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새로운 생활
아스텔은 새벽에 눈을 떴다.
침대를 덮은 커튼 사이로 파르스름한 빛이 스며들어왔다. 정신을 차리고 커튼을 열자 캄캄하던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혼자 누워 있던 커다란 침대가 훤히 드러났다.
카이젠은 약속을 지켰다. 그는 새벽에 황제궁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숄을 걸치고 침실 문을 열다가 멈칫했다. 문을 열자마자 휴식실에 누워 있는 카이젠이 보였다. 아스텔은 놀라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황제궁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새벽에 얼핏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휴식실에 있던 카이젠이 밖으로 나가는 소리였다. 불편해서 자기 침실로 돌아가려나 보다 아스텔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다시 돌아온 건가.’
하긴 신혼 첫날밤에 황제가 자기 궁으로 가버리면 뒷말이 많겠지.
카이젠은 소파에 누워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결혼식 때문에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아스텔은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지나쳐 갔다.
“아스텔.”
소파를 지나쳐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잡았다.
카이젠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스텔은 예법대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 편히 주무셨습니까?”
카이젠은 황당하다는 눈길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편히 자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젠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소파도 나름 잘 만하군.”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조용한 새벽빛에 조각상처럼 잘생긴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흠잡을 데 없이 근사한 모습이다. 셔츠에 바지만 입은 차림새라 남자다운 단단한 어깨와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당신은 피곤하지 않아?”
그의 손이 아스텔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으로 다가왔다.
아스텔은 그의 손이 닿기 전에 얼른 무릎을 굽혀서 인사를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또다시 이런 분위기 속에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다.
아스텔은 얼른 몸을 돌렸다.
“시종들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아스텔은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갈 길을 잃은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 * *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황후의 거처에 딸린 식당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엄마!”
“테오르.”
복도 반대편에서 테오르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식당 안에는 카이젠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황제답게 완전한 복장을 갖추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다가 일어났을 때의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그 곰인형을 가져왔구나.”
테오르는 곰인형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레빈은 나하고 같이 자요. 블린도.”
간단한 아침 식사긴 했지만 황제가 참석한 탓에 평소보다 호사스러웠다.
고기와 과일을 넣은 여러 종류의 파이와 팬케이크.
새콤한 소스를 발라서 구운 담백한 생선 등이 다채롭게 준비되었다.
한나가 잘라준 파이를 먹던 테오르가 카이젠을 돌아보며 물었다.
“폐하, 이제 여기서 사는 거예요?”
“그래.”
테오르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포크를 내려놓던 카이젠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시중을 들던 시종도 당황해서 멈칫했다.
카이젠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가 여기 사는 게 싫으냐?”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테오르는 맑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쯤 되자 카이젠도 당황한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아스텔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폐하, 정무 회의에 늦으시겠습니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저녁에 다시 오마.”
카이젠은 테오르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은 뒤 시종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식당 안에는 아스텔과 한나, 테오르만이 남았다.
아스텔은 얌전히 수프를 떠먹고 있는 테오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가 여기 계시는 게 싫어?”
테오르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응.”
아스텔은 한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왜 싫은 거니?”
“그냥.”
테오르는 두 사람을 보지 않고 수프 그릇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걸까. 아이가 자랄수록 부모에게 비밀이 생기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카이젠을 왜 싫어하는 건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테오르는 아버지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카이젠을 잘 따랐다. 아버지라는 걸 알고 난 뒤부터는 이상할 만큼 카이젠을 서먹하게 대한다.
역시 아버지라는 이야기가 충격이 컸을까.
아스텔의 근심 어린 표정을 보던 한나가 갑자기 의자에 놓인 곰인형을 집어 들었다.
한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곰인형을 식탁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곰인형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저는 레빈이에요.”
곰인형은 식탁 모서리를 걸어 다니며 폭신폭신한 팔다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두 팔을 치켜들고 춤을 추기도 했다.
테오르는 얼굴을 들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곰인형이 팔을 흔들면서 물었다.
“폐하가 왜 싫으신가요?”
이번에는 솔직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엄마가 싫어해서.”
살랑살랑 움직이던 곰인형이 뚝 멈췄다.
테오르는 수프 그릇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엄마랑 할아버지랑 한나도 싫어하니까.”
“저는 폐하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황자님.”
한나가 곰인형 뒤에서 얼굴을 내밀고 황급히 말했다.
그녀는 아스텔을 힐끔거리며 한 번 더 강조했다.
“정말이에요.”
“…….”
한나가 카이젠을 싫어하는 줄은 몰랐다. 한나는 늘 침착해서 자기감정을 내보이는 법이 없었다. 하긴 딱히 카이젠을 좋아할 이유도 없긴 했지만.
테오르는 얼굴을 숙이고 수프 그릇을 휘저었다.
“그래서 나도 싫어할래.”
“테오르.”
아스텔은 건너편에 앉은 테오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테오르는 주저하다가 아스텔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아스텔은 그 작은 손을 꼭 붙잡았다.
“엄마는 폐하가 싫은 게 아니란다. 아직 함께 있는 게 어색해서 조금 불편할 뿐이야.”
“정말?”
“응.”
어린애들 눈은 속일 수가 없다더니.
테오르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린 테오르가 아스텔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좋고 싫어하는 걸 빨리 느끼는 걸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폐하를 싫어한다고 해서 너도 같이 싫어할 필요는 없어. 네가 좋은지 싫은지 그것부터 생각하는 게 좋아.”
“으응.”
테오르는 아스텔의 말을 납득한 것 같았다.
다시 수프를 떠먹으며 대답했다.
“그냥 폐하는 가끔 왔으면 좋겠어.”
* * *
황후궁의 복도를 걸어가던 카이젠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노인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아스텔의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이었다. 늙은 후작도 그를 발견하고 다가와서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괜찮네. 그렇게 예의를 차릴 것 없어.”
테오르의 출생이 밝혀지자 이 늙은 후작에 대한 오해도 풀렸다.
그동안 카이젠은 아스텔이 이 노인과 어린 조카 때문에 혼자 고생하고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보니 전부 오해였다. 정작 아스텔과 테오르를 돌보면서 고생한 사람은 이 늙은 후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했군. 테오르를 지키려다가 다쳤다고 들었네만. 몸은 이제 괜찮은가?”
이 노인을 만날 때마다 건강부터 묻는 것 같군.
후작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살펴주신 덕분에 금세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인은 만날 때마다 뼈있는 소리를 한다.
카이젠은 불쾌감을 참고 억지로 웃었다.
“그대가 황후의 곁에 있어 줘서 고맙네. 앞으로도 황궁 안에서 편히 지내게.”
후작은 묵묵히 카이젠의 말을 들었다.
이 젊은 황제는 황궁에 머물게 해주는 걸 엄청난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은혜는커녕 후작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골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스텔과 테오르만 아니었으면 수도에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스텔에게 푹 빠져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했지만.’
별로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섬겼던 전전대 황제도 처음에는 강제로 데려온 아내를 몹시 좋아했다.
하지만 금세 시들해져서 다른 여자들을 찾았다.
그때 두 사람 옆에서 느릿느릿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근사하게 차려입은 레스턴 공작이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가 무슨 일이지?”
“제 딸, 아니, 황후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왔습니다.”
공작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스텔은 황후가 됐고, 정적이었던 크로이첸의 아내를 잡아넣었으니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카이젠이 대답 없이 무시하자 공작은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안 그래도 걱정이 돼서 한 번 찾아뵈려고 했는데.”
아버님이라는 호칭에 늙은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자네의 아버님인가?”
후작은 거의 시비조로 물었지만 공작은 여유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제 아내의 부친이시니 제게도 아버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카이젠의 표정도 구겨졌다.
공작의 말은 카이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도 공작의 딸인 아스텔과 결혼했으니까.
카이젠은 마음 같아서는 공작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문득 늙은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카이젠과 칼렌베르크 후작은 공통점을 찾았다.
둘 다 레스턴 공작이 죽도록 싫었다.
