르는 며칠 전부터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가정교사는 아스텔이 원한 대로 세르벨이었다.

그래봤자 매일 2, 3시간 정도 간단한 기초 수업을 하고 검술 자세나 좀 배우는 정도였다만.

그나마도 힘들게 허락을 얻어낸 것이었다.

수업 얘기가 나오자마자 카이젠은 미간을 찌푸렸다.

“힘들어하지 않아? 매일 수업하는 건 너무 힘들지도 몰라. 테오르는 아직 5살이라고.”

“폐하께서는 4살 때부터 교사들에게 배우셨는데요.”

아스텔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달랬다.

테오르는 수업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재미있어했다.

힘들어하는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아스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생각해 뒀던 화제를 꺼냈다.

“물론 폐하께서는 4살 때 황태자가 되셨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요.”

“그랬지.”

카이젠은 여전히 테오르를 매일 교육시키는 게 싫은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스텔을 향했다.

“이번 행사가 끝나면 테오르를 황태자로 정할 거야.”

“폐하, 테오르는 아직……. 그건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나는 4살에 황태자가 되었어. 늦어지면 오히려 말이 더 많을 거야.”

카이젠은 조금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테오르는 당연히 내 후계자야.”

결혼 전에 이미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 후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황태자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아스텔도 황태자 지위가 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젠과의 관계가 벌써 이렇게 되고 있으니, 지금 당장 테오르를 황태자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스텔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잠시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들자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붉은 눈이 보였다.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 걱정할 것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과 테오르를 지킬 거니까.”

* * *

레스턴 공작은 황후궁의 입구를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문이 익숙해진 시종들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문을 열어줬다. 황후궁의 시종들은 그와 단순히 안면만 익힌 게 아니라 물질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크로이첸 후작이 실각하면서 공작가의 저택에는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 황제의 심복이었던 크로이첸가는 몰락하고 레스턴 가문의 딸이 황후가 되고 어린 황자까지 데리고 왔다.

심지어 황제는 프리츠를 서부의 관리자로 임명해서 서부 영지로 내려보냈다.

귀족들은 앞다퉈서 공작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동안 그를 적대시하던 귀족들마저 공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찾아와서 선물과 아부를 늘어놓았다.

모든 게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다. 저택의 늙은 집사는 공작가가 다시 위세를 되찾았다며 매일 감동해서 울고 다녔다. 하지만 레스턴 공작은 상황이 그렇게 녹록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황제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으니.’

지금의 이 행복한 현실은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빠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스텔이 황제의 사랑을 잃으면 상황은 다시 나락으로 처박힐 것이다.

공작은 그런 미래가 오기 전에 황제를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기회를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완벽한 기회가 올 때까지 아스텔이 황제의 마음을 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황후궁에서는 끊임없이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둘이 벌써부터 각방을 쓴다고 한다.

‘쯧쯧.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황제의 측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합심해서 새로운 여자를 황제에게 들이밀기로 했단다.

이미 적임자를 찾아서 황궁에 들여보냈다고.

그 계획에 참여한 귀족 중 한 명이 그에게 달려와서 말해줬다.

공작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저택을 나섰다.

황자의 놀이방으로 들어서자 테오르와 칼렌베르크 후작이 보였다.

테오르는 테이블에 앉아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쓰는 거예요.”

“잘 배웠구나.”

흐뭇한 눈빛으로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테오르도 공작을 보고 손을 멈췄다. 두 사람 모두 왜 왔냐는 시선이었다. 불청객 취급이었지만 공작은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테오르에게 다가갔다.

“우리 황자님, 뭘 하고 계십니까?”

“……오늘 배운 걸 쓰고 있어요.”

테오르는 궁정 예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 밉살스러운 외조부에게도 공손하게 말하게 됐다.

종이에 적힌 건 몇 개의 문장이었다.

교사로 온 세르벨이 긴 문장을 쓸 수 있게 문법을 가르쳐 주는 모양이다.

‘하필이면 그자의 양아들을 스승으로 임명하다니.’

아스텔이 왜 에클렌 백작의 양아들을 황자의 스승으로 정했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여전히 탐탁지 않았다.

“잘하시는군요. 과연 우리 황자님께서는 황후 폐하를 닮아서 총명하십니다.”

그가 기특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테오르는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서 피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곰 인형을 끌어안고 후작의 품으로 도망쳤다.

후작은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왔나?”

용건이 없으면 가라는 말투였다.

“우리 황자님을 만나러 왔지요.”

“난 외할아버지 싫어.”

테오르는 곰 인형을 끌어안고 후작에게 딱 붙어서 그를 경계했다.

후작의 어깨 너머로 곰 인형의 머리가 보이고 테오르의 얼굴이 빼꼼 보였다.

레스턴 공작은 그런 외손자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황자님, 곰 인형보다 동생을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동생?”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테오르가 고개를 내밀고 눈을 깜빡였다.

붉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공작은 잔잔한 눈웃음을 지으며 테오르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우리 황자님. 매일 혼자 계시니 외롭지 않으십니까?”

“혼자 아닌데. 레빈이 있는데. 블린도.”

“……블린이 뭡니까? 팬케이크?”

“강아지.”

테오르가 테이블 옆에 얌전히 배를 깔고 누워 있는 금색 사냥개를 가리켰다.

“그렇지만 인형이나 개는 말을 못 하니까 재미없지 않습니까? 동생이 생기면 매일같이 놀고 재미있는 얘기도 하고, 공부도 같이하고, 아주 즐거울 텐데요.”

테오르는 그 달콤한 목소리를 열심히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하지만 공작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테오르를 끌어안고 있던 칼렌베르크 후작이 공작에게 위협적으로 경고했다.

“어린 황자님 앞에서 별소리를 다 하는군. 할 얘기가 그것뿐이면 그만 돌아가게.”

후작은 그를 경멸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린 테오르가 있어서 차마 더 심한 말은 못 하는 듯했지만.

가만히 안겨 있던 테오르가 불쑥 끼어들었다.

“난 동생 싫어.”

“예?”

“난 동생 싫어. 동생 필요 없어.”

테오르는 몇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황제 폐하를 만나기 전, 시골에 있는 작은 저택에서 살 때의 일이었다.

저택 근처엔 다른 사람들이 사는 마을도 있었다. 조그만 마을이었지만 근처에는 테오르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다.

테오르는 가끔 저택 근처에 놀러 오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놀곤 했었다. 개중엔 어린 동생과 함께 노는 애들도 많았다.

동생이 없는 테오르는 손을 붙잡고 어울려 다니는 형제자매들을 보면서 동생이라는 개념을 처음 배웠다.

그날 동생을 갖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다. 그때 집에는 그레텔 이모도 와 있었다. 그레텔은 테오르를 붙잡고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동생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야. 동생을 만들려면 엄마가 몹시 아프고 위험할 수도 있어.’

나중에 상황을 들은 할아버지도 그 말에 동의했다. 왜 아픈 건지는 두 사람 다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테오르는 그 말을 듣고 무서워서 금방 포기했다.

엄마가 아프면 싫다. 동생은 없어도 된다. 엄마가 아프고 위험한 건 싫어.

나는 엄마가 제일 좋으니까.

공작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어른이라는 것들이 어린애한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지.”

“자네가 하는 말이 더 쓰잘데없지.”

후작은 품 안에 있는 테오르를 토닥여준 뒤 바닥에 내려놓았다.

“테오르. 이제 그만 한나에게 가봐라.”

“네, 할아버지.”

테오르는 공작에게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얌전히 앉아 있던 사냥개도 테오르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닙니다.”

테오르가 사라지자마자 레스턴 공작은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당초 어린 황자에게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황자가 아니라 늙은 후작이었다.

공작은 공손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아버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황제가 아스텔에게 관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난 자네 아버님이 아닐세.”

“안타깝지만 지금은 아스텔의 지위는 물론이고, 우리 가문과 어린 황자님의 안전까지도 아스텔에 대한 황제의 총애에 매달려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칼렌베르크 후작은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최근에 황제는 잠시 이곳에 들렀다가 금방 자기 궁으로 가버렸다. 테오르를 잠시 봐주고 아스텔과 대화를 좀 나누는 게 전부였다. 이런 상황이 시작된 건 크로이첸 가문의 일과 관련해서 다툰 뒤부터였다.

‘남들이 보기엔 부부 관계가 위태로운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후작은 애초에 위태로울 만한 관계도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로만 부부일 뿐 아스텔은 처음부터 카이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진짜 부부로 사는 것은 더 끔찍할 테니까. 하지만 갑자기 카이젠이 돌변하는 바람에 후작도 조금 심란해졌다.

