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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이후 용사 파티-3화 (4/49)

제 3화

용사의 요정은 200년의 낮잠에서 깨어난다. (3)

비상 전력을 가동해둔 덕에 내려갈 때는 픽시의 도움을 받아 내려갈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정상 가동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초조하게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승강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알몸의 여자가 뒤늦게 그를 눈물 맺힌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들어와."

승강기 안으로 여자를 잡아 끈 레이븐은 자신의 가방에서 그나마 걸칠 만한 옷가지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레이븐 본인이 입는 옷이었으니 당연히 사이즈는 맞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혹독한 황무지에서 헐벗은 알몸으로 돌아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평소 여자를 밝히는 레이븐이라고는 하나, 여자를 황무지에 알몸으로 벗겨놓고 같이 데리고 다닐 정도의 변태 성벽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자, 아무래도 체격 차이 때문에 소매는 길어서 삐져나왔고, 바지도 지나치게 길어 바닥에 늘어졌다.

하는 수 없이 위 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레이븐은 옷이 다소 아깝긴 했지만, 바지 밑단을 절단해 그녀의 다리 기장에 맞게끔 즉석에서 옷을 수선했다.

"됐지?"

"... 고맙습니다."

"너. 이름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지상으로 엘리베이터가 자신을 데려다주기를 기다렸던 레이븐은 잠깐 시간도 났겠다, 유리관 안에 갇혀있던 여자의 신상을 물었다.

"저... 저는. 에리스라고 해요."

"에리스... 알았어."

"당신은요?"

"내 이름은 사정 상 말할 수가 없어. 나는 레이븐이야."

"...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은데요."

자신의 이름은 사정 상 말할 수 없다고 해놓고서, '레이븐'이라는 칭호를 대다니. 이상한 눈빛으로 에리스가 노려보자, 레이븐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레이븐은 내 이름이 아니야."

"그럼... 가명인가요?"

"가명도 아니야. 음. 그러니까."

띵-동.

승강기가 1층에 도착했다는 신호음이 울리고, 문이 열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레이븐은 방금까지만 해도 보지 못 했던, 웬 연구실 로비 한가운데에 무지막지한 크기의 기계를 보고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전갈처럼 생긴 기계다. 여섯 개의 다리를 갖고 있고, 등 뒤에는 레이저를 뿜어대는 독침과도 같은 발사기가 존재한다. 양팔에 집게 대신 개틀링 건이 달려있고, 장갑에는 푸른 마력이 둘러져 있었다.

"꺄..."

갑자기 튀어나온 무시무시한 전투 기계를 보고 에리스가 비명을 지르기 직전, 레이븐은 재빨리 에리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비명을 막고, 동시에 승강기의 '닫기' 버튼을 난타했다.

탁탁탁탁탁!!!!

레이븐의 급한 심정을 대변하듯, 연속해서 버튼이 눌리고, 순간 저 무식한 기계의 시선이 그를 향하기 직전 승강기의 문이 닫혀주었다.

"헉.. 헉... 헉... 시발 저게 뭐야..."

"마계 전쟁 때 사용되었던 무기 중 하나예요."

에리스는 숨을 잠시 돌리고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짧게 설명해주었다.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현행 무기로 사용되었던 기억은 있어요. 이름이, 데스 스토커였나. 그랬었는데. 저 뒤에 있는 레이저 조사기엔 분해 마법이 서려 있어서. 맞으면..."

"저걸 맞으면 훅 간다는 건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아. 너 이 시설 사람이잖아. 저거 조작할 수 있겠어? 저게 우릴 공격하는 순간, 상당히 골치가 아파지는데."

"그건... 한 번 해볼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요. 아무래도 시설 안에 '악마'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절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출격된 거 같아요. 제가 한 번 전원을 꺼볼게요."

"그래."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에리스가 나오자 인기척을 감지한 '데스 스토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있으니까, 나선 거겠지. 긴장을 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 무지막지한 기계랑 싸우지 않게 될 수 있다면 이득이다.

