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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백 (10/24)

10. 고백

이틀 뒤, 아스텔은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대 안에는 흰 화장 가운을 입은 창백한 여자가 앉아 있다. 향초를 달인 물로 감고 나온 백금색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한나가 분첩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아스텔 님, 화장을 해드리겠습니다.”

아스텔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몹시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귓가에 한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스텔 님. 후작님과 도련님은 무사히 떠나셨을 겁니다.”

“그래. 그랬겠지.”

테오르와 할아버지는 이틀 전에 이미 수도를 떠났다.

오늘 아스텔은 무도회에 참석할 것이다.

아스텔의 어머니 이름으로 황궁의 연회 홀에서 열리는 자선 무도회였다.

카이젠이 참석하라고 통보했던 무도회.

공작가에서 소규모로 열릴 예정이었던 무도회는 수도 안의 수많은 귀족이 전부 초대된 성대한 무도회가 되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생기든 간에 아스텔은 그 여파가 테오르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막아낼 것이다.

한나는 아스텔의 창백한 피부에 백분을 바르고 연분홍색 잇꽃 가루로 입술에 살짝 색을 입혔다. 드레스는 전에 무도회 때 입었던 것과 똑같은 드레스였다.

덴츠 성에서 카이젠이 선물해 줬던 드레스는 전부 그 성에 놓고 왔다. 하지만 이 드레스는 아스텔의 몸에 맞게 수선해서 놔두고 갈 필요가 없다며 한나가 짐가방에 챙겨 넣었다.

집으로 돌아간 뒤에 팔아버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다시 입게 될 줄은 몰랐다. 

전에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그때 신었던 구두를 똑같이 신었다. 한나가 건네주는 댄스 카드가 달린 부채를 들고 실크 장갑을 끼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그날 밤과 똑같은 모습을 한 자신이 서 있었다. 마치 무도회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덴츠 성에서 무도회가 열리던 밤. 카이젠과 춤을 추고 그에게 테오르를 보내달라고 간청했다가 거절당했던 그 시간으로.

‘이번에는 그렇게 실패하면 안 돼.’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이제 카이젠은 아스텔이 테오르의 생모라는 걸 눈치채버렸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아스텔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무도회에 오라고 하는 것도 아스텔을 괴롭히고 휘두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카이젠은 아직 테오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한 가지를 잃었으니 남은 하나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드레스 손질을 끝낸 한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스텔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스텔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나도 시녀로 동행했다.

이 저택은 황궁 가까이에 있었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래도 형식상 저택에 있던 마차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아래층에는 기대하지 않던 사람이 와 있었다.

“아스텔.”

“프리츠 오빠?”

근위대 정복을 차려입은 프리츠가 문 앞에서 아스텔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리츠가 저렇게 차려입은 걸 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멋스러운 예복을 차려입은 프리츠는 6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무도회에 같이 가려고 왔다.”

“무도회에 함께 가겠다고요?”

“그래.”

아스텔은 조금 놀랐지만 상황을 이해했다. 이 무도회의 주최자는 공식적으로 공작가였다. 첫 댄스를 끊을 사람은 아버지인 공작이나 아스텔, 아니면 프리츠다. 현재는 세 사람 다 미혼이었다.

아버지가 그런 역할을 원할 리 없으니 프리츠나 아스텔이 첫 번째 댄스를 끊어야 할 것이다.

아스텔은 계단을 내려서며 무심하게 말했다.

“파트너분과 함께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파트너는 없다.”

담담한 대답에 아스텔은 오빠를 올려다봤다.

“너만 허락한다면 네 파트너가 되고 싶구나.”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인 프리츠는 소년 시절부터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의 파트너가 되려고 레이디들끼리 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가문이 힘을 잃어서 가깝게 지내는 숙녀도 없는 걸까.’

씁쓸한 기분이 들어서 모질게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스텔은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도 무도회장에서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요.”

프리츠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너와 함께 가고 싶었다.”

“무도회장은 여기에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예요.”

걸어가도 15분 안에 갈 수 있다.

이런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길을 걸어가려면 힘들긴 하겠지만.

프리츠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잠깐의 고민 끝에 속마음을 털어놨다.

“혼자 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던 아스텔은 마지막 한 계단을 남겨두고 걸음을 멈췄다.

6년 전, 이혼 과정이 끝난 뒤에 아스텔은 미련 없이 황궁을 떠났다. 지금 아스텔은 이혼 후 처음으로 황궁에 들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심란할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데리러 와준 건가 보다.

프리츠 오빠에게 이런 세심한 면이 있었나. 아스텔이 기억하는 프리츠는 엄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아스텔을 아껴주긴 했지만 여동생의 마음까지 다정하게 살펴주는 살가운 오빠는 아니었다.

“잠시 무도회에 참석하는 거예요.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지금은 이미 테오르의 일로 머리가 복잡했다. 마음이 심란한 것 따위는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프리츠는 아스텔의 손을 잡아주려 했지만 아스텔은 프리츠를 지나쳐서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했다. 저택의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 둘 사이엔 정적만이 흘렀다.

“아버님은 먼저 출발하셨다.”

프리츠는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무도회장에서 만나겠네요.”

마음 같아서는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만.

테오르의 일을 생각하면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은 첫 번째가 카이젠이고 두 번째가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이었다.

‘아버지가 이 일을 알면 가만있지 않겠지.’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아버지는 카이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암담했다.

‘오빠는 그 일을 알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스텔은 프리츠를 보면서 속으로 부정했다.

그런 비열한 방식은 프리츠의 취향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오빠에게 그런 일을 말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프리츠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스텔을 살폈다.

“아버님은 걱정하지 마라.”

느닷없는 소리에 아스텔은 다시 오빠를 향했다.

맞은편에 앉은 프리츠는 어두운 표정으로 아스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님이 테오르에 대해 알게 되어도 네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내가 막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프리츠도 아스텔이 테오르의 생모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젠이 아이의 친부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눈 색 때문이겠지.’

아스텔과 카이젠의 자식이라면 푸른 눈이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괜한 소리를 했다가 의심을 사게 될까 봐 아스텔은 그냥 간단하게 답했다.

“고마워요. 오빠.”

프리츠의 연두색 눈에 슬픔 서린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주마.”

고마운 말이었다.

하지만 테오르의 혈통이 밝혀지면 아스텔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때는 무슨 짓을 해도 테오르를 황궁에 빼앗기게 될 것이다.

* * *

마차는 금세 황궁 입구에 도착했다.

무도회가 있는 날이라 해 질 무렵인데도 정문을 통과하는 마차가 많았다. 전부 무도회에 초대된 손님들일 것이다. 

공작가의 자선 무도회는 무도회의 입장권을 판매해서 그 수익을 기부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입장권을 구입하면 누구나 무도회에 손님 자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비싼 입장권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고위 귀족들이 전부였지만.

오늘 무도회는 황궁에서 열리기 때문에 초대권을 파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각자 기부금을 내놓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황궁의 입구에서 무도회장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세 개의 문을 지나 황궁의 중심까지 들어가야 했다.

한참을 걸어서야 무도회장으로 쓰이는 커다란 홀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연회 홀의 대리석 문 너머로 환한 빛이 보였다. 무도회가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인지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레스턴 공자님과 공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무도회장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순간 무도회장 안에 있는 모든 이가 아스텔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스텔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놀라서 속삭였다.

“정말 폐황후예요.”

“세상에…….”

아스텔의 등장이 어지간히 놀라운 모양이었다.

덴츠 성에서도 아스텔을 보며 다들 놀라워했지만 그때는 그냥 소문으로만 듣던 폐황후를 직접 보게 됐다는 놀라움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예전부터 아스텔을 알던 귀족들이 잔뜩 있었다. 모두 6년 만에 다시 등장한 폐황후를 신기한 눈으로 관찰했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스텔은 물론이고 프리츠에게도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 지금 수도에서 레스턴 가문의 입장이 어떤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프리츠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스텔은 오빠를 돌아봤다. 그가 자신을 위로해 주려고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스텔.”

그러나 무관심과 냉대에 굴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카이젠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의 관심이 더 집중되었다. 아스텔은 치맛자락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고개를 들자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붉은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만나는 게 저렇게 불쾌한 걸까?’

이혼하긴 했지만 그녀는 어려서부터 카이젠의 약혼녀였고, 잠시나마 황후의 자리에 있던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돌연 자취를 감추더니 시골에서 사생아를 낳아서 키우고 있었다.

아스텔은 단 한 번도 카이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보기 싫은데 왜 무도회를 열고 참석하라고 강요한 거지?’

불쾌한 감정은 이해할 수 있겠는데, 그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아스텔 자신을 괴롭히려는 목적이었으면 굳이 황궁에 무도회를 열고 참석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옆에 있던 프리츠도 그에게 예를 갖췄다.

“폐하, 저희 가문의 자선 무도회를 황궁에서 열어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고 아스텔만 직시했다.

“무도회가 끝나고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지금 말씀하실 수는 없는 이야기인가요?”

“그래. 지금은 안 돼.”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말투는 의외로 담담했다.

붉은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끝나고 정식으로 말해주지.”