레스턴 공작의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아스텔과 카이젠의 계약도, 아스텔과 테오르의 처지도 온전히 카이젠의 마음에 달려 있다.

카이젠이 두 사람에게 애정을 잃으면 계약이고 뭐고 지키지도 않고 내팽개칠 수도 있으니까.

‘정말 어처구니없는 상황이군.’

억지로 결혼을 한 것만으로도 한스러운데, 이제는 아스텔이 카이젠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밀었다.

공작은 그의 눈치를 보며 쐐기를 박았다.

“황제의 신하들이 이미 다른 여자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가만히 두고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여자를 데려왔다고?”

후작은 놀라서 되물었다.

그가 섬겼던 전전대 황제는 여색을 몹시 밝혔다. 그 시절에는 황제의 애첩들 때문에 황궁 안이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공작은 그의 놀란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뭐, 언젠가 황제가 아스텔에게 흥미를 잃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요.”

공작 자신이 다시 기반을 좀 얻으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그때까지는 아스텔이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도 다행이지요. 황제가 아스텔에게는 조금 흥미를 잃었어도 황자에게는 애정이 지극하니까요.”

공작 자신도 그랬다.

그의 아내이자 아스텔의 어머니, 제클린은 아름답고 우아한 숙녀였다.

하지만 부부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아내는 훌륭한 레이디였지만 아스텔과 비슷하게 미련한 구석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성격도 가치관도 안 맞아서 자주 다퉜다.

그래도 결혼 생활이 유지된 이유는 프리츠 때문이었다.

공작은 아내에게 화가 날 때마다 둘 사이에 가문의 후계자가 될 아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참고 참았다.

물론 황후가 될 딸을 낳아야 한다는 좀 더 거시적은 목표도 있었지만.

“그게 내 앞에서 할 소리라고 생각하느냐?”

그의 말을 듣던 칼렌베르크 후작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버럭 화를 냈다.

공작은 찔끔하는 표정으로 황급히 말을 돌렸다.

“프리츠 녀석은 서부에 내려가 있으니 도와줄 사람은 아비인 저밖에 없습니다.”

공작은 조금도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둘을 화해시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후작도 동의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더 복잡한 일만 생길 것 같으니.

칼렌베르크 후작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아버님께서는 이름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공작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해가 저물어가는 정원엔 흐리터분한 습기가 감돌았다.

“오늘은 마침 날씨도 좋군요.”

* * *

아스텔은 저녁 식사 후에 목욕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요새는 언제나 침실에 들기 전에 테오르가 잠드는 걸 확인하러 갔다 오곤 했다.

“테오르는?”

“황자님께서는 잠시 정원의 파빌리온에 가셨습니다.”

“정원에? 이 시간에?”

“후작님께서 함께 가셨습니다.”

잠들기 전에 잠시 놀러 나간 건가.

카이젠이 이곳에서 잠을 잘 때는 그가 밤늦게까지 테오르와 놀아줬다. 하지만 이제 카이젠은 저녁을 먹자마자 돌아가 버렸다.

테오르는 밤마다 서운해했다. 요즘은 외할아버지가 테오르를 달래주느라 잠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줬다. 병정 인형을 늘어놓고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나도 가봐야겠다.”

아스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나가 능숙하게 숄을 가져다가 어깨에 걸쳐줬다. 아스텔은 바닥까지 끌리는 얇은 모슬린 잠옷 위에 숄을 걸치고 복도로 나갔다.

어둠이 내린 정원엔 조용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황후궁의 정원에 있는 파빌리온은 휴식실의 유리문에서부터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덕분에 우산 없이도 비를 맞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잠옷 차림의 테오르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엄마!”

“테오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파빌리온 안에는 테오르와 할아버지가 함께 있었다. 솜인형 몇 개와 따뜻한 찻잔도 보였다. 함께 있던 외조부가 웃으며 말했다.

“테오르가 잠이 안 온다고 해서 잠시 나왔다. 나도 머리가 아파서 바람도 쐴 겸.”

외조부의 주름진 눈가엔 지친 기색이 감돌았다. 항상 테오르를 돌봐주느라 피곤하신 모양이다. 아스텔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 피곤하실 텐데 먼저 주무세요. 이제 제가 돌볼게요.”

“그래주겠느냐.”

후작은 테오르에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돌아갔다. 역시 많이 피곤하셨구나 싶어서 아스텔은 더욱 미안해졌다.

“테오르. 뭘 하고 놀고 있었니?”

“인형을 가지고 놀았어.”

테오르가 파빌리온의 의자에 놓인 작은 곰 인형을 가리켰다.

“얘는 레빈의 동생이야.”

“응?”

“레빈 동생. 레빈이 형이야.”

폭신한 곰 인형은 이곳에 와서 새로 사온 것이었다.

레빈보다 좀 더 작았다. 갑자기 왜 동생인 걸까.

“테오르. 혹시 또 동생을 갖고 싶니?”

예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잘 달래서 금방 포기하긴 했는데.

“아니. 동생 싫어. 엄마 아픈 거 싫어.”

아스텔은 웃으며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곳 생활에 더 익숙해지면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를 구해줄게.”

나이가 좀 더 들면 함께 놀 수 있는 또래 친구를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 너머로 비에 젖은 정원이 보였다. 이슬같이 맑은 비가 조용한 정원을 흠뻑 적셨다. 하얀 달이 촉촉한 풀잎 위에 은은한 달빛을 더했다.

“테오르. 이제 그만 자러 가야지.”

“응.”

아스텔은 테오르의 인형을 정리했다.

그때 황후궁 쪽에서 통하는 회랑에 불빛이 아른거렸다.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잠시 후 익숙한 사람이 도착했다.

“폐하?”

카이젠이 시종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테오르가 반가워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조금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폐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카이젠은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아스텔, 나하고 얘기 좀 해.”

카이젠은 황후궁에 들러서 아스텔을 만난 뒤 자기 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 직전에 테오르도 만나서 함께 놀아주고 저녁을 먹는 것도 보고 왔다.

테오르가 오늘 새로 배운 거라며 몇 개의 문장을 자랑스럽게 써 보일 때는 기분이 조금 미묘하긴 했지만.

카이젠은 찜찜한 기분을 숨기고 장하다고 한껏 칭찬을 해줬다. 어린 테오르가 점점 이곳 생활에 적응해가는 걸 보니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반면 아스텔과의 관계는 여전히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매일 각자 할 일만 하고 저녁에 대화 좀 하다가 자러 가는 게 다였다. 대화의 주제도 그날 있었던 일을 간단히 말하는 게 끝이었다. 요즘은 아스텔보다 벨리안이나 다른 대신들과 더 대화를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계약 결혼이라는 것이 원래 이런 것이겠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폐하, 차를 가져왔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더니 못 보던 시녀가 서 있었다.

붉은 머리의 젊은 시녀였다.

‘새로 온 시녀라고 했었나?’

기분상인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부터 이 시녀가 유독 자주 보였다.

붉은 머리 시녀는 카이젠을 힐끔 올려다봤다. 푸른 눈동자가 이채를 담고 반짝인다. 제법 고운 얼굴이었다.

‘조심스러운 성격인 것 같진 않군.’

시종장이 직접 뽑았다고 했나. 갑자기 새로운 시녀를 뽑아 들이다니. 그것도 이렇게 젊고 경험도 별로 없어 보이는 젊은 시녀를.

이게 무슨 의미인지 눈치채지 못한다면 바보일 것이다.

‘아스텔과 사이가 안 좋아 보인다는 거겠지.’

조금 소원해 보인다고 이렇게 금방 쓸데없는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내 신하들이 이렇게 성실한 줄은 몰랐군.’

다들 할 일이 부족한 모양이다.

당장 내일부터 업무량을 늘려줄 생각을 하면서 시녀를 물렸다.

“그래, 두고 가라.”

“네……?”

시녀가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다.

“놔두고 가라고 했다.”

짜증스러운 말투에 시녀는 기죽은 얼굴로 다시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시종장이 그에게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폐하, 황자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선물?”

시종장은 그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칼렌베르크 후작님의 시종이 가져왔습니다. 황자님께서 폐하께 드리고 싶다고 부탁하신 모양입니다.”

시종장이 가져온 건 손바닥만 한 나무 상자였다.

테오르의 놀이방에 있던 장난감 상자였던 것 같다.

열어봤더니 반으로 접어 놓은 그림이 나왔다.

“황자님께서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폐하께 드리고 싶다고 보내셨습니다.”

시종장이 웃음을 머금고 설명했다.