* * *
“아버지는 아직도 서재에 계셔?”
플로린은 창문을 내다보며 유모에게 물었다.
유모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가 감옥에 끌려간 뒤부터 아버지는 서재 안에 칩거한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친한 귀족 몇 명과 나름대로 해결 방법을 의논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플로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어머니는 황후의 옷에 독을 넣으려다가 잡혔다.
황제의 병사들이 후작가의 저택을 둘러싸고 감시하는 중이었다.
이 상황에 제대로 된 해결책이 있을 리가 없었다.
유모는 그런 플로린을 애타는 눈으로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가씨, 그래도 공작가에 보낸 하인이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으니…….”
그래. 그렇지.
공작가에 잠입시켰던 하인이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다. 황제가 순행을 떠나있는 동안 공작이 서부의 영주에게 밀서와 돈을 보냈다는 것이다. 서부 쪽 상단에 몰래 연락해서 뭔가를 주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플로린은 그 정보를 듣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레스턴 공작은 폐하가 없는 동안 반역을 준비하고 있었어.”
공작이 그런 마음을 품을 만도 했다.
당시 폐하는 순행 중이라 수도를 비웠고, 수도의 최고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란베르크 기사단도 북부로 보내졌다.
누가 봐도 반란을 일으킬 만한 절호의 기회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중간에 포기한 것 같지만.
‘공작은 워낙 몸을 사리는 성격이니까. 뭔가 계산이 틀어져서 계획을 포기했겠지.’
플로린은 유모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밀서를 전했다는 사람을 잡아 와.”
이 일을 터뜨리면 공작은 반역을 시도한 죄목으로 조사받겠지. 진짜로 반역을 일으킨 건 아니지만 공모만 한 것도 엄청난 죄였다.
하지만 플로린은 당장 이 일을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이걸 가지고 아스텔과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 * *
“이건 다 확인했으니 시종장에게 전해.”
아스텔은 한나에게 서류를 넘겨줬다.
두 달 뒤에 있을 수확제에 관한 내용이었다.
행사 날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워낙 큰 행사다 보니 일찍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아스텔은 황후가 된 첫날부터 황궁을 관리하는 권한을 얻었다.
황제에 대항하던 공작가의 딸이 황궁 살림을 틀어쥐었다고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카이젠은 거리낌 없이 아스텔에게 황궁 살림을 모두 맡겼다. 갑작스레 일거리가 늘어났지만 별로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아스텔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황태자의 약혼녀로 살 때도 황태후 전하 곁에서 황궁 일을 도왔으니까.
“폐하께서는?”
“황자님과 함께 침실에 계십니다.”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카이젠은 첫날밤부터 매일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황후궁에서 잠을 잤다. 귀족들은 황제와 황후가 금슬 좋은 부부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속사정은 전혀 달랐지만.’
카이젠은 매일 찾아와서 아스텔과 테오르와 저녁 식사를 하고 황후의 침실 밖에 있는 소파에서 잤다.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기절할 것이다. 황후는 침대에서 편히 자고, 황제 폐하는 소파에서 자다니.
아스텔도 카이젠을 소파에서 재우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나 침대를 내줄 테니 잠자리를 바꾸자고 말했지만 카이젠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소파가 편하다며 그 자리만 고집했다.
‘엄청 불편해 보이던데…….’
이제는 지켜보는 아스텔도 불편해졌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냥 오지 말라고 해야겠다.
매일 밤 황제를 휴식실 소파에서 재우느니 차라리 부부관계가 시들해졌다는 소문이 나도는 게 나았다.
* * *
카이젠과 테오르는 침실에 딸린 휴식실 창가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흑백의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엄마. 나 이거 어떻게 하는지 배웠어!”
카이젠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테오르가 자기 앞에 있는 체스 말을 들어 보였다.
“테오르에게 체스를 가르쳐 주고 있었어. 이 녀석 제법 잘하는데.”
체스판 위에는 흑백의 체스 말이 이리저리 놓여 있었다.
‘둘 다 재미있게 놀았나 보네.’
이전에도 그랬지만 테오르와 카이젠은 죽이 잘 맞았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고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해줬다.
“테오르 그만 네 방으로 가서 자야지.”
“응.”
테오르는 순순히 바닥에 내려서서 두 사람을 돌아봤다.
“안녕히 주무세요, 폐하. 어머니.”
카이젠은 시녀의 손에 이끌려가는 테오르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폐하라는 호칭에도 그냥 익숙해진 모양이다. 방 안에는 아스텔과 카이젠 단둘이 남았다.
아스텔은 무심코 테이블에 놓인 체스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걸 보고 카이젠이 제안했다.
“오랜만에 한판 하겠어?”
“피곤하지 않으세요?”
하루 종일 정무에 시달렸을 텐데.
아스텔은 황궁 일만 했는데도 조금 지친 반면 카이젠은 피곤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군.”
아스텔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잠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카이젠은 직접 체스판을 정리했다.
아스텔은 시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눈치 빠른 시녀는 즉시 과일 디저트와 차가운 와인을 가져왔다.
아스텔은 상아로 깎아 만든 매끈한 체스 말을 손으로 잡았다. 이걸 해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테오르는 머리가 좋아. 금방 규칙을 배우더군.”
카이젠의 목소리에 희미한 자부심이 감돌았다.
테오르는 또래보다 이해력이 뛰어나고 집중력도 좋았다. 연극을 할 때도 이해력이 빨라서 금방 규칙을 배웠다.
‘그래봤자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이 체스 말을 칸 위에 내려놓는 걸 보고 또다시 웃었다.
“당신은 어릴 때 이걸 어려워했었지.”
아스텔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 가끔 카이젠과 체스 게임을 했던 적이 있었다. 카이젠은 그 시절을 생각하며 낮게 웃었다.
“당신 실력이 정말 형편없었는데.”
카이젠은 체스에 익숙했지만 아스텔은 체스를 배운지 얼마 안 되어서 실력이 형편없었다.
번번이 카이젠에게 졌다.
카이젠은 체스판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너무 실망할까 봐 내가 몇 번 져줬지.”
“알고 있었습니다.”
아스텔의 조용한 대답에 카이젠은 시선을 들었다.
“폐하께서 저를 위해 일부러 져주신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
스스로 알아낸 게 아니라 프리츠 오빠가 말해줘서 알았다. 두 사람의 게임을 지켜본 뒤 그렇게 말했다.
전하께서 너를 위해 게임을 져준 거라고.
둘보다 나이가 많은 프리츠의 눈에는 훤히 보였던 모양이다. 당시 아스텔은 카이젠의 배려에 감동했다.
‘역시 황태자 전하는 상냥한 분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몇 년 뒤 아스텔은 체스 게임에 능숙해져서 카이젠도 이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카이젠을 이겨보지 못했다.
지는 걸 싫어하는 카이젠을 위해 일부러 매번 그에게 져줬으니까.
“당신이 일부러 졌다고?”
카이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 그랬습니다.”
“나는 상상도 못 했군.”
아스텔이 자기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짐작도 못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불쾌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와인 잔을 들며 호기롭게 제안했다.
“그럼 이번에는 배려하지 말고 제대로 해보지.”
아스텔도 옆에 놓인 차가운 와인을 조금 맛보며 대답했다.
“네, 그러지요.”
그 후 두 사람은 말없이 게임에 집중했다.
게임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빠르게 결판이 났다.
몇 번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지만 아스텔은 순조롭게 카이젠의 킹을 잡아버렸다.
“제가 이겼습니다.”
아스텔은 마지막 체스 말을 내려놓았다.
카이젠은 자신이 완벽하게 패배한 체스판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 정말 잘하는군.”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좋은걸. 이제야 솔직하게 당신과 마주 앉은 기분이야.”
아스텔도 그 말에 동감했다.
약혼 기간에는 황태자 전하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슬퍼도 기쁘다고 거짓말을 하고 힘들고 괴로워도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카이젠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텔을 싫어하면서도 겉으로는 다정한 척 연기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둘 다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놓고 있었다.
