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의혹 (9/24)

9. 의혹

아스텔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빠르게 걷고 있었다.

테오르에게 줄 간식거리를 사 가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 손에는 꿀과 바닐라를 곁들인 우유가 담긴 컵이 있었고 다른 손에는 버터를 발라 구운 동글동글한 쿠키와 설탕으로 절인 알록달록한 과일 절임이 가득 담긴 작은 종이 그릇을 들었다.

주변은 시장을 구경 나온 인파로 가득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람에 치일 정도였다.

‘얼른 돌아가야지. 기다리겠네.’

테오르는 카이젠에게 맡겨두고 왔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간식거리를 사서 돌아가려고 가까운 데서 먹을 만한 걸 골랐다. 많이 사지는 못했지만 과일도 테오르가 좋아하는 것만 들었으니 간단한 요깃거리로는 괜찮을 것이다.

저녁은 먹고 나왔으니 이 정도면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형극이 있는 광장의 한편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아스텔……!”

갑자기 나타난 카이젠이 창백한 낯 색으로 아스텔을 마주했다.

“폐…….”

놀라서 무심코 그를 부르려던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안겨 있는 테오르를 보고 멈춰 섰다.

테오르는 카이젠의 품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테오르?”

얼핏 보면 잠들어 있는 것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배어 나와 있는 게 보였다.

테오르를 끌어안고 있는 카이젠이 그답지 않게 황망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테오르가……. 열이 나서 갑자기 정신을 잃었어.”

손에 힘이 빠지면서 들고 있던 것들을 놓쳐 버렸다.

컵이 나뒹굴고 우유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바닥에 떨어진 색색의 과일 절임이 이리저리 굴러갔다.

“테오르……!”

아스텔은 테오르의 이마에 손을 댔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가 불덩이 같았다. 미약한 숨소리가 힘겹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차를 준비시켰어.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지.”

아스텔이 붙잡기도 전에 카이젠은 그대로 테오르를 끌어안고 마차로 향했다.

아스텔은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마차가 저택으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 아스텔은 지옥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테오르는 저택에 돌아올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식은땀이 아이의 창백한 이마를 축축하게 적셨다.

많이 고통스러운지 정신을 잃은 상태로도 힘없이 감긴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마차가 출발하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전후 상황을 캐물을 수 있었다.

“당신이 음식을 사러 간 사이에 내가 테오르에게 과일 주스를 사줬어. 그걸 먹자마자 쓰러지더군.”

카이젠은 하얗게 질린 아스텔을 바라보며 묵묵히 대답했다. 그의 붉은 눈에도 당혹스러움과 불안함이 감돌았다.

“과일 주스요?”

“평범한 거였어. 나도 마셨고.”

혹시 독이라도 들어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서 놀라서 묻자 카이젠은 분명하게 말했다.

평범한 과일 주스였다면 테오르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카이젠은 아스텔의 혼란한 눈빛을 보며 위로했다.

“컵을 챙겨오라고 했으니 조사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테오르는 여전히 눈을 감고 실신해 있었다. 열 때문에 힘겨운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끊어질 듯 희미하게 이어졌다.

그 순간 아스텔은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저…… 혹시 어떤 과일을 넣은 주스였는지 기억하시나요?”

테오르의 이마에 난 땀을 손으로 닦아내던 카이젠이 그 말에 다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눈동자에 의문이 드러났다.

“……잘 모르겠군. 흔한 과일이 이것저것 섞인 것 같았는데.”

“그렇군요.”

아스텔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췄다.

카이젠에겐 말한 적이 없지만 사실 아스텔 자신에겐 특이한 체질이 하나 있었다.

린테일 과일을 먹으면 고열에 시달리는 특이 체질이.

그런 체질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린테일은 수도에서 흔하게 쓰이는 과일이라 누구나 즐겨 먹었다. 이런 체질을 가진 건 가족 중에도 아스텔 혼자밖에 없다.

동부에서 살던 지난 6년간 아스텔은 린테일을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테오르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린테일을 먹어보지 못했다.

‘혹시 테오르도 내 체질을 닮은 거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카이젠 앞에서 내색하면 안 되는 생각이었다. 현재 테오르는 아스텔의 5촌 조카로 되어 있었으니까.

‘설마,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더 큰 문제긴 했다. 병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아스텔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테오르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곧 마차가 멈춰 섰다. 저택에 도착하자 시종들이 두 사람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테오르를 발견하고 놀라서 멈춰 섰다. 놀라서 바라보는 시종들 사이로 한나가 뛰쳐나왔다.

“아스텔 님? 테오르 님이…….”

“한나. 얼른 물수건을 준비해 줘. 테오르가 열이 심해서 정신을 잃었어.”

아스텔의 다급한 설명에 저택은 순식간에 폭탄을 맞은 것처럼 분주해졌다.

한나가 물수건을 준비해 오고 시종들은 의사를 부르기 위해 달려 나갔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침대에 눕히고 한나가 가져온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줬다. 열이 워낙 심하다 보니 이마에 올린 차가운 물수건이 금방 미지근해졌다.

“폐하.”

황궁에서 불려온 의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순행 중 열병에 걸렸을 때 한번 만난 적 있었던 황제의 시의였다. 의사는 테오르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불안한 안색으로 옆에 서 있는 아스텔을 향해 물었다.

“이상하군요. 특별한 질병 같지는 않습니다. 혹시 도련님께서 뭔가 특별한 음식을 드셨습니까? 지금까지 드신 적 없었던 음식을요.”

“……과일을 먹었다는데 어떤 과일인지는 모르겠어요.”

아스텔은 자신 없이 대답하며 카이젠을 바라봤다. 카이젠은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 기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알아봤느냐?”

“예. 음료가 담겨 있던 컵에는 어떤 독약 성분도 없었습니다. 음료를 파는 상인도 수상한 점은 전혀 없었습니다. 재료는 세 가지 과일이 전부라고 합니다.”

기사는 세 가지 과일의 이름을 말했다.

세 개 모두 수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과일이었다. 그중 하나는 수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문제의 린테일이었다. 

멍하니 그의 설명을 듣고 있는 아스텔에게 의사가 다시 물었다.

“그중에 도련님께서 드셔본 적 없는 과일이 있습니까? 혹시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것이 있을까요?”

“예, 있어요.”

아스텔은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린테일은…… 한 번도 먹여본 적 없어요.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가족분 중에 린테일에 민감한 체질인 분이 계십니까? 특정한 음식에 민감한 체질은 대부분 가족력이 있지요.”

가족력.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한 호흡이 지나가는 동안 아스텔은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옆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생각해 보니 내 아내가 그런 체질이었던 것 같군.”

고개를 돌리자 뒤늦게 테오르를 보러 침대 곁에 와 있던 칼렌베르크 후작이 보였다. 후작은 아스텔을 보지 않고 높낮이 없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 과일을 먹으면 열이 난다고 했었지. 그런데 이상하군. 자식들은 그런 체질이 없었는데. 죽은 손자 애도 안 그랬고.”

“역시 그렇군요. 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유전병이 대를 건너뛰는 경우도 흔하니까요.”

의사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넘기는 눈치였다.

‘…….’

외할머니에게 그런 체질은 없었다.

아스텔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테오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할아버지가 왜 하필 외조모를 들먹이며 거짓말을 하는지는 이해가 갔다.

외할머니인 칼렌베르크 후작 부인은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지금 수도에는 그분에 대해 자세히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 거짓말을 해도 들킬 염려가 없다. 하지만 사촌 오빠인 지그문트나 돌아가신 외삼촌 내외라면 아직 수도 안에 그분들과 친했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해열제를 드시면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의사는 들고 온 가방 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열이 내리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만 그래도 어린 분이니까 후유증이 남지 않게 적어도 2주 정도는 절대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서 머리를 받치고 약을 수저에 조금씩 따라서 입안에 흘려 넣어 주었다.

테오르는 정신을 잃은 상태로도 얌전히 아스텔이 건네주는 약을 마셨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여전히 열에 들뜬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서인지 아까보다는 편안해 보였다.