그 말대로 작은 종이에 이것저것 많이 그려져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테오르와 아스텔이었다. 그리고 강아지와 인형, 후작으로 보이는 남자. 한쪽에는 카이젠 자신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도 있다. 어린아이가 그린 어설픈 그림이었지만 귀여웠다.

카이젠은 물감이 마른 자리를 매만지면서 웃다가 시종장을 향했다.

“여기 놔둬야겠어. 액자를 찾아와.”

시종장은 액자까지 가져오라는 말에 조금 놀라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알겠다고 하고 나갔다.

그림을 책상 위에 놓고 상자는 옆으로 치우려는데 상자 안에 뭔가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만 한 크기의 풀다발이 구석에 박혀 있었다.

‘이게 뭐지?’

카이젠은 그걸 밖으로 꺼냈다.

말린 풀을 작게 잘라서 묶어놓은 것이었다.

‘왜 이런 게 들어 있지?’

테오르가 정원에서 가지고 놀다가 넣어둔 건가. 장난감과 함께 있는 상자니까 소꿉놀이를 하다가 그냥 놔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버리려고 집어들었는데 순간 낯설지 않은 향이 코를 스쳤다.

‘음?’

풀다발을 코에 대고 향을 맡았다. 씁쓸한 풀냄새 속에 독특한 향기가 희미하게 풍겼다.

카이젠은 순간 그 풀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건 약초였다. 젊은 귀부인들이 흔히 쓰는 약초.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작은 액자를 들고 돌아온 시종장이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카이젠은 대답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황후궁으로 가겠다.”

당황한 그는 아스텔을 만나러 다시 황후궁으로 향했다.

* * *

“폐하, 오늘은 여기서 자는 거예요?”

테오르가 카이젠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난처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

“잘됐다!”

테오르는 기뻐하면서 그의 품에 끌어안겼다.

그동안 저녁마다 카이젠이 돌아가 버려서 서운했던 모양이다.

카이젠은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테오르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눈치빠른 아스텔이 얼른 말했다.

“테오르. 먼저 방에 가 있으렴. 조금만 있다가 따라갈게.”

“응…….”

테오르는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카이젠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폐하도 오셔야 돼요.”

“그래, 알겠다.”

아스텔의 눈짓을 받은 시녀가 카이젠에게 다가와서 테오르를 건네받았다.

시녀가 테오르를 데리고 사라진 뒤, 카이젠도 함께 온 시종을 멀리 물렸다.

정원의 파빌리온 안에는 아스텔과 카이젠 단둘만 남았다.

“폐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카이젠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상자에 담긴 약초를 발견하고 놀라서 무작정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정작 아스텔을 마주하고 나자, 왜 이런 일로 이렇게 다급하게 쫓아왔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이젠은 손안에 쥐고 있는 마른 풀을 매만지며 어색하게 답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야.”

아스텔의 눈빛이 더 기묘해졌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이 밤중에 왜 여기까지 왔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카이젠은 한숨을 내쉬며 손안에 든 걸 보여줬다.

“테오르가 보낸 상자에 이런 게 담겨 있더군.”

아스텔은 그가 건네준 약초를 받아 들었다.

약초에 익숙한 아스텔은 보자마자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이건…… 안젤리카인가요?”

안젤리카는 임신을 촉진시키는 약초였다.

아이를 원하는 기혼 부인들은 이 약초를 곁에 두고 매일 달여먹었다.

이제는 아스텔도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약초는 황후궁에 없습니다.”

그렇겠지. 당신이 이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순간 그렇게 말할 뻔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할아버님께서 실수로 확인을 못 하시고 그냥 보내셨나 봅니다.”

“글쎄, 단순한 실수인지 모르겠는데.”

“네?”

“오늘도 당신 아버지가 다녀갔나?”

“…….”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젠은 한숨 섞인 비웃음을 흘렸다.

“딱 당신 아버지가 할 만한 짓이군.”

아스텔이 아이를 간절하게 원한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던 거겠지. 자신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주면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좋아질 거라고 멋대로 추측한 모양이다.

‘하긴 평범한 귀족 남자이라면 이런 걸 발견하고 흥미가 생길지도 모르지.’

대부분의 귀족들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도 자식은 많이 갖길 바란다.

자식이 많아야 가문이 번창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었고, 이 결혼은 평범한 결혼이 아니었다.

아스텔이 이제 와서 또다시 아이를 원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혹시라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미래에는 둘의 관계가 변하지 않을까. 하는 한 줄기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자신은 그런 희망을 가질 자격도 없다는 것을.

“제 아버지가 괜한 짓을 해서 폐하를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아스텔은 난처한 얼굴로 사죄했다.

“신경 쓸 것 없어. 당신 아버지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정원에는 여전히 축축한 빗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카이젠은 흐린 물안개가 감도는 화단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오해하는 모양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아스텔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잠시 피했을 뿐인데.

며칠 새에 다들 오해를 하고 이상한 짓을 꾸며댄다.

알고는 있었지만 황궁에서 부부로 살아가는 건 힘겨운 일이었다.

“오늘은 여기 머물겠어.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돌아가면 더 이상하게 보겠지.”

“송구합니다, 폐하.”

아스텔은 잠옷 위에 얇은 숄을 걸친 차림새였다.

습기가 감도는 정원.

은은한 등불이 밝혀진 파빌리온 안에서 새하얀 모슬린 잠옷을 입고 서 있는 아스텔은 우아하면서도 가녀린 모습이었다.

카이젠은 귓가가 달아오르는 걸 감추기 위해 얼른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다면 가끔씩 이곳에 머물러도 될까?”

아스텔은 조금 놀란 듯이 그를 올려다봤다.

카이젠은 얼른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예전처럼 밖에서 잘 테니까.”

그는 아스텔에게서 몸을 돌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뭔가를 원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

“…….”

아스텔은 말없이 카이젠을 응시했다. 그의 쓸쓸한 얼굴에 그림자가 비쳤다.

이런 밤에 단둘이 나와 있어서일까.

오늘따라 카이젠이 조금은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 * *

“황후가 뭐라고 했다고?”

저택 안에서 조용히 지내던 플로린은 시녀의 말을 듣고 노발대발했다.

오늘 아침에 나엔이 황후의 소식을 전해왔다.

황후가 그녀를 황궁 연회에 초대했고, 어머니인 후작부인 대신 혼처를 찾아주겠다고 했단다.

“혼처라니?”

그 말을 듣자 분노가 치솟았다.

‘보복할 길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내게 복수를 하려고?’

플로린은 아스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지난일에 대한 앙갚음으로 결혼을 강요할 생각인 거다.

아버지인 후작이 있긴 했지만 황제가 결혼을 강요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원래 귀족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그녀에게 보복하려는 아스텔이 좋은 혼처를 찾아줄 리가 없었다.

분명 끔찍한 상대와 억지로 결혼시킬 것이다.

‘절대 그렇게 당할 수는 없어.’

결혼 얘기가 나오는 순간 플로린은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유모에게 말하지도 않고 소식을 전해온 시녀에게 명령했다.

“나엔에게 다시 연락해.”

플로린은 의자에 앉아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너무 흥분하면 안 돼.’

지나치게 분노하면 몸이 안 좋아진다.

언제나 그랬다.

나이가 들면서 남들만큼 건강을 회복하긴 했지만 자신의 몸은 아직도 허약했으니까.

플로린은 감정을 가다듬으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아스텔이 보복하려고 들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플로린 자신도 이런 상황이면 보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필이면 결혼을 들먹이다니.’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제일 화나는 건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아스텔을 이길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수도에서 쫓겨났고, 아버지도 대신 자리를 잃었다.

비록 여전히 다른 대신들과 친분이 있긴 하지만…….

약삭빠른 대신 중에 플로린을 위해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황후와 싸우려고 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황후와 정면으로 싸울 방법이 없어.’

어떻게든 황후가 복수심을 잠시라도 잊게 해야 한다.

아스텔이 복수심을 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플로린은 최대한 단순한 방법을 찾기로 했다.

황궁 안이 소란스러워지면 된다.

황궁 안에 큰일이 생기면 아스텔은 정신없이 바빠진다.

사소한 복수심 같은 건 신경 쓸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스텔을 제일 당황하게 할 만한 존재가 하나 있었다.

테오르였다.

‘황후에게는 어린 황자가 제일 중요하겠지.’

황자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아스텔도 이성을 잃고 연회니 결혼식이니 하는 일은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물론 황자를 죽이거나 해칠 생각은 없다.

그건 가문이 멸문당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니까.

소란만 피우면 된다.

지금은 무슨 일이 생겨도 죄를 대신 덮어쓸 아주 좋은 먹잇감들도 있다.