깊은 빛을 담은 붉은 눈이 아스텔을 직시했다. 그는 장난하듯이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약혼 동안 또 뭘 숨기고 있었지?”
“…….”
아스텔은 그 익숙한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카이젠은 아직도 과거 아스텔이 자신을 사랑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사실 저는 폐하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는 없습니다.”
아스텔은 체스 말을 정리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서 이만 침실로 들어가겠습니다. 폐하께서도 편히 주무십시오.”
아스텔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캄캄한 감옥 안에는 달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크로이첸 후작 부인은 한기가 감도는 돌벽에 몸을 기댄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후작 부인은 며칠째 비참한 신세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딸도, 남편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밖으로 연락을 보내고 싶지만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두 사람이 나를 구해주겠지.’
그런 믿음으로 견디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그녀는 시녀가 채찍질 당하는 걸 목격한 순간 모든 것을 자백했다. 말하지 않으면 그녀도 저런 신세가 될 거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위 귀족 출신은 아니어도 평생 귀하게 살아왔다. 미천한 자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순히 자백해 버린 대가로 이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이가 나를 구해줄 거야. 자기 부인인데 설마 버려두지는 않겠지.’
후작 부인은 그런 희망으로 무너질 것 같은 정신을 다잡았다. 친딸이지만 플로린은 그녀를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
* * *
“누가 왔다고?”
황후궁의 예산안을 점검하던 아스텔은 시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레이디 플로린께서 오셨습니다.”
“플로린 양이?”
플로린은 아직 미혼의 레이디라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황궁에 출입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 때문인가?’
그래도 이곳에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딱히 찾아올 이유도 없었고.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플로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플로린은 예전에 봤을 때처럼 귀여운 차림새였다. 레이스와 리본으로 장식된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케이크 위에 놓인 달콤한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결혼식을 축하드립니다. 황후 폐하.”
플로린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고마워요, 플로린 양.”
아스텔은 아직 사교계 행사를 열지 않았다. 황후가 된 뒤 귀족 영애를 만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스텔은 시녀를 물리고 플로린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나요?”
“황후 폐하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플로린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본론부터 꺼냈다.
‘거래라.’
“어머님을 구하려고 오셨군요.”
“아뇨. 어머니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시야를 가리는 나무를 뽑아내 버리라는 듯한 맑고 가벼운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무사히 국무대신 자리를 지키고 우리 가문이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왜 도와줘야 하지?”
이제 갓 성년이 된 아가씨가 자신과 가문을 위해 친어머니를 버리겠다고 하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심하게 멍청하고 못 돼 먹은 여자기는 해도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아스텔이 순식간에 하대하자 플로린의 고운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 흐려졌다.
“저와 거래를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황후 폐하의 아버님이신 공작님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답니다.”
“증거?”
“공작님께서는 황제 폐하께서 순행을 떠나 계신 동안 서부 영주들과 내통하며 반역을 준비하셨더군요.”
“아버지가 반역을 준비했다고?”
아스텔은 진심으로 놀랐다.
하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카이젠이 동부를 순행 중일 때 아버지는 암살자를 보내서 카이젠을 죽이려고 했었다.
아버지가 황제 암살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는 반란을 일으킬 준비도 하고 있었다니.
조심성 많은 아버지가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한꺼번에 준비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플로린의 예쁜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진해졌다.
“네, 그래요. 공작님께서는 서부에 밀서를 보내서 병사를 모으고 무기를 준비하셨더군요. 그 밀서를 전해준 시종을 붙잡았어요.”
“플로린 양이 붙잡았다고?”
아스텔은 진심으로 놀라서 되물었다.
아버지가 암살과 반역을 동시에 준비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밀서를 전달한 사람을 아무나 잡아갈 수 있게 방치해 뒀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버지라면 그런 중요한 인물은 어딘가에 꼭꼭 숨겨놓거나, 아니면 계획이 실패했을 때 그냥 죽여버렸으리라.
그런데 고작 후작 영애에 불과한 플로린이 공작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증인을 잡았다?
크로이첸 후작도 아니고 이제 갓 성년이 된 플로린이?
‘이건 너무 황당한 얘기라서 믿기 어렵군.’
플로린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님을 섬기는 시종이더군요. 힘들게 붙잡아서 안전한 곳에 놔뒀답니다. 아버님께 직접 여쭤보세요.”
“…….”
심지어 아버지가 곁에 있는 시종에게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맡겼다니.
“그 사람이 자기가 밀서를 전달했다고 말했나?”
“밀서를 가지고 있더군요. 서부 영주가 확인한 뒤 다시 돌려줬다고 했어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공작님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심부름한 것도 모자라서 밀서까지 가지고 있어?
플로린은 아스텔의 놀란 얼굴을 즐겁게 바라봤다.
“내용은 암호였지만……. 해석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던데요. 이미 편지에 찍혀 있는 공작님의 인장도 확인했습니다. 의심할 바 없는 진짜였어요.”
어떤 면으로 봐도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플로린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자신하는 모양이었다.
이 영리해 보이는 아가씨가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는다는 게 놀라웠다.
하긴 플로린은 아직 어렸고 평생을 저택 안에서만 지냈다.
아스텔은 자신도 저 나이 때 카이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플로린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내며 선언했다.
“황후 폐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이 일은 비밀로 묻어두겠어요.”
“…….”
반역의 내용을 담은 밀서를 가져간 시종이 있고, 그 밀서에는 공작의 인장이 찍혀 있다.
증거는 확실했지만 이건 너무 황당할 정도로 허술했다.
‘아버지가 정말 반역을 준비했을까?’
물론 아버지는 언제나 카이젠을 없앨 기회만 노리고 있었겠지만.
순행 중인 황제를 암살하려고 벼르고 있었으면서, 반란 계획도 꾸미고 있었다니. 암살이 성공하면 반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고, 반란이 성공하면 암살을 시도할 필요가 없다.
물론 둘 다 성공하면 더 좋겠지만. 한쪽에만 온 힘을 쏟아도 성공하기 어려운 일인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시도했다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혹시 아버지는 카이젠의 시선을 돌리려던 게 아니었을까?’
반역을 꾸미는 것처럼 의심스럽게 행동하면서 몰래 암살 계획을 진행한다. 카이젠은 공작의 반역을 감시하느라 등 뒤에 드리워진 칼날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 계획이었던 게 아닐까?
‘딱 아버지가 할 만한 비열한 짓인데.’
순행 중에 카이젠이 비를 핑계로 계속 시간을 끌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 아스텔은 카이젠이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곳에서 시간을 끄는 거라고 짐작했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카이젠이 비를 핑계로 수일 동안 마에른 성에 눌러앉아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정확한 건 아버지를 불러서 물어봐야 알겠지만.’
아스텔은 자신만만한 플로린을 바라보며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어쨌든 이 귀여운 아가씨가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하게 놔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안심하고 있는 동안에는 더 이상 허튼짓을 안 할 테니까.’
아스텔은 진지한 얼굴을 가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거래하지. 대신 그 일이 새어나가지 않게 비밀을 지켜줘야 해.”
플로린이 자색 눈을 접으며 곱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황후 폐하께서도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서 저희 아버지를 지켜주셔야 해요.”
“그래. 반드시 후작가를 지켜주겠어.”
아스텔은 분명하게 약속했다.
물론 크로이첸 가문을 도와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스텔은 이참에 크로이첸 후작가가 힘을 잃고 물러나길 바랐다.
벌써부터 공작가의 저택을 감시하고 휘젓고 다니는 이 교만한 아가씨도 치워버리고.
* * *
아스텔은 플로린이 떠나자마자 아버지에게 연락을 보냈다.
지금 당장 황후궁으로 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이 아스텔을 만나러 왔다.
“네가 나를 먼저 초대하는 일도 있구나.”
레스턴 공작은 조소를 담아서 인사를 건넸다.
“그야 당연히 아버지를 부를 일이 없으니까요. 제가 부르지 않아도 거의 매일 찾아와서 테오르를 귀찮게 하고 제 일에 참견하시잖아요.”