따뜻한 손이 어깨를 짚었다. 외조부인 후작이 아스텔을 내려다보며 안심하라는 듯이 어깨를 다독여 줬다. 아스텔도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카이젠은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의사가 준 해열제는 효과가 좋았다. 약을 먹이고 한두 시간이 지나자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펄펄 끓어오르던 고열이 점점 사그라들고, 하얗게 질렸던 안색도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괜찮아지셨군요. 곧 깨어나실 겁니다.”

아스텔은 손을 들어서 곤히 잠든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감겼다. 테오르의 상태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었다. 이제 열은 거의 사라지고 미열만 남아 있었다. 힘겹게 이어지던 숨소리도 편안하게 들렸다.

“으음…….”

잠시 후 포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던 테오르가 천천히 눈을 떴다.

“테오르? 괜찮니?”

눈꺼풀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다.

테오르는 아스텔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천천히 머리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으응……. 나 괜찮아.”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카이젠은 테오르가 누워 있는 침대로 성큼 다가왔다.

침대 옆에 누워 있던 개가 그를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테오르.”

“폐하……?”

테오르가 기운 없는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착잡한 시선을 던졌다. 그가 아스텔에게 말했다.

“이곳은 좁아서 환자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 큰 침실로 옮기는 게 좋겠어.”

저택의 주인 가족이 쓰는 방이 아니라 손님.

그것도 조금 격이 낮은 손님에게 내주는 위층의 작은 침실이었다.

이 방을 고른 사람은 테오르였다. 창문 너머로 정원수의 가지가 손에 닿은 듯 가까이 있고, 저 멀리 수도의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는 게 선정의 이유였다.

테오르는 여기서 블린과 함께 자겠다고 고집했다. 어차피 하루 이틀만 자고 돌아갈 예정이라 그때는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했었다. 작은 손님 방이긴 해도 있을 건 다 있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방이 너무 작아서 여러 사람이 들어와 있기에 좀 불편했다. 의사와 하녀들이 계속 들락거릴 텐데 넓고 쾌적한 공간에 머무는 게 좋았다. 환자를 위해서도 공기가 잘 통하는 방이 더 좋을 것이다.

“예, 폐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이젠은 침대에 누워 있는 테오르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하려고 했는데, 단호한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배웅하러 나올 것 없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카이젠이 돌아간 뒤, 곧바로 2층의 넓은 침실에 환자 방을 꾸미게 되었다. 시녀들이 테오르의 짐을 옮기고 새 이불을 가져왔다.

테오르는 새 침대에 누웠다. 테오르를 쫄래쫄래 따라온 블린도 침대 머리맡에 앞발을 베고 누웠다. 그 모든 걸 지켜보던 아스텔에게 외조부인 후작이 다가왔다.

“얘야, 너도 좀 쉬거라.”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근심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후회와 자책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테오르가 제 체질을 닮았을 줄은 몰랐어요.”

설마 그 체질을 닮았을 줄이야.

린테일에 민감한 체질은 가족 중에서도 아스텔에게만 있었다.

아버지도 오빠도 어머니도 그런 체질은 없었다. 테오르 역시 아직까지 특정한 음식이나 물건에 예민한 반응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런 안이한 생각이 문제였다.

마음속으로 자책하고 있는데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감싸왔다.

후작이 아스텔을 가만히 감싸 안으며 위로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도 몰랐잖느냐.”

“예…….”

미리 알았다면 절대 야시장 같은 곳에 데려가지 않았을 텐데.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키고 후회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테오르가 무사해서 다행이지 않느냐.”

“예. 그렇죠.”

별 탈 없이 잘 치료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테오르는 새로 정돈한 깨끗한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스텔은 물수건으로 식은땀이 배어 나온 아이의 이마를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뒤늦게 심각한 현실을 깨달았다. 이제 원치 않게 2주간 더 수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 * *

외투를 입고 집무실 문을 나서던 벨리안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색 하늘 위에 우중충한 구름이 가득한 우울한 밤이었다.

벨리안은 피로로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피곤하고 잠도 부족해서 삭신이 쑤셨다.

‘아이고.’

나흘째 야근을 했는데 어쩌면 내일도 철야를 해야 할 듯싶다. 

그것만으로도 끔찍한데, 그보다 더 걱정되는 건 내일이면 아스텔이 동부로 떠날 거라는 사실이었다.

‘아스텔 님이 떠나면 폐하는 또 기분이 안 좋으시겠지.’

불쾌한 표정으로 일만 하고 있을 황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벨리안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정말 내일은 출근하기 싫다.’

한탄을 삼키며 복도를 걸어갈 때였다. 갑자기 반대편에서 시종이 나타났다. 뭔가 하고 봤더니 그 뒤로 황제 폐하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폐하?”

“벨리안.”

카이젠은 그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는 혼란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스텔의 저택에서 나올 때부터 그는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준 음료 때문에 쓰러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카이젠은 그 와중에 더 큰 당혹감을 느꼈다.

오늘 있었던 일이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런 일이 있었지.’

아스텔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카이젠은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가 12살쯤 되었던 어느 여름날. 황궁의 후원에서였다.

그날 아스텔이 황궁에 놀러 왔었다. 언제나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보석을 늘어뜨린 12살의 아스텔이 카이젠을 졸졸 쫓아다녔다.

‘전하. 어디로 가시나요?’

‘그냥 산책.’

아스텔은 밝게 미소 지으며 카이젠 옆으로 걸어왔다.

‘그럼 저도 정원에 나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정원길을 걸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던 시종들과 귀족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정중히 예를 올렸다.

고개를 숙이고 나서 살짝 미소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12살짜리 어린 황태자와 그런 황태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12살의 공녀가 귀엽다는 듯이.

하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이 쫓아오는 게 너무 귀찮았다. 

어쩔 수 없이 아스텔을 떼놓기 위해 황태후의 궁전으로 향했다. 아스텔을 몹시 좋아하는 황태후는 아스텔을 발견하면 붙잡고 놔주지 않았으니까. 거기 데려가서 황태후에게 떼놓고 오면 될 것 같았다. 전에도 몇 번이나 그렇게 아스텔을 황태후에게 떨궈놨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황태후 전하께서는 신전으로 가셨습니다. 두 분께서 오시면 다과를 대접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황태후궁의 시녀가 전해준 말이었다.

‘이런…….’

황태후궁의 시녀들은 이 어린 커플이 귀엽다는 듯이 정성 들여서 차와 쿠키, 조그만 케이크와 타르트 등을 잔뜩 가져왔다.

카이젠은 도망갈 새도 없이 황태후궁의 테라스에 아스텔과 마주 앉게 되었다. 짜증스러워진 카이젠은 시원한 아이스티만 들이켰다.

아스텔은 딸기가 들어 있는 케이크를 조심조심 포크로 잘라먹었다. 카이젠은 타르트를 한 조각 덜었다. 여러 가지 과일을 올린 알록달록한 타르트였다. 한 조각을 먹어봤는데 시큼하고 맛이 별로였다.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기분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맞은편에서는 아스텔이 아직도 드레스에 케이크를 묻힐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떠먹고 있었다. 케이크를 먹는 게 아니라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정성 어린 손짓이었다.

카이젠은 시큼한 타르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스텔. 너도 이걸 먹어봐.’

그건 그냥 심술이었다. 맛없으니 너도 먹어봐라. 뭐 이런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었다.

그의 속마음을 모르는 아스텔은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카이젠이 자기를 챙겨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스텔은 고분고분하게 타르트 한 조각을 자기 접시로 가져갔다.

그런데 접시에 내려놓은 채 먹지는 않고 유심히 구경하기만 했다.

‘뭐 하는 거야?’

아스텔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무슨 과일이 들었는지 살피고 있었어요.’

‘왜?’

카이젠은 뒤늦게 타르트를 살폈다.

