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용사의 요정은 200년의 낮잠에서 깨어난다. (4)
데스 스토커로부터 이것저것 비싸 보이는 부품을 많이 뜯어낸 레이븐은 챙길 수 있을 만큼 가방에 이를 때려 넣고 어깨에 들쳐맸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거운 무게 때문에 몸이 살짝 뒤쪽으로 기우는 것 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신의 힘 및 내구 스탯은 이 정도 짐을 들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소환기에서 성가신 알림이 표시되자, 하는 수 없이 그는 서번트를 교체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꺼내놓은 서번트가 영령형 스카아크였었나. 그는 소환기를 만지작거리다가, 힘과 내구 스탯에 비중이 많이 쏠려있던 서번트로 교체했다.
소환사 자신의 스탯은 기본적인 자기 자신에 스탯에다가, 소환해두고 있는 서번트의 스탯의 일부를 보정치로서 더 해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가 이번에 소환한 서번트, '환수형 레비아탄'은 높은 힘 스탯과 내구 스탯을 갖고 있기에, 소환사인 레이븐 본인에게도 각각 힘과 내구 스탯을 더해줄 수 있다.
"엇차."
"소환기를 다루는 거. 하루이틀이 아닌 모양이시네요."
"응?"
행동 수를 전부 소모한 레이븐은 소환기의 탄창에서 검게 타버린 검은 보석 하나를 빼버리고, 주머니에서 새로운 걸 꺼내 안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소환기의 '동력원' 역할을 하는 물건으로 주로 속된 말로는 '마탄'이라고 레이븐은 비롯한 현대의 소환사들은 부르고 있다.
이 동력원이 없어도 소환기를 작동시키는 건 가능하긴 하지만, 서번트를 소환하거나, 서번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즉, 이게 없으면 소환기는 그냥 크기만 할 뿐인 고철 애물단지로 변해버린단 거다.
"그거 대체 어디서 손에 넣으신 거예요?"
"주웠다니까. 그리 자세하게 알려고 하지 마. 내게도 내 나름의 사생활이 있는데. 그 이전에 하나만 물어도 될까? 너, 아까 쓴 그거. 마법이었지? 일반적인 인간이 마법을 쓸 리는 없으니까. 너도 나랑 동류인가?"
"동류?"
"나는... 반인반마야. 인간과 악마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거든. 너도 그런가 싶어서."
에리스는 복잡한 심경으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 인간은 한창 마계의 악마들이랑 전쟁 중이었으니 말이다.
마계에서 넘어온 악령들이 인간을 죽였고, 인간들 역시 마계로 넘어가 수많은 악령들을 죽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찬란했던 과학과 마법 기술을 자랑했던 시절이었지만, 동시에 전쟁으로 인해 그 어떤 시대보다도 어둡고 칙칙했으며, 잔혹했던 사회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악마를 죽이기 위해, 정확히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마왕을 죽이기 위한 인간 병기, '용사'의 가이드인 요정이었던 그녀는 반인반마라고 레이븐이 밝히자마자, 그에게 악마의 자식 따위랑 자신을 같게 취급하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백 년이, 이백 년이, 어쩌면 그 이상의 영겁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냉동 포드에 얼려져 있다가, 죽을 운명으로부터 구해준 것은 바로 이 눈앞의 반인반마의 미청년이었다.
"... 당신이랑 같은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반인반마 같은 게 아니니까. 그것보다 알려주세요. 전쟁은 어떻게 됐죠? 여기는 어디죠? 지금 저희는."
"나랑 같은 취급? 반인반마인 게 뭐 어때서. 기껏 힘들게 구해줬더니만..."
"저도 그쪽을 데스 스토커의 분해 광선에서 구해줬으니까. 쌤쌤이거든요."
"진짜 골 아픈 여자네. 확 두고 가버릴까."
"에... 앗."
그제야 에리스는 지금 상황에서 누가 갑이고, 을인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200년이나 지난 지금, 이 영문 모를 세계에서 구를 대로 구른 모험가에 기대지 않으면, 대체 지금 누구한테 기대어 물자도, 정보도, 아무것도 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나간단 말인가.
"죄. 죄송해요. 하라는 거 다 할게요. 두고 가지만 말아주세요..."
"... 이러니까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농담이야."
툴툴거리며 입을 삐죽인 레이븐은 그녀가 잠들어있던 2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직접 보여주는 편이 빠를 거라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따라와. 걸으면서 이야기하자."
"괜찮을까요? 방금 같은 경비 로봇이 또 나타나면."
"내가 대부분 다 없애놨으니까. 안심해."