“아비 덕분에 목숨을 구했는데 고마워하지도 않는구나.”
공작은 투덜거리면서 차를 마셨다.
아스텔은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다가 본론부터 꺼냈다.
“아버지, 제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차를 마시던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의 단호한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레이디 플로린이 아버지의 시종을 납치했다고 하더군요.”
“내 시종? 누구?”
아스텔이 황당하게 쳐다보자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끄덕였다.
“아, 그래. 시종 중 한 명이 말도 없이 사라져서 찾고 있다던데. 그 녀석 말이군.”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아니, 너는 모를 거다. 새로 들어온 시종이니까.”
“새로 들인 시종에게 그런 엄청난 일을 맡기셨어요?”
레스턴 공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스텔은 플로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전했다.
반역 얘기와 순행에서 있었던 일들.
시종이 가지고 있었다는 밀서까지 전부.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의 말을 듣더니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렇게 된 이상 뭘 숨기겠느냐. 네가 짐작하고 있는 게 맞다. 반역 계획 같은 건 없었어.”
“처음부터 암살을 계획하고 계셨던 거군요.”
“그래. 반역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생각하면 카이젠이 순행 중에 시간을 끌 거라고 생각했다. 외부에 있다 보면 빈틈이 생기는 법이니까.”
공작은 아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잘하면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저와 테오르. 외할아버님도 같이 죽이려고 하셨고요.”
아스텔의 담담한 지적에 공작은 조금 뜨끔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우리도 공격하던데요?”
“네가 카이젠 곁에 있었으니 그랬겠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면 공격받을 일도 없었을 거야.”
아스텔은 아버지의 뻔뻔한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 일을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지나간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을 테고.
“밀서는요?”
“그 녀석에게 준 건 함정으로 만들어 놓은 밀서였다. 자세히 보면 전부 허무맹랑한 내용이고 거기 찍은 직인도 가짜였지.”
‘그래서 서부 영주가 돌려준 거였군.’
흔한 수법이었다.
가짜 편지를 여러 개 만들어서 보내는 것.
그중에 진짜 밀서에만 특정한 표지를 해놓는다.
“일부러 놔두신 거죠? 아버지를 감시하는 사람이 그 편지를 훔쳐다가 고발하면 무고죄가 될 테니까요.”
특히 황제 쪽 사람이 그걸로 아버지를 모함하면 역으로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공작은 다시 찻잔을 들며 플로린만큼이나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내가 후작 영애한테 납치당하는 그런 어리숙한 녀석을 믿고 밀지를 맡겼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녀석에게는 돈 한 푼도 못 맡기지.”
아스텔도 뒤늦게 찻잔을 들었다.
자신이 예상한 대로였다.
안도감과 함께 아버지의 비열함에 한숨이 나왔다.
“플로린 양은 자기가 증거를 찾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어요.”
“귀엽구나. 그 애는 제법 영리해서 네 오라비 짝으로 어떨까 했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아스텔은 어이없다는 듯이 핀잔을 줬다.
플로린과 프리츠 오빠는 8살 이상 차이가 난다.
“프리츠에게 혈통 좋은 신부를 구해주려고 몇 년간 벼르고 벼르다 보니 전통 있는 가문들이 다 사라져서 말이다.”
이제 명문가라고 할만한 가문은 다 사라졌으니 프리츠 오빠의 상대가 될 만한 레이디가 없긴 했다만.
“그래, 뭐 어차피 그 집안은 몰락할 테니.”
공작의 단정한 얼굴에 번들거리는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애정이 가득한 눈길로 아스텔을 건너다봤다.
“이참에 크로이첸 가문을 없애버려야 한다. 시키지 않아도 네가 황제에게 잘 말할 거라고 믿는다.”
“…….”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쓸데없는 음모를 꾸미고 귀찮은 짓을 벌이는 크로이첸 가문이 사라지는 건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좋아할 것 없어요. 아버지도 곧 크로이첸 후작처럼 될 거예요.’
* * *
카이젠은 저녁노을이 지는 정원에서 테오르와 놀아주고 있었다.
아스텔은 창문 너머로 뭔가를 손에 들고 휘두르고 있는 테오르가 보였다. 그게 뭔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어린이용 목검이었다.
테오르는 조그만 손으로 작은 목검을 쥐고 힘껏 휘둘렀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하얀 볼이 붉게 상기될 만큼 열심히 하고 있었다.
“테오르. 뭘 하고 있니?”
“엄마, 나 검술을 배웠어.”
테오르가 목검을 들고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이것 봐! 내 검이야!”
테오르는 검을 들고 짧은 팔을 힘껏 휘둘렀다.
조그만 몸이 비틀거릴 만큼 열심히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대단하네.”
아스텔은 웃으며 칭찬해줬다.
“그치만 사람이 다치면 안 되니까. 밖에서만 연습해야 해. 블린도 가까이 있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응! 조심할게.”
테오르는 목검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나도 기사가 될 거야. 린든 아저씨처럼!”
“너는 기사가 아니라 황제가 될 거다.”
테오르에게 다가온 카이젠이 커다란 손으로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찍 오셨네요.”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왔다.
정무가 끝나자마자 왔나 보다.
카이젠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별일 없었나?”
그도 플로린이 다녀간 걸 들었나 보다.
말은 안 해도 황후궁의 일이 카이젠의 귀에 들어갈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겠어요. 하루 종일 장부만 들여다봤지요.”
테오르는 다시 정원으로 가서 검을 휘두르고 놀았다.
조심하라고 했더니 블린이 있는 곳에서 좀 더 멀리 떨어졌다.
“후작 부인의 일은 마무리됐나요?”
아스텔은 옆에 있는 카이젠에게 조용히 물었다.
“조사는 다 끝났어.”
카이젠은 아스텔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일 당장 처벌을 결정할 생각이야. 본보기로 크로이첸 후작가도 처벌할 거야.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카이젠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스텔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그녀가 반대할까 봐 염려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스텔은 반대하지 않았다.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 * *
테오르는 정원에서 들어올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선물 받은 목검이 마음에 드는지 해가 다 질 때까지 목검을 가지고 놀았다.
블린도 같이 신이 나서 정원을 뛰어다녔다.
사냥개로 훈련받은 블린은 테오르가 검을 휘두르고 다니는 걸 보고 사냥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목검이 움직일 때마다 꼬리를 흔들면서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아스텔이 유리창을 열고 테오르를 불렀다.
“테오르. 이제 그만하고 저녁을 먹어야지.”
“조금만 더 하면 안 돼?”
테오르는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애원했다.
쫄래쫄래 따라온 블린까지 꼬리를 내리고 아스텔을 올려다봤다.
‘둘 다 강아지 같네.’
아스텔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말했다.
“그럼 저녁을 먹고 나서 씻기 전까지 조금만 더 놀아.”
“응!”
테오르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 목검을 든 채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옆에 있던 카이젠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저런 점은 나를 닮았어.”
“…….”
아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오르는 조만간 황태자가 되고 언젠가는 황제가 된다.
제국의 군주가 되려면 카이젠처럼 냉혹하고 가차 없는 성격이 되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아스텔은 테오르가 카이젠이나 전전대 길베르트 폐하처럼 자라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스텔은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테오르의 스승 문제입니다만.”
그 한마디에 카이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 그래. 세르벨에게 맡기고 싶다고 했었지.”
“세르벨 경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냥 외조부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골에서 살 때는 가정 교사를 구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워낙 외진 시골이라 아이를 보낼 만한 학교나 교육 기관도 없었다.
테오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아스텔 자신이 직접 기본 교육을 가르치고, 검술 같은 건 외조부님한테 부탁드리려고 했었다.
어차피 기초 검술 정도는 기본자세만 알면 누구나 가르칠 수 있다.
“아냐,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세르벨 경에게 맡겨.”
카이젠은 갑자기 말을 바꿨다.