그냥 이런저런 과일을 전부 조금씩 넣어서 다채로운 색을 낸 타르트였다. 껍질을 벗긴 포도도 있고 사과도 있고 자두도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조그맣게 깎아 놓은 과일들도 안쪽에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스텔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말하기 난처한 모양이었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을 배려할 마음이 없었다.

‘왜 그러는데?’

머뭇거리던 아스텔이 간신히 대답했다.

‘그냥……. 싫어하는 과일이 있을까 봐서요.’

한심한 대답이었다.

식감이 이상한 어류나 채소 같은 것도 아니고 과일을 가릴 건 뭐람.

카이젠 자신도 그 당시엔 몇 가지 채소를 죽도록 먹기 싫어했지만, 과일을 가린다는 아스텔의 말은 한심하게 들렸다.

하여간 까다로운 공녀님이군.

‘그냥 먹어. 맛있다니까.’

카이젠은 고집스럽게 명령했다.

아스텔이 싫어한다니 더 억지로 먹이고 싶었다.

‘예, 예. 전하.’

아스텔은 그가 화난 줄 알고 황급히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타르트를 반 넘게 먹어버렸다.

흥미를 잃은 카이젠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에는 새파란 나뭇잎들이 울창한 숲처럼 펼쳐져 있다. 그 시원한 광경을 구경하면서 차가운 아이스티를 마셨다.

옆에서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뭐?’

카이젠이 무심하게 돌아봤을 때였다.

의자에 앉아 있던 아스텔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다음은 시녀들이 들어오고 의사가 불려오고 난장판이 벌어졌다.

아스텔은 갑작스러운 고열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시 뒤에 공작가에서 시종과 마차를 보내 아스텔을 데려갔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왜 갑자기 열이 나서 쓰러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레스턴 공작이 걱정스러워 하는 황제와 황태후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열병이었다고 합니다. 폐하.’

공작은 그렇게 설명했다.

아스텔은 느닷없이 열병에 걸려서 쓰러진 것이라고.

황제와 황태후는 별 의심 없이 그의 말을 믿었다.

카이젠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일주일쯤 지났을 때, 아스텔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황궁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로도 아스텔이 열이 올라서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 * *

지금, 황제가 된 카이젠은 그날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던 일이다. 오늘의 일이 없었다면 평생 기억하지도 못했으리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열이 올라 쓰러지던 테오르의 모습에 그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카이젠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뒤늦게 깨달았다.

당시 아스텔이 먹었던 타르트. 그 과일 타르트에도 린테일이 있었다는 것을.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는 느낌이었다.

“빨리 알아볼 일이 있다.”

카이젠은 벨리안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조금 전 야시장에서부터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던 일을.

“테오르의 출생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해 봐.”

* * *

그날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아스텔은 침대 근처에서 밤을 지새웠다. 테오르를 간호하면서 열이 더 오르지 않는지 지켜봐야 했다.

의사는 아이가 해열제를 먹었으니 더 악화될 일은 없다고 말했지만 테오르는 이제 겨우 5살이었다. 혹여라도 뭔가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밤새 테오르를 지키다가 잠시 졸았더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커튼 사이로 하얀 새벽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아스텔이 눈을 뜨고 몸을 뒤척이는데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깨를 덮고 있는 따뜻한 모포가 보였다.

“아스텔 님.”

한나가 곁에 와 있었다.

“한나. 벌써 일어난 거야?”

아직 새벽이었지만 한나는 시녀복을 빈틈없이 차려입고 있었다. 헤드 드레스를 쓴 머리에도 흐트러짐은 조금도 없다.

아스텔은 한나가 밤새 두 사람을 지켜보며 함께 밤을 지새웠다는 걸 깨달았다.

“아스텔 님. 따뜻한 차와 수프를 준비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드세요.”

한나는 찻주전자와 수프 그릇이 담긴 트레이를 창가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고마워.”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로 걸어가다가 한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스텔을 바라보는 한나의 눈은 깊고 어두웠다. 문득 어제저녁부터 입을 굳게 다물고 테오르의 병간호를 들던 한나가 생각났다.

아스텔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스텔의 체질을 아는 사람은 네 명이었다. 아버지와 오빠, 외할아버지인 후작.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측근 시녀였던 한나.

한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눈으로 아스텔을 향해 차분하게 묵례를 했다.

“아스텔 님께서 말씀해 주실 때까지 저는 어떠한 질문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나…….”

아스텔은 말문이 막혔다.

‘한나에게 말해줘도 될까?’

그 답은 아스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한나는 세상에서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외조부와 마찬가지로 아스텔에겐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숨길 수 없지. 한나 네가 생각하는 대로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아스텔이 확답을 주자 한나의 침착한 갈색 눈에 충격이 감돌았다.

충격으로 떨리던 눈동자가 점차 슬픔으로 흐려졌다. 한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떨궜다.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나. 울지 마.”

아스텔은 한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어깨에 닿는 뺨에선 계속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스텔 님께서…… 저를 가장 필요로 하실 때 제가 곁에 있어 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죄송스러워서…….”

새벽빛이 스며드는 조용한 침실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온기를 나눴다.

한나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한나는 아스텔이 카이젠을 열렬하게 사랑했던 걸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와 결혼하고 첫날밤을 지낸 뒤 폐위되어 떠나던 모습도 봤다. 그 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

아스텔은 그냥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더 이상 한나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한나에게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폐하의 아들이야.”

한나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테오르는 폐하의 자식이야. 내가 약으로 눈색을 바꿨어. 아이의 신분을 숨겨야 해. 황자인 걸 들키면 테오르가 위험해져.”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전해질 때까지 이 비밀을 숨겨야 한다.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아스텔의 간결한 설명만으로도 한나는 모든 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훌쩍이던 소리가 서서히 멈췄다. 한나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축축하게 젖은 뺨을 닦으며 아스텔을 향해 맹세했다.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 * *

다행히 테오르는 아침부터 기운을 차렸다.

“블린!”

테오르가 몸을 일으키자 침대 밑에 누워 있던 사냥개가 아이에게 덤벼들어 뺨을 핥았다. 테오르는 까르르 웃으면서 블린을 끌어안았다.

“테오르. 이제 괜찮니?”

“응!”

테오르는 블린의 털을 쓰다듬다가 아스텔을 올려다봤다.

“나 배고파.”

“훗.”

아스텔은 안도하며 웃었다.

지켜보던 한나도 웃음을 머금었다.

테오르는 안색도 좋아지고 활기도 되찾았다.

아침 일찍 찾아온 의사도 테오르를 진찰한 뒤 확답을 줬다.

“금방 회복하셨군요. 어린 도련님께서는 아주 건강한 체질을 타고 나신 모양입니다.”

한나가 테오르를 위해 얇게 부친 감자 팬케이크와 따뜻한 수프를 가져왔다. 테오르는 완전히 기운은 회복했는지 한나가 가져다준 음식을 깨끗하게 비웠다. 아스텔은 테오르가 아침을 먹는 걸 지켜본 뒤 침실 밖으로 나왔다.

“테오르가 회복 되는대로 떠나야 해요. 일주일 정도만 경과를 지켜보고 떠나요.”

아스텔은 할아버지를 붙잡고 서재로 들어가서 말했다.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은 테오르를 보려고 침실로 찾아왔다가 아스텔과 함께 서재로 들어왔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회복되는 걸 봐야겠지만 이대로면 문제 없을 것 같아요.”

테오르는 원래 건강했으니 특별한 문제만 없다면 순조롭게 회복할 것이다. 테오르가 무사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스텔은 여전히 불안했다.

‘또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지기 전에 빨리 떠나야 해.’

어제까지만 해도 지금쯤이면 수도를 떠나 동부 가도를 달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하룻밤 만에 테오르가 앓아눕고 일정이 연기되었다. 또 이런 일이 생기게 만들 수는 없었다. 기회가 될 때 빨리 떠나야 한다. 이번엔 카이젠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떠날 생각이었다.