“…….”

뭘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신전 일이 다 해결된 마당에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을 리 없었다.

‘분명 테오르 얘기겠지.’

당황한 프리츠가 아스텔을 돌아보며 근심 어린 눈길을 보였다.

아스텔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접대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 * *

카이젠은 떠나가는 아스텔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프리츠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손님들은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연회장에 머물거나, 아니면 연회장 근처의 응접실이나 발코니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도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잠시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려는 듯했다. 지금 무도회장에서 아스텔은 호기심의 대상일 뿐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카이젠은 아스텔을 마주하는 순간 복잡한 감정들이 하나로 뒤엉켰다.

아스텔이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혼자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다니.’

6년 만에 재회했던 날, 뻔뻔스러운 얼굴로 조카라고 속이던 아스텔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스텔의 소재를 조사할 때 알아본 바에 따르면 지난 6년간 아스텔의 곁에는 남자가 없었다.

그걸 보면 아이 아버지와 깊은 관계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자식을 낳은 여자를 두고 떠난 걸 보면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스텔이 그런 남자의 아이를 낳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스텔이 안쓰럽고 가엾게 느껴졌다.

제국 최고의 공녀가 가문에서 절연당한 뒤 혼자서 아비도 없는 아이를 낳았다. 넉넉하지도 못한 형편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카이젠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스텔은 그 아이를 자기 자식이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있다. 

양 극단에 있는 상반된 감정들이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이 일로 고통을 겪는 걸 원치 않았다. 카이젠은 무도회의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크로이첸 후작 내외를 돌아봤다.

저들을 없애서 이 사실이 폭로되는 걸 막아버릴까 했었다. 하지만 어차피 아이의 출신을 영원히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아스텔은 아이의 출생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아이의 생모로 적힌 하녀를 처리하지도 못하고 출산을 도운 산파도 없애지 못했다. 그 하녀는 카이젠이 손을 쓰기 전에 크로이첸 가문으로 넘어갔다. 조사에 따르면 이미 암암리에 귀족들 사이에서 이 사실이 공유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아스텔은 사생아를 낳은 여자로 모욕을 당하고 수치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굴욕을 당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준비하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되었지?”

카이젠의 물음에 머뭇거리며 다가온 벨리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 준비는 끝났습니다만…….”

벨리안은 힘없이 말을 흐렸다.

그는 엊그제부터 이 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제발 폐하께서 지금이라도 이성을 차리고 정상적인 판단을 하시길 바랐으나, 카이젠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계획대로 실행할 테니 빈틈없이 준비해라.”

* * *

“괜찮은 거냐?”

연회장을 잠시 벗어나서 복도로 나오자마자 프리츠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카이젠을 만났을 뿐이지.

그는 할 얘기가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몰라도 분명 테오르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발코니에 가서 잠시 쉬어야겠다.”

“네, 그게 좋겠네요.”

이곳에 있다가는 아버지도 만나게 될 것이다. 카이젠을 만난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아버지까지 보는 건 피하고 싶었다.

프리츠는 앞장서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연회장으로 쓰이는 황궁의 외궁이라 발코니는 위층에 있었다.

“프리츠.”

위층에 있는 발코니로 가기 위해 계단을 향해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프리츠를 불렀다.

돌아봤더니 프리츠의 옛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아스텔 공녀. 정말 오랜만이군요. 수도에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프리츠의 친구는 민망한 듯이 말끝을 흐렸다.

아스텔이 수도에 왔다는 것을 듣고도 찾아와서 인사하지 못했으니 면목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리라. 프리츠도 그렇지만 친구인 이 사람도 사교계에서 냉대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과거에는 소위 대귀족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명문 귀족들이 사교계를 점령했었다.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귀부인들은 언제나 명문 공작가의 안주인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귀족들은 힘을 잃었고, 남아 있는 가문들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교계에서도 찬밥 신세가 되었으리라.

“저는 위에 올라가 있을게요.”

아스텔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도록 자리를 피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릇을 받쳐 든 시녀였다. 음식을 나르는 중인가 보다. 아스텔은 별생각 없이 치맛단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중간쯤에서 시녀가 아스텔에게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멈춰 섰을 때였다.

“윽!”

그릇을 든 시녀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계단 위에 엎어졌다. 그릇이 엎어지면서 그 안에 있던 묽은 수프가 사방으로 튀었다.

시녀는 바닥에 엎드려서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레이디.”

스프가 튀는 바람에 드레스의 밑단이 축축하게 젖었다. 제일 심하게 젖은 건 구두였다. 계단을 오르느라 치맛단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릇이 엎어지면서 구두 앞부분에 스프 국물이 잔뜩 튀었다.

‘이런…… 이대로는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는데.’

“아스텔 님, 괜찮으세요?”

한나가 무릎 꿇고 있는 시녀를 노려봤다. 시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가 한나의 형형한 눈빛을 보고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아는 사이야?”

“네. 비어 있는 황후궁의 시녀입니다.”

황후궁이라.

지난 6년간 황후궁에는 주인이 없었다. 하지만 주인 없는 궁이라고 해도 황후의 궁전을 방치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안에는 궁을 관리하는 시녀들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나는 바닥에 엎드린 시녀에게 싸늘한 비웃음을 보냈다.

“윗분들 앞에서는 착실하고 얌전하게 굴더니 어쩌다가 이런 실수를 했니?”

차가운 목소리엔 고의가 아니냐는 따가운 질책이 담겨 있었다.

시녀는 일순간 움찔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실수였습니다.”

“괜찮아, 한나.”

치맛단을 살펴보고 있던 아스텔은 한나를 달랬다. 일부러 그런 것 같긴 했지만 시녀를 추궁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이런 치졸한 수단에 굳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싶지도 않고.

“갈아입으셔야겠어요.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한나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아스텔은 계단 아래의 연회장 문을 돌아봤다.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 있었지만 저택에 다녀오려면 빠듯할 것 같았다.

“저, 공녀님…….”

바닥에 엎드렸던 시녀가 살며시 얼굴을 들고 제안을 꺼냈다.

“황후궁에 공녀님의 드레스와 구두가 남아 있습니다.”

“그게 아직도 남아 있다고?”

“거짓말 마. 아스텔 님의 물건은 전부 황태자궁의 창고에 있잖아.”

아스텔이 카이젠과 결혼하고 첫날밤을 보낸 곳은 황태자궁이었다. 당시 카이젠은 황태자였으니까. 다음 날 그는 황제가 됐지만 아스텔은 황후궁의 문턱을 넘어보지 못했다. 

한나의 일침에 시녀는 억울하다는 듯이 반박했다.

“폐하께서 황후궁으로 옮겨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뭐?”

‘왜 그런 명령을 내렸지?’

아스텔은 한나와 의아한 눈빛을 교환했다.

시녀가 말하는 건 아스텔이 결혼 당시 가져갔던 혼수품이었다.

이혼하고 황궁을 급히 떠날 때 혼수로 가져간 드레스와 가구들은 황태자궁에 그대로 남겨놓았다. 아스텔은 카이젠이 그 물건들을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 이제라도 돌려주려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황후궁에 옮겨놓은 거지?

“아스텔 님, 어떻게 할까요?”

한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한나는 이 뻔히 보이는 계략이 어이가 없다는 눈치였다.

아스텔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아무리 봐도 이 일은 황후궁으로 보내기 위한 조잡한 계획인 듯했다.

“가보지. 내 물건이 거기 있다니 가서 갈아입어도 되겠지.”

아스텔은 계단 아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괜한 오해가 있으면 안 되니 미리 폐하께 허락을 받아야겠어.”

황후궁에 허락없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누군가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증인이 되어 줄테니까.

아스텔은 한나에게 명령했다.

“한나, 린든 경을 찾아서 사정을 설명하고 내가 황후궁에 가서 드레스를 가져와도 될지 폐하께 허락을 구해달라고 부탁해 줘. 괜찮다면 함께 갈 시종도 보내 달라고 하고.”

이 조잡한 계획이 뭘 노리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황제에게 허락을 구하고 증인이 될 만한 시종을 데려간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네, 아스텔 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카이젠은 당연히 허락해 줬다. 시종이 아니라 근위 기사까지 딸려줬다. 아스텔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황후궁으로 향했다.

* * *

아스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침실이었다. 벽과 천장을 뒤덮은 금세공 장식이 사치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화려한 침실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침실의 가구와 장식품들이 6년 전 아스텔이 기억하던 황태자궁의 내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침대와 안락의자, 협탁과 테이블까지 전부 아스텔이 결혼하면서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침실에서 이어지는 드레스 룸에 있는 옷장과 화장대도 모두 아스텔의 혼수였다.

‘황후궁으로 똑같이 옮겨놨구나.’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아스텔은 혼란스러웠다. 한나는 옷장에 있던 드레스 두 벌과 드레스에 짝을 이루는 구두 두 켤레를 가져왔다.

“아스텔 님, 무도회용 드레스는 이 두 벌뿐이에요.”