아스텔이 놀라서 돌아보자 그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녀석은 괜찮은 기사야. 내가 괜히 트집을 잡았지.”
그런 것 같긴 했다.
왜 그러는 건지 궁금해서 혹시 폐하가 세르벨 경을 싫어하는 거냐고 벨리안을 만나면 물어보려고 했었다.
카이젠의 옆얼굴에 자조 섞인 미소가 스쳤다.
“……젊은 귀족이 당신과 가까이 있는 걸 보니까 화가 나더군.”
아스텔은 습관적으로 표정을 감췄지만 속으로는 많이 놀랐다. 카이젠은 지금 자기가 질투했다는 말을 솔직하게 하고 있었다. 너무 당혹스러워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볼 뻔했다.
“폐하, 그게 무슨…….”
카이젠은 몸을 돌려서 아스텔의 당황한 눈빛을 직시했다.
“당신이 나 말고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보니 질투가 났어.”
“…….”
벨리안하고는 더 자주 대화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예외인가.
카이젠은 아스텔의 속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중얼거렸다.
“벨리안 같은 녀석은 괜찮지만.”
아스텔은 유리창을 내다다보며 당황스러운 감정을 가라앉혔다.
왜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진짜 부부나 연인이 된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그저 계약으로 맺어진 계약 관계에 불과했다.
“저는 황후가 됐으니 앞으로도 다른 귀족들을 접견해야 합니다. 그게 불편하시다면 최대한 사교 행사에 참석하는 건 제한하겠습니다.”
아스텔은 일부러 더 냉정하게 말했다.
카이젠이 착각하지 않게 더 분명히 선을 긋고 싶었다.
아스텔의 딱딱한 목소리에 카이젠의 눈빛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민망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화를 내려나 싶었지만 카이젠은 분노 대신 서글픈 눈빛으로 말했다.
“알아. 당신이 누구하고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참견할 자격이 없다는 거.”
“…….”
“괜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군.”
그는 아스텔이 대답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결혼한 뒤부터 이런 불편한 관계까 계속되고 있었다. 카이젠은 계속 아스텔에게 다정했지만 아스텔은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차가운 태도에 매번 상처를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스텔은 그의 마음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아스텔은 부질없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할 때였다.
“한나.”
그녀는 문을 열고 한나를 불렀다.
“린든 경에게 연락해서 후작가를 더 철저히 감시해 달라고 말해. 특히 플로린 양을 잘 살펴보라고 해줘.”
아스텔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플로린은 그녀에게 보복하려고 밀서를 공개할 것이다.
이제는 반대로 이쪽에서 플로린의 행동을 감시해야 했다.
* * *
크로이첸 후작가에 대한 처벌이 내려온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후작 부인은 북부로 유배당했다.
크로이첸 후작은 국무대신 자리를 상실했고, 새로 얻은 영지도 절반 이상 잃었다.
유모는 충격에 빠진 플로린을 위로했다.
“어쨌거나 최악은 면했어요.”
“최악을 면했다고?”
플로린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유모는 머뭇거리며 플로린을 달랬다.
“아가씨, 마님께서는 황후 폐하를 죽이려고 했어요.”
“…….”
플로린도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관대한 처벌이라는 걸.
후작 부인을 도왔던 의상실 주인과 시녀 등은 처형당했다고 들었다.
그에 비하면 유배에 영지와 대신 자리만 잃은 후작가는 아주 관대한 처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황제는 그간의 공적을 감안해서 가문의 명맥은 이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플로린은 고맙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번 일로 크로이첸 가문은 그동안 쌓아 올린 것을 전부 다 잃고 말았다. 플로린 자신의 인생도 이대로면 가문과 함께 다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게 다 멍청한 어머니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녀를 가장 분노하게 만든 건 아스텔의 배신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자기는 황자가 있으니까 가문이 몰락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계산인가?
황제가 푹 빠져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일까?
‘정말 그렇게 될지 한번 봐야겠군.’
어차피 플로린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공작의 밀서가 공개돼도 그녀는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플로린은 자신의 명령을 듣는 시종을 불러왔다. 이 시종은 공작가의 시종을 납치해 온 장본인이었다.
플로린은 그에게 밀서를 맡기면서 말했다.
“이 밀서를 황궁의 내무부에 가져다 놓으라고 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갖다 놔야 해.”
* * *
아스텔은 연락을 받자마자 황제가 정무를 보는 곳으로 향했다.
복도에 있는 기사들과 귀족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놀라서 허리를 숙였다.
황후가 된 지 수일이 지났지만 황제궁에 온 건 처음이었다. 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결혼식 이후 처음이었다.
순행을 떠나 있는 동안 밀린 일이 너무 많아서 공식 행사를 열지도 못했다. 아스텔은 관리들의 시선을 받으며 황제의 집무실 앞에 섰다.
“폐하를 뵙고 싶네.”
문 앞을 지키던 근위 기사가 황제에게 그녀의 도착을 알렸다.
곧바로 문이 열렸다.
집무실 안에는 황제와 여러 대신이 모여 있었다.
모두 갑작스러운 아스텔의 방문에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 고개를 숙인 채 슬픈 목소리를 냈다.
“폐하, 저희 아버님에 대한 터무니없는 모함을 듣고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왔습니다.”
모여 있던 대신들은 모두들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황후를 바라봤다. 황제 옆에 있던 벨리안도 멍하니 아스텔을 보고 있었다. 공작의 밀서가 들어온 지 한 시간 정도 지났나?
내무부의 관리가 회의 중이었던 황제에게 그걸 전한 게 30분 전이었다.
그 밀서 때문에 평범한 국무회의는 순식간에 당혹스러운 분위기로 돌변해 버렸다.
밀서에는 분명히 공작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얼마 전에 공작의 딸이 황후가 됐는데 그 아비의 반역을 고발하는 투서가 들어오다니.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모함이라고?”
“폐하, 저희 아버님은 충성심이 강한 분입니다.”
“…….”
그 말엔 카이젠마저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벨리안은 충성심이라니 지금 농담하시는 거냐고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아스텔은 몹시 진지했다.
“나도 이게 공작의 편지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인장을 확인해 보시면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
“그래야겠지.”
카이젠은 황궁의 문서고에 있는 공작가의 문서를 가져오게 했다.
상속이나 작위 계승 등을 보고하는 귀중한 문서였다. 그런 문서에는 반드시 가주의 인장을 직인으로 찍는다. 가문의 인장은 황제의 인장만큼이나 귀한 것이었다. 함부로 위조할 수도 없다.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가 서류에 찍힌 인장과 밀서의 인장을 세세히 비교했다. 한참 동안 서류를 살펴본 관리가 황제에게 보고했다.
“인장이 다릅니다.”
단순한 위조에 불과했다는 소리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었다.
아스텔은 무덤덤한 얼굴로 가만히 서서 결과를 들었다.
그러고는 벨리안에게 물었다.
“그 익명의 고발을 가져온 사람이 누구인가요?”
“고발자의 신원은 모릅니다. 말 그대로 익명으로 들어온 투서라서…….”
벨리안은 아스텔이 일을 키우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다.
대충 생각해 봐도 이번 일은 공작을 증오하는 귀족의 짓이 분명했다.
공작을 싫어하는 귀족은 대부분 황제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이었다.
‘설마 아스텔 님이 아버지의 정적을 없애려고 밀서를 만들어서 보낸 건 아니겠지?’
지금의 상황을 보건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지켜보는 대신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차가운 눈길로 황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카이젠에게 부탁했다.
“린든 경을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곧이어 린든이 무거운 표정으로 집무실 안에 들어왔다.
일련의 상황을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아스텔은 그에게 물었다.
“익명의 투서를 가져온 사람을 잡았나요?”
“예, 황후 폐하.”
린든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뒤 황제와 다른 대신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말했다.
“크로이첸 후작가에서 나온 시종이었습니다.”
“만족하셨습니까?”