‘이미 허락을 받았으니 그냥 떠나도 괜찮아.’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카이젠이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빨리 떠날 것이다. 그런 계산을 하면서 아스텔은 오전을 보냈다.

그런데 오후에 접어들 무렵 현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시종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평민처럼 보이는 남녀 한 쌍이 또 다른 상자를 들고 따라왔다.

아스텔은 현관 옆에 서 있던 한나를 불렀다.

“한나. 이게 무슨 일이지?”

“아스텔 님…….”

한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설명을 꺼내기 전에 상자를 가져온 시종이 아스텔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스텔 님.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남녀도 아스텔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시장에서 인형극을 하던 부부입니다.”

“인형극?”

문득 어젯밤에 시장에서 봤던 인형극이 떠올랐다.

조잡한 상자 안에서 줄에 매단 인형을 움직이면서 하는 연극이었다. 테오르는 그 인형극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스텔의 시선을 받고 상자를 들고 온 남녀가 얼른 말했다.

“도련님을 즐겁게 해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시종은 두 사람을 테오르가 있는 침실로 데려갔다.

시종이 들고 온 상자에는 장난감이 가득했다. 솜인형과 공, 조그만 사람 인형들과 실물처럼 정교하게 만든 성과 마차, 대포 등이 나왔다.

예상대로 테오르는 굉장히 좋아했다.

“정말 인형극을 여기서 하는 거야?”

“그래. 폐하께서 보내주셨대.”

아스텔은 조금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테오르는 상자에서 나온 금실로 짠 공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폐하는 정말 좋아.”

“…….”

그러는 사이에 인형극을 하는 남녀는 침대 앞에 연극 상자를 펼쳐놓고 인형극을 시작했다.

테오르는 홀린 듯이 무대를 구경했다.

아스텔은 씁쓸한 눈길로 행복해 보이는 테오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플로린은 어머니인 후작 부인의 내실로 갔다.

침실에 딸린 내실은 귀족 부인들이 사적인 공간으로 이용하는 방이었다. 방 안에는 어머니와 자매 중 막내인 나엔이 모여 있었다. 플로린이 인형같이 예쁜 데 반면, 나엔의 통통하고 둥근 얼굴엔 예쁜 구석이 별로 없었다.

나엔은 진한 흑갈색 머리카락을 대충 묶어 올리고 칙칙한 잿빛 모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 차림새 때문에 귀족가의 아가씨라기보단 수녀 같았다.

테이블에 수틀이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수 시간이로군.’

귀족 여성들은 할 일 없는 오후엔 수를 놓으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막내딸을 잡고 하소연을 하느라 수틀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가 화가 나서 살 수가 없어…….”

‘저 말을 한 번만 더 들으면 백만 번을 채우겠네.’

플로린은 지긋지긋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가엾은 나엔은 어머니를 위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외모도 못난 막내는 가족들을 돌보면서 집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았다. 주로 어머니인 후작 부인의 말 상대 겸 위로 인형이 되는 게 주된 역할이었다.

“그 여자가 나한테 했던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나서 잠도 잘 수 없어.”

후작 부인은 선연한 금발을 정성 들여 틀어 올리고 녹색 다마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세 딸을 둔 귀부인이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그 여자는 수도에서도 폐하를 저택에 끌어들인다는구나. 명색이 공녀였다는 여자가 염치도 없지.”

“그 여자는 폐하의 아내였어요. 어머니.”

플로린은 자수 바늘을 꽂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그분을 찾아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분 덕분에 남부 영지의 일도 쉽게 마무리했으니까요.”

후작 부인이 눈을 치켜떴다.

플로린에게 한소리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참았다. 지난번에 플로린에게 한 소리 들은 뒤부터 후작 부인은 이 둘째 딸에게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레이디 아스텔은 곧 떠난다잖아요.”

나엔이 후작 부인을 위로했다.

“그러면 뭘 하니. 간다더니 또 안가고 더 있는다잖아. 떠날 날이 되면 또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안 갈 게 분명해.”

“이번에는 어쩔 수 없겠죠. 아이가 아프다면서요.”

“애가 아프다고?”

나엔의 말에 플로린이 시선을 들었다.

둘째 딸을 무시하던 후작 부인이 그 말에 화를 내며 외쳤다.

“그 어린애가 무슨 과일을 먹고 병이 났다는 거야. 린테일이라나. 그 흔한 걸 먹고 병이 나는 체질이라니.”

그녀는 혀를 끌끌 찼다.

“사내애가 그렇게 몸이 약해서야, 분명히 오래 살지 못할걸. 병이 나는 김에 그냥 죽어버리지.”

다섯 살짜리에게 악담을 쏟아놓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엔도 할 말을 잃고 다시 자수틀을 잡았다.

수를 놓으며 딴생각에 빠져 있던 플로린은 어머니의 말을 흘려듣다가 멈칫했다.

“그 애가 뭘 먹고 병이 났다고요?”

“린테일이라는구나. 그 흔한 걸…….”

후작 부인은 조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시녀를 매수해서 아스텔의 저택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또다시 아스텔에 대한 악담이 이어졌다.

그러나 플로린은 다른 생각을 했다.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참석했던 다과회에서 린테일을 골라놓던 아스텔의 모습을.

* * *

이틀간의 시간이 무난하게 지나갔다.

테오르는 이제 완전히 기운을 회복한 것 같았다. 침대의 이불 위에서 뒹굴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아스텔을 보자마자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테오르는 아스텔의 품에 매달려서 얼굴을 부비작거렸다.

“나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

아스텔은 아이를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아직은 안 돼. 의사가 닷새간은 침실에 있으라고 했잖니.”

“히잉…….”

테오르는 조금 풀죽은 얼굴을 베개 위에 가져다 댔다.

다행히 테오르는 지겨울 틈이 별로 없었다.

침실에는 카이젠이 보내준 장난감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매일 인형극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테오르는 반복되는 인형극을 열렬한 눈빛으로 관람했다. 매번 비슷한 내용이니 질릴 만도 한데, 몇 번을 봐도 재미있는지 정말 열심히 구경했다. 

아직 정원에 나갈 수는 없지만 테오르는 낮에는 침실 안을 돌아다니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활기차게 노는 걸 보면 몸은 완전히 회복된 모양이다.

“할아버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잠시 한나에게 가서 테오르의 점심을 준비하는 걸 보다가 위층으로 올라왔더니, 테오르와 함께 있던 할아버지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얘야.”

계단을 내려오던 후작은 아스텔을 발견하고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를 찾고 있었다. 네 오빠가 와서.”

“프리츠 오빠가요?”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이었다.

‘프리츠 오빠는 첫날 이곳에 찾아온 뒤로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후작의 눈엔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그래. 그 녀석, 너를 만나러 왔다더구나.”

처음 이 저택에 찾아왔을 때 프리츠는 외조부인 후작에게도 그간의 일을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할아버지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아스텔이 가만히 있는 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오르는 얘기는 뭐라고 하셨어요?”

아스텔은 그것부터 걱정스러웠다.

“테오르는 감기에 걸렸던 거라고 둘러댔다.”

“……잘하셨어요.”

프리츠는 당연히 아스텔의 체질을 알고 있다.

이 일의 자세한 사정을 들으면 테오르의 출생을 눈치챌 것이다.

아스텔은 긴장된 발걸음으로 테오르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반 정도 열린 문틈으로 테오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 기사가 검을 들고…….”

프리츠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문틈 사이로 침실 안의 풍경이 보였다.

침대에 기대앉은 테오르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인형 두 개를 들고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프리츠의 모습. 프리츠가 손에 든 인형을 툭툭 움직이자 테오르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스텔은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문을 열었다.

“아스텔 고모!”

인형극에 몰입하고 있던 테오르가 아스텔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프리츠도 인형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아스텔.”

“오빠,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테오르가 인형극을 좋아한다길래 같이 놀아주고 있었어.”

그 말대로 침대 위에 인형들과 작은 장난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테오르는 인형을 들고 아스텔에게 매달렸다.