‘나엔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위험하면 다프네 그 교활한 계집애도 있고.’

내무대신의 조카인 다프네는 마리안과 동갑으로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자작 가문의 친척이라 원래는 변변치 않은 신분이지만 욕심이 많고 마리안보다는 훨씬 머리가 좋았다.

황후감으로 점쳐지던 플로린이 이런 처지가 되자 다프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궁으로 들어가서 시녀가 됐다고 한다.

플로린은 고운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종이를 꺼내서 나엔에게 보낼 쪽지를 적었다.

* * *

“어젯밤에 왜 그런 짓을 하셨어요?”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스텔은 외조부를 만나자마자 어젯밤 일부터 따져 물었다.

아스텔이 화난 듯이 묻자 외할아버지도 놀란 얼굴을 했다.

“이상한 일이라도 있었느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셨어요?”

아스텔은 한나에게 시켜서 약초가 왜 테오르의 장난감 상자에 있었는지 알아보게 했다.

상자를 가져간 사람은 외할아버지를 시중드는 시종이었다.

그는 후작님도 허락하신 일이라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네 아비가 부탁을 했다. 그런 걸 넣을 줄은 몰랐구나.”

외할아버지는 민망한 낯으로 사정을 털어놨다.

어제 아스텔의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이 와서 간곡하게 부탁을 했단다.

아스텔과 카이젠을 화해시키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은 몹시 단순했다.

카이젠이 옛정을 되새길 수 있게 테오르의 그림을 보내면서 아스텔의 어린 시절 물건을 같이 넣어서 보내자고.

그걸 보면 함께 자라던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자신이 아스텔을 버린 과거도 생각날 테니 옛 추억과 죄책감이 동시에 들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스텔이 나하고 화해하고 싶어서 이런 방법을 생각해 냈구나’ 하는 생각에 카이젠이 먼저 마음을 풀고 다가올 거라고 했다.

“……네 아비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은 내가 어리석었다.”

외할아버지의 푸른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아스텔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아버지다운 짓이네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임신촉진제 같은 걸 넣어서 보내다니.

외할아버지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황제가 뭐라고 하더냐?”

“별 얘기 없었어요. 아버지 짓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던데요.”

하긴 상식적으로 아스텔이 그런 걸 갖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외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괜한 짓을 했다.”

“아니에요. 저 때문에 걱정하신 거잖아요. 괜히 심려를 끼쳐서 죄송해요.”

아스텔은 외할아버지가 뭣 때문에 아버지의 감언이설에 넘어갔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카이젠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것 같아서 불안하셨던 거겠지.

“그래도 그 일 덕분에 폐하는 오랜만에 이곳에서 주무셨어요.”

여전히 침실 앞에 있는 소파에서 잠을 청했지만.

“폐하와 화해한 거냐?”

“화해라고 할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네, 조금은 풀어진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잠들기 전까지 와인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아버지에 대한 험담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단둘이 가진 편안한 시간이었다.

아스텔은 문득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새벽에 잠을 깨서 침실 문을 열었다.

유리창 밖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차가운 빗물이 어두운 밤하늘을 적시고 있었다.

하얀 달빛 아래 카이젠이 보였다.

그는 소파 위에 누운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모포를 준비해놓지 않았더니 아무것도 안 덮고 그냥 누워서 자고 있다.

평소에는 저렇게 잠들어도 괜찮아 보였지만, 오늘은 추워 보였다.

비가 와서인지 밤공기가 싸늘했다.

아스텔은 잠시 고민하다가 침실로 들어가서 옷장 안에 있는 모포를 꺼냈다.

푹신한 모포를 카이젠에게 조심스럽게 덮었다.

모포를 덮어주고 돌아서려는데 손목을 잡혔다.

아스텔은 흠칫 놀라서 몸을 돌렸다.

“아스텔.”

새하얀 달빛 아래 카이젠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진득하고 간절한 눈빛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모포를 덮어드리려고 했는데……. 주무시는 걸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스텔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카이젠은 순순히 그녀를 놔줬다.

“고마워.”

“편히 주무십시오, 폐하.”

아스텔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지금으로서는 황제가 마음을 바꾸면 안 된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외할아버지의 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대신들에 황제에게 새로운 여자를 보낸 모양이다.”

“그래요?”

언젠가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외할아버지의 침통한 말이 이어졌다.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 황제가 마음을 바꿔먹으면 너도 테오르도 위험해질 게야.”

“…….”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카이젠이 다른 여자에게 빠져서 아스텔 자신과 테오르를 멸시하는 날이 올까?

카이젠의 성격으로 보면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마찬가지로 카이젠의 냉혹한 성정을 생각하면 언제까지나 그가 아스텔 자신과 테오르에게 한없이 애정을 베풀어줄지도 미지수였다.

“황후 폐하.”

그때 갑자기 한나가 다급한 눈빛으로 들어왔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스텔은 외할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나와 함께 자기 거처로 돌아왔다.

“레이디 플로린이 레이디 나엔에게 쪽지를 보냈습니다.”

“벌써?”

정말 빠르네.

결혼을 강요받는다는 게 플로린에겐 그 정도로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나보다.

‘강제로 결혼을 강요받는 건 충분히 끔찍한 알이긴 하지.’

아스텔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식으로 보복하지 않을 것이다.

플로린이 그녀를 잘 안다면 이게 단순히 협박에 불과하다는 걸 눈치챌 텐데.

다행히 플로린은 아스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쪽지는 가져왔어?”

“여기 있습니다.”

한나가 작은 종이를 꺼내놓았다.

한나는 그동안 시녀들에게 나엔을 감시하게 했다.

나엔이 플로린과 몰래 쪽지를 주고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외궁의 하녀가 황궁 후원의 정해진 곳에 종이를 숨겨두고 가면 나엔이 가서 찾아오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황후궁에서 일하는 나엔이 외궁의 시녀를 직접 만나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클 테니까.

그런 식으로 소통하는 것이었다.

한나는 그걸 미리 빼돌렸다고 한다.

한나가 가져온 쪽지에는 알수 없는 숫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암호네.”

정원에 쪽지를 숨겨놓으면서 글자를 그냥 적어두는 바보는 없겠지.

아스텔은 쪽지에 적힌 숫자를 유심히 살폈다.

겉보기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숫자가 순서대로 줄줄이 적혀 있었다.

“숫자가 300을 넘어가는 게 없어.”

“네, 책일까요?”

“그럴지도 몰라.”

특정한 책의 페이지와 단어 숫자를 적어서 암호로 보내는 건 지나치게 뻔한 방식이긴 했다.

하지만 나엔이라면 이런 평범한 암호를 쓸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엔은 예기치 못하게 이곳에 끌려오게 됐다.

플로린과 미리 암호 같은 걸 연습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단순한 암호를 쓸 수밖에 없었겠지.

아스텔은 한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엔이 가지고 있는 책이 있어?”

“저택에서 보내준 짐에 2, 3권 가져온 게 있을 겁니다.”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지금 나엔을 이곳으로 불러와. 내가 시킬 일이 있으니까.”

한나는 설명해 주기도 전에 아스텔의 뜻을 눈치채고 대답했다.

“그동안 나엔 양의 방에 가서 책을 찾아보겠습니다.”

잠시 후에 나엔이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황후 폐하.”

“그래, 나엔 양. 어서 와.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아.”

아스텔은 나엔을 붙잡아두고 몇 시간 동안 계속 일을 했다.

실제로도 일이 쌓여 있어서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아스텔은 보고서를 살피는 동안 나엔에게 자신의 명령을 받아 적게 했다.

나엔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아스텔이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일했다.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명령인지는 몰라도 이 소녀는 이번에도 플로린이 시키는 대로 할까?’

나엔은 이 와중에도 아스텔이 시킨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었다.

아스텔은 그런 나엔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소녀는 이번에도 플로린이 시키는 대로 할까? 플로린은 이번에도 이 소녀를 이용하려는 걸 텐데.

그동안 곁에 두고 지켜본 결과 나엔은 바보가 아니었다. 조금 소심하고 둔하긴 하지만 시킨 일은 정확히 했다.

플로린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가족이라 어쩔 수 없으려나.’

힘없는 귀족 영애는 가족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가문이 몰락하면 자신의 운명도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과거엔 아스텔 자신도 그랬다.

‘플로린은 이 소녀에게 또 위험한 일을 시키겠지.’

일이 잘못되면 또다시 죄를 덮어씌울 테고.

쪽지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아스텔은 플로린의 계획을 미리 알아내서 두 자매를 모두 함정에 빠뜨릴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직 성년도 안 된 나엔을 보니 그렇게 냉혹하게 처리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나엔 양.”

