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화
로키는 환영 뒤에서 웃는다. (1)
설득은 하지 못 했지만 동기는 알았다.
그 너머에 있는 목적까지 알았다.
와일드 헌트의 수장, 카이네의 목적은 데이터 칩을 활용한 디바이너 교단의 배제. 정확히는 마그놀리아를 향한 대대적인 침공이다.
협상의 테이블 앞에 선 단테에게는 카이네를 비판할 권리는 없었다.
그녀가 디바이너에게 당했던 참혹한 일들은 감히 당사자가 아닌 단테의 상상력을 까마득히 뛰어넘는 고통을 그녀에게 안겨주었겠지.
디바이너가 저지르고 다니는 인간주의사상에 희생된 정착지를 배달 업무를 하면서 몇 번이고 봐 온 단테는 그 고통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디바이너, 혹은 와일드 헌트.
어디에 협력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를 단테 가슴 속에 있는 마음속 천칭에 재 보았을 때, 단테는 희미하게 저울 추가 와일드 헌트 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디바이너에는 그가 싫어하는 버질이 있다. 게다가 반인반마인 그가 디바이너에서 당한 수모를 생각해본다면, 당장 카이네의 옆에 붙어 마그놀리아를 밀어버리는 게 더 현명한 선택처럼 보였다.
그러나 디바이너에는 베아트리체가 있다. 그녀가 찾는, 궁극적인 무엇인가가 디바이너 안에 있는 한 마그놀리아가 없어지게끔 볼 수는 없다.
더 나아가서, 마그놀리아 안에는 디바이너의 무력 집단인 홀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들도 있다. 만약 저 데이터 칩에 있는 무언가, '비대칭 전력'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마그놀리아를 강타하게 된다면, 그 사람들도 전부 쓸려버릴 게 뻔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전쟁은 총을 가진 자들의 전유물. 총을 가지지 않은 자들에게는 총구를 돌리지 않는 것이, 전쟁을 거의 반쯤 비즈니스로 여기는 단테의 제1원칙이었다.
단테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자신의 이득을 최대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이뤄낼 수 있을까.
기회는 단 한 번 뿐.
단테는 분노로 일그러진 카이네를 바라보며, 이 사건에 얽힌 수많은 이해관계를 다시 찬찬히 곱씹었다.
그리고 철제 테이블 위에 놓인 차가 마저 다 식기 전에, 그는 무엇인가 결론을 내는 데 성공한 건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디바이너 측에 붙을 바에는... 너희 측에 붙는 게 훨씬 낫지."
"그게 정말인가?"
"나는 반인반마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저 녀석들의 종교 재판 아래에서 목이 뎅겅하고 잘려나갈 뻔했다고.
내 목이 잘려나가지 않는 대신, 나는 그들에게 고용되어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처지야. 이번 용병 일의 보수는 내 죗값인 셈이지.
괘씸하잖아? 레이븐은 무조건 중립이야. 누군가에게 고용되기 바로 전까지. 그런데 반인반마라는 이유로 날 감옥에 처넣고, 죽이려 드니까 말이야.
그리고 디바이너가 여태까지 해왔던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네게 해왔던 짓을 포함해서, 그들은 인간주의사상을 방패와 창 삼아서 수많은 학살과 전쟁범죄를 저질렀어.
그리고 지금, 그 용서받을 수 없는 일에 대한 단죄의 시간이 드디어 찾아왔지.
인간에게 시달려온 마왕이, 핵폭탄을 떨어뜨려 이 세계를 마소로 물들였듯. 그들은 다시 한 번 현재의 오만한 행태에 대해 신벌을 받아야만 해."
단테의 말을 들은 카이네는 그의 마족의 눈동자를 보고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도 아머의 헬멧을 다시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다.
"좋다. 용병. 반인반마인 그대라면 우리 쪽의 설득에 어울려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말은 번지르르 했지만. 우리가 널 믿을 만한 근거가 아직 무엇 하나 없지 않나? 이미 한 번 디바이너를 배신 때린 전적이 있는 만큼, 네놈이 우릴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잖나."