“프리츠 삼촌이 인형극을 해줬어! ‘기사와 곰’이야! 아스텔 고모도 알아?”

“그래. 무슨 내용인지 알아.”

아스텔은 프리츠를 향했다.

“우리 어릴 때 같이 본 거네요.”

“기억하고 있었구나.”

프리츠는 조금 감동한 듯 보였다.

“…….”

오빠와 대화를 하다 보니 이렇게 오랫동안 남남처럼 지내다가 다시 만났는데도 미묘하게 편안한 기분이 든다.

친혈육이기 때문일까. 혈연보다는 함께 자라면서 쌓인 정 때문이리라. 핏줄로 치면 아버지와 더 가까워야 하는데, 그쪽은 편하지도 않고 애틋한 마음도 조금도 없었으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오빠와 애틋한 혈육의 정을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테오르가 아파서 떠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돼서…….”

“저희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스텔은 침착한 말투로 오빠의 말을 잘랐다. 테오르가 곁에 있으니 화를 내거나 냉랭한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끝까지 다정한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테오르에게 점심을 먹어야 해서요. 그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아스텔은 자신을 바라보는 슬픔 어린 연녹색 눈을 애써 무시했다. 프리츠의 잘생긴 얼굴에 깊은 상실감이 드러났다. 오빠가 원망스러워서 상처를 입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빠가 테오르를 오랫동안 만나는 게 걱정스러웠다.

가까운 혈육이라 조금이라도 눈치챌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프리츠 삼촌, 가야 해?”

테오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프리츠의 소매를 꼬옥 붙들며 물었다. 프리츠의 난처한 눈빛이 아이에게 돌아갔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달래며 말했다.

“테오르. 점심 먹고 약 먹어야지. 다 먹은 다음에 다시 놀자.”

“아스텔. 잠시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느냐?”

프리츠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또 무슨 일이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빠가 할 얘기라면 자신과 관련된 중요한 일일 것이다. 아니면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의 일이거나. 어느 쪽이든 안 듣겠다고 거절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잠시뿐이에요.”

둘은 테오르를 남겨두고 옆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일인데요?”

“아스텔.”

프리츠가 그녀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눈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스텔, 나는 네 친오빠다.”

“그걸 말씀하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겠죠?”

“테오르는…….”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이제는 아스텔의 가슴에도 불길한 감각이 차올랐다.

“테오르와 관련해서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하거라.”

“오빠가 도와줄 일은 없어요.”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도 끊어지기 직전의 실처럼 가늘게 떨렸다. 그런 그녀에게로 프리츠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속삭였다.

“지금은……. 누구의 도움이든 필요한 상황이 아니냐?”

“…….”

이쯤 되자 더는 다른 뜻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프리츠는 눈치챈 것이다. 테오르의 출생에 대해.

‘왜 들켰을까? 과일 때문에?’

테오르를 처음 봤을 때, 가만히 서서 아이를 바라보던 프리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스텔은 뒤늦게 깨달았다. 오빠가 처음부터 아이의 출생을 의심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오빠……. 난…….”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지만 숨이 막히는 기분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프리츠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스텔. 내가 도와주마. 오빠를 믿어다오.”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오빠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어차피 들켰다면, 그러나 진실을 알고도 자신을 도와주려는 거라면 이 도움을 거절해도 되는 걸까?

‘그전에 오빠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테오르가 그녀의 아이라는 것만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카이젠의 자식이라는 것도 눈치챈 걸까? 아스텔은 우선 그것부터 확실히 알아보고 싶었다.

둘 중 어느 쪽이냐에 따라 그녀의 결정도 달라질 테니 말이다.

“오빠, 나는…….”

그러나 아스텔이 뭐라고 대답을 꺼내기 전에 날카로운 음성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스텔.”

두 남매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문 앞에 카이젠이 서 있었다.

* * *

카이젠은 말없이 두 남매를 향해 걸어왔다.

무심하게 내딛는 그의 발걸음에 아스텔의 심장도 같이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한 말을 들었을까? 들었으면 무슨 뜻이라고 생각했을까?

카이젠은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아스텔을 바라보던 차가운 눈동자가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아스텔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프리츠의 손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프리츠가 아스텔에게 당혹감이 서린 눈빛을 보냈다.

아스텔은 당황하지 않고 무심하게 답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어머니의 무도회 얘기를 했습니다.”

“어머니의 무도회?”

“예, 저희 어머니께서는 매년 이 시기에 자선 무도회를 주최하셨습니다. 그 일은 저희 가문의 전통이라, 오라버니와 함께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스텔은 대답을 끝내고 침착하게 시선을 내렸다.

하필 이 순간에 왜 그 일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카이젠과 춤을 줬던 덴츠 성에서의 무도회가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나 보다. 카이젠의 얼굴을 보며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순간 무도회가 떠오른 걸 보면.

프리츠는 아스텔의 손목을 놓고 카이젠에게 예를 갖췄다.

“예, 제가 동생을 돕겠다고 했는데……. 의견 차이가 있어서 잠시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믿어줄까?’

아스텔은 불안하게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다행히 카이젠은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군.”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겨났다.

“정말 좋은 일이로군. 그런 전통이 있는 줄은 몰랐어. 그런 좋은 일을 의논하는데 왜 싸우는 건가? 마땅히 두 남매가 같이 협력해야지.”

프리츠의 눈빛이 스쳐 가듯 아스텔을 지나쳤다.

잘 넘어간 것 같다. 그런 의미인 듯싶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오라비인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카이젠은 말없이 서 있는 아스텔을 향했다.

“테오르는 좀 어때?”

“폐하께서 살펴주셔서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스텔은 평소와 다름없이 미소를 지었다.

“보내주신 인형극과 장난감 모두 감사드립니다. 테오르가 많이 좋아했습니다.”

“다행이군.”

카이젠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다정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지만 아스텔을 바라보는 붉은 눈은 유리알처럼 차가웠다. 그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무도회 얘기는 내가 도와주지.”

“예?”

아스텔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카이젠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이런 좋은 일로 두 남매가 싸우고 있다니 말이야. 이참에 좋은 생각이 났어. 작고한 공작 부인의 무도회는 황궁에서 열도록 하지. 그러면 두 사람이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나?”

두 남매는 황급히 시선을 교환했다.

프리츠가 정중한 말투로 나섰다.

“폐하, 감사합니다만 이 일은 저희 가문의 전통이라…….”

“어차피 자선을 베푸는 일인데 황궁에서 더 거창하게 연다면 죽은 공작 부인도 좋아하지 않겠는가?”

카이젠은 아스텔을 슬쩍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지금 아스텔은 테오르 때문에 무도회 일을 논의할 수도 없을 테니 황궁에서 하면 문제가 없지.”

“폐하, 저는…….”

아스텔이 거절하려고 나서자 카이젠은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스텔은 그 냉혹한 눈빛에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카이젠은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잔잔한 미소를 보냈다.

“참석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의 테오르를 위해서라도.”

아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카이젠이 돌아가자마자 아스텔은 정원으로 달려나갔다. 정원을 걷고 있던 할아버지, 칼렌베르크 후작을 찾았다.

“수도를 몰래 빠져나갈 방법을 아세요?”

아스텔은 정원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왜 그런…….”

정원을 둘러보며 산책을 하고 있던 후작은 아스텔을 보고 놀라서 말끝을 흐렸다. 할아버지의 반응을 보고서야 아스텔은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모르긴 몰라도 창백하게 질려 있을 것이다. 하얗게 질려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리라.

“이쪽으로 따라와라.”

후작은 아스텔의 손을 잡고 정원의 끝으로 향했다.

정원 끝에는 작은 가제보가 있었다.

보통 대저택의 정원에 놓인 가제보는 정교한 금제 장식으로 치장된 화려한 곳이었다. 이 저택의 가제보도 여느 가제보들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곳에는 다른 정원에는 없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다. 가제보의 한쪽 면에서 온종일 물이 흘러내린다는 점이었다.