펜을 잡고 열심히 글자를 쓰던 나엔이 고개를 들었다.

“황후 폐하?”

“나엔 양은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나?”

“네?”

나엔은 당황해서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택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울 것 같아서 묻는 거야. 저택에는 지금 플로린 양과 부친인 후작이 있을 텐데.”

아스텔의 직설적인 물음에 나엔은 한참 버벅이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저, 저는 저택이 그립지만 이곳 생활도 좋습니다.”

“그래? 일하는 게 힘들지는 않나?”

“네, 네에.”

아스텔은 나엔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서두를 꺼냈다.

“나엔 양. 나는 처음엔 형식적인 처벌을 하려고 나엔 양을 이곳으로 데려왔어.”

나엔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곳에 데려온 뒤로 계속 곁에 불러서 일을 시켰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나엔 양도 알겠지만 밀서 일은 실수였다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

“하지만 나엔 양은 아직 성년도 아니고 가족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희생한 거라고 생각해서 이 정도로 마무리 지은 거야.”

‘가족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희생했다’는 말이 나오자 나엔의 얼굴은 희게 질렸다.

그녀가 언니의 명령을 듣고 거짓말을 했다는 걸 대놓고 꼬집은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스텔은 그녀를 안심시키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나엔 양은 무척 성실하고 착실해서 나도 마음에 들어. 괜찮다면 앞으로도 이곳에서 나를 도와줬으면 해.”

아스텔이 그렇게 말을 끝내자 나엔의 순진한 얼굴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졌다.

설마하니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나엔은 시선을 내리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아스텔은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빛에 스쳐 가는 죄책감을 놓치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나엔은 뒤늦게 고개를 수그렸다.

“저, 저도 이곳에서 황후 폐하를 섬기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기운 없는 목소리였지만 마지막 말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아스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폐하.”

그때 한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그래. 한나.”

한나가 아스텔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암호의 해답을 찾은 걸까.

아스텔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나엔에게 미소를 보냈다.

“나엔 양. 수고했어. 마지막으로 서재에 가서 거기 있는 책을 정리하고 수확제 기록을 찾아다 주겠어?”

“수확제 기록이요?”

“그래. 오랜만이라 미리 예법 도감을 찾아보고 대비하고 싶어서.”

물론 예법 도감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나엔이 방에 돌아가기 전에 시간을 끌려는 것뿐이었다.

순진한 나엔은 별로 의심하지 않고 순순히 서재로 향했다.

나엔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아스텔은 한나에게 물었다.

“찾았어?”

“네, 예상대로 책이었습니다.”

한나는 정원에서 찾은 쪽지와 함께 암호를 해독한 쪽지를 내려놓았다.

“내용을 해석해 왔습니다.”

아스텔은 쪽지를 펴봤다.

작은 종이 안에 몇 개의 단어가 쓰여 있었다.

[황자. 애완견. 다음에. 약을. 줄 테니. 먹여라.]

“개한테 약을 먹이라고?”

이건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아스텔은 나엔에게 일부러 플로린의 결혼 얘기를 흘렸다.

플로린이 화가 나서 뭔가 새로운 음모를 꾸미게 만들려는 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블린을 죽이려고 하다니.”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계획이었다.

한나가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와 황자님께 접근하는 건 힘들 테니까요. 블린을 죽여서 혼란을 일으키고 싶은 게 아닐까요?”

“확실히 그런 생각인가 보네.”

아스텔은 테오르가 먹는 것, 입는 것 모두 철저하게 검사하게 했다.

플로린도 테오르를 해칠 생각까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니까.

플로린이 원하는 건 단지 아스텔이 자신에게 보복하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다.

그런 엄청난 짓을 꾸밀 필요는 없었다.

“확실히 블린이 독을 먹으면 황후궁이 혼란스러워지겠지.”

아스텔이 당황하고 범인을 찾느라 플로린에게 보복하려던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이니까 엄청난 사건이 되지는 않는다.

황자가 먹은 것도 아니고 사람이 목숨을 잃을 만큼도 아니니까.

황후궁 내에서만 조용히 조사할 거라고 생각해서 이런 계획을 생각해 낸 듯했다.

‘직접 찾아와서 사과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모양이군.’

한나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블린이 잘못되면 안 돼.”

원래는 플로린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게 만든 뒤 결정적인 순간 증거를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블린이 잘못되게 만들 수는 없다.

아스텔은 짧은 고민 끝에 마음을 정했다.

“우선 쪽지는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두고 나엔이 발견하게 해. 나엔에 대한 감시도 두 배로 늘리고.”

“알겠습니다.”

* * *

나엔은 아스텔이 명령한 책을 찾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황후궁은 넓고 화려한 데다 구조도 복잡했다.

처음에는 위치를 외우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어딜 가야 뭐가 있는지 훤히 알게 되었지만.

이곳에서의 대접은 좋았다.

시녀들은 다들 친절하고 상냥했다.

황후 폐하도 엄격해 보이지만 시키는 일만 잘하면 다정하게 대해줬다.

‘얼마 후엔 저택으로 돌아가게 될까?’

괜찮으면 계속 이곳에서 일해도 좋다는 아스텔의 말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하신 말씀인 걸까?

사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엔의 어머니는 황후 폐하를 해치려다가 유배를 갔고 큰언니도 황후 폐하를 모함하려다가 쫓겨났다.

황후 폐하는 나엔이 일부러 가족들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모양이다.

……괜찮다면 계속 여기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저택으로 돌아가 봤자 딱히 할 일도 없고, 자신을 반겨줄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복도를 걷고 있는데 감자기 반대편에서 동그란 공이 굴러왔다.

발치에 닿는 공을 집어 들자 저 앞에 작은 어린아이가 보였다.

“황자님?”

“그거 내 거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남자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 옆에 커다란 금색 사냥개가 함께 붙어 있었고, 몇 걸음 뒤에는 젊은 시종도 함께 있었다.

나엔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황자, 테오르는 나엔의 발치에 굴러다니고 있는 공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나엔을 관찰했다.

나엔은 조금 긴장했다.

황후궁에서 지낸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황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어린 황자님은 나엔을 자세히 살피다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네?”

뒤따라온 시종이 점잖은 말투로 지적해 줬다.

“황자님께서는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시니 레이디께 공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황자님, 제게는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나엔은 생긋 웃으면서 다시 무릎을 굽혔다.

“그냥 나엔이라고 부르세요.”

가까이서 마주친 적은 없지만 나엔은 이곳 시녀들에게서 어린 황자님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다.

대부분 황자님이 얼마나 귀엽고 착하고 말도 잘 듣는지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나엔.”

황자는 그녀의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젖살이 남은 하얀 뺨에 보조개가 패인다.

‘정말 귀여운 분이네.’

특이한 붉은 눈도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황제 폐하의 붉은 눈은 몸이 움츠러들 만큼 무서웠는데 어린 황자님의 붉은 눈동자는 보석같이 예뻤다.

“멍!”

테오르의 옆에 붙어 있던 금색 사냥개가 자신에게 관심을 달라는 듯이 짖으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테오르는 나뭇잎 같은 작은 손으로 금빛 털을 쓰다듬었다.

“얘는 블린이야.”

“부드러운 금색이라 블린이군요. 귀엽네요.”

블린은 동부에서 팬케이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엔은 어디 가는 거야?”

“황후 폐하의 명령으로 서재에 가는 중입니다.”

“서재에는 왜?”

테오르는 나엔에게 호기심을 느껴서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눈치 빠른 시종이 끼어들어서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황자님, 이제 후작님께 돌아가셔야지요.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응.”

테오르는 돌아서서 시종과 함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몸을 돌리고 나엔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나엔. 나중에 봐.”

“네, 황자님.”

나엔은 복도에 가만히 서서 어린 황자님이 사라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황자를 자신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하는 시종의 모습에 씁쓸한 기분이 밀려왔다.

다들 친절해서 잊고 있었지만 자신은 이곳에서 벌을 받고 있을 뿐이다.

역시 계속 여기 있겠다는 건 괜한 생각이었다.

나엔은 기운 없이 책을 찾아서 아스텔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아스텔은 다른 일이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엔은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저녁 무렵이라 다들 저녁 준비로 바쁜 것 같았다.

나엔은 정원으로 나가서 황궁 후원으로 통하는 길을 걸어갔다.

플로린은 나엔과 쪽지를 주고받기 위해 이곳 후원을 이용했다.

매번 정해진 나무 밑에 정해진 자리에 쪽지가 있었다.

자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매일 이곳을 찾아오면 의심을 살 테니까.