"그렇다면 협력의 표시로 디바이너에 협력 중인 내가 중요한 정보를 몇 개 너희들에게 전해주지. 전쟁에 있어서 정보는 중요하잖아?
현재 홀리의 기사단장, 베르질리우스는 너희들이 야생에 풀어놓은 영체, 환수형 케르베로스와의 전투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어. 데이터 칩을 이용해서 마그놀리아를 급습하려면 지금이 적기야.
지금 대부분의 마법 능력자들은 '스칼라 발전소'를 두고 서로 갈등하고 있으니까. 거기 파견되어 있거든. 못 믿겠다면 정찰병을 보내보든가."
"음..."
단테의 말을 곰곰이 들은 카이네는 터미널에 호환되는 작은 테이프 하나를 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건?"
"레일로드 주둔군과 마찬가지로. 마그놀리아 내부에는 통신 관제 타워가 있어서. 기사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철저하게 서로 통신을 주고받으면서 빠르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지.
그 테이프는 내가 와일드 헌트 기술 부서에서 받아온 건데. 삽입하는 그 순간 통신 기능을 마비시키지.
사흘 시간을 주겠다.
네놈이 신용을 증명해보이고 싶다면, 사흘 후 정오. 테이프를 통신 관제 탑을 컨트롤하는 터미널 안에 집어넣어라.
통신 기능이 마비된 걸 이쪽에서 확인하자마자, 나는 마도 아머에 부착된 소환기를 이용하여 영체를 해방시키겠다. 그럼 마그놀리아는 혼란에 빠지겠지.
마왕이 보유했던 최강의 영체는 마그놀리아의 모든 생명들을 샛별의 빛과 함께 거둘 것이다. 그 영기가 다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야."
"알았어."
단테는 카이네로부터 테이프를 받아 들고, 코트 안주머니에 이를 숨겼다.
"돌아가라. 용병. 총질만 할 수 있는 단세포인 줄 알았지만. 네놈의 긴 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걸 명심해라. 그리고, 만약에 우리를 배신하게 된다면 모든 와일드 헌트가 네놈의 목을 노리게 될 것이다."
"명심하지."
* * *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레일로드 주둔군에서 험비를 타고 마그놀리아의 홀리 본부로, 베아트리체, 버질과 함께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단테는 막사에서 잠시 옷을 벗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긴장감 넘치는 대화를 너무 오래하다온 탓이었을까, 옷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눅눅해져 있었다.
얼른 막사에서 들어가서 쉬고 싶다, 그런 단테를 배려해주기 위해 베아트리체는 취사병에게서 받아온 식사를 손수 그의 앞에 가져다주며 슬쩍 물었다.
"그래서... 단테. 와일드 헌트는 뭐라고 했어?"
"물러날 생각이 없는 거 같아. 무슨 일이 있어도 데이터 칩을 넘겨줄 수 없다고 단정 짓던데. 그쪽에게도 그쪽 나름의 신념이 있어서, 단순한 말로는 해결을 보기 어려워. 정면충돌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
"역시 그렇구나."
"스칼라 전선에 있는 소환사를 불러들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정도 되지? 녀석들은 빠른 시일 내에 마그놀리아를 급습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해놨어. 지금 당장 스칼라 전선 쪽에 있는 소환사를 이쪽으로 불러들이는 건 불가능한가?"
"무리야. 거리가 지나치게 멀어. 헬기를 이용하면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애초에 팽팽한 스칼라 전선에서 소환사를 빼내는 건... 지금 상황으로선 힘들 거야.
마법 능력자와 소환사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레이븐즈 로지스틱스가 이상한 거지, 원래 소환사는 극히 희귀한 존재야. 지금 와서 갑자기 뭔가를 준비하기에는 지나치게 촉박해."
"그럼, 베아트리체. 그 전에 하나만 물을게."
단테는 그녀가 내민 식판을 옆으로 치워버리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이번 일. 데이터 칩의 회수에 대해서인데."