둥근 지붕의 처마를 타고 끝없이 은빛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졌다. 물줄기는 온종일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마치 가제보의 절반을 투명한 벽이 뒤덮은 것처럼 보였다.

신비로운 형태였지만 실제로는 그저 지붕 꼭대기에 수도를 연결해서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만든 것뿐이었다.

후작은 아스텔을 그곳으로 데려갔다. 가제보에 들어서자마자 아스텔은 할아버지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눈치챘다.

‘물소리가…….’

가제보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폭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쉼 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주변의 소리를 차단했다. 이곳이라면 밖에서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을 수 없을 것이다.

“카이젠이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아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스텔은 본론부터 꺼냈다.

후작도 충격을 받았다.

“그럴 리가?”

“조금 전에 그가 왔었어요.”

아스텔은 방금 있었던 카이젠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조금 전, 그녀는 카이젠의 말 한마디에 나락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맛봤다.

‘참석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의 테오르를 위해서라도.’

그 한마디만 놓고 보면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 같은 사나운 붉은 눈동자가 아스텔을 직시했다. 깨닫고 싶지 않아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절대 평범한 언급이 아니라는 것을.

아스텔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카이젠에게 물으려고 했다.

‘폐하, 테오르가 무슨…….’

카이젠은 얼음처럼 싸늘하게 내뱉었다.

‘무슨 뜻인지는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나?’

‘…….’

‘무도회는 황궁에서 하는 것으로 알겠어. 준비하라고 명령하지. 그날은 당신도 반드시 참석해.’

카이젠은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옆방의 테오르에게 가는 것 같았다. 테오르가 웃으면서 뭔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아스텔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황제가 네 체질을 아는 거냐?”

후작이 아스텔의 설명을 듣고 초조하게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에게 말한 적은 없는데…….”

아버지인 공작은 아스텔이 특이체질인 걸 들키면 황태자와의 약혼에 문제가 생길까 봐 철저히 비밀로 했었다.

시중드는 시녀 중에서도 한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른 시녀들에게는 그냥 린테일을 싫어해서 가린다고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가리는 음식 정도는 있었으니까. 당연히 아스텔은 카이젠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럼 전부 눈치챈 거냐? 제 자식인 것도?”

“……그것도 모르겠어요.”

어느 선까지 들켰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스텔의 아이인 것만 들킨 것인지. 아니면 모든 걸 알았는지.

“다 들킨 건 아닐 수도 있어요.”

그건 프리츠 오빠를 보고 알았다.

카이젠이 돌아간 뒤, 프리츠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스텔을 달랬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스텔. 폐하께서……. 네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아시고 진노하신 것 같구나.’

카이젠은 붉은 눈, 아스텔은 연녹색 눈이지만 테오르는 두 사람과 전혀 다른 푸른 눈을 갖고 있다.

그런데 테오르는 아스텔의 체질을 닮았다.

이 상황 속에서 프리츠는 가장 간단한 답, 아스텔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답을 생각한 모양이다.

아스텔은 그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카이젠도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지.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했으면 당장 황궁으로 데려갔겠지.”

아스텔의 설명을 듣는 내내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고 있던 후작이 그녀에게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스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죠. 아직 자기 자식인 건 모르는 게 분명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곤란했다. 

단단하게 쌓인 둑도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테오르가 아스텔의 아이라는 걸 알면 아버지가 누구인지 생각할 것이다. 아이를 관찰하면서 실마리를 파헤치다 보면, 언젠가는 테오르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아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

아스텔은 연못으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바라보다 결정을 내렸다. 이곳으로 오면서 계속 생각하고 있던 결정이었다.

“할아버지, 테오르를 데리고 먼저 떠나세요.”

“너는 어떻게 하려고?”

“저는 무도회까지 여기 있어야 해요.”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무도회에 참석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테오르와 할아버지까지 참석하라고 한 건 아니었다.

“테오르의 친부가 밝혀지지 않았을 때 떠나야 해요. 제 자식인 건 알아낼 수 있어도 아이가 없으면 친부가 누군지는 밝혀낼 수 없어요.”

그러니 테오르를 이곳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최대한 빨리.

아스텔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저는 이곳에 남아서 무도회 날까지 시간을 끌게요. 할아버지는 이삼일 전에 먼저 떠나세요.”

이미 집으로 돌아가는 건 허락을 받았다. 테오르가 아파서 시간이 지체됐을 뿐이지.

오늘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무도회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테오르와 할아버지까지 오라는 말은 없었다. 그러니 다른 명령이 내리기 전에 빨리 떠나면 된다.

“테오르와 할아버지의 방을 이 저택의 별채로 옮기고 한나 혼자서 시중을 들게 할게요. 그러면 중간에 사라져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이 저택의 별채는 정원 한구석의 외진 곳에 있었다. 그곳이라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테오르가 하도 졸라대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옮기면 의심도 피할 수 있을 테고.

후작은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아스텔의 의견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이제는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아이를 지키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을.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아스텔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괜찮겠느냐?”

“…….”

괜찮을까. 아스텔이 아이의 친모라는 게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카이젠이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스텔은 공녀였다. 아비도 모르는 자식을 낳았다고 하면 가문의 불명예가 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스텔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테오르가 태어났을 때부터.

“테오르를 빼앗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저는 무슨 일이 생기든 괜찮아요.”

* * *

유리창 너머로 흐린 구름 속에서 어렴풋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카이젠은 하얀 새벽빛이 어둠에 감싸인 도시를 밝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테오르의 이름을 꺼냈을 때 당황하던 아스텔의 모습이 밤새도록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직 조사한 내용을 듣지도 못했지만 카이젠은 그 순간 자신이 찾던 물음의 해답을 알 수 있었다.

테오르가 아스텔의 아이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아스텔이 아이를 낳다니. 

그것도 다른 남자의 아이를.

카이젠이 알기로 아스텔의 근처엔 어떤 남자도 없었다. 아스텔을 찾아서 정보를 수집했을 때 이미 조사했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는 대체 누구일까? 

아스텔은 대체 지난 6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이혼당하고 황궁에서 내쫓기고 가문에서 버림받고 혼자 떠돌면서 어쩌다가 아이를 낳게 됐을까?

끝없이 의문이 쏟아졌지만 의문보다 앞선 것은 안타까움과 슬픔이었다. 공녀였던, 한때 황후였던 여자가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가난 속에 혼자 아이를 낳아서 기르다니.

아스텔이 그 모든 과정을 어떤 마음으로 견뎌냈을지 카이젠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평생 공녀로 곱게 자란 여자가 감내하기에는 너무 큰 시련이었다. 사실 어떤 여자도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이자 원인 제공자는 바로 카이젠 자신이었다.

그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끔찍할 만큼 그를 괴롭혔고, 끝없이 분노하게 만들었다.

“폐하. 들어가겠습니다.”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벨리안이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벨리안은 책상 위를 가득 채운 서류 더미를 보며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밤새 한숨도 안 주무셨습니까?”

“조금 전에 다 끝냈다.”

카이젠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느라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동안 밀린 일이 많은 탓이었다. 그러나 일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아보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됐지?”

“예. 말씀하신 대로 사람을 보내서 알아봤습니다.”

벨리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 일을 보고하러 온 것이었다.

“조금 전에 보고가 왔습니다만……. 산파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깐의 침묵이 지나갔다.

벨리안은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최대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테오르를 낳은 사람은 아스텔 님이라고 합니다.”

그는 테오르의 출생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아기를 받은 늙은 산파를 급히 찾았다.

아기를 받았다는 산파는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그 늙은 산파는 너무 노쇠해서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하지만 5년 전, 동부 시골의 후작님 저택에 불려가서 아이를 받은 것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택의 구조나 아이의 성별이나 생김새는 좀 오락가락했지만, 산고를 겪던 산모가 후작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고 했다. 

산모가 아주 귀한 아가씨처럼 보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일이 다 끝난 뒤에는 늙은 후작님이 이 일을 비밀로 하라고 큰돈까지 줬다고.

“…….”