소총을 어깨에 들쳐 메고, 그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나간 바로 그때, 에리스의 눈에 무너져 내린 찬란했던 인간 도시의 참상이 그대로 들어왔다.
성한 건물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무너져 내렸으며, 깨지지 않은 유리창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도시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에 버려진 자동차들이 녹슬고,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살아있는 인간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인적도, 안내용 로봇도 없었으며, 여기저기에 세워진 가로등은 부러지고 쓰러져 도로 여기저기를 틀어막고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은 갈라지고 벌어져 있었으며, 부분 부분 살면서 본 적도 없는 기괴한 형태의 방사능 변이 식물들이 자라나 건물을 휘감고 있다.
"대... 대체. 뭐가. 뭐가 일어난... 거죠...?"
"말했잖아. 난 역사학자가 아니니까. 잘 모른다고."
심하게 충격을 받은 에리스와는 달리, 레이븐은 일상적으로 이러한 풍경을 접해왔다는 듯이 별 감흥 없이 무너진 유령 도시 폐허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여기저기에서 총의 화약 냄새, 그리고 오염된 물과 인간의 오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나 알고 있는 게 있긴 한데. 딱 200년 전인가? 네가 봉인되었을 때랑 비슷한 시기에. 여기에 폭탄이 떨어졌대. 뉴클리어? 뭐 그런 폭탄이라던데. 아무튼 그 폭탄이 인간계 전역에 떨어지면서 인간 문명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대. 엄청난 섬광과, 열기와 함께."
"그럼. 전쟁 때, 악마가 이긴 건... 가요?"
에리스의 답에 레이븐은 깔끔하게 대답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악마도, 인간도, 아무도 이기지 못했지. 내 말은... 이 광경을 봐. 나도 마계에 가본 적은 없지만, 거기도 상황은 뭐 비슷하지 않을까? 문명이 파괴된 흔적만 남아있지 않겠어?"
"... 말도 안 돼."
자신의 고향이 폭탄에 휩쓸려 파괴된 참상을 보고 에리스는 참지 못 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만약 냉동 포드에 얼려지는 대신, 용사를 도와 용사의 요정으로서 제 역할을 다했더라면 자신의 고향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의미 없는 후회가 에리스를 괴롭힌 무렵, 레이븐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용사. 용사의 요정... 200년 전에. 악마와 맞서. 싸웠더라면."
"거 그거. 용사니, 마계 전쟁이니, 요정이니, 반인반마 앞에서 할 말인 지는 모르겠다만. 이제 전쟁은 끝났어.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너가 자는 사이에 이미 200년이 지났다고.
네가 고향을 잃고,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몰려오는 건 나도 알아. 가슴에 총 맞은 기분이겠지. 하지만, 그게 널 이 황무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지는 않아.
이미 끝난 전쟁 가지고 편 갈라 치기 하면서 후회할 시간에 지금 어떻게 살아갈지부터 생각해. 마왕의 시대도 끝났고, 용사의 시대도 끝났으니까."
거칠지만 레이븐의 말은 확실히 정론이었다.
전쟁은 이미 끝나버렸다.
에리스가 손을 쓰기도 전에 말이다.
이미 핵폭탄을 맞아버린 인간계의 시간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고, 설령 그 자리에 에리스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용사의 요정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부정당하고, 전쟁이 끝나버린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힘들지만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나갈 수는 없다.
훌쩍이던 에리스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 눈물을 훔쳤다. 레이븐은 장갑 낀 손을 벗어, 검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만 좀 울어라. 코 풀고 싶으면 흥. 하고."
"필요 없어요. 무슨 애도 아니고."
하지만 내심 칙칙한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건네준 레이븐에게 감사해하며, 에리스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울다가 웃다가 하면 엉덩이에 털."
"1절만 하세요."
"무슨 말이야? 그건."
아무래도 공용어 자체는 서로 통하는 모양이었지만, 예전에 쓰였던 일부 관용어의 경우 200년이란 세월 속에서 묻힌 모양이었다. 지금 같은 '1절만 하라.'라는 관용어처럼.
"... 농담을 할 때 안 할 때 구별하란 소리예요."
"아. 미안. 좀 심했나?
"... 책임져줄 수 있어요? 저."
느닷없는 말에 레이븐은 부서진 도로를 힐끔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건 장담 못 하겠는데..."
원래라면 인간 문명의 고대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테크 연구소를 조사하고, 그곳에서 용사가 사용했던 고대 병기 같은 걸 의뢰주에게 건네주는 것이 그가 맡은 의뢰였다.
즉, 원래 계약했던 의뢰대로라면, 이 연구소가 그렇게 엄중히 지키고 있던 건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여자니, 이 여자를 의뢰주에게 건네주는 게 맞지만...