"응. 물어봐도 괜찮아."
"... 버질에게서 일단 대충은 들었어. 그리고 나도 대충 예상은 했고. 베아체. 네가 버질과 협력하고, 디바이너 아래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디바이너만이 네가 쫓는 궁극적인 목표를 이뤄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게 뭔지는 지금 묻지는 않을게. 어차피 대답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이번에 네가 찾는 이 '데이터 칩'이 네가 궁극적으로 찾는 목표인 거야?"
"..."
베아트리체는 잠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단테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이건 그저, 디바이너와 버질의 신뢰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 이 데이터 칩 자체가 내가 쫓는 목표는 아니야. 나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왜 그런 강력한 영체를 원하겠어. 이미 신령급 서번트를 갖고 있는 내가. 내가 원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디바이너와 버질이 널 그냥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너가 원하는 그 목적을 이용해서. 현시대 거의 최강이나 다름없는 마법 능력자인 너를... 붙들고 있다는 생각. 3년이야 트릭시.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 그런데도 디바이너는 네가 원하는 걸... 무엇 하나 이뤄주지 않았잖아."
"당연히 생각해봤지. 그리고... 3년에 이르른 지금. 그게 맞다는 생각이 마음 한 켠에 계속 들어.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어. 그것만큼은... 절대로."
대체 디바이너에게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이렇게 베아트리체는 필사적으로 디바이너와의 협력을 유지하려 드는 걸까. 역시 그 해답은 버질 자신의 입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걸까.
단테로서도 이 이상 자세히 캐묻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궁극적 목표가 '데이터 칩'이 아니란 사실만 알았어도, 큰 수확이었으니까.
"알았어. 식사 가져와줘서 고마워."
"응."
베아트리체가 방에서 나간 걸 본 단테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와일드 헌트의 테이프를 꺼내 손에 쥐었다. 이걸 관제탑의 터미널에 밀어 넣는 그 순간, 마그놀리아의 모든 통신 장비는 마비되고 혼란에 빠진다.
디바이너는 싫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만큼은 자신의 편이었으면 한다.
디바이너가 잡고 있는 베아트리체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선, 와일드 헌트로부터 데이터 칩을 회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그는 동시에 네오 쿄토로부터 의뢰를 받아놓은 상태며, 와일드 헌트와 손을 잡고 마그놀리아를 무너뜨릴 계획에 몸 담고 있다.
자. 단테.
이 상황에서 너는. 어떻게 움직일 거지?
단테는 조용히 카이네로부터 받아든 테이프를 쥔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답은 뻔하지.
버질도, 와일드 헌트도, 베아트리체조차도 예상 못 할 큰 그림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나갔던 그는 쉬라는 베아트리체의 권유를 무시하고, 그대로 홀리의 기술 부서 쪽으로 걸어갔다.
"아. 단테 씨. 어서 오세요. 요정 보러 오신 거죠?"
기술 부서에서 일하고 있던 엔지니어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버질은 현재 의무실에, 베아트리체는 자기 숙소로 돌아간 듯 하니, 이 기술 부서에 남아있던 건 평소 여기서 일하는 연구자들과 기사들 뿐이다.
"어. 맞아. 에리스는?"
"지금 연구실에서 쉬고 있어요. 그녀의 신체 구조랑 몸에 품은 영체를 조금 분석하고 있었거든요."
"결과는 어땠어?"
단테가 묻자, 그녀는 다른 사람이 듣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가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소근소근 말했다.
"그 저기. 단테... 씨한테는 조금 실례되는 발언일 수도 있는데요."
"뭐길래 그래. 난 지금 바빠. 에리스랑 나눌 얘기가 있어."
"... 에리스. 씨에 대해서 나쁜 소식 두 가지가 있어요. 먼저 들어두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이건 단테 씨를 위한 거예요."
"뭐가 그렇게..."
"에리스 씨 말인데요. 아마 앞으로 얼마 오래 못 살 거예요."
"..."
뭐?