한 벌은 물빛 나는 하늘색 빌로드, 다른 한 벌은 점잖은 은빛 실크였다. 드레스는 황태자비가 된 다음에도 필요할 때마다 새로 구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많이 준비하지 않았다.

“회색으로 할게.”

한나는 아스텔이 고른 드레스와 구두를 샅샅이 검사했다. 천을 하나하나 만져보고 구두도 안쪽 깊숙이까지 손가락을 넣어서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구두 굽을 몇 번 바닥에 쳐보기까지 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이곳까지 끌어들인 걸 보면 분명히 뭔가 준비를 해놨을 것 같았는데. 혹시 자신이 이곳에 다녀간 뒤에 뭔가를 숨겨놓고 훔쳐갔다고 하려는 건가? 

너무 조잡하고 유치한 방법이지만 크로이첸 부인이라면 그런 유치한 방식을 좋아할 것 같았다. 그런 함정을 피하려고 근위 기사까지 데려왔는데 헛수고였나 보다.

“그럼 갈아입을게.”

아스텔은 한나의 도움을 받으며 옛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딱 맞으시네요.”

다행히 6년이 지났는데도 그 시절에 지은 옷이 몸에 맞았다. 구두도 그대로였다.

“이제 돌아가자.”

* * *

아스텔은 새 드레스와 구두를 신고 다시 무도회장으로 내려갔다. 옷을 갈아입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무도회 시작 시각을 아슬아슬하게 맞췄다.

무도회장으로 들어서자 또다시 아까처럼 시선이 집중됐다. 보아하니 아스텔이 늦게 오는 바람에 다들 수다나 떨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크로이첸 후작 부인은 숨 쉬는 것마저 짜증 난다는 표정을 하고 플로린 옆에 서 있었다.

그렇게 많이 기다린 것 같지는 않은데.

황좌에 앉아 있던 카이젠이 명령했다.

“주인공이 왔으니 얼른 시작해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름다운 미뉴에트 선율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무도회의 시작이었다.

명목상 공작가의 무도회였으니 당연히 공작가 사람이 첫 번째 댄스를 춰야 했다. 프리츠가 정중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아스텔은 그의 손을 잡았다.

“드레스를 갈아입었구나.”

“네, 음식이 묻어서요.”

프리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은 것 같았지만 아스텔은 그 이상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아스텔은 프리츠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의 한가운데로 나갔다.

‘궁정 무도회의 첫 춤은 미뉴에트겠지.’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가던 중이었다.

무심코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바닥에 닿은 발이 저절로 기울어졌다.

“윽……!”

넘어지려는 순간, 바로 옆에 서 있던 프리츠가 재빨리 아스텔의 팔을 잡아챘다.

“괜찮아?”

아스텔은 그의 팔에 기댄 채 중심을 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어머……. 무슨 일일까요?”

아스텔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황급히 중심을 잡고 움직이려는데 또다시 발을 내딛자마자 힘없이 내려앉았다. 아스텔은 프리츠의 팔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왜 이러는 거지?’

조심스럽게 구두를 움직여 봤다. 구두 뒤창에 있는 높은 굽이 바닥에 닿자마자 힘없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뒷굽이…….’

구두 뒷굽이 빠져 있었다.

* * *

“뭐가 잘못됐어?”

프리츠가 아스텔을 부축해 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스텔은 너덜거리는 구두 굽을 양옆으로 움직여 보며 답했다.

“잘못된 건 아니에요. 그냥 구두 굽이 빠졌어요.”

“굽이 빠졌다고?”

“양쪽 다 너덜거리네요.”

자연스럽게 부러진 게 아니라 밑창과 이어진 부분이 빠져서 너덜거리는 듯했다. 두툼한 치맛단이 바닥까지 질질 끌려서 다행이지. 아니면 뒷굽이 너덜거리는 걸 모두에게 보여줄 뻔했다. 

치마가 길고 무거워서 발을 가려주는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있었다. 안 그래도 치맛단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이 드는데, 이제는 중심을 잡고 몸을 가누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 것이다.

“최대한 빨리 갈아 신고 올 수 있겠어?”

“글쎄요. 황후궁에 다른 구두가 몇 켤레 있긴 한데 그것도 멀쩡한지 장담할 수가 없네요.”

이 구두도 분명히 처음에 신었을 땐 멀쩡한 굽이 달려 있었다. 아마 구두 굽이 연결된 부분을 일부러 느슨하게 해놓은 모양이다. 몇 번 걷다 보면 굽이 빠져 버리도록.

쓸데없을 만큼 정성 들인 악의였다. 

아스텔은 창가 쪽에 있는 플로린 모녀를 힐끗 봤다. 플로린이 여전히 차분한 눈빛인 반면, 후작 부인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뭐, 범인은 찾을 필요도 없을 것 같군.’

아마 춤을 출 때쯤 구두 굽이 부러지게 할 계획이었겠지. 한나가 구두를 검사하다가 굽을 몇 번 내려쳐 봐서 다행이었다. 그 덕에 구두 굽이 좀 더 일찍 빠진 거겠지. 안 그랬으면 춤을 추다 말고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그랬으면 엄청난 망신이었을 것이다.

아스텔이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자 카이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발목을 다친 거야?”

그가 아스텔에게 자상한 관심을 보이자 주변의 시선이 또 미묘해졌다.

아스텔은 발뒤꿈치를 들고 서서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폐하.”

이렇게 정성을 들인 걸 보니 황후궁에 있는 다른 구두도 멀쩡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아스텔은 프리츠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뉴에트는 무리예요.”

미뉴에트는 달콤한 선율만큼이나 복잡하고 우아한 춤이었다. 기나긴 곡이 끝날 때까지 번갈아 자리를 옮기고 위치를 바꾸면서 정교하게 스텝을 밟아야 한다.

이 너덜거리는 구두를 신고 추려면 시작도 하기 전에 열 번쯤은 넘어질 것이다.

‘어쩌지?’

뭐, 저택에 가면 원래 신던 낡은 구두가 있으니까 그걸 가져오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건 무도회용 구두가 아니었다. 무도회용 구두는 평범한 구두와는 달랐다. 매끄러운 바닥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스텝을 밟을 수 있게 특별히 주문 제작하기 때문이다.

뭣보다 한나를 불러서 구두를 가져오는 동안 여기 있는 사람들을 계속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다.

‘이미 늦게 시작했는데 또 늦추자니 좀 그런데.’

그냥 몸이 안 좋다고 하고 돌아가는 게 나으려나. 아니면 한나가 새 구두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잠시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왜 저러죠? 춤을 못 출 것 같아서 그러는 걸까요?”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았으니…… 스텝을 잊어버렸으려나요.”

순간 프리츠의 눈에 불쾌감이 서렸다. 갑자기 그가 한쪽에 있는 시종에게 손짓했다. 연회의 진행을 담당하는 시종이었다.

“공자님,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누이와 잠시 의논을 했습니다.”

시종이 다가오자 프리츠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저희 가문에서는 무도회의 첫 댄스를 미뉴에트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춤을……?”

프리츠는 카이젠을 돌아보며 공손히 부탁했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왈츠를 좋아하셔서 무도회의 첫 댄스는 언제나 왈츠였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이번에도 첫 댄스는 왈츠로 하고 싶습니다.”

카이젠은 당연히 반대하지 않았다.

“주최자의 뜻대로 해야지.”

아스텔은 오빠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왈츠를 추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미뉴에트와 달리 두 사람이 밀착해서 추는 춤이라 남성이 여성을 받쳐 올리다시피 지탱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재미 삼아 춤을 연습하던 거 기억나느냐?”

“그럼요.”

아스텔은 여섯, 일곱 살 때쯤 오빠의 발등에 올라서서 장난삼아 왈츠 연습을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프리츠는 아스텔이 그때의 일을 기억한다는 말에 기뻐하는 눈빛이었다.

“그때처럼 해보자.”

“너무 무거울 텐데요.”

프리츠가 소리를 낮춰서 작게 웃었다.

“괜찮아.”

왈츠의 감미로운 선율이 들려왔다.

그래도 어릴 때처럼 오빠의 발등에 올라탈 수는 없었다. 아스텔은 너덜거리는 구두 굽이 바닥에 닿지 않게 발뒤꿈치를 들고 스텝을 따라갔다. 몇 번 중심을 잃을 뻔했지만 다행히 무리 없이 스텝을 따라갈 수 있었다.

아스텔이 쓰러질 듯 비틀거릴 때마다 프리츠가 그녀를 붙잡고 스텝을 이끌었다. 아스텔은 그의 팔에 의지한 채 간신히 스텝을 맞췄다. 그렇게 아스텔을 지탱해 주면서도 정작 프리츠는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아스텔은 오빠를 올려다보며 내심 감탄했다.

‘오빠도 의외로 힘이 대단하네.’

하긴 성실한 도련님처럼 보여도 프리츠는 한때 근위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검술로 단련된 힘이 있을테니 아스텔의 몸을 지탱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나 보다.

몇 번을 그렇게 돌고 나자 첫 번째 음악이 끝났다. 프리츠는 아스텔을 부축한 채 홀의 중앙을 빠져나왔다. 아스텔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속삭였다.

“발코니로 가주세요.”