그는 힐끔 등 뒤의 데스 스토커의 부품을 슬쩍 바라보곤 어깨를 움츠렸다.
"뭐 됐나.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는 책임져 줄게. 관람료는 내야지."
"관람... 료?"
고개를 갸웃한 에리스는 순간 그가 던진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윽고 그가 성적인 농담을 던졌다는 걸 깨닫고 있는 힘껏 뺨에 싸대기를 날렸다.
"당신 같은 남자에게 책임을 져달라고 한 내가 바보지!"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소환사가 받는 데미지는 소환사가 소환해둔 서번트가 대신 받는다.
그 공식 때문에 아무리 싸대기를 때려도, 아파오는 건 에리스 자신의 손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그를 힐끔 눈알만을 굴려 말했다.
"... 그래도 뭐. 고마워요. 절 챙겨봤자 돌아오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딱히 그런 건 아니야. 여행 도중에 말동무가 생기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지. 레이븐은 외로운 직업이라 말이야. 시내 밖으로 나가야 해. 여기 안은 도로가 너무 망가져 있어서 못 돌아다니거든."
"네. 아. 그리고... 제 정체에 대해서 여쭤보셨죠? 반인반마인지. 어떤지."
"그랬지."
"저는... 그. 당신이 가진 소환기랑 비슷한 기관이 체내에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네요. 그러니까... 제 몸에는 영체가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몸임에도 마법을 쓸 수 있죠."
"서번트를 품은 인간이라. 흥미롭네. 그래서? 무슨 서번트를 품고 있지?"
"대천사 미카에리스. 그게 제가 품은 영체의 이름이에요. 들어보신 적, 있나요?"
"아니... 처음 듣는데. 상당히 레어도가 높은 서번트인 모양이네. 신령 계열인가?"
"네..."
"아. 맞다. 돌아다닐 때, 발 밑을 조심하면서 걷는 게 좋을 거야. 가끔 몇몇 정신 나간 로그들이 가끔 발목 지뢰를 깔아놓아서, 잘못 밟으면 발목 날아가거든."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것이 마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는 듯이 시내 여기저기에 지뢰가 깔려있다고 발언한 레이븐은 들어오기 전에 대부분의 로그들을 쓸어버렸음에도 조심조심하며 시내를 걸었다.
"로그? 그게 뭐죠?"
"도적이야. 아무리 200년 전이라고 해도 망할 좀도둑이나, 강도 새끼들은 있었을 거 아니야. 안 그래?"
200년 전에 강도야, 있긴 했지.
시내에 지뢰를 뿌려놓고 다니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저희, 어디로 가는 거죠?"
"트럭에 도착하면 고속도로를 타고 레이킨스로 갈 거야. 거기 의뢰인이 기다리고 있거든. 후딱 거기서 오늘 미친 기계 전갈에게서 뜯어낸 분해 장치를 팔아재낀 다음에, 레이븐즈 로지스틱스로 돌아가서 의뢰를 받으러 가거나, 아니면 레이킨스 근처에서 머물면서 의뢰를 받으면서 지내거나."
"정말 모험가처럼 생활하시네요."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떨지."
레이븐은 어깨를 으쓱하곤 발길을 서둘렀다.
"슬슬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니까. 빨리 트럭으로 가자. 날이 어두워지면 그 녀석들이 나오거든. 괜히 총알 낭비하긴 싫어."
"날이 어두워지면... 뭐가 나오나요?"
"날이 어두워지면. 여러 가지 것들이 튀어나오지. 방사능 처먹은 야생 동물. 방사능 좀비들. 그 외 방사능 뭐시기들이랑. 그리고... '섀도'."
"섀도?"
처음 들어보는 낯선 단어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떨어지는 해의 방향을 보고 레이븐은 발길을 서둘렀다.
"빨리 가자."
"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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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탯 : 매력(Charisma.)
현재 레이븐의 매력 : 9
* 모든 스탯의 평균치는 5, 일반적인 최대치는 10이다.
상인들과 거래, 협상.
설득과 농담.
서번트의 전반적인 능력치 및 충성도.
'매혹 계열' 스킬.
야생 영체에 서번트화 등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뛰어난 화술, 사람과 영체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에 영향을 주는 스탯. 매력이 높으면 상기 행동에 대한 추가 보정을 얻으며, 낮을 시 상기 행동에 대한 실패 확률이 올라가게 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격언은 황무지에서도 통하는 법. 사람과 영체의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외모, 화려한 화술은 때로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각종 사건사고를 헤쳐나갈 수 있게끔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