벨리안은 카이젠이 크게 화를 낼까 봐 정말 무서웠다.

황제는 얼마 전부터 아스텔에게 정신없이 빠져 있었다. 그녀를 위해 암살을 사주한 레스턴 공작의 일을 비밀리에 덮어줄 정도로 증상이 심했다. 그런데 그 아스텔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단다.

‘조카라고 데리고 다니던 테오르가 사실은 아스텔 님의 아들이었다니.’

벨리안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기절할 뻔했는데 황제 폐하가 마음속으로 얼마나 분노했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벨리안은 보고를 끝내고 다급히 머리를 숙였다. 겁에 질려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카이젠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다리다가 조심조심 고개를 들자, 그제야 카이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낳았다는 하녀는? 찾았느냐?”

벨리안의 시선을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그, 그게……. 테오르를 낳았다는 하녀는 이미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라져?”

날카로운 붉은 눈이 그에게 향했다.

벨리안은 황급히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폐하.”

“설마 아스텔이 숨겼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예, 그것은 아니옵고…….”

벨리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이건 아스텔이 숨겼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었다. 차라리 아스텔이 숨겼으면 훨씬 나았지.

‘아, 이것만은 정말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로이첸 가문의 사람이 데려갔다고 합니다.”

* * *

모든 것은 순서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우선 테오르의 방을 저택의 정원에 딸린 작은 별채로 옮겼다. 아스텔은 시종들에게 햇빛이 잘 드는 별채에 아이를 두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가 몸을 회복하는 중이니 뛰어놀 수 있는 정원 근처에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니 떠나기 전까지 거처를 옮기겠다고 고압적인 태도로 선언했다.

한나는 다른 시녀들에게 푸념 섞인 속사정을 흘렸다. 테오르가 정원에서 가까운 별채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이 옮겨 가게 됐다고.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짐을 옮기느라 힘들다고 불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들 별 의심 없이 두 사람의 상반되는 설명을 믿었다. 예컨대 어린 도련님이 나무와 연못이 지척에 있는 별채로 가겠다고 떼를 썼고 아스텔도 괜찮아 보여서 허락했다는 것이었다.

의심할 구석이 전혀 없었다. 거기에 테오르가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함께 머물게 됐다는 것 역시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님께서 먼저 나가 계세요.”

외조부와 별채에 마주 앉은 아스텔은 본격적으로 이동 계획을 짰다.

“내일 낮에 피크닉을 갈 거예요.”

“그래. 그럼 나는 그때…….”

“예, 할아버님께서는 저택으로 돌아오지 말고 성문 근처에 머물고 계세요.”

외조부가 저택을 빠져나가서 성문 근처에 머물며 기다린다. 한밤중에 한나가 몰래 테오르를 그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테오르와 할아버지는 새벽이 되자마자 성문을 빠져나가 동부로 간다. 단순한 계획이었다.

‘어차피 황제의 허락은 받았으니 문제 될 것도 없어.’

테오르가 수도를 떠나는 날짜는 무도회 이틀 전으로 정했다. 아스텔은 한나와 함께 테오르의 짐을 정리해서 별채로 옮겼다.

“왜 방을 옮겨야 해?”

테오르는 두 사람이 짐을 정리하는 걸 구경하다가 곰 인형을 끌어안고 한나를 졸졸 따라갔다.

짐을 옮기던 한나가 포근한 눈길로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도련님이 별채를 좋아하실 것 같아서 옮기는 거예요. 별채는 정말 아름답거든요. 커다란 느티나무가 옆에 있는데 지붕에 올라가서 나뭇잎과 새 둥지를 만져볼 수도 있어요.”

“정말? 아기 새도 있어?”

동물 얘기가 나오자 푸른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테오르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설명하던 한나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났다.

“예, 그럼요. 그리고 정원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에는 개구리도 있답니다. 어떠세요? 보러 가고 싶지 않으세요?”

“응, 좋아. 나 개구리 보러 갈래.”

한나가 다정하게 구슬리자 테오르는 신이 나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테오르의 옷을 정리하던 아스텔은 아이의 천진한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삼켰다. 

별채에 있는 방은 본채의 침실보다 작았지만 햇빛이 잘 들고 안락했다. 커튼을 열자 벽면을 채운 유리창에서 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살이 내리쬐는 벽난로 앞에는 테오르의 장난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보들보들한 솜털로 만든 인형과 실물처럼 정교한 군선과 성채. 손가락만 한 병정 인형들이 둥글게 모여서 햇살을 머금고 있다. 테오르는 두 사람이 짐을 정리하는 동안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곰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한나가 짐가방을 정리하러 간 사이에 아스텔은 테오르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장난감에 열중하고 있는 테오르를 가만히 품 안에 끌어안았다.

“아스텔 고모?”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뺨에 닿았다. 젖살이 남은 하얀 피부에서 우유 냄새가 살포시 풍겨왔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잠깐의 이별일 뿐인데도 마음이 심란했다. 여태껏 아이를 품 안에서 떼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지난 5년 동안 아스텔은 테오르를 언제나 눈 닿는 곳에 두었다. 품안에서 떼어내 멀리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테오르. 며칠 뒤에 할아버지와 함께 여기를 떠나야 해.”

아스텔의 품에서 벗어난 테오르는 물끄러미 얼굴을 들었다.

“우리 이제 집에 가는 거야?”

“그래. 그렇지만 엄마는 같이 갈 수 없어.”

짐가방에 넣지 못한 유일한 장난감, 곰 인형 레빈이 테오르의 손에 들려 있었다.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테오르가 놀라서 물었다.

“왜 할아버지하고 나만 가?”

“나는 수도에 남아서 꼭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중요한 일?”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야.”

아스텔은 테오르와 할아버지가 떠난 것을 숨긴 채 이틀 동안 이 저택 안에 머물 것이다.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무도회에 참석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테오르도 데려오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며칠 전에 테오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걸 허락했고, 그 후 테오르의 거취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명령을 철저히 따를 생각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명령대로 무도회에 참석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테오르는 동부 가도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있으리라.

테오르는 아쉬운 듯이 말했다.

“나도 수도에 더 있고 싶었는데.”

아스텔은 테오르와 눈높이를 맞추고 웃었다.

“집에 돌아가면 정원에 연목도 만들고 블린의 집도 만들자. 극단이 올거야. 그러면 ”

“응! 나 연극 보러 갈래!”

연극이라는 소리에 테오르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아스텔은 웃으면서 다시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마음이 평온해지면서도 며칠 뒤에는 아이를 떠나 보내야 한다는 현실에 가슴이 쓰렸다.

* * *

출발 전날은 예정대로 수도의 공원으로 피크닉을 떠났다. 

일행은 아스텔과 테오르, 그리고 할아버지와 한나였다. 할아버지는 공원 근처의 번화가에서 내렸다. 남은 세 사람은 공원을 돌아보면서 시간을 끌다가 돌아올 예정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가는 거야?”

테오르가 걱정스러운 듯이 마차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떠나기 전에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말거라. 내일 밤에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밤에?”

“그래. 밤에 만나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게야.”

아스텔은 할아버지와 눈짓을 교환했다. 할아버지는 성문 근처의 미리 약속된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밤에 한나가 테오르를 그곳에 데려갈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스텔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걱정 말거라. 다 잘될 거다.”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목적지는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공원이었다. 넓은 호수를 중심으로 화단과 산책로가 있는 한적한 공원이었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싱그러운 풀잎과 화초가 가득한 산책로가 나왔다.

“도련님, 여기 물고기가 있어요.”

한나가 테오르를 호수 근처로 데리고 갔다.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잉어들이 맑은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잉어 떼가 일제히 수면 위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먹이를 주는 거예요.”

한나는 바구니에 담아 온 말린 빵 부스러기를 수면 위에 한 움큼 던졌다. 테오르도 작은 손으로 빵 부스러기를 연못 위에 뿌렸다. 잉어 떼가 빵 부스러기를 서로 먹으려고 한데 모여 발버둥 쳤다.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의 다채로운 비늘이 수면 위에서 물결쳤다.