"신원 파악 중.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

에리스의 얼굴을 확인한 데스 스토커는 붉은 카메라로 에리스를 좌우로 훑어보기 시작하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데이터베이스란 도서관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읽어내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는 에리스. 위대한 용사님의 여정을 돕는 가이드 요정, 페어리야. 지금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

"오류 : 데이터베이스가 파손됨. 대상에게서 '악마'의 기운이 감지. 대상을 '침입자'로 간주."

"에?"

"언제나 계획한 대로 안 돌아간단 말이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레이븐은 데스 스토커의 화기가 활성화되고, 그녀에게 조준이 맞춰지기 직전에 에리스에게 뛰어들어 그녀를 끌어안고 옆으로 도약했다.

"에리스, 위층으로 올라가 있어."

"다... 당신. 저걸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뭐 별 수 있어? 때려잡아야지."

등 뒤에서 M4A1를 꺼내든 레이븐은 데스 스토커를 노려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자, 네가 쫓던 반인반마가 여기 있어. 한 번 해보자고."

"대상에게서 악마 반응 확인. 배제 개시."

철컥, 철커덕.

양 팔에 달린 두 정의 개틀링 건이 일제히 자신을 겨누기 직전, 레이븐 서둘러 왼손의 소환기로 적을 분석했다.

녹색의 홀로그램 스크린이 그 앞에 표시되며, 전체적인 데스 스토커의 내부 구조와 상세 정보 및 제원, 그리고 약점이 동시에 표기되었다.

[타겟 : 데스 스토커. 마계 정복 전쟁 때 쓰였던 육족 보행 마법 병기. 배리어 스펠을 통해 상시 보호막을 두르고 있으므로,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음. 또한 개틀링 건을 통한 순간 화력 투사가 매우 강력함.

제안 : 마법 공격을 통한 배리어의 제거. 및 대장갑 공격을 이용한 무기 관제 시스템 혹은 메인 시스템의 선제 파괴.]

"알았어."

데스 스토커는 괴물의 포효 대신, 강철이 끼워맞춰지는 살벌한 철혈의 굉음과 함께 개틀링 건을 레이븐에 대고 조준했다. 하지만 움직이는 건, 레이븐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잭 오 랜턴!"

[악령형 잭 오 랜턴 : 소각.]

옆으로 도약하며 왼손을 휘두르자, 그에 맞춰 호박 머리를 한 가죽 코트의 남성이 홍련의 불꽃과 함께 나타나, 손바닥에서 맹렬한 불길을 쏘아내었다.

개틀링 건의 난사를 인간을 초월한 속도로 회피한 레이븐은 근처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현재 자신에게 남아있는 행동 수를 살펴보았다.

픽시에게 비행을 명령했을 때 한 번.

데미지를 받아 소환 해제된 픽시 대신, 잭 오 랜턴을 소환했을 때 한 번.

그리고 방금 스킬 : 소각으로 한 번.

6번의 행동 중, 3번을 썼으니 앞으로 남은 행동은 3번인가.

투다다다다당!!! 기이이잉... 투다다당!!!!

대구경의 살벌한 장갑관통탄은 레이븐이 몸을 숨긴 엄폐물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바로 옆에 총알 구멍이 숭숭 뚫리는 걸 확인한 그는 옆으로 한 바퀴 구르며, 허리춤에서 고대 문명 병기와 싸우기 위해서 미리 사뒀던 전기 펄스 수류탄을 꺼내 터뜨렸다.

파앙!!!

삐이이익-

사방에 푸른 전기가 확 튀는 것과 동시에, 순간 데스 스토커의 기능이 짧지만 정지되었다. 그 틈을 타, 레이븐은 재빨리 소환해둔 서번트를 교체했다.

"와라 스카아크!"

[소환 : 영령형 스카아크.]

스카아크를 소환하자마자, 소환기로 재빨리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역시 고대 문명의 기술이 깃든 괴물답게 전기 펄스 수류탄을 맞고도 녀석은 꿋꿋하게 관절을 삐걱거리며 일어났다.