돌아봤더니 벨리안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스텔은 알현을 끝낸 뒤 잠시 황제궁의 응접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할 얘기는 다 했으니 황후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카이젠과 단둘이 있었으면 그냥 돌아가겠다고 했을 텐데. 신하들 앞이라 황제의 명령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잡아놓고 집무실에서 대신들과 이번 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건 지루하지 않았다. 황제궁의 시종장이 다급히 황후 폐하를 위한 차와 디저트를 내왔다. 그리고 이제는 황제의 보좌관인 벨리안까지 아스텔을 찾아왔다.
“무슨 뜻인가요?”
“후작 부인과 함께 후작 영애까지 없애버리시게 됐으니 만족하셨냐고 물었습니다.”
벨리안은 잠시 멀리 떨어진 시종을 곁눈질하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비아냥거렸다.
아스텔은 상대의 삐딱한 태도를 가만히 바라봤다.
황제의 보좌관인 벨리안은 크로이첸 가문이 몰락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이제 국무대신도 새로 뽑아야 할 테니.
하지만 이번 일은 아스텔도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고 우리 집을 감시했던 모녀를 내가 왜 봐줘야 하나요?”
“그래서 가짜 밀서를 가져가게 하신 겁니까?”
“내가 준 게 아닌데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스텔은 플로린이 말하기 전까지 그런 밀서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벨리안은 아스텔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 푹 빠져 계신 황제 폐하께서도 그 말은 안 믿으실 겁니다.”
아스텔은 상대의 무례한 태도에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내가 함정을 파서 플로린 양을 끌어들였다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닙니까?”
“아니에요. 내가 왜 플로린 양에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티 파티에서 후작 부인을 함정에 빠뜨리신 건 잊으셨습니까?”
“그건 후작 부인이 테오르를 납치하려고 했으니까 그랬죠.”
테오르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았다면 후작 부인이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그냥 놔뒀을 것이다.
마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약 상자를 뒤져보지만 않았으면 어떤 소리를 해도 그냥 흘려넘기고 말았을 텐데.
“제가 기억하기로 크로이첸 가문과의 일은 언제나 그쪽에서 먼저였어요. 나는 어쩔 수 없이 대응한 것뿐이고요.”
“그야 예전 일은 그랬지만…….”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벨리안은 계속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여기서 벨리안의 불평을 계속 상대해 주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남자의 무례를 참아줄 생각도 없었다. 아스텔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폐하의 보좌관인 그대가 황후인 내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군.”
벨리안은 당황한 듯이 입을 조금 벌렸다.
여태까지 조곤조곤 대화하다가 갑자기 하대하니까 놀란 모양이다.
아스텔은 담담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그를 질책했다.
“제국의 황후인 내 앞에서 예의를 갖추지도 않고, 근거 없는 소리로 죄인을 두둔하다니. 그대는 황제 폐하를 모시는 자가 궁정 예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건가?”
“아, 아니…….”
벨리안은 당황하면서도 약간 배신감이 서린 눈빛으로 해보였다.
“지금까지 허물없이 대화했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그야 그때는 황후가 아니었으니까 그랬지.
당시 아스텔은 가문에서 절연 당한 힘없는 공작 영애였다.
“황후인 내가 황제 폐하의 보좌관이 근거도 없이 트집을 잡는 걸 참아준다면 황제 폐하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일이 아닌가?”
“그, 그야…….”
벨리안이 어버버 하면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노크 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황후 폐하.”
정무 회의에 참여했던 귀족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아스텔의 눈치를 살피면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회의는 끝났나요?”
“예, 황후 폐하. 오래 기다리시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삐딱한 태도로 아스텔을 심문하던 벨리안과 달리 대신들은 지극히 공손하게 굴었다.
“그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허락하신다면 조만간 황후궁으로…….”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간 찾아뵙지 못한 것을 사죄하며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허락을 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로이첸 가문은 몰락해 버렸고, 황후 후보로 가장 확실시되던 플로린도 이번 일로 무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젊은 황제는 황후에게 빠져서 매일 황후궁에서 살다시피 했다.
심지어 황후에게는 황태자가 될 황자도 있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황후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써야 했다.
아스텔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카이젠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텔.”
“폐하를 뵙습니다.”
비굴할 만큼 공손하고 친절하게 굴던 대신들과 달리 카이젠의 표정은 어둡고 차가웠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신하들을 내쫓았다.
“그대들은 물러가라.”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벨리안은 대신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벨리안은 응접실 안에 함께 서 있는 황제 부부를 슬쩍 돌아봤다.
‘제국의 황후는 무슨.’
벨리안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겉모습처럼 행복한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애초에 벨리안은 두 사람의 결혼 계약을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매일 황후궁에서 지내지만 겉으로만 부부일 뿐, 실제로는 남남처럼 지내는 게 분명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야 할 시기에 나날이 어두워지고 있는 카이젠의 표정만 봐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 * *
저택 안에 있던 플로린은 뒤늦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게 가짜였다고?”
유모는 플로린의 충격받은 눈빛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진정하세요.”
유모는 플로린이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한 눈길로 그녀를 달랬다.
플로린은 쓰러지지 않았다.
아스텔에게 분노했을 뿐이었다.
‘이 교활한…….’
일부러 그런 밀서를 넘겨준 거였어. 우리를 속여서 함정에 빠뜨리려고.
플로린은 그렇게 굳게 믿었다.
이미 밀서를 가지고 나갔던 시종도 잡혔다고 한다.
그것은 곧 플로린 자신도 황궁에 끌려가 조사받게 될 거라는 소리였다. 이걸 미리 알게 된 건 아버지와 친했던 다른 대신이 먼저 연락을 해준 덕분이었다. 안 그랬으면 영문도 모르고 붙잡혀갈 뻔했다.
“아가씨, 어떻게 해야 하지요?”
플로린은 유모의 근심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심호흡을 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차분하게 생각해야 한다. 침착하게 생각하면 방법이 있을 테니까.
창문을 내다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플로린은 문득 이 일이 처음 시작된 계기를 떠올렸다. 덴츠 성에서의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일이 잘 풀렸으면 아스텔은 황자를 데리고 동부로 돌아가서 평생 시골에 처박혀서 조용히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도로 돌아온 뒤 황자가 과일을 먹고 쓰러졌다는 걸 들으면서 일이 이렇게 꼬이고 말았다.
그리고 무도회 날 어머니가 아스텔이 아이의 생모라는 걸 폭로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갔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플로린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려야겠어.”
“후작님께 어떤 말씀을…….”
“나엔은 어디 있어?”
“막내 아가씨요?”
유모는 그녀가 자매 중 막내인 나엔의 위치를 묻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엔 아가씨는 방에 계시겠지요.”
플로린은 얌전하고 어리숙한 동생을 생각하며 명령했다.
“나엔에게 아버지 서재로 오라고 말해.”
* * *
나엔은 힘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후작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나엔은 별로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
언니들처럼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신만만한 큰언니와 신경질적인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며 그럭저럭 가족들 사이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와 둘째 언니는 그녀를 투명인간으로 여겼지만.
어머니와 큰언니 마리안은 난폭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해도 비위만 맞춰주면 나엔을 가족으로 대우해줬다.
‘그런데 이제 둘 다 멀리 사라져 버렸어.’
큰언니 마리안은 수녀원으로 보내졌고, 어머니는 북부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마저 대신 자리를 잃고 저택에 칩거해 버렸다. 후작가의 저택은 삭막하게 느껴질 만큼 조용하고 적막한 분위기였다.
하인들이 부산하게 오가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엔은 조용한 복도를 지나 아버지의 서재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버지, 찾으셨어요?”
어두운 서재 안에는 아버지와 둘째 언니 플로린이 함께 있었다. 뭔가를 얘기하던 두 사람은 나엔의 등장에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일까?’
나엔은 아버지가 왜 갑자기 자신을 서재로 부른 건지 몰랐다.
아마도 어머니와 큰언니의 일이겠지 싶었다.
생필품 같은 걸 챙겨서 두 사람을 위로하러 가는 일이었으면 좋겠는데.