가끔 찾아와서 새로운 쪽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오늘은 약속된 자리에 쪽지가 숨겨져 있었다.

나엔은 주변을 확인한 뒤 작은 쪽지를 주워 들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엔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쪽지를 집어 들었다. 혹시 잘못 해석했나 싶어서 다시 한번 책을 확인했다. 몇 번을 다시 확인해도 그 안에 적힌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플로린이 보낸 쪽지에는 독을 줄 테니 황자의 개에게 먹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나엔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니가 왜 이런 짓을 시키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자가 키우는 애완견이 플로린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엔은 답을 찾았다.

‘지난번 결혼 얘기 때문인가.’

황후 폐하는 플로린을 연회에 초대한다는 말과 함께 덧붙여서 말했다.

플로린이 성년이 됐는데 가엾게도 혼처를 찾아줄 어머니가 없으니 자기가 도와주고 싶다고.

그 얘기는 정식으로 저택에 편지를 써서 전했다.

그걸 전할 때는 나엔도 조금 심란한 마음이 있었다.

플로린은 그 얘기를 듣고 화가 나서 이러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화가 난다고 해서 황자의 개를 죽인다니?

나엔이 알기로 플로린은 이런 식으로 쓸데없이 화풀이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대체 왤까?’

나엔은 밤새 끙끙거리며 고민한 끝에 답을 찾았다.

플로린 언니는 황후 폐하가 자기한테 보복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았다.

황후궁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거구나.

나엔은 구겨진 쪽지를 들고 심란한 마음을 곱씹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어린 황자님이 떠올랐다.

정말 귀여운 황자님이었다.

나엔 자신은 자매 중에 막내라서 동생이 없지만 그렇게 귀여운 동생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을 정도로.

나엔은 손안에 든 쪽지를 힘없이 매만졌다.

‘이건…… 역시 못할 것 같아.’

언니의 목숨이 달린 문제라든가 뭐 가문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면 마음을 독하게 먹어 보겠지만.

무슨 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죄 없는 동물을 해치고 어린 황자님을 슬프게 하는 짓을 하다니.

그런 짓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언니의 결혼 문제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직접 만나서 말해줘야겠어.’

연회 날에는 플로린도 황궁에 들어올 것이다.

그날 직접 만나서 이런 짓을 못 하겠다고 말해야지.

* * *

아스텔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화초로 가득한 정원에는 오후의 햇살이 따스하게 감돌았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빛이 비치는 정원을 구경하면서 통통한 솜인형 안에 바늘을 찔러넣고 있는데,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녀들에게 시키지 그래.”

돌아봤더니 카이젠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젠은 탁자에 놓인 바느질 상자를 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왜 당신이 이런 걸 하고 있어?”

“테오르의 인형이 또 망가져서요.”

아스텔은 들고 있던 곰 인형을 뒤집어서 뜯어진 부분을 보여줬다.

인형의 등에 손가락 한 마디만큼 구멍이 뚫려 있었다.

“너무 낡았잖아. 새 걸 사줘.”

“테오르가 이걸 제일 좋아해서요. 아이에겐 특별히 의미가 있는 인형이에요.”

“그럼 고치는 건 시녀들에게 시켜야지.”

“매번 제가 고쳐줬는걸요. 이건 너무 낡아서 고치기 힘들어요.”

아스텔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카이젠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래도 당신은 일도 바쁜데…….”

불평하는 목소리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장난감 상자 일 이후 카이젠과의 관계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다.

카이젠은 이틀에 한 번씩 이곳에서 자고 갔다.

전보다 더 일찍 와서 이렇게 다정하게 굴기도 했다.

아스텔은 화제를 돌렸다.

“연회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습니다. 문제없이 진행될 겁니다.”

“연회가 끝난 뒤엔 또 수확제 준비로 바쁘겠군.”

“그렇지요.”

황제가 매일매일 정무로 바쁘듯이 황후도 1년 내내 황궁 살림과 공식 행사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카이젠은 잠시 햇빛이 들어오는 유리창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번 수확제엔 나도 사냥 대회에 나갈 생각이야.”

“사냥 대회에 나가신다고요?”

아스텔은 놀라서 되물었다.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스텔은 얼버무렸지만 조금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 폐하가 왜 사냥 대회를 나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태자 때는 십 대 소년이니까 그런데 나가서 상을 타는 게 보기 좋았지만.

황제가 돼서까지 그러는 건 좀 이상했다.

상식적으로 황제 폐하가 나가면 아무도 즐겁게 대회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다들 폐하의 눈치만 보겠지.

카이젠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반박했다.

“나도 작년에는 나가지 않았어.”

“올해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 못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문득 십 대 시설의 사냥 대회가 떠올랐다.

카이젠은 대회에서 우승할 때마다 아스텔에게 화관을 바쳤다.

아스텔은 그 화관들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려서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 화관들은 어떻게 됐을까?’

이혼하고 수도를 떠날 때 저택에 그냥 놔두고 떠났다.

아마 시녀들이 청소하면서 버렸겠지.

“아무튼 수확제는 시종장을 불러서 일을 맡겨. 너무 무리하지 말고.”

카이젠은 화제를 돌렸다.

사냥 대회에 관해서는 더는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스텔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네, 폐하.”

아스텔의 무덤덤한 대답에 카이젠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쓸쓸한 감정을 담은 눈빛이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 * *

나엔은 기운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무렵의 정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엔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정원의 샛길을 걸어갔다.

며칠 동안 계속 불안하게 고민하다가 다시 정원에 나왔다.

지난번 플로린의 쪽지에 담을 해주지 못했다.

그 쪽지는 그날 밤에 불에 태워버렸지만.

혹시라도 플로린이 새로운 쪽지와 독을 정원에 보냈을까 봐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암호가 적힌 쪽지는 누가 발견해도 해석하지 못해서 괜찮겠지만.

그 옆에 독이 함께 숨겨져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일단 가져다가 없애는 게 좋겠어.’

그런 마음으로 정원에 나왔다.

나엔은 매번 쪽지를 놓아두는 곳으로 갔다.

나무 아래에 있는 돌을 들춰봤더니 그 밑에 작게 접힌 종이와 작은 주머니가 있었다.

‘역시 가져다 놨구나.’

나와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쪽지와 주머니를 움켜쥐고 돌아서는데 맞은편 풀숲 옆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나엔 님.”

나엔은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상대는 황후궁의 시종이었다.

그가 나엔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황후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 아니 그게…….”

황후라는 말을 듣자 당황한 가운데서도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감시했구나. 여기 올 줄 알고 기다린 걸까?

나엔은 손안에 든 주머니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저, 저……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

뭔가 변명해야 하는데 변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갑자기 정원에 와서 돌 밑에 숨겨져 있던 쪽지와 주머니를 찾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짓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시종은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

“나엔 님.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황후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십시오.”

“…….”

무의식중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엔은 주머니를 손에 쥔 채 시종을 따라갔다.

* * *

“황후 폐하. 나엔 님을 모셔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황후는 휴식실에서 남은 업무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엔은 덜덜 떨리는 다리로 걸어들어갔다.

황후는 태연한 낯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엔 양. 업무가 끝났는데 갑자기 불러와서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황후 폐하.”

나엔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스텔은 정리된 서류를 살펴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나엔 양이 플로린 양과 쪽지를 주고받는 걸 알고 있었어.”

“네?”

나엔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쪽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도 알고 있지. 분명 플로린 양이 독을 보냈을 텐데. 가져왔나?”

“그, 그게…….”

“나엔 양. 가져왔냐고 물었어.”

나엔은 손안에 든 주머니를 움켜쥐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져왔습니다…….”

아스텔은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경고했다.

“황후궁에 독약을 반입한 죄는 큰 벌을 받는다는 건 알고 있겠지?”

“저, 저는…….”

나엔은 덜덜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눈가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언니가 시킨 대로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그냥 거기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가져온 것뿐입니다.”

나엔은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언니가 황자님의 개를 죽이라고 했는데 자신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독을 정원에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가져왔다.

대충 그런 얘기였다.

나엔은 설명을 끝내고 울먹이며 애원했다.

“……제발 믿어주세요, 황후 폐하.”

아스텔은 겁에 질려서 떨고 있는 나엔을 말없이 관찰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미 나엔을 감시하면서 그동안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나엔은 지난번 플로린의 쪽지에 답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정원 근처에도 가지 않다가 오늘에서야 밖으로 나갔다.

“좋아. 믿어주지.”

나엔은 희망을 발견한 듯이 고개를 들었다.

아스텔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대신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어?”

* * *

플로린은 창가 앞을 초조하게 서성였다.

