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화
로키는 환영 뒤에서 웃는다. (6)
"나는... 실패했나."
신령급의 타락천사, 루시퍼를 디바이너를 멸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끝에 불러낸 카이네는 무릎을 꿇은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단테를 바라보았다.
오른손에는 손잡이밖에 남지 않은 성검을, 왼손에는 M1911을 들고 다가온 그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했던 모든 용사의 프로토타입을 이 자리에 소환해낸 단테를 앞에 두고, 카이네는 혀를 찼다.
"네놈. 만 없었어도... 이 세상에서. 인간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었는데. 복수를... 완수할 수 있었을 터였는데. 나는... 대체 왜 인간의 편을 든 거냐. 배달부. 네가 갖고 있는 그 힘. 올바른 방향으로 쓴다면 분명..."
"헛소리 집어치워, 카이네. 나는 이게 올바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 아무래도, 네 올바름과 내 올바름의 기준이 좀 다른가 보지. 나는 네가 디바이너를 멸하려 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해.
루시퍼가 봉인된 데이터 칩을 내게 넘겨. 그럼 내가 교단에게 끌려가서 잔혹한 고문을 받게 하는 꼴 만큼은 면하게 해 줄게."
"흥. 이제와서 착한 척이냐. 용병. 지금 와서 착한 척해봤자. 네놈의 이름 뒤에 붙는 수많은 칭호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흉조, 용병, 피비린내 나는 마법사. 안 그런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이네는 순순하게 손에 꽉 쥐고 있던 데이터 칩을 단테에게 넘겨주며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걸 낚아챈 단테는 곧바로 그걸 자신의 소환기 안에 밀어 넣고, 총구 끝으로 도망가라는 듯이 그녀 뒤에 펼쳐진 황야를 가리켰다.
그러나.
"용병. 원하는 걸 가져간 듯 하니 하나만 의뢰하지. 나는... 나는. 이미 오래 못 버텨. 루시퍼를 현계시키는 데 마력을 지나치게 많이 소모한 데다, 부족한 마력은 나의 내장... 신체기관을 제물로 바쳐서 충당했어.
어차피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금방 죽는다. 고통받으면서 골골거리다 죽을 바엔, 여기서 명예롭게 네 손에... 마지막에 신령을 쓰러뜨린 용사의 손에 죽고 싶다.
쏴라. 의지가 약했던 나의 패배다."
"... 그게 네 선택이라면. 존중해주지."
단테는 침을 삼키고 카이네의 이마 한가운데를 조준하고, 방아쇠울 안에 검지를 집어넣었다. 한치 흔들림 없이 두 손으로 권총을 파지한 그는 카이네를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 * *
마그놀리아로 돌아온 직후.
루시퍼를 제지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한 모든 마법 능력자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홀리의 의료실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
베아트리체와 단테의 경우, 지나친 마력의 소모로 인해 체내에 마소가 쌓일 대로 쌓인 탓에 올라오게 된 부작용을 치료받았고, 몇 가지 찰과상과 골절을 치료받았다.
특히나 단테를 담당한 의사는 조금만 잘못했어도, 그 자리에서 소환기나 성검의 보조가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좀비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마소에 노출되었다며 한 소리를 했다.
아마 [영령형 아서]를 소환한 직후, 단테도 알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단테 자신도 '영체화'가 되었었는데, 그 반동을 평범한 반인반마의 몸으로 받아내려다보니 찾아오게 된 부작용인 듯했다.
그래도 치료를 받는 타이밍이 빠른 데다, 단테의 몸에 흐르는 악마의 피 덕에 마소병에 걸리지는 않고 넘어갈 수 있었던 듯 했다.
버질은... 안 그래도 치료가 덜 된 몸으로 전장에 나간 탓에 벌어진 상처가 더 벌어지고 말았다.
마소 중독 증세의 경우, 베아트리체나 단테보단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양호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으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어떤 의사도, 그의 조각난 자존심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환 고정기를 통해 이 땅에 불러온 엑스칼리버의 영령, '아서'를 쓸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어디서 굴러온 지 모를, 그냥 대충 고대 유적에서 성검이나 주워다 쓴 반인반마에게 빼앗겨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에리스의 상태는 어때?"
치료를 받고 난 직후, 단테는 루시퍼와 대등하게 맞서 싸웠던 용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의무실'이 아닌, 홀리의 '연구부서'로 끌려간 요정의 상태를 확인했다.
"체내의 영체는 일단 진정시켰어요. 하마터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진짜 말 그대로 체내의 마력이 역류해서, 문자 그대로 신체가 산산조각 날 뻔했으니까... 일단 지금은 안정기에 들어섰고요. 기운도 다시 차렸어요."
"그건 다행이네... 하아."
"하지만."
연구 부서의 엔지니어는 검지를 단테의 코 바로 앞에 가져다대며 당부했다.