사람들은 조금 의아하게 보는 것 같았지만 어디 가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춤을 추다가 잠시 쉬러 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스텔은 프리츠와 함께 2층의 발코니로 올라갔다.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서자 한숨부터 나왔다.

아스텔은 지친 얼굴로 프리츠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마워요.”

프리츠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폐하께 허락을 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

“아니에요.”

그럴 필요는 없었다.

첫 댄스는 끊었으니 이제 더는 춤을 출 일도 없다. 여기서 노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 어차피 돌아가겠다고 해도 카이젠이 보내주지도 않을 것 같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한나가 황급히 발코니로 따라왔다.

“아스텔 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구두가 망가졌을 뿐이야.”

아스텔은 난간에 기댄 채 구두를 벗었다.

“분명히 확인했는데…… 열심히도 준비했네요.”

“정말 쓸데없는 정성이지.”

한나는 시녀들의 대기실에 가서 실내용 구두를 구해 왔다. 구두라기보다 슬리퍼에 가까운 푹신한 천으로 만든 낮은 신발이었다. 한나는 두 사람을 위해 잔에 담긴 샴페인도 가져다주었다. 아스텔은 시원한 샴페인을 조금 마셨다.

과일 향이 감도는 상쾌한 술이 열에 들뜬 목을 식혀주었다.

“아스텔 님.”

“린든 경?”

린든이 발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아스텔에게 허리를 굽히며 카이젠의 명령을 전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이요?”

무도회가 끝나고 부른다고 하지 않았나?

아스텔은 프란츠와 눈빛을 교환한 뒤 발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아래층의 무도회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스텔은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몇 번째 이런 등장인지 모르겠네.’

연회장에 들어갈 때마다 시선이 집중된다. 끝날 때까지는 내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아스텔.”

돌아봤더니 카이젠이 서 있었다.

아스텔은 그의 모습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긴장으로 굳어진 표정과 얼어붙은 붉은 눈동자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가 아스텔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평범한 귀족 신사가 숙녀에게 춤을 청하는 것처럼.

아스텔은 놀라서 굳어졌다. 알현실에 모여 있던 수많은 귀족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카이젠이 이 자리에서 갑자기 폭탄을 꺼내서 집어 던져도 다들 이것보단 덜 놀랄 것 같았다.

아스텔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며 숨을 들이켜듯 더듬거렸다.

“폐하…… 왜…….”

카이젠은 자신에게 향하는 경악한 눈빛들을 무시했다.

그는 오직 아스텔만을 보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그와 아스텔 단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가 천천히 분명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아스텔, 부디 내 아내가 되어 줘.”

* * *

일순간 세상이 멈췄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시간의 흐름도, 연회장의 풍경도, 순식간에 흐릿하게 사라졌다. 눈앞에는 오직 카이젠만이 남아 있었다.

연회장의 중심에 당당히 서서 아스텔을 바라보는 카이젠.

황제의 예장을 입고 선 모습에는 강하고 냉혹한 군주의 위엄이 서려 있다.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아스텔이 먼저 침묵을 깼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스텔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카이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신에게 청혼하는 거야.”

연회장 안에는 경악스러운 침묵이 감돌았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웅성거리거나 감탄사라도 터져 나왔을 텐데. 이건 너무 놀랍다 보니 어느 누구도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황제 폐하가 6년 전에 이혼하고 내친 전 황후와 다시 결혼하겠다니.

모두 너무 놀라서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스텔도 넋을 잃고 카이젠을 바라봤다. 먼지 쌓인 기억 속에 열 살짜리 카이젠이 보였다. 어린 황태자 전하는 푸른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건네주며 아스텔에게 청혼했다.

‘아스텔, 나와 결혼해 줘.’

앳된 얼굴로 미소 짓던 어린 황태자가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른다.

비록 어른들의 계산으로 만들어진 약혼이었지만, 아스텔은 그 순간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 카이젠은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와 결혼해 줘, 아스텔.”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아스텔은 혼란한 가운데서도 의문을 느꼈다. 카이젠은 테오르가 아스텔의 자식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도 청혼을 하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걸까?’

아스텔은 너무 당혹스러워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카이젠의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크로이첸 후작 부인이었다. 구석에 서 있던 후작 부인이 억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뛰쳐나왔다. 

“폐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연회장 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폐하! 아스텔 공녀는 사생아를 조카라고 속여서 키우고 있습니다!”

“어머니!”

플로린이 후작 부인을 말리려고 쫓아 나왔다. 후작 부인과 달리 플로린은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황제가 갑작스레 청혼한 이상 상대의 명예를 훼손하는 짓을 하면 황제에 대한 모욕이 된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황제가 아스텔에게 청혼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딸의 손을 뿌리치며 아스텔에게 삿대질을 했다.

“아비도 없는 사생아를 낳아서 조카라고 속인 주제에 뻔뻔스럽게 황궁에 나타나다니……!”

후작 부인의 난데없는 폭로에 전율에 가까운 놀라움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전 황후가 사생아를 낳았다니…….

황제 폐하께서 폐위된 전 황후에게 다시 청혼한 것보다 더 엄청난 충격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귀족들은 충격을 받다 못해 경악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 놀라운 광경에 넋을 잃고 있던 레스턴 공작이었다. 공작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되물었다.

“뭐, 뭐라고?”

아버지의 격렬한 반응에 프리츠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감돌았다.

“아스텔, 그게 사실이냐?”

아스텔은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는 눈치 빠른 아버지에게 덜미를 잡힐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아버지에게 과거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해 줄 이유도 없었고.

답답해진 공작이 딸에게 소리쳤다.

“아스텔!”

혼란스러운 와중에 카이젠이 입을 열었다.

“린든.”

싸늘한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연회장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카이젠은 문가에 서 있는 린든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후작 부인을 끌어내라. 감히 황궁에서 공녀를 모욕하다니.”

“예, 폐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후작 부인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제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증인도 있어요! 저 여자에게 물어보세요!”

증인.

그 한 단어에 아스텔은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했다.

그랬구나.

어떻게 알아냈나 했더니 테오르의 생모로 등록한 하녀를 찾은 모양이다. 하긴 이 일에 증인이 되어줄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 출산을 도운 산파도 있지만 노쇠한 산파는 아스텔의 신분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확실한 증인이 되어줄 사람은 하녀뿐이었다.

‘공을 많이 들였네.’

찾기 어려웠을 텐데 금방 수소문해서 찾아낸 걸 보면.

후작 부인은 큰딸 마리안의 일과 덴츠 성에서의 일로 아스텔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으니 아스텔을 망신 주기 위해 정성을 들일 만도 했다만.

당황한 린든이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얼른 후작 부인을 데려가라는 뜻이었다.

기사들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맑고 침착한 목소리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네, 그래요.”

충격으로 흔들리던 시선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아스텔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테오르는 내 아들이에요.”

순순히 고백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충격과 경악, 조소와 경멸이 가득한 시선들이 화살처럼 내리꽂혔지만 아스텔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테오르를 빼앗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후작 부인이 비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더럽고 뻔뻔스러운…….”

아스텔은 말없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후작 부인은 움찔 놀랐다.

“후작 부인.”

아스텔은 거리낌 없는 태도로 물었다.

“제가 사생아를 몇 명 낳든 부인과 무슨 상관이 있지요?”

후작 부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명색이 제국의 공녀가…….”

“제가 아이를 낳는 게 죄가 되나요? 저는 이혼한 뒤 줄곧 홀로 지냈는데. 남편을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죠?”

제국에서는 사생아를 낳는 것 자체는 죄가 되지 않는다. 양쪽 다 미혼이라면 조금도 문제 될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언제나 세상 사람들의 질책과 비난이 뒤따르는 법이었다.

특히 사생아를 낳은 여자에게는 평생 동안 조롱과 멸시의 시선이 쏟아졌다.

아스텔은 몸을 돌렸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어두운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서류에 아이의 출신을 속인 것은 잘못이니 폐하께서 처벌하신다면 벌을 받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후작 부인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나와 내 아들을 모욕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후작 부인은 아스텔의 서늘한 협박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아이의 생모가 누구인지 폭로했으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경악하는 와중에도 변함없는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카이젠은 무덤덤한 눈으로 아스텔을 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세 번째로 충격을 맛봤다.

쫓겨난 황후가 사생아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전 황후에게 청혼을 했다.

꾸며내기도 어려울 만큼 놀라운 사건이었다.

“린든. 뭘 하고 있느냐?”

카이젠의 조용한 질책에 린든은 다급히 기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기사들은 후작 부인을 연회장에서 끌어냈다.

당황한 후작 부인이 남편을 돌아봤지만 크로이첸 후작은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폐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폐하!”

후작 부인은 뒤늦게 용서를 빌었지만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가만히 고개를 들고 카이젠을 바라봤다.

카이젠이 왜 자신에게 청혼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처음엔 놀랐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이 이 스캔들로 상처받고 모욕당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황제의 청혼을 받은 여자라면 누구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을 테니까. 눈앞에서 보여주었으니 다른 말이 나올 것도 없었다.