나엔에게 독이 든 주머니와 쪽지를 보낸 지 2일째였다.

황궁에서 일하는 하녀를 통해 나엔이 독을 가져갔다는 것은 확인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황후궁 안에 특별한 일이 생겼다는 소식도 없었다.

‘괜한 짓을 한 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런 짓을 하다니.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아스텔이 결혼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잠시 이성이 흐트러졌던 것 같다.

나엔은 전에 보낸 쪽지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나엔도 이번 일을 내켜 하지 않는 듯했다.

독을 가져가긴 했지만 역시 실행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걸까?

아직 아무 일도 없건만 계속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괜찮아.’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애초에 목표물은 동물일 뿐이니까.

황후궁에 독을 가져간 건 잘못이지만 애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양도 아니다.

플로린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쯤이었다.

차가운 발소리가 딱딱한 돌바닥을 밟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플로린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 문이 벌컥 열리고 익숙한 정복을 입은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디 플로린.”

황궁에 소속된 황제 직속 기사들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젊은 기사는 그녀를 무심하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황궁으로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플로린은 마음의 동요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

“저를요? 갑자기 무슨 일로요?”

그러나 기사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

좋은 일이 아니군.

기사의 무뚝뚝하고 거만한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걱정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는 걸.

“아가씨……!”

뒤늦게 유모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플로린은 그녀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내가 정신을 차리고 수습해야 해.’

“유모, 내 외투를 가져와. 지금 황궁에 가야 해.”

플로린은 기사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누가 이런 명령을 내렸죠?”

다행히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사는 그녀를 힐끗 보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입니다.”

* * *

플로린은 황제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곳에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앉은 황제가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 황후도 있었다.

주변에는 얼굴을 아는 신하들도 몇 명 있었다.

대부분 플로린의 아버지, 크로이첸 후작과 친한 사람들이었다.

플로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갔다.

불안에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침착하게 예를 갖췄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폐하?”

“네가 황자를 죽이라고 독을 보냈느냐?”

플로린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인사를 받자마자 본론부터 꺼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불려왔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 순간엔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황자를 죽이려고 독을 보냈다니?

플로린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황자의 개를 죽이라고 했지. 언제 황자를 죽이라고 했어?’

그때 그녀의 뒤에서 문이 열렸다.

돌아봤더니 창백하게 질린 나엔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엔은 플로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던 아스텔이 앞으로 나섰다.

“독을 가져온 하녀가 이미 실토했네. 이 약은 크로이첸 가문의 저택에서 받아왔다고 했어. 그대가 독과 함께 보낸 쪽지도 증거로 남아 있고.”

아스텔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옆에는 작은 주머니도 있었다.

멀리서 봐도 뭔지 알 수 있었다.

주머니는 자신이 보낸 독약이었고, 아스텔이 집어 든 종이는 독약과 함께 보낸 쪽지였다.

“쪽지의 내용을 해석했더니 이 약을 쓰라고 적혀 있더군.”

플로린은 상황을 파악했다.

나엔이 독을 가지고 있다가 황후에게 들켰다.

겁에 질린 나엔은 암호는 물론 하녀에 대한 얘기까지 전부 털어놓은 것이다.

플로린은 나엔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이걸 다 털어놓다니. 제정신이야?’

나엔은 덜덜 떨면서 플로린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수그렸다.

‘저런 멍청한 애를 믿은 게 잘못이지.’

역시 이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시금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고?”

“제가 관여되었다는 증거는 없잖아요?”

“독을 가져온 하녀는 크로이첸 가문에서 받아온 돈과 보석을 숨겨두고 있었어. 독을 받아올 때 만났던 시녀도 기억하던데. 그 시녀를 데려다가 심문해 보면 알겠지.”

“…….”

플로린은 아스텔의 말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일개 시녀가 목숨을 바쳐가며 의리를 지킬 리가 없다.

그런 식으로 조사하면 독을 보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어떤 독인지 볼 수 있을까요?”

“뭐?”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이 플로린을 쳐다봤다.

주변의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독인지 보면 저희 가문에서 나온 건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카이젠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코웃음 쳤다.

하지만 아스텔은 플로린의 말에 동의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아스텔은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종이를 펼쳐놓고 책상 위에 놓인 주머니를 들어서 안에 있는 가루를 종이 위에 쏟았다.

하얀 종이에 노란색의 고운 가루가 조금 쏟아졌다.

자신이 보낸 약이 맞았다.

플로린은 조금 안도했다.

“이 독이 저희 가문에서 나왔다고 해도.”

플로린은 순진한 얼굴을 가장하며 다시 물었다.

“이게 사람을 해칠 만한 독약이었나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저희 가문에서는 사람을 해칠 만한 무서운 약은 저택 안에 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충이나 쥐를 잡기 위한 약은 준비해 두지요. 그것도 성분을 분석해 보면 독이지만요.”

어느 집이나 해충을 죽이기 위해 쥐약 같은 극약을 조금씩 상비해 둔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플로린이 보낸 이 약은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라 동물을 죽이는 약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일부러 사람이 먹어도 목숨을 잃지 않는 약을 보냈다.

“제가 보기엔 저건 그런 독처럼 보이는데요? 저게 어떤 식으로 저희 가문에서 나갔는지는 몰라도…… 사람을 해치는 약이 아니라면 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는 없는 게 아닌가요?”

지켜보던 신하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조금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황제는 짜증스럽게 명령했다.

“의사를 불러서 저 말이 맞는지 확인해 봐라.”

잠시 후 궁정 의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종이 위에 있는 독을 세심히 살폈다. 그러고는 보고했다.

“해충을 없애는 약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건 그보다 강한 독입니다.”

그 말에 다시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건가?”

“예, 폐하. 충분히 치사량이 되는 독입니다.”

플로린은 순간 그럴 리가 없다고 소리칠 뻔했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아스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슷하게 보이는 독으로 바꿔놨구나.’

플로린은 아스텔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걸 독살 시도로 만들어서 크로이첸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것이다.

황자의 개에게 독을 먹이라고 싸놨던 쪽지는 사라지고, 이 독을 쓰라고 적힌 마지막 쪽지만 남아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나엔 양. 플로린 양이 이전에 미리 쪽지를 보냈다고 했지? 거기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나?”

아스텔의 물음에 다시 나엔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플로린은 그녀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해!’

그러나 나엔은 이번에도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나엔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황자님께 독을 쓰라고…….”

“나엔!”

플로린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증언도 있고 증거도 확실하군.”

카이젠의 목소리엔 얼핏 분노가 서려 있었다.

플로린은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그래도 아직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자신이 관여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 애가 혼자 저지른 짓입니다.”

“누가 실행한 일이든 상관없다.”

카이젠은 플로린의 변명을 차갑게 잘라냈다.

“감히 황후궁에 독을 들여보내다니. 그간의 공을 생각해서 몇 번이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계속 자비를 베풀어줬건만.”

그가 기사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기사들이 플로린과 나엔을 붙잡았다.

“둘 다 감옥에 수감하고 당장 크로이첸 후작도 체포해라.”

“폐하!”

“북부로 보냈던 후작 부인과 마리안도 다시 수도로 데려와라.”

황제의 말은 이참에 후작가를 멸문시키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플로린은 도움을 청하려고 귀족들을 돌아봤다.

신하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감히 앞으로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이젠은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황후와 황자를 해치려고 하면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 *

“당신, 괜찮아?”

한차례의 소란이 가라앉은 뒤 카이젠은 신하들을 물렸다.

아스텔도 기회를 봐서 나가려고 했지만 카이젠이 그녀를 붙잡았다.

아스텔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안 괜찮을 게 있나.

아스텔 자신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플로린이 시작한 어리석은 짓을 좀 더 큰일로 만들었을 뿐이다.

“계속 이런 일이 생겨서 미안해.”

그러나 카이젠은 그녀에게 침통한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처벌해서 본보기로 삼겠어.”

그 눈빛에 얼마나 절절한 괴로움이 깃들어 있는지, 아스텔은 사실 플로린이 노린 건 테오르가 아니라 블린이었다는 걸 말하지 못했다.

원래는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 순순히 고백하려고 했는데.

아스텔은 그의 눈빛을 슬쩍 피하면서 말했다.

“폐하, 나엔 양은 자백하는 대신 제가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나엔 양을 제가 계속 돌봐 줄 수 있게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아스텔이 원하는 대로 자백해 주는 조건이었다.

겁에 질린 나엔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카이젠은 별로 마땅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수락했다.

“알겠어. 당신 뜻대로 해.”