“고모, 이것 봐. 물고기야!”

아스텔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테오르에게 가려고 했다.

그 순간 구슬 같은 맑은 목소리가 아스텔의 발걸음을 잡았다.

“어머, 아스텔 님?”

공원 입구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연분홍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플로린과 자색 드레스를 입은 크로이첸 후작 부인이었다.

산책을 나온 것인지 둘 다 외출복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후작 부인. 플로린 양.”

‘왜 하필 이 모녀를 만난 거지?’

아스텔은 짜증을 감추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플로린이 해맑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이런 곳에서 아스텔 님을 만나다니 오늘은 정말 운이 좋네요.”

행복한 눈빛으로 말하는 플로린을 보며 아스텔은 이 어린 아가씨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쓸데없는 정성이로군.’

후작 부인은 샐쭉한 표정으로 간신히 고개만 까딱거렸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오랜만에 뵙네요.”

아스텔은 친절한 미소로 두 모녀를 상대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 신경이 쓰였다.

오늘 밤 할아버지와 테오르가 수도 밖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아가씨가 붙여놓은 첩자에게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테오르를 보내는 건 더 조심스럽게 해야겠다.

“아스텔 고모?”

연못가에 있던 테오르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한나도 다급한 얼굴로 뒤따라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테오르가 아스텔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는 분들을 만난 것뿐이야.”

“어머나, 귀여운 도련님이네요.”

플로린이 호기심을 담고 테오르를 살폈다.

“예, 제 조카랍니다.”

테오르도 귀엽고 예쁜 플로린이 마음에 드는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조그만 도련님이 예의가 바르네요. 귀여워라.”

플로린은 테오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뒤 아스텔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인형같이 귀여운 이목구비에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조카분이 아스텔 님과 정말 많이 닮았네요.”

* * *

아스텔은 플로린의 귀여운 얼굴을 보며 직감했다. 이 어린 아가씨는 테오르의 생모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설마 린테일 때문에 눈치챈 건 아닐 텐데.

테오르의 생모를 의심하는 사람은 카이젠뿐이었다.

혹시 그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걸까?

카이젠이 안다면 측근에 있는 신하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벨리안부터 떠올랐다.

‘설마 그 사람이 플로린에게 말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입에서 전해졌을 수도 있다. 몇 가지 가정이 떠올랐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스텔은 혼란한 마음을 감추며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어릴 때 외탁을 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아스텔은 플로린을 마주 보며 평온한 미소로 화답했다.

“친척이니 닮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잖아요.”

“그런가요?”

플로린은 자색 눈을 휘며 의미심장한 답을 던졌다.

“저는. 아직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

긴장감을 감추고 있던 아스텔은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이 똑똑한 플로린조차 테오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을.

‘테오르가 황자라는 걸 알았으면 이런 식으로 나를 조롱하지 않고 어떻게든 아이를 없애려고 했겠지.’

깊은 안도감에 저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아스텔은 웃으며 옆에 서 있는 후작 부인을 향했다.

“후작 부인께서는 이해하시겠네요. 따님을 세 분이나 두셨으니까요. 큰따님이신 레이디 마리안은 어머님을 많이 닮으셨던데요.”

“지금 뭐라고 하셨죠?”

옆에서 지켜보던 후작 부인이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아스텔에게서 마리안의 이름을 듣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다.

“왜 그러시나요? 아름다운 따님들이 부인을 닮아서 자랑스러우실 것 같았는데요?”

아스텔은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후작 부인은 당장에라도 아스텔을 후려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공원에서 아스텔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녀는 아스텔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요, 누구와는 다르게 우리 아이들은 떳떳한 혈통을 타고났거든요.”

이럴 때 보면 혈통이 뭔지 신기했다.

후작 부인은 마리안과 매우 흡사했지만, 정작 플로린과는 개미 눈곱만큼도 닮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요. 후작 가문의 훌륭한 혈통 덕에 따님들이 이렇게 출중하신 거지요.”

아스텔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후작 부인의 말을 긍정했다.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자 후작 부인은 화를 내며 돌아섰다.

“그만 돌아가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후작 부인.”

얼른 가라고 옆으로 비켜줬다. 후작 부인이 저만큼 걸어간 뒤에도 플로린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황궁에서 공작가의 자선무도회가 열린다면서요. 아스텔님께서 주최자의 자격으로 참석하시는 거지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플로린의 예쁜 얼굴에 미소가 진해졌다.

“무도회에서 다시 뵐 수 있겠네요.”

후작 부인은 공원의 입구로 걸어가다가 뒤따라오지 않는 플로린을 향해 소리쳤다.

“플로린! 뭐 하고 있는 거니?”

플로린은 유리알 같은 눈으로 아스텔을 바라보다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그럼 무도회날 뵙겠습니다. 아스텔 님.”

“네, 무도회 날 뵙지요.”

아스텔도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두 모녀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아스텔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스텔 님.”

한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아스텔을 불렀다.

“괜찮아. 다 알아챈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군요.”

그 이상 설명해 주지 않아도 한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플로린이 어떤 계기로 아스텔이 테오르의 생모라는 걸 알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플로린이 테오르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모, 고모.”

테오르가 아스텔의 치맛자락을 살랑살랑 잡아 흔들고 있었다.

“테오르? 왜 그러니?”

테오르는 공원의 입구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왜 매일 기분이 나빠?”

“풉.”

한나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아스텔도 웃으면서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세상에는 저렇게 매일 화난 사람도 있는 거야.”

테오르는 아스텔의 어깨에 매달리며 재잘거렸다.

“폐하도 그랬는데 이제 화내지 않아.”

“…….”

아스텔은 테오르의 귀여운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카이젠의 어린 시절을 빼닮은 아이가 애정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제 안 그러지.”

* * *

아스텔은 한밤중에 커다란 짐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테오르의 짐이 담겨 있었다. 한쪽에는 조그만 옷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장난감과 작은 신발을 넣어두었다. 아스텔은 가방 안에 있는 짐들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한 뒤 만족스럽게 가방을 닫았다.

“짐은 완벽하게 준비됐어.”

아스텔은 밤늦도록 테오르의 짐을 챙겼다. 미리 짐을 챙겨놓고도 몇 번씩 다시 점검했다. 테오르를 할아버지와 단둘이 보내는 것이었다. 뭐든 빠뜨리면 안 되니까 빈틈없이 준비해서 보내야 했다.

“아스텔 님. 다 준비됐습니다.”

한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나는 두툼하고 폭이 넓은 펠레린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아스텔은 침대로 가서 테오르를 깨웠다.

“으응…….”

“테오르. 이제 가야 해.”

아스텔은 미리 준비해 둔 옷을 테오르에게 입혔다. 작은 외투까지 꼼꼼하게 입히고 나서 한나에게 안겨주려고 했다. 뒤늦게 잠이 깬 테오르가 아스텔의 목에 팔을 감고 얼굴을 묻었다.

“흐흑…… 엄마.”

알고는 있었지만 갑자기 자다 말고 떨어진다는 생각에 겁이 나는 모양이다.

“괜찮아. 테오르.”

아스텔은 테오르를 안심시키기 위해 등을 천천히 손으로 쓸어줬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거야. 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렴. 엄마도 곧 따라갈게.”

훌쩍거리는 소리에 아스텔도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한참을 매달려 있던 테오르는 간신히 아스텔에게서 떨어졌다.

“블린은?”

“블린은 나중에 엄마가 데려갈게.”

테오르는 울먹이며 바닥에 앉아있는 블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나. 테오르를 부탁해.”

“걱정 마세요. 아스텔 님.”

한나는 테오르를 꼭 끌어안고 품이 넓은 외투로 가렸다.

두 사람은 별채의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을 돌아서 미리 준비해 둔 열쇠로 저택의 쪽문을 열었다. 한나는 아스텔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돌아서서 빠르게 거리를 걸어갔다.

아스텔은 한나와 테오르가 한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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