“분위기를 망쳐서 송구합니다, 폐하.”

그러나 아스텔은 그의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스텔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대로 연회장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한 걸음을 떼는 순간 카이젠이 손목을 잡아챘다.

“내 제안은 여전히 그대로야.”

아스텔을 붙잡은 그가 간절한 눈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와 결혼해 주길 바라.”

“…….”

저 말을 듣고 한없이 행복해하던 때가 있었다.

아직 세상을 모르던 어린 아스텔은 카이젠의 청혼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 지금도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우치진 못했으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안다.

아스텔 자신과 카이젠은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

그리고 아스텔은 이제 카이젠의 마음에 휘둘리며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은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스텔은 붙잡힌 손목을 빼냈다.

“청혼은 거절하겠습니다.”

* * *

연회장 밖은 캄캄한 밤이었다.

서늘한 공기에 머리가 조금 맑아진다. 불안하게 요동치던 심장이 점차 안정을 찾았다.

“아스텔!”

뒤따라 나온 프리츠가 아스텔을 찾아왔다.

“오빠, 전 괜찮아요.”

사실은 별로 괜찮지 않았다. 아직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무심한 낯을 가장하며 마음속의 혼란을 능숙하게 숨겼다.

“아스텔 님!”

한나가 아스텔의 짐을 챙겨서 두 사람을 찾아왔다. 연회장에서의 일을 전해 들었는지 황망한 표정이었다.

“아스텔 님…… 괜찮으세요?”

“한나. 나는 괜찮아.”

프리츠는 연회장의 문을 돌아봤다.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아스텔도 동의했다.

여기 오래 있다가는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건 연회장 전의 일로도 충분했다.

아스텔은 프리츠와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스텔은 침실로 향했다. 화장대 위에 목걸이를 벗어놓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저택에 도착하자 쌓여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 일은 전부 예상했던 일들이었다.

카이젠이 아스텔과 테오르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다는 것도.

플로린 모녀가 그 일과 관련해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다 예상하고 각오하고 있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카이젠의 청혼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그 자리에서 청혼할 줄이야. 아무리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고 해도 그렇지. 제국의 황제가 이혼한 전 황후에게 공개 청혼을 하다니.

‘바보같이.’

황제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일인 데다 황가의 체면도 깎아내리는 일이건만.

그런 터무니없는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수도 안의 모든 귀족이 이 일에 대해 떠들어댈 것이다. 짐을 챙겨서 당장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 무도회에 참석하라는 명령에 순순히 복종했으니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도 될 것이다.

아스텔은 날이 밝자마자 짐을 싸 들고 떠나겠다고 마음먹었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아스텔 님.”

한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한나.”

“욕탕에 목욕물을 준비해 뒀습니다.”

‘그래, 옷을 벗고 화장을 지워야지.’

아스텔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치마를 부풀린 드레스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한나가 아스텔을 부축했다.

“아스텔 님.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한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아스텔을 위로했다.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더 고민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어쨌든 목표는 달성했다. 테오르는 할아버지와 함께 동부로 떠났다. 테오르의 친부가 누구인지도 들키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스텔은 화장대 앞에 앉았다. 한나가 아스텔의 머리를 풀어줬다.

“목욕하시기 전에 차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한나가 창백한 표정의 아스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문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텔!”

익숙한 고함 소리였다. 아스텔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이었다.

“아스텔! 어디 있느냐?”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어 놓은 머리카락이 등 뒤로 흘러내렸다. 그대로 걸어가서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여기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오던 아버지가 아스텔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프리츠가 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스텔.”

아버지 레스턴 공작이 이를 갈아붙이며 아스텔의 방으로 들어왔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신가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허락도 없이 돌아가 버리다니. 연회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제가 저택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하나요?”

아스텔은 차분하게 반문했다.

당연히 아버지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아스텔은 가문에서 의절당한 몸이었으니까. 

공작은 마음 같아서는 아스텔을 당장에라도 후려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정말이냐?”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 어린애가 정말로 네 자식이냐는 소리다!”

공작은 참다못해 소리쳤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한쪽 눈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공작을 뒤쫓아 온 프리츠가 아버지를 말렸다.

“아버지. 그만하세요.”

그러나 아스텔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들었으면서 왜 다시 묻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순순히 대답을 반복했다.

“네, 연회장에서 들으셨잖아요. 테오르는 제 아들이에요.”

방 안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작은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멍하니 서 있었다.

짧은 침묵이 흘러간 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 더러운……!”

“아버지.”

프리츠가 냉엄한 표정으로 공작을 막아섰다.

“제 누이를 모욕하시면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스텔은 조금 놀랐다.

행실 바른 오빠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드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공작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아스텔을 모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가 감히 아비에게…….”

그때 문밖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딱딱한 발걸음 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똑똑.

두 차례의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뒤로 근위대 정복을 입은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을 거느린 린든이 안으로 들어와서 아스텔에게 예를 갖췄다.

“아스텔 님. 한밤중에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괜찮아요, 린든 경. 무슨 일인가요?”

린든은 아스텔 곁에 있는 공작 부자를 힐끗 쳐다본 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명령으로 오늘부터 근위대가 이 저택을 지킬 겁니다.”

좀 전보다 더 무겁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 저택을 지킨다고요? 왜요?”

린든의 진중한 얼굴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아스텔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챘다.

‘아스텔 님은 폐하의 청혼을 받으신 분이니……. 황제 폐하의 정혼자나 다름이 없으십니다. 당연히 근위대의 보호를 받으셔야…….’

대충 그런 이유일 것이다.

린든은 차마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최대한 완곡하게 대답했다.

“폐하의 명령이십니다.”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못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는 내일 떠날 예정이에요.”

“떠나신다고요?”

“떠난다고?”

떠난다는 말에 린든보다 공작이 더 놀랐다.

“이미 황제 폐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물론 무도회에서 청혼을 받기 전의 일이었지만.

“죄송합니다만, 아스텔 님. 폐하의 명령 없이는 이 저택을 떠나실 수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 밖에 나갈 수는 있는 건가요?”

“외출하시는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기사들이 동행할 겁니다.”

“…….”

이미 허락을 받았다고 우기면서 내일 당장 수도를 떠나려고 했는데.

청혼까지 한 걸 생각하면 쉽게 보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하니 저택에 감금해서 감시할 줄은 몰랐다. 아스텔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눌러 참았다.

“제가 감금당한 건가요?”

저택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밖에 나가려면 기사들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사실상 감금이었다.

“그, 그럴 리가요. 어디까지나 아스텔 님을 보호해 드리는 겁니다. 가족분들도 얼마든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절대 감금이 아닙니다.”

린든은 황급히 그렇게 둘러댔지만 그의 순박한 눈에는 깊은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

그 역시도 마음속으로는 감금이라는 말에 동의하고 있는 듯했다.

“그럼 저는 기사들을 배치하고 떠나겠습니다.”

린든은 재빨리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서도 잠시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황제가 근위대를 보내서 아스텔을 지키라고 했다. 이것은 아스텔을 황후로 삼겠다는 가장 강력한 의사 표시였다. 과거 아스텔은 황태자의 약혼녀로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지만, 근위대의 보호를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공작과 프리츠는 물론 당사자인 아스텔마저 말을 잇지 못했다. 무도회장에서 카이젠이 직접 청혼하는 모습을 목격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이 정도로 강하게 아스텔과의 결혼을 원할 줄은 몰랐다.

“청혼을 받아들여라.”

침묵을 깬 사람은 공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뭘 거부하는 거냐? 내일 다시 황제를 찾아가서 오늘 일을 사죄하고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싫어요. 제가 청혼을 받아들일 일은 없을 거예요.”

“왜 거부하는 거냐? 황제와 결혼하면 너는 다시 황후가 되는 거야!”

“아이 딸린 여자가 황후가 되었다고 평생 비웃음을 당하겠죠.”

“사생아를 낳은 공녀로 비웃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공작은 차갑게 조소했다.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황궁에 들어가서 카이젠의 옆자리를 지키며 사는 것보다 시골에서 테오르와 함께 편하게 사는 것이 훨씬 좋았다.

‘이제 와서 다시 황후가 되라니…….’

그러나 마음 한편에선 갈등이 생겼다.

아스텔이 테오르의 친부를 철저하게 숨겨왔던 건 황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키면 아이를 빼앗기기 때문이었다.

테오르가 황자가 되어 황궁에 들어가 버리면 아스텔은 아이를 지킬 수 없었다. 가엾은 테오르는 새 황후의 자식들에게 치이다가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스텔 자신이 다시 황후가 된다면…….

더는 전전긍긍하며 아이의 혈통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 황궁에 들어가서 미약하게라도 테오르를 지킬 힘을 얻을 수 있다.

‘다시 황후가 되는 편이 안전할까?’

아스텔은 마음속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공작의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네가 그동안 힘들게 살았던 건 알고 있다. 그때는 나도 너무 심했지. 이제라도 네게 용서를 빌겠다.”

공작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아스텔에게 사과했다. 그러고는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난 일은 잊고 현실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 황제가 공개적으로 네게 청혼했다. 다시 황후가 될 기회가 왔는데. 그걸 걷어차겠다고?”