[영령형 스카아크 : 게 불그.]

오른손에 든 창을 빙글 휘두르며, 정확하게 무기 관제를 담당하는 시스템에 창을 찔러 넣기 직전, 실드 배터리가 다시 재가동하면서 그녀의 창은 데스 스토커의 배리어에 막혀 불발되었다.

영체를 통한 공격이라고는 하나, 스카아크의 '게 불그' 스킬은 물리, 그중에서도 '관통' 속성을 띄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 공격을 완전 방어하는 배리어에 막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칫."

[데스 스토커 : 디스인테그레이트.]

소환기에서 울리는 경고 사인을 들은 레이븐은 데스 스토커가 등 뒤에 난 꼬리를 치켜올리는 걸 보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걸 직감했다.

분해 광선.

한 번 맞는 순간 시체고 뭐고, 형체도 없이 이 세상과 작별해 지옥 급행 열차를 탈 수 있는 최속의 수단이 지금 레이븐의 앞에서 번득였다.

그는 찰나의 순간,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지금 여기서 '행동'을 소비해도, '민첩'을 비교해봤을 때, 무조건 저쪽이 행동하는 게 빠르다. 방어에 뛰어난 서번트로 교체해 턴을 소비해도, 소환이 완료되기 전에 분해 광선이 이쪽을 덮치는 게 훨씬 빠르다.

그렇다면 전력으로 달려서 회피에 일단 전념하는 게 답인가.

어차피 '소환사'는 소환한 서번트의 스테이터스의 일부를 가져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일반인을 초월한 신체 능력을 가졌다. 회피에 전념할 경우, 운이 좋으면 분해 광선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해 광선을 못 피한다고 하더라도, 격통만 조금 느낄 뿐 죽지는 않는다. 어차피 데미지는 소환된 서번트인 스카아크가 대신 받을 테니.

해볼 만한 도박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회피를 준비했던 바로 그때, 윗층에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에리스 : 새벽의 화살.]

파앙! 파앙! 파앙!!

팔에 남색의 마법궁을 소환한 그녀는 용감하게 분해 광선이 자신에게 닥쳐올 수도 있었음에도 데스 스토커를 조준하고 마법의 화살을 날렸다.

첫 번째 한 발에 데스 스토커의 실드가 완전히 해제되어 벗겨졌고. 두 번째, 세 번째 발은 데스 스토어의 다리에 직격 했다.

콰직! 쿠웅!

다리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중심을 잃고 엎어지자, 분해 광선의 조준도 흐트러졌다. 레이븐이 서 있는 곳이 아닌, 완전히 엉뚱한 곳을 조준하기 시작하자, 레이븐은 에리스의 의도를 읽고 소환기의 ACS(조준 보조 시스템)를 가동했다.

[영령형 스카아크 : 게 불그.]

정확하게 메인 컴퓨터를 노린 스카아크의 물리 관통 공격. '장갑'을 무시하고 들어간 어느 대영웅의 스승이 날린 투창은 멋들어지게 데스 스토커의 대가리를 꿰뚫었다.

콰직. 쿠우웅!!!

메인 컴퓨터가 박살나자, 데스 스토커는 처리 능력을 완전히 읽어 그 자리에서 한 마리의 고철 덩이로 변해 자리에 쓰러졌다.

"후우."

남은 행동 수는 정확히 1. 만약에 이번 공격이 빗나갔다든가 했더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레이븐은 스카아크를 다시 소환기 안으로 불러들인 다음, 에리스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며 솔직하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야. 고맙다. 에리스. 덕분에 살았어."

계단으로 성큼성큼 내려온 에리스는 레이븐을 보고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당신. 정말로 막무가내네요. 저걸 상대로 싸울 생각을 하다니... 그건 그렇고. 당신, 소환기를 갖고 있다니. 그건 대체 어디서 구한 거예요? 용사를 비롯한 극소수의 인간만이 쓸 수 있게 허용된 건데."

"아 그래?"

그는 왼팔에 장착