"이제는 요정의 몸이 버티질 못 해요. 마법을 쓰면 쓸 수록, 조금 전에 말했던 붕괴 상태에 더 가까워진 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아마... 앞으로 세 번. 아니면 네 번 정도가 한계겠죠.
그 이상 사용하게 된다면... 확실하게 죽을 거예요. 에리스 씨.
원래, 영체를 소환하는 소환 마술이 지닌 리스크는 소환사인 단테 씨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 영체를 서번트화 과정 없이 그냥 인간의 몸에 때려박은 거예요.
사실... 본인이 마법을 쓰면서도 자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점점 자신의 붕괴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럼에도. 그 전장에 뛰어들었다는 건. 그만큼 당신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단 거겠죠.
조금 더 신경써주세요. 무엇보다, 단테 씨의 요정이니까."
"그래. 명심할게."
엔지니어의 당부를 마음에 새기고, 그는 에리스가 입원해있던 방에 들어가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웠는지, 에리스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주인님. 무사했군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이 망할 년아.
"그럼 그럼. 내가 그리 쉽게 죽겠냐? 신령을 베어 가른 남자라고? 나."
"네. 정말 대단했죠... 그때."
에리스는 일부러 자신의 몸 상태를 단테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마력으로 인한 붕괴로 죽을 뻔했다는 것도 숨겼고,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도, 얼굴에 철면피를 깐 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섬기는 용사인 단테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단테는 그리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이젠 손잡이밖에 남지 않은 성검을 보여주었다.
"그건..."
"리버레이터의 손잡이야. 이제 나. 용사도 뭣도 아니거든. 용사의 자격 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검이 박살나버렸으니까. 이제 굳이 주인님이라고 안 불러도 돼. 무리할 필요도 없고."
"아뇨.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에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입고 있던 환자복에서 황무지에서 활동할 때 입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모험도 같이 해온 데다, 사경까지 함께 넘어왔으니, 이제는 속옷을 보여주는 것 정도야, 거리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레이디는 레이디. 단테는 매너 있게 살짝 뒤를 돌아, 에리스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일부러 시야 바깥으로 몰아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뒤를 돈 채로 단테가 주머니에 손을 비집어넣은 채 물었다. 그러자, 에리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검을 그 손에 갖고 있기 때문에... 주인님이 용사인 게 아니에요. 그 손으로 성검을 다뤄낼 수 있었던 그 시점부터. 주인님은 용사였던 거니까요. 성검이 없다고 해서, 바뀌는 건 무엇 하나 없어요."
"... 그런가."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왼팔에 장착된 소환기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루시퍼'의 영체 데이터.
이 세상에 현계한 루시퍼는 '에리스'를 보고 자신의 '날개 반쪽'이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카이네를 매개체로 나타난 루시퍼는, 날개 한쪽이 소실된 상태로, 전력을 낼 수 없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루시퍼가 사용하는 '새벽'의 마법. 에리스가 사용하는 '새벽'의 마법. 루시퍼의 마법만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 '에리스'의 마법.
아무리 멍청한 단테라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에리스의 몸 안에 있는 건, 대천사 미카에리스같은 게 아니다. 저 안에 있는 건, 루시퍼가 잃어버린 날개의 반쪽. 대악마 루시퍼의 반신이다.
이걸 알려줘야만 할까.
아니면... 그녀가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줘야 할까.
단테가 잠시 고민하고 있었던 무렵, 등 뒤에서 에리스가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으며 꼭 끌어안으며, 자신의 얼굴을 단테의 등에 기댔다.
"루시퍼 토벌.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다시 봤다니까요. 정말."
"난 원래 할 땐 하는 남자야."
단테는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결국 결단을 내렸다. 이제는 200년이나 지나버린 일. 굳이 에리스의 아픈 상처를 지금 당장 후벼 팔 필요는 없겠지.
"에리스."
"네?"
"오늘 내로 여길 떠날 거야. 그러니까 짐 챙기고, 엘리자베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 네. 홀리의 격납고 안에 있었죠?"
레일로드 주둔군에게 에리스가 잡혀 들어왔을 때, 단테의 트럭인 엘리자베스 또한 디바이너 놈들에게 잡혀 들어갔다. 뭐 그 덕에 엘리자베스의 짐칸에 설치된 터미널을 통해 서번트를 교체할 수 있던 거라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근데 되게 빨리 떠나시네요. 보급 같은 거.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보급받자마자 튈 거야. 다 생각이 있거든."
단테는 미소를 지으며 에리스의 등을 통통 두드렸다.
"가자."
"네에..."
* * *
에리스와의 재회 후, 바로 홀리의 의무실로 돌아온 단테는 꼴 사납게 버질이 쓰러진 침상에 팔짱을 낀 채 다가왔다.
"후. 하. 하. 하."
버질을 비웃듯이 거만하게 가짜 웃음을 지으며 단테가 입에 담배를 물고 들어오자, 버질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단테를 째려보았다.
"담배 피지 말라니까. 진짜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듣는 건가?"
"나 아직 불 안 붙였다?"