“네. 거절하겠어요.”

아스텔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일순간 갈등이 생기긴 했지만 아버지를 보는 순간 빠르게 결정이 났다. 아스텔 자신은 황후가 될 수 없었다.

테오르의 혈통을 밝히고 아스텔이 황후가 되면,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은 외손자를 황제로 만들려고 또다시 위험한 짓을 벌일 것이다.

아스텔은 물론이고 테오르까지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죽어도 아비 말을 듣지 않겠다고?”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살았어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딸로 자랐죠.”

어릴 때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가문의 이름을 길이 빛내는 훌륭한 딸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끝내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는 없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바라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뤄냈지만, 단 한 번.

카이젠의 이혼 요구를 듣고 자신의 뜻대로 이혼을 결정했다는 그 단 한 번의 결정 때문에 20여 년의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아스텔은 실패작이 되어 가문에서 내쫓겼다.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와 가문에 대한 의무는 다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결국 황제의 청혼을 거절하고 시골로 돌아가겠다고?”

“네. 그래요.”

공작은 아스텔을 한참 노려보다가 차갑게 비웃었다.

“어떻게 돌아갈 생각인지 몹시 궁금하구나.”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사실상 이 저택 안에 감금당했다. 이제는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다.

* * *

무도회 밤부터 아스텔의 감금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활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아스텔은 여전히 이 사치스러운 저택 안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저택 안에는 수많은 하인과 하녀들, 시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스텔이 원하는 건 뭐든지 가져다주었다.

행동도 자유로웠다. 저택 안에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원한다면 저택의 지하나 지붕 꼭대기에도 갈 수 있다.

오직 저택의 대문만 넘어갈 수 없었다.

사실상 세상에서 제일 호화로운 감금이었다. 그러나 호화롭든 사치스럽든 감금은 감금이었다.

“린든 경. 저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요?”

아스텔은 정원에 나가서 린든을 붙잡았다.

린든은 난처한 얼굴로 수없이 반복했던 대답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아스텔 님. 죄송합니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가요?”

린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텔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무도회가 끝나자마자 짐을 싸 들고 떠날 예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이고 말았다.

카이젠은 호위라는 명목하에 아스텔을 저택에 감금했다. 사람을 가둬놓고는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몇 번이나 알현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폐하를 뵙게 되면 다시 한번 부탁드려 주세요. 제가 꼭 뵙기를 청한다고요.”

“알겠습니다. 아스텔 님. 반드시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스텔은 돌아서서 정원의 끝으로 향했다.

저택 안은 물론이고 정원에도 이곳을 지키는 근위대 기사들이 있었다.

근위대 기사들은 아스텔이 지나갈 때마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예를 표했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궁금할 만도 하지.’

수도 안에는 아스텔에 대한 소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고 했다.

황제 폐하가 폐황후를 다시 데려왔다. 공개적으로 청혼까지 했단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아이 딸린 여자가 황후가 된다니. 그것도 사생아를 낳은 여자가.

덕분에 이혼 과정과 더불어 아스텔의 존재 자체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결혼한 지 단 하루 만에 쫓겨난 황후. 6년 동안 사라졌다가 사생아를 데리고 나타난 공녀.

그런데도 다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기이한 여자.

대충 이런 평가라고 한다.

“아이에 대해서는 뭐라고들 하고 있지?”

아스텔이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테오르의 일이었다. 이미 아스텔이 아이의 친모라는 게 밝혀진 이상, 혹시 테오르가 황제의 아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을까?

한나는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도련님의 출생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만일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라면 진작에 밝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요.”

하긴, 설마 폐황후가 황자를 사생아로 꾸밀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없겠지.

사생아를 낳은 여자는 여전히 모욕적인 시선을 받았다.

아스텔은 명문가의 공녀였다. 귀한 신분의 공녀가 손가락질당하는 일을 자처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행이야.”

아스텔은 한나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뒤에서는 뭐라고 떠들어대든 이곳 시녀들과 시종들은 아스텔에게 몹시 깍듯했다. 황후가 되실 분이라며 벌써부터 ‘황후 폐하’라고 부르는 시종들도 있었다. 아스텔은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금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재혼할 거라는 건 이미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청혼까지 했으니 다들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스텔의 의견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테오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스텔을 가장 심란하게 만드는 일은 테오르와 할아버지의 소식이었다.

이곳에 감금당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린든은 아스텔에게 할아버지와 테오르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아스텔은 순순히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린든은 당황했지만 반박하진 못했다. 황제가 이미 허락했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나.

그는 황궁에 돌아가서 카이젠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그 사실을 들은 카이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단다.

‘다행이지.’

테오르를 돌려보내는 일은 잘 마무리된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아스텔은 이상하게 불안감을 느꼈다. 두 사람이 별일 없이 무사히 가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출발한 지 며칠이 지났으니 얼마 안 있으면 집에 도착할 텐데. 연락을 해볼 수도 없고 쫓아갈 수도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니 무슨 일이 있겠느냐만.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아스텔은 이틀 전, 프리츠를 불러서 따로 부탁했다.

테오르와 할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내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켜달라고.

무도회의 일만 없었다면 테오르와 할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젠이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청혼하고 이제는 저택에 감금까지 시켰다. 지금 테오르는 아스텔의 사생아로 세간에 알려진 상태였다.

혹시라도 아스텔에게 원한을 품고 테오르에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스텔은 그런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유일하게 도움이 되어줄 만한 프리츠에게 도움을 청했다.

프리츠는 당장 사람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한나가 물가에 서 있는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스텔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아스텔 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과 후작님은 무사히 집으로 가고 계실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생각이 너무 많아서 과민해진 기분이다. 걱정만 하고 있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스텔은 정원의 끝에서 몸을 돌렸다. 방으로 들어가서 휴식을 취할 생각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아스텔 님.”

저택의 본관으로 향하는 샛길을 따라 시녀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한나가 그녀를 막아서며 물었다.

시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아스텔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알렸다.

“폐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 *

“황제 폐하의 친서를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벨리안은 몹시 떨떠름한 눈빛으로 공손하게 황제의 친서를 바쳤다. 그의 앞에 있는 레스턴 공작은 황제가 보냈다는 친서를 바라보며 조롱 섞인 찬사를 내뱉었다.

“폐하께서 직접 친서를 내리셨다니. 이렇게 영광스러울 데가 있나.”

벨리안은 공작의 비웃음을 무시하며 황제의 친서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스텔 공녀님의 일입니다.”

아스텔의 이름이 나오자 공작의 단정한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황제가 친서랍시고 보낸 편지를 읽었다. 형식적인 인사말과 서두를 대충 넘겨 버리고 아래로 내려가자 제일 먼저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에 레스턴 공작가에 청혼의 뜻을 전하는…….]

공작은 벨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건 친서가 아니라 청혼서로군.”

벨리안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작은 다시 친서의 본론 부분을 읽었다.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느라 쓸데없는 미사여구가 들어가 있긴 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아스텔과 다시 결혼하고 싶다는 것.

관습에 따라 부친인 레스턴 공작에게 허락을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공작은 황제의 친서를 읽으며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무도회부터 이상했지.’

공작가의 자선 무도회는 죽은 아내가 자선 모금을 한답시고 만들어낸 행사였다.

자선 행사를 열거나 기부를 하는 부인은 많았다. 귀부인들은 자선을 베푸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일종의 과시용 미덕인 셈이다.

공작은 여자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제 어머니를 추억한답시고 자선 무도회를 열었을 때도 의무적으로 참석만 했다.

그런데 카이젠이 그 자선 무도회를 황궁에서 열겠다고 느닷없이 통보해 왔다.

공작은 당황했다. 순행에서 돌아온 황제가 왜 공작가의 소소한 행사에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다행히 그 자리에 있었던 프리츠가 아버지의 의문을 풀어줬다. 프리츠는 황제가 아스텔에게 보답해 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태후의 유언장 일을 쉽게 마무리 짓게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일 뿐이라고.

조금 미심쩍긴 했지만 공작은 아들의 말을 믿었다. 그것 말고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아스텔이라면 황제에게 영지나 돈으로 보상을 요구하는 대신, 제 어머니의 무도회를 황궁에서 열어달라고 멍청한 부탁을 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공작은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청혼하는 것을 보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카이젠이 자선 무도회를 황궁에서 개최한 것은 아스텔에게 청혼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반했다. 그건 누가 봐도 열렬히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순행 도중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텔이 드디어 젊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무려 이혼 후 6년 만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기가 막힌 일이긴 했지만 이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지난번 암살 시도가 무산된 뒤 공작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 언제 그가 한 짓이 발각돼서 처형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삶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돌파구가 생겼다.

‘아스텔을 다시 황후로 만들면.’

아스텔이 황후가 돼서 시간을 벌어주면 된다. 아스텔이 황궁에 들어가 있으면 황궁 안에도 공작가 사람들을 심을 수 있다.

지금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눈이 멀어서 뭐든지 해달라는 대로 해줄 것이다. 잘하면 카이젠을 없앨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혹시 모르지. 운이 좋으면 아스텔이 황손을 임신할 수도 있고.’