“폐하, 후작가 사람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카이젠이 이번 일로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전에 후작 부인이 아스텔을 독살하려다가 실패했을 때도 후작가 자체는 별로 건드리지 않았는데.

카이젠은 무심한 눈빛으로 냉혹한 대답을 냈다.

“그 집안 때문에 결혼식 전부터 계속 당신과 테오르를 위협하는 일이 생겼잖아. 이참에 본보기로 처형할 거야.”

“…….”

물론 크로이첸 후작 부인은 예전에 테오르를 납치하려고 했었고, 아스텔을 죽이려고 하기도 했다.

플로린도…… 아스텔의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의 밀서를 가지고 아스텔을 협박했다.

아스텔도 이참에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는 크로이첸 가문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가문 사람들을 다 죽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후작가 사람들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스텔은 차분한 말투로 카이젠을 설득했다.

“플로린은 이제 겨우 성년이 넘었고 나엔은 성년도 아닌데 둘이 독을 가지고 있었어도…….”

나엔이 가지고 있던 독은 사람을 죽일 만한 극약은 아니었다.

아스텔은 크로이첸 가문을 확실하게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비슷한 색의 독으로 바꿔놓게 했다.

그 사실을 카이젠에게 말하는 게 좋을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진실을 알면 나를 비난하려나?’

아스텔은 그런 고민을 하면서 카이젠을 살폈다.

일견 냉혹해 보이는 붉은 눈에는 아스텔을 향한 염려와 애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아스텔은 짧은 고민 끝에 마음을 정했다. 이런 일을 영원히 비밀로 해둘 수는 없었다.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나엔 양의 말을 들어보면 플로린은 테오르를 해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황후궁에 소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했는데?”

“제가 플로린 양의 결혼에 대해 말해서…… 제 관심을 돌리려고 그런 듯합니다.”

아스텔은 그에게 어느 정도 솔직하게 말했다.

나엔의 쪽지를 감시했던 것부터 나엔을 붙잡아서 증언을 강요했던 일까지.

이어서 독을 바꿔치기한 것도 말하려는데 카이젠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카이젠은 플로린 자매의 행동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어떤 이유로든 황궁 안에 위험한 약을 가져오는 건 큰 죄야.”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테오르는 매일 개와 붙어 있어. 일이 잘못되기라도 해서 우리 테오르가 약을 먹거나 손으로 만지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

틀린 말은 아니었다.

테오르는 아직 5살이다.

동물을 죽이는 약을 먹는다면 목숨을 잃지는 않아도 몸에 해로울 것이다.

“크로이첸 후작은 폐하를 위해 여러모로 힘써왔는데 처벌이 너무 가혹하면 원성을 살 겁니다.”

그리고 그 원망은 당연히 아스텔 자신에게 향할 것이다.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작 부부는 딸들과 함께 수도에서 추방하고 영원히 시골에 가서 살게 하는 것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스텔은 처음부터 그 정도로 처벌되길 바랐다.

이 일로 작위도 잃고 영지도 거의 몰수당하겠지만, 가문의 명맥을 이을 정도의 땅은 남겨주고 수도에서 추방한다.

그 정도면 살아가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참에 그냥 후작 부인과 마리안도 함께 시골 영지에 가서 살면 되겠지.

“처벌은 해도 살아갈 방편은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카이젠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알겠어.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할 것 없어. 내가 당신을 어떻게 이기겠어?”

카이젠은 조소 반 한숨 반인 투로 낮게 웃었다.

아스텔은 잠시 침묵하다가 사죄했다.

“제 마음대로 일을 크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미리 의논하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만들어서 조금 미안하긴 했다.

“아냐. 그 집안은 도가 지나쳤어.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카이젠은 개의치 말라는 듯이 말했다.

“블린이 잘못됐으면 테오르는 크게 상처받았을 거야.”

“그랬겠지요.”

“먼저 돌아가 있어.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에 갈게.”

아스텔은 그의 다정한 눈빛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 * *

잠시 후, 아스텔은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황제궁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황후궁은 평온하기만 했다.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나가 아스텔을 맞이하러 나왔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응. 잘 끝났어.”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정원에서 놀고 있는 테오르가 보였다. 테오르는 평소처럼 블린과 함께 정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스텔을 발견한 테오르가 화단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아스텔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한나가 곁에서 미소를 지었다.

“황자님께서는 오늘 수업을 끝내셨습니다.”

행복하게 뛰어노는 테오르와 블린을 보니 조금 전 느낀 피로감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아스텔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맞아. 한나, 내가 편지를 써줄 테니 전달해 줘.”

“편지요? 무슨 일이신가요?”

“사람을 좀 찾으려고.”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새삼 그레텔이 떠올랐다.

국혼 전에 한 번 그레텔이 사는 곳으로 편지를 보냈었는데 답이 오지 않았다.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낙후된 시골에만 돌아다니는 그레텔은 수도의 소식에 별 관심이 없었다.

새 황후가 생겼다는 말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번에는 집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있는 여관으로 보낼 거야.”

그레텔이 약초를 연구할 때 가끔 들리는 지역이 있었다. 혹시 그쪽에 머물고 있을 수도 있으니 편지를 보내보는 게 좋을 듯했다.

“황궁으로 불러보시려고요?”

“응. 만나서 보답을 하고 도움을 주고 싶어.”

* * *

벨리안은 어두침침한 계단을 걸어가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윽……!’

앞서가던 기사가 그를 돌아봤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여기는 왜 이렇게 어두운 거야.’

감옥 복도에 초를 아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죄수가 아니라 지나다니는 사람들만 피해를 보는데. 이곳은 황궁의 지하에 있는 감옥이었다. 몇 번을 와 봤지만 이 음침한 곳은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는다. 할 수만 있으면 이런 어두침침한 곳은 영원히 안 오고 싶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플로린의 유모가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힌 플로린을 만나달라고.

그냥 유모의 부탁이었으면 거절했겠지만 플로린이 직접 부탁했다고 해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동생인 나엔은 수감된 직후 풀려났다. 그때 플로린 양이 밖으로 나가는 나엔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유모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그리고 그 유모는 또 벨리안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고…… 뭐 대충 그렇게 부탁이 전해져왔다.

‘무시해도 그만이긴 한데. 내가 마음이 너무 여려서 그만.’

벨리안은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간 벨리안은 국무대신이었던 크로이첸 후작에게 가끔 도움을 받았다. 플로린과도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플로린의 요청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기엔 좀 찜찜했다.

‘내가 뭐 트집 잡힐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너무 매정하게 굴다간 보복을 당하는 법이다.

벨리안은 결국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플로린을 만나러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지하 밑바닥에 있는 감옥에 도착하자 간수가 플로린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줬다. 빛은 한점도 들지 않는 어두운 감옥 안에 플로린이 앉아 있었다.

“레이디 플로린.”

나름대로 정중하게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둠 속에 플로린의 인형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하얗게 질린 플로린은 창백한 석고상 같았다.

“좋은 소식입니다. 레이디.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실 모양이에요.”

벨리안은 그녀를 위로하려는 듯이 말했지만 여전히 플로린은 대답이 없었다.

“음…… 아직 결정된 건 없지만 영지를 좀 더 몰수하고 수도에서 추방되는 선에서 끝날 듯합니다. 후작님의 작위에 대해서는 확답을 드릴 수가 없지만 작위가 박탈될 가능성도 낮은 것 같고요.”

그동안의 일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관대한 처분이었다. 특히 황제 폐하께서 크게 분노하셨던 걸 생각하면.

조금 의아하긴 했다.

크로이첸 후작까지 체포하라고 했을 때는 후작가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갑자기 황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눈 뒤, 관대한 처분 쪽으로 폐하의 마음이 바뀌었다.

‘설마 황후가 폐하를 설득한 걸까?’

하긴 후작가가 멸문당하기라도 하면 황제파 귀족들은 새 황후를 비난할 테니까.

황후는 그냥 크로이첸 가문을 수도에서 없애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나 보다. 수도에서 추방해 버리면 크로이첸 가문은 영원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목숨만 연명하게 될 테니.

수도의 고위 귀족이 된 크로이첸 가문 입장에서는 몹시 비참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볼 때 지금의 후작가로서는 몹시 기쁜 소식이었다.

벨리안은 플로린도 그렇게 생각할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플로린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았다.

“벨리안 님.”

플로린은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어둠 속에 보이는 섬뜩할 만큼 표정이 없는 싸늘한 얼굴은 마치 유령 같았다.

벨리안은 움찔 놀라서 뒷걸음쳤다.

“레, 레이디? 왜 그러시는…….”

플로린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어둠 속에서 자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을 발했다.

“나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어요. 나를 도와주세요.”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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