단테는 씨익 웃어 보이며 소환기를 몇 번 조작하더니, 그 안에 삽입된 '데이터 칩'을 꺼내 보여주었다.
안에 강력한 신령, '루시퍼'의 영체 데이터가 들어있는, 잘만 하면 황무지의 대립 구도를 180도 바꿔버릴 수 있는, 전략 병기 그 자체.
그걸 눈 앞에 둔 버질은 이번 작전의 승리의 주역이 단테였다는 걸 상기하곤 혀를 찼다.
"네 앞에서 담배 안 피우겠다는 약속 지켜줄게. 그러니까. 이 데이터 칩을 넘겨줄 테니. 너도 약속 지켜. 베아트리체는 대체 왜 나랑 잘 지내다가. 네 곁으로... 디바이너 곁으로 떠난 건지.
디바이너 안에서 그녀가 찾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설마 성스러운 용사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 디바이너의 성기사님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진 않겠지? 응?"
"뭐 좋다. 네놈에겐 알려줘 봤자지."
버질은 의무실에 있던 다른 의료진들에게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으니, 나가보라고 짤막하게 손짓했다. 마침내 단테와 버질, 단 둘이 남게 되자 버질은 그 특유의 짜증 나는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는... 나의 트릭시는 한 가지 병을 앓고 있다."
"언제부터 네 트릭시였... 하아. 아니다. 얘기 계속해봐."
"너, 베아트리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냐?"
"보기보다 아주 나이가 많다는 건 알지. 마법을 이용하면 젊게 사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베아트리체는 실제로 단테가 어렸을 때,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베아트리체는 외적으로 변한 모습이 전혀 없었다. 과거 사진 같은 게 있다면 한 눈에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그런 건 단테의 손에는 없었다.
"베아트리체는 '전쟁 전' 사람이다. 네가 냉동 포드에서 해동한 그 요정이랑 시대적으로 같은 삶을 살았던 인간이라는 거지."
"그건... 야. 200살이 넘는다고? 그.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트릭시의 '병'이야. 그녀는... 늙지 않아. 죽지도 않아. 죽음이라는 개념를 현재 빼앗긴 상태다.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필멸자'로서의 삶을... 되찾고 싶어 해.
베아트리체는 그게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번트 소환 마법'이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고. 디바이너에는 소환 고정기와 이를 연구하는 연구진들이 있지."
"늙고 싶어도 늙지 못 하는 병.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병이라니. 불로불사 아닌가? 그게 왜... 병이라는 거지?"
"네가 알던 것. 네가 소중하게 여긴 것들이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는 꼴을. 자신만이 그대로인 채로 바라본다고 생각해봐라. 단세포인 넌 잘 모르겠지만. 그건 엄청난 고통일 거야."
"그래서. 벌써 3년이란 세월이 지났어. 그 병은 언제 고칠 셈이야?"
"고칠 생각 없는데?"
버질은 그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최고잖아. 불로불사. 우리가 원하는 건. 베아트리체의 병을 고치는 게 아니야. 베아트리체의 병을 연구해서, 우리 같은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것이지. 더욱 완벽한 형태로.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 해 사라지는 것이 곤란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를 만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베아트리체는 그 병을 디바이너가 고쳐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있기에 우리에게 협력하고 있어. 그녀의 마법 능력은 소중하지. 유니온과의 길고 긴 전투에서 핵심 전력이 되어줄 거야."
"..."
단테는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마치 좀비의 시체 속을 들끓는 구더기를 노려보듯 버질을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너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를 좋아한다면. 그 마음을 붙들어두기 위해서 뭐든 하겠지. 그런 거 아닌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용병이잖아. 너."
"그러시겠지. 난 이해해."
단테는 보란 듯이 성냥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네가 쓰레기 새끼라는 걸 말이야. 내가 이걸 베아트리체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 거 같냐? 미친 새끼야."
"베아트리체가 네 말을 믿겠냐? 내 말을 믿겠지. 뭐 두고 보자고. 아무튼. 데이터 칩 회수. 고맙다. 부하들을 시켜서 엘리자베스에 식량과 물, 탄약 등을 싣게끔 명령해두지. 다시는 볼 일 없게 하자고. 서로."
"..."
단테는 썩은 얼굴로 버질을 한 차례 노려보곤... 그가 들으라는 듯이 의무실의 벽을 주먹으로 냅다 후려치고 떠났다. 사랑하는 아내를 눈앞에서 빼앗겼음에도 아무것도 못 하는... 통한의 고통이 담긴 그 모습을 보고 버질은 미소를 지으며 병상에 도로 누웠다.
의무실을 떠난 단테가.
'미소'를 짓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 한 채.
이미 단테의 소환기에는...
'음성 메모' 기능이 활성화 되어있었단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 하나 더 올라갑니다. 이번 이야기 끝마치려고요.
+ 다른 소설은 일러 갈아넣던데 왜 안 갈아 넣으시나요?
-> 돈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