아스텔이 황제가 될 아이를 낳으면 레스턴 가문은 다시 예전의 힘을 되찾게 될 것이다.

카이젠을 없애고 자신의 외손자가 황제가 된다. 꿈같은 미래였다.

그 정도로 잘 풀리지는 못하더라도 아스텔이 황후가 되는 건 공작으로서는 마다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이것 참, 너무 과분한 영광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공작은 황제의 친서를 내려놓으며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이 몇 년 전에도 황후를 배출하는 영광을 얻기는 했네만. 이렇게 영광스러운 일은 반복해서 겪어도 여전히 놀라워서 말일세. 안 그런가?”

“…….”

벨리안은 공작의 조롱을 한 귀로 흘리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공작님의 허락을 얻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나는 찬성일세. 내 부족한 딸을 선택해 주신 황제 폐하의 은덕에 평생을 두고 감사하겠다고 전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벨리안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더는 그를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벨리안이 사라지자마자 공작은 곁에 있던 부하에게 물었다.

“그 애는 찾았느냐?”

“예, 숙소를 찾았습니다.”

공작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반했고, 심지어 황후로 삼겠다고 청혼까지 했다. 그런데 정작 아스텔은 고집을 부리면서 한사코 청혼을 거절하고 있었다.

공작은 아스텔을 카이젠과 결혼시키기 위해 아스텔의 약점을 잡기로 했다. 아스텔의 약점이 뭔지는 아주 명백했다.

‘제 자식은 소중하겠지. 그 사생아를 잡아놓으면 아스텔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될 거야.’

공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령했다.

“그 애를 붙잡아서 수도로 데려와라.”

* * *

아스텔은 저택의 응접실로 향했다.

저택 입구에 못 보던 기사들이 보였다. 카이젠을 따라온 근위대 기사들인 모양이다. 낯선 얼굴들을 보니 카이젠이 저택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아스텔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햇살이 가득한 응접실에 카이젠이 서 있었다.

“아스텔.”

카이젠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황제의 예복을 입은 모습은 제국의 주인답게 강인한 품격과 위엄이 넘친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군.’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카이젠은 언제나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카이젠이 저렇게 당당하고 근사한 모습으로 제국을 지배하는 동안 아스텔 자신은 포로처럼 이곳에 갇혀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폐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알현 신청을 하긴 했지.

한 번만 만나달라고 서른 번도 넘게 전했는데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됐다. 아스텔은 카이젠을 향해 직설적으로 물었다.

“폐하, 저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합니까?”

“여기서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이 있나?”

이 순간엔 아스텔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을 가둬놓고 불편한 게 있냐니.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요.”

저택 안에서만 산다면야 불편할 건 없었다.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침실에 궁정 요리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식사가 나오고, 온종일 시녀들이 살뜰하게 시중을 들어줬으니까.

“하지만 저는 이 저택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 동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

카이젠은 지극히 당연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명령했다.

아스텔은 기가 막혔다.

“폐하, 하지만 집에 저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기사들을 보내서 당신 외조부와 테오르를 다시 수도로 데려오게 했어.”

“뭐라고요?”

‘뭘 어떻게 했다고?’

테오르를 먼저 수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다시 이곳으로 데려오게 했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마음 같아서는 눈앞에 있는 카이젠을 밀치고 화를 내고 싶을 정도였다.

“저택에 가둬둘 사람은 저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카이젠은 아스텔의 원망 어린 눈빛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는 당신 곁에 있어야지. 당신은 아이를 돌려보낸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

“황공합니다만, 폐하. 지금 제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스텔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물었다.

지금 그녀가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카이젠이 그녀를 여기 감금하고 집에 보내주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카이젠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스텔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당신은 공녀 신분으로 사생아를 낳았잖아. 지금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는지 알기나 해?’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아스텔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무슨 말을 하든지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의 소문 때문에 테오르의 출생을 들킬 염려만 없다면야, 뭐라고 떠들어대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카이젠은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아버지에게 청혼서를 보냈어.”

이제는 놀라는 것도 지칠 지경이었다.

“황실청에서 국혼 준비를 시작했어. 빠르면 두 달 안에 대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될 거야.”

“죄송합니다만, 폐하. 거절한다는 말의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되셨나요?”

차가운 조소에 카이젠의 표정도 서늘하게 굳어졌다.

화를 내려나. 감히 황제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심한 무례였다.

하지만 카이젠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번민이 드러난 눈빛으로 아스텔을 직시했다.

“당신이 모욕당하게 놔둘 순 없어. 이번에는 절대 고통받지 않게 할 거야.”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절절한 진심과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는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반평생을 그의 약혼녀로 살아온 아스텔을 첫날밤 이후 수치스럽게 내쫓았던 일을. 그 결과 아스텔은 가족들에게 절연 당하고 혼자 아이를 낳아 미혼모가 됐다.

카이젠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카이젠은 말없이 서 있는 아스텔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탓이겠지. 내가 책임지고 일을 바로잡을 기회를 줘.”

“그래서 제게 청혼하신 건가요?”

“형식상의 결혼일 뿐이야.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겠어. 당신은 그저 황후의 지위를 갖게 되고 다시 제국의 안주인이 되는 거야.”

“…….”

어떤 식으로든 지나간 일을 다시 바로잡을 수는 없다.

아스텔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카이젠은 지나간 일에 대한 보상으로 그녀에게 황후 자리를 돌려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테오르도 내 자식으로 삼아서 황자로 기르겠어.”

이 대목에서는 아스텔도 심장이 메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스텔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부질없이 기운이 빠졌다.

“당신에게 소중한 건 내게도 소중해.”

고개를 들자 진한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대답 없는 아스텔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줘.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을 하는 카이젠도.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아이의 친부를 숨기고 있는 아스텔 자신도.

아스텔은 충동적으로 그를 불렀다.

“폐하…….”

목소리가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스텔은 참았던 감정을 토해놓듯이 힘겹게 말을 시작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스텔은 본능적으로 이게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느꼈다.

‘…….’

아스텔은 말을 끊고 잠시 마음을 진정시켰다.

기껏 마음을 다잡았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카이젠을 보자 다시 말문이 막혔다.

이걸 말해도 될까?

아스텔이 염려하는 건 테오르를 황궁에 빼앗기는 것.

그리고 테오르가 정쟁의 희생양으로 이용당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를 막아내기 위해 아스텔은 지난 시간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 왔다.

카이젠에게 진실을 고백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사생아에 불과한 아이를 황자로 삼아서 기르겠다고 하는 남자였다. 테오르가 자기 아들이라는 걸 알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보호해 줄지도 모른다.

카이젠이라면 아스텔의 아버지인 공작이 쓸데없는 짓을 벌이기 전에 막아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한편으로 아스텔은 여전히 카이젠을 신뢰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아스텔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말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얄팍한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면 카이젠은 다시 아스텔 모자에게 무관심해질 것이다. 황제의 애정을 잃으면 아스텔에게는 가세가 기울어진 가문과 어린 테오르만 남는다.

“아스텔?”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스텔은 몸을 돌려서 그의 눈길을 피했다.

일순간 카이젠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지만 아스텔은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아스텔…….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그가 아스텔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몸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아스텔은 대답 없이 창가 쪽으로 몸을 피했다.

카이젠이 걸음을 멈췄다.

“폐하!”

그때 린든이 닫힌 문을 열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카이젠과 붙어 있는 아스텔을 보고 린든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갔다.

아스텔은 조금 안도했다.

린든의 등장 덕에 불편했던 분위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린든은 두 사람에게 공손히 예를 갖췄다.

“폐하, 아스텔 님.”

“무슨 일이냐?”

카이젠은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물었다.

린든이 아스텔의 눈치를 살폈다.

“폐하, 따로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스텔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녀는 살짝 무릎을 굽힌 뒤, 카이젠이 붙잡기 전에 빨리 복도로 나왔다.

* * *

카이젠은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아스텔의 뒷모습을 아쉬운 눈길로 좇았다.

아스텔은 여전히 무심하고 냉정했지만 그래도 그는 상황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진심을 털어놓았을 땐 석상처럼 무심하던 얼굴에 동요의 흔적이 나타났다. 아스텔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카이젠은 린든에게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말해라.”

“폐하.”

린든은 근심 어린 눈빛으로 아스텔이 사라진 복도를 돌아보며 보고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테오르 님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소리였다.

“아이가 사라지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린든은 침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가 보낸 기사들이 후작과 테오르를 쫓아갔었다. 그러나 둘이 머무는 숙소에 도착하자 이미 테오르는 사라진 뒤였다. 함께 있던 후작은 상처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테오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사람을 보내서 후작을 습격하고 아이를 납치해 갔다.

“후작의 상태는 어떠냐?”

“그곳 관저에서 치료받고 계십니다. 부상을 입으셨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늙은이가 죽기라도 하면 아스텔은 몹시 슬퍼할 테니까.

“아이를 누가 데려갔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느냐?”

아스텔을 황후로 삼겠다는 결정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은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그가 아스텔을 황후로 삼겠다고 천명한 이상, 감히 아스텔의 아이를 납치하려고 들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린든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보고했다.