이 적막하고 불편한 저택에 잇는 것보다는 짐을 챙겨서 멀리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참에 수도 밖에도 나갈 수 있고.
“네가 우리 가문을 위해 해줄 일이 있다.”
아버지가 나엔을 향해 말했다.
나엔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무거운 얼굴로 침묵한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침묵에 불길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나엔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둘째 언니 플로린이었다.
“나엔.”
플로린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나엔은 흠칫 놀랐다.
플로린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성질을 부리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엔은 본능적으로 이 차분하고 예쁜 언니가 불편하고 무서웠다.
플로린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나 대신 다과회에 가줘. 하는 듯한 말투로.
“네 도움이 필요해.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 줘.”
“어, 언니, 황궁이라니?”
황궁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소리였다.
플로린은 당황하는 나엔을 보며 순식간에 미소를 지워냈다.
“공작가의 일을 네가 한 것으로 할 거야. 네가 직접 황궁에 가서 증언해.”
* * *
아스텔은 카이젠과 단둘이 남겨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카이젠과의 관계는 결혼 이후에도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오히려 순행 중일 때가 더 편했던 것 같다. 그때는 적어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기라도 했는데. 두 사람은 결혼 후에 더 무미건조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카이젠은 말없이 아스텔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스텔은 그가 조금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왜 저러지?’
멀거니 보고만 있는 아스텔을 향해 카이젠이 천천히 다가왔다. 어둡게 가라앉은 붉은 눈에 깊은 분노가 일렁거렸다.
아스텔은 뒤늦게 깨달았다.
카이젠은 슬픈 게 아니라 지독하게 화가 났다는 것을.
“언제까지 당신의 일을 이렇게 보고받아야 하는 거지?”
“폐하. 저는…….”
“밀서 얘기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카이젠은 아스텔의 변명을 차갑게 잘랐다.
아스텔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털어놨다.
“플로린 양이 제게 와서 그 밀서로 협박을 했습니다.”
밀서를 가져온 플로린부터 아버지와 대화까지 아스텔은 처음부터 다 이야기했다.
“……그걸 이제야 말하는 거야?”
“아버지의 계획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이젠도 아버지 레스턴 공작이 무슨 계획을 꾸몄는지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행을 질질 끈 거겠지.
하지만 중간에 암살 사건이 있었다.
카이젠이라면 자신이 속았다는 걸 충분히 깨달았으리라.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그렇게 뭐든지 잘 알고 있으니, 내가 왜 공작의 죄를 다 밝혀내지 못했는지도 알겠군.”
카이젠은 이를 악물고 아스텔을 직시했다.
그야 증거가 없어서 못 밝혀낸 게 아닌가. 아스텔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왜지?”
“……테오르 때문이겠지요.”
수도로 돌아온 직후엔 암살 사건의 진범을 밝혀내려고 했겠지.
하지만 그때쯤 테오르의 일이 터졌다.
카이젠은 테오르 때문에 암살 사건을 덮어둔 모양이다. 아스텔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테오르의 외조부였다. 지나간 일을 세세히 밝혀냈다가는 테오르와 아스텔이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 테니까.
아스텔은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카이젠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치려다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폐하.”
아스텔은 당황한 눈길로 굳게 닫힌 문을 슬쩍 돌아봤다.
여기는 황제의 궁전이었다.
문밖에 대신들이 있고 벽만 하나 넘어가면 시종들과 근위 기사들이 잔뜩 있었다.
이런 곳에서 황제 부부가 언성을 높이면서 말다툼을 할 수는 없었다.
아스텔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는 정무로 바쁘실 테니 저는 이만 황후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에…….”
여기서 싸우지 말고 싸우고 싶으면 저녁에 황후궁에서 하자는 소리였다.
하지만 카이젠은 몇 시간도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
아스텔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데 카이젠이 성큼 다가왔다.
피할 새도 없이 손목을 잡혔다.
그는 아스텔의 손목을 붙잡고 돌려세웠다.
“우리가 계약 관계라면 서로에게 신뢰를 지켜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일이 생기면 내게 먼저 말을 해줘야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밀서가 진짜 플로린의 손에 있는지, 어디에 숨겨놓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작정 카이젠에게 일러바칠 수는 없었다.
아스텔은 천천히 손목을 잡아뺐다.
카이젠은 허탈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낮게 웃었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를 불러서 의논했나? 당신 아버지는 증거가 없어도 당신 말을 믿어줄 만한 사람이라서?”
“당사자에게 물어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쓴 밀서라는데 당연히 아버지를 불러서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나.
아스텔은 왜 이런 소모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황제궁의 중앙에서 소리치면서 싸울 일이란 말인가.
아스텔의 무덤덤한 태도에 카이젠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결국 당신은 나보다 당신 아버지가 더 믿음이 간다는 말이군. 당신을 가문에서 내쫓고 무시한 그 아버지를 믿는다니 대단한 효심이야.”
이쯤 되자 아스텔도 인내심이 바닥났다.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뭐?”
“폐하께서도 똑같지 않습니까?”
“……!”
필요할 때는 그녀를 이용하고 살갑게 대해주다가, 쓸모가 없어지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버린 건 아버지나 카이젠이나 둘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아스텔은 차라리 아버지가 더 신뢰가 갔다.
“폐하께서는 언제든지 마음이 변하면 저를 버릴 수 있지만 아버지는 이제 저를 버리지 못하니까요.”
카이젠은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들여서 새로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아버지에겐 아스텔과 테오르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차이일 뿐입니다. 이미 두 분 모두에게 신뢰 같은 건 조금도 없어요.”
“…….”
카이젠은 하얗게 굳어진 낯으로 서 있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붉은 눈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아스텔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이다.
그럼 어떤 소리를 해줄 줄 알았던 걸까.
이 남자에게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은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아스텔은 상처받은 얼굴로 서 있는 카이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허락하신다면 이제 황후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더 얘기하고 싶으면 황후궁에 가서 조용히 말하자는 뜻이었는데. 카이젠의 표정을 보니 당분간 찾아오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아스텔은 흐트러짐 없이 허리를 숙이고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폐하.”
벨리안이 정말 들어오기 싫은 표정으로 조심조심 문을 열었다.
몇 분 뒤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 크로이첸 가문의 영애가 죄를 고백하겠다고 왔습니다.”
나갈 시점을 놓치고 가만히 서 있던 아스텔이 놀라서 되물었다.
“플로린이?”
플로린이 대담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조금 의외였다.
직접 찾아와서 죄를 고백하겠다니.
그러나 벨리안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셋째 영애입니다.”
* * *
나엔은 황궁 복도의 호화찬란한 장식들을 돌아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예전에 한두 번, 행사가 있을 때 황궁에 들어와 보기는 했었다.
사교계에 데뷔하기는 했지만 어머니는 나엔을 사교계 행사에 별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래도 대규모 연회가 열릴 때는 가끔 온 가족이 함께 황궁에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냥 황궁은 정말 아름답구나. 플로린 언니가 이런 곳에서 살게 된다니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탄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엔은 거대한 황궁의 모습에 압도당했다. 화려하고 찬란한 궁전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너무 걱정 말거라.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야.’
저택을 떠나기 전, 아버지 크로이첸 후작은 그렇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아버지는 멍하니 서 있는 나엔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불쌍한 둘째 언니가 공작가를 감시하다가 함정에 빠졌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당장 일을 수습할 겨를이 없다. 이대로면 둘째 언니가 곤란에 빠진다.
하지만 둘째 언니는 훗날 황후가 되어야 할 몸이다. 어머니와 큰언니가 수도에서 쫓겨난 지금 둘째 언니만이 가문의 희망이다. 그러니 나엔 네가 플로린을 대신해서 공작가의 일을 책임져 달라는 소리였다.
나엔은 그 ‘공작가의 일’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택 안에서 자수나 놓으며 살아온 나엔으로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일이었다.
‘그, 그러니까 제가 그렇게 했다고 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네가 자백을 하고 나면 내 친구인 다른 대신들이 너를 보호해 줄 거다. 그런 다음에 네 언니가 있는 곳에 가서 한동안 함께 지내면 된다.’