"아니. 자. 잠깐.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에리스랑 잠깐 이야기하려고 홀리의 연구 부서를 들른 것뿐인데, 터무니없는 사실을 들어버린 단테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엔지니어의 어깨를 잡았다.
"지. 진정해주세요. 에리스 씨가 들을 수도 있잖아요."
"... 그래. 하아. 대체 왜 얼마 못 산다는 거야?"
"에리스 씨가 품고 있는 영체 때문이에요. 여기서 두 번째 나쁜 소식인데요. 에리스 씨가 품고 있는 '영체' 말인데요. 저희 소환 고정기를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조사해봤거든요?
저희가 사용하는 소환 고정기는, 전쟁 전. 인간이 사용했던 소환 고정기와 동일하고. 요정에 탑재되는 영체의 데이터 또한 여기 저장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가 품은 영체와 파장이 일치하는 영체가 없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몸에 대천사 미카에리스를 품고 있다고 했지만요. 저희가 갖고 있는 대천사 미카에리스의 데이터와 무엇 하나 일치하지 않았어요.
바로 이 점 때문이에요.
현재 에리스 씨에게 '탑재'된 영체는 에리스 씨의 몸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오히려 체내에 있는 영체가, 지금 에리스 씨의 파장과는 정반대의 것이라서. 소환기를 사용하지 않는 소환사들. 그니까, 사이커들 사이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요.
성향이 맞지 않은 영체를 체내에 받아들이면 반발이 엄청 심해요. 베아트리체 님 정도 되는 사이커들은 그런 건 크게 상관이 없지만. 미숙한 사이커라면 이야기가 또 다르죠..."
"즉. 에리스가 영체의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죽어간다는 거야?"
"... 네."
"하 씨 진짜 미치겠네."
그동안 여행을 같이 하면서 있는 정 없는 정 다 들어버린 마당에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처음 유적에서 냉동 포드를 열었던 그때부터, 정을 줄 생각을 말았어야 했는데.
"에리스 본인은 미카에리스를 품고 있다고 주장했어. 그리고 녀석은 용사를 치유할 수 있는, 미카에리스의 축복까지 갖고 있었다고. 그런데 안에 있는 영체가 '다른 것'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본래, 미카에리스의 마법의 접두어는 '광휘'라고 해요. 광휘의 화살. 광휘의 속검. 광휘의 축복. 등등이요. 하지만, 단테 씨의 요정. 에리스 씨가 사용하는 마법의 접두어는... '새벽'이죠.
새벽이란 접두어를 가진 마법을 다루는 영체는 저희 쪽 소환 고정기에는 등록되어있지 않아요."
아니 어쩌면.
엔지니어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곤, 이렇게 말했다.
"과거... 역사 기록에서요. 마왕이 다뤘던 영체 중에서. '새벽'의 접두어가 붙는 영체가 있었던 거 같아요. 이름이... 대악마. 루. 루시? 루사? 어쩌고 였던 거 같은데."
"알았어. 알았어. 그 쯤 하면 됐다고. 에리스를 만나러 갈 테니까. 좀 비켜."
단테는 착잡한 기분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도록, 이를 꽉 악물었다. 엔지니어가 안내해준 신체검사 방에, 환자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던 에리스는 활짝 웃으며 단테를 반겨주었다.
"아. 작전... 무사히 끝나셨나보네요. 저 없이 나가신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다고요."
엔지니어는 에리스 본인에게는 따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지.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다른 건 지금은 생각하지 마. 단테는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으며 잡생각을 떨쳐버리곤, 에리스 앞에 다가가 터미널 테이프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에리스."
"네?"
"부탁이 있어. 일단 내 이야기를 잠깐 들어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 연참할 수도 있으여. 스케쥴 상 가능하다면요.
사유는 분량 상 디바이너와 유니온이 데이터 칩 갖고 싸우는 걸 빠르게 마무리하기 위해서요.
동시에 베아트리체의 비밀 및 단테의 큰 그림도 시원시원하게 전개하는 편이 더 낫겠죠?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