“주변을 조사해 본 결과 레스턴 공작의 부하들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런 짓을 할 만한 인간이 한 명 있긴 했군.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공작이 데려갔다면 테오르는 무사할 것이다.

‘아스텔을 협박하려고 아이를 데려갔군.’

공작은 아스텔이 다시 황후가 된다는 말에 몹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스텔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결혼을 거부하고 있었다. 공작은 테오르를 이용해서 아스텔에게 결혼을 강요하려는 심산일 것이다.

‘그 징그러운 인간.’

자기 딸을 손아귀에 쥐고 협박하기 위해 외손자를 납치하다니. 

딱 레스턴 공작다운 짓이었다.

카이젠은 그를 혐오했다. 아스텔의 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에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었다만. 기회만 되면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공작가에 가서 아이를 찾아와.”

그는 린든을 돌아보며 차갑게 명령했다.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없애 버려라.”

* * *

작은 짐 마차가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달려갔다.

테오르는 유리창을 덮은 뻣뻣한 모직 천을 손으로 걷었다. 커튼 사이로 드러난 조그만 틈으로 푸른 하늘과 넓게 펼쳐진 밀밭이 보였다.

수도를 벗어난 지 닷새째였다.

테오르는 할아버지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작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재미있었다. 수도로 갈 때는 커다란 마차를 타고 궁전 같은 성에서 잤는데 이번에는 조그만 마을을 옮겨 다니면서 작은 집에서 잠을 잤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가끔씩 내려서 다른 마차로 옮겨 가야 했다. 테오르는 그때마다 채소밭과 개울물을 구경했다.

테오르는 시원한 냇물이 흘러가는 길을 걷다가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엄마는 언제 와?”

짐을 들고 있던 할아버지는 테오르에게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우리가 먼저 집에 가 있으면 금방 올 거다.”

테오르는 그 말을 믿었다.

떠나기 전에 엄마도 비슷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와 먼저 집에 가 있으면 엄마도 뒤따라 올 거라고.

수도의 저택을 떠올리던 테오르는 다시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블린도 같이 오겠지? 한나도?”

“그럼.”

블린과 한나도 온다면 다행이다.

저택을 떠나온 뒤부터 테오르는 틈만 나면 그 커다란 사냥개를 그리워했다.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달달한 쿠키를 가져다주는 한나도 그리웠다.

물론 가장 그리운 건 엄마였다. 저택에서 떠나온 뒤 테오르는 밤마다 엄마가 그리웠다.

‘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렴. 엄마도 곧 따라갈게.’

그게 저택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테오르는 엄마가 그리웠지만 울지 않고 참았다. 집으로 가면 엄마도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할아버지가 곁에서 살뜰하게 보살펴줘서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해 질 무렵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마을 입구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환하게 켜진 커다란 2층짜리 건물이었다.

“할아버지, 여긴 어디야?”

“여관이야.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다.”

테오르도 여관이 뭔지는 알았다.

수도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면서 두 사람은 계속 어딘가에 있는 여관에서 잠을 잤다. 안으로 들어가자 시끌벅적한 소음과 고소한 음식 냄새가 감돌았다.

할아버지는 문 앞에 있던 남자에게서 열쇠를 받고 테오르의 손을 잡고 2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네모난 방 안에는 작은 침대와 옷장, 의자가 놓여 있었다. 테오르는 할아버지와 함께 하얀 빵과 삶은 채소와 고기, 수프가 있는 단출한 식사였다. 성이나 저택에서 먹던 식사에 비하면 별 볼 일 없었지만 그래도 테오르는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할아버지는 테오르를 씻겨주고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눕자마자 졸음이 밀려왔다. 테오르는 곰 인형 레빈을 끌어안고 푹신한 이불 속에 파묻힌 채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귓가에 얼핏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을 넣어야겠구나.”

‘약을 넣을 시간이 지났구나.’

잠에 취한 테오르는 할아버지가 약을 꺼내는 소리를 들었다. 평소에도 자려고 누워 있을 때 엄마가 눈에 약을 넣어 주곤 했었다.

테오르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베개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테오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테오르를 깨웠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몸이 덜렁 들어 올려졌다.

품 안에 있던 레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테오르는 얼핏 정신을 차리고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우웅…… 레빈…….”

할아버지는 곰 인형을 집어서 테오르에게 안겨줬다.

그리고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옷장 문을 열었다.

“테오르. 여기 가만히 있어라.”

그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정신을 차리자 캄캄한 옷장 안이었다. 테오르는 켜켜이 쌓인 겉옷 위에 앉아 있었다. 문틈 사이로 얇은 빛이 스며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지?’

졸린 눈을 비비며 문틈을 내다봤다. 촛불이 켜진 방 안은 조용했다. 할아버지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테오르가 가물가물한 눈으로 문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방 안의 정적이 순식간에 깨졌다.

“윽!”

낯선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을 시작으로 무섭도록 조용하던 방 안에 불길한 소란이 일었다.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

뭔가를 잘라내는 듯한 섬뜩한 소리까지.

어린 테오르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다른 사람들이 왜 우리 방에 들어온 거지? 할아버지는 어디 있는 거야?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문틈으로 내다봤지만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 테오르가 있는 옷장 바로 아래에 뭔가가 쓰러지면서 옷장이 크게 흔들렸다.

“흡…….”

놀란 테오르는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막았다.

방 안을 어지럽히던 소리가 일시에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정적에 테오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였다.

탁.

옷장의 문이 열렸다.

* * *

“이봐, 백작.”

중년의 내무대신이 벨리안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책상을 두 손으로 짚었다.

벨리안은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그는 온종일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에 집중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

“대체 이게 뭔가?”

내무대신이 벨리안의 코앞에 서류장을 흔들었다.

“황후 폐하의 궁전을 증축하는 계획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이걸 대체 어떤 작자가 만든 건가?”

벨리안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그야 물론 내가 만들었지. 나는 뭐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나.’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벨리안은 지난 며칠 동안 백번도 넘게 반복해 온 말을 또다시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그 말에 내무대신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긴 불만스러울 만도 하지.’

벨리안은 며칠째 대신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레스턴 가문의 공녀를 다시 황후로 삼겠다는 황제 폐하의 명령은 수도의 모든 귀족을 충격에 빠트렸다. 물론 아스텔 자체는 충분히 황후가 될 수 있는 신분이지만. 문제는 그 아스텔 공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아버지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사생아가.

‘충격적이긴 했지.’

벨리안은 얌전하고 기품있는 아스텔의 얼굴을 떠올리며 혀를 차다. 설마 그 어린애가 아스텔 님 자식일 줄 알았겠냐고.

‘애 아버지는 대체 누굴까?’

사실 벨리안은 아스텔이 아이의 친모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테오르가 혹시 황제 폐하의 아들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아스텔의 성격상 이혼당한 후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폐하의 자식이라면 그 눈을 설명할 수가 없는데.’

선황제 폐하와 돌아가신 황태후 전하는 물론이고, 그 윗대의 황제 폐하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푸른 눈을 가진 황족은 없었다.

‘아니, 얼굴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작정하고 살펴보니까 폐하의 얼굴이랑 비슷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폐하의 아드님이라면 눈이 왜 파란색인지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역시 폐하의 자식은 아닌 건가.’

혹시라도 황제 폐하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헛된 희망을 품었지만 역시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 어린애가 황자님이라면 이 난장판 속에 굳이 감춰두고 있을 리가 없지.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된 거야? 자네는 곁에 있으면서 대체 뭘 했나? 자네가 폐하를 잘 보필해야 하잖아!”

내무대신은 벨리안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벨리안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이미 지난 며칠 동안 대신들은 물론이고, 그 아랫급의 귀족들까지 그를 들들 볶으면서 괴롭혀댔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만은 하나였다. 사생아를 낳은 공녀를 황후로 삼겠다는 황제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

모두들 공감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신분이 높은 공녀라도 아이가 딸린 미혼모를 황후로 삼으신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은 황제에게 대항하다가 권력을 잃은 사람이다. 어느 모로 봐도 그 공녀는 황후감이 아니었다. 비록 그 공녀가 한때 황후였다고는 해도.

벨리안도 할 수만 있으면 이 결혼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황제 폐하는 어느 누구의 만류도 듣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감히 폐하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

할 수 있으면 당신이 해보시지.

벨리안도 황제 폐하를 말려보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면박만 당했다.

“어쨌거나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불만이 있으시면 폐하께 직접 말씀하십시오.”

“……그건.”

내무대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황제 폐하는 기나긴 내전을 끝내고 대귀족들을 몰아냈다. 지금 이곳에서 황제의 뜻을 대놓고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히 황제 폐하 앞에서는 반대할 수 없으니, 다들 만만한 그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벨리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자기 일거리로 돌아갔다.

“그럼 황후께서 머무실 궁전은 국혼 전까지 증축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 * *

카이젠은 착잡한 심정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아스텔에게 후작과 테오르의 소식을 알려주러 가는 길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이를 그리워하고 있을 아스텔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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