아버지가 말하는 언니는 큰언니인 마리안이었다. 마리안은 바닷가에 있는 수녀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귀족 가문의 영애가 수녀원에 머무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가난한 귀족 가문 딸들은 공부를 하러 수녀원에 가는 경우도 많았다. 원래부터 귀족 영애들이 지내는 곳이니 힘든 환경을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엔을 열심히 달랬다.
정작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큰언니를 찾아가 본 적이 없으면서.
이 사태를 초래한 둘째 언니 플로린도 나엔의 손을 잡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엔. 절대 네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할 거야.’
나엔은 플로린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그러지 못했다. 이 꺼림칙한 둘째 언니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투닥이며 함께 자란 큰언니는 미운 정이라도 들어서 친숙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혼자 떨어져 자란 플로린은 친자매인데도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나엔은 아버지와 플로린의 명령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나엔은 어리숙했지만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면 저택에서 사는 것은 수녀원에서 사는 것보다 더 끔찍해질 것이다.
“레이디 나엔?”
복도에 멍하니 서 있는데 근위대 기사가 그녀를 불렀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나엔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기사를 따라갔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황제 폐하의 궁전에 있는 접견실이었다. 정면에 황제 폐하가 앉아 있고 몇몇 귀족이 주변에 서 있었다.
황제 폐하 옆에는 백금발을 틀어 올린 여자가 나엔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아, 황후 폐하구나.’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나엔은 신전에서 열린 결혼식 날 황후를 얼핏 봤었다.
“죄를 자백하겠다고?”
황후를 쳐다보고 있는데 정면에서 노기 섞인 음성이 들렸다.
황제 폐하의 목소리였다.
“예, 예, 폐하. 저…….”
몹시 중요한 순간인데도 황후의 유리알 같은 연녹색 눈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나엔은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택에서부터 준비해 온 말을.
“제가 공작님을 모함했습니다.”
“네가 뭘 했다고?”
카이젠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소리는 난생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황당한 눈빛들이었다.
나엔은 다급하게 준비한 대사를 되풀이했다. 플로린이 적어주고 외우라고 시켰던 대사들이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폐하. 저, 저는 그저 폐하를 위해서…….”
나엔은 자기가 공작가를 감시했다며 열심히 그간의 정황을 고백했다.
자신이 공작가를 감시하다가 밀서를 손에 넣었다. 그걸 보자마자 놀라서 아버지에게 알리지도 않고 황궁에 보냈다. 애초에 공작가를 감시한 이유는 어머니와 언니의 일로 황후에게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다.
둘째 언니와 아버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밀서가 가짜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충 정리하자면 그런 얘기였다.
나엔은 열심히 말했지만 듣는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몇몇은 대놓고 조소를 보냈고, 몇 명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당황하는 사람들은 막내딸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크로이첸 후작의 행동에 놀라워했다.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대단하군’ 그런 뜻을 담은 눈빛이 오갔다.
중년의 국무대신이 ‘실수’로 가짜 밀서를 고발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성년도 안 된 17살의 귀족 영애가 우연히 가짜 밀서를 손에 넣고 그걸 황궁으로 보냈다고 하면 철모르는 십 대 소녀의 행동이라고 우길 수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귀족 중에 이런 허황된 얘기를 진지하게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레이디 나엔.”
아스텔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나엔이 겁먹은 눈길로 아스텔을 돌아봤다.
“그럼 제일 처음 밀서가 든 봉투를 열어본 게 나엔 양인가?”
“네? 네, 네. 그럼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엔은 당황해서 버벅거리다가 다시 명확하게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제가 직접 열어봤습니다.”
“그렇다면 나엔 양은 당연히 그 밀서를 읽어봤겠지?”
“네, 그렇습니다.”
황궁에 오기 전, 플로린은 그 밀서인지 뭔지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말해줬다.
나엔은 언니가 알려주는 걸 필사적으로 외웠다.
뭘 물어보든 자신이 있었다.
“그렇군.”
아스텔은 차분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편지가 어떤 방식으로 접혀 있었는지 기억하겠지?”
“네……?”
“꽤 특이한 방법으로 접혀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제국에는, 정확히는 사교계 숙녀들 사이에는 편지를 접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부채를 접고 펴는 사소한 손짓에도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듯이, 연서를 접는 방식에도 각각 다른 의미가 있었다.
나엔은 당황했다.
플로린이 밀서에 적힌 내용과 암호의 방식까지 다 가르쳐 줬지만 종이가 접힌 방법 같은 건 알려주지 않았다.
“그, 그건…….”
“왜 그러지? 직접 봤다면 알 수 있을 텐데?”
나엔은 당황한 눈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 같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거짓말을 판별할 때는 사소한 부분을 캐물으면 된다.
상대를 속이려고 아무리 철저하게 가짜 이야기를 꾸며내도 모든 부분을 다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건…….”
나엔은 아스텔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카이젠이 차갑게 질책했다.
“편지를 봤다면서 왜 대답을 못 하지?”
“폐, 폐하. 그게…….”
나엔의 통통한 하얀 뺨이 안쓰러울 만큼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자기가 한 짓이라고 우겼다.
“정말로 제가 보냈습니다. 정말입니다……!”
나엔은 울먹이면서 간절하게 애원했다.
이제 겨우 16, 17살쯤 되었을까.
크로이첸 가문과 친했던 건 아니지만 이 셋째 딸에 대해서는 이상할 만큼 들은 바가 없었다.
‘가문 내에서 별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네.’
아스텔은 나엔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플로린을 위증죄로 처벌하고 싶었는데. 설마하니 플로린이 성년도 안 된 동생을 방패막이로 내몰 줄은 몰랐다.
나엔은 사교계에 나오지도 않고 저택 안에서만 사는 조용한 귀족 영애였다.
‘이런 소녀가 밀서를 위조했다는 걸 누가 믿을까?’
수상쩍은 밀서를 얻어서 황궁으로 몰래 보냈다고 하면 큰 죄가 되지도 않는다.
억지로 무고죄로 엮을 수는 있겠지만 성년도 안 된 귀족 영애를 그렇게 처벌해 봤자 아스텔과 공작가의 평판도 나빠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유배지 같은 데로 보낼 수는 없고.’
아스텔은 잠시 고민했지만 카이젠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손짓했다.
“끌어내라.”
근위대 기사들이 나엔을 끌고 가려고 다가섰다.
아스텔은 짧은 고민 끝에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폐하, 여기 있는 레이디가 상황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카이젠에게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어린 레이디가 갑자기 비밀 편지를 손에 넣었으니 당황했겠지요. 제대로 내용을 살펴볼 새도 없이 황궁으로 보낸 것도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하긴 그렇겠군.”
카이젠도 아스텔의 생각을 눈치챈 것 같았다.
“밀서를 위조한 사람은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스텔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저희 가문을 모함하려는 교활한 자가 순진한 레이디를 이용하려고 일부러 밀서를 위조해서 후작가에 흘렸겠지요.”
가짜 밀서를 만들어서 후작가에 흘린 교활한 사람은 아버지 레스턴 공작이었다만.
순간 카이젠의 붉은 눈동자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아스텔은 조금 민망해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 일로 저와 제 가문은 누명을 쓸 뻔했습니다. 나엔 양의 경솔한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나엔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겁에 질려서 덜덜 떨고 있었다.
아스텔은 나엔을 돌아본 뒤 다시 카이젠을 향했다.
“그러니 진범이 밝혀질 때까지 나엔 양의 처벌은 제게 맡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스텔의 부탁에 주변엔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대신들마저 아연한 눈길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다들 황후의 냉혹함에 질렸다는 눈빛이었다. 나엔은 황제의 기사들을 봤을 때보다 한층 더 겁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떨었다.
‘내가 그렇게 잔인해 보이나?’
직접 처벌하겠다는 말에 어째 다들 끔찍한 상황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을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그래. 저 애는 죽이든 살리든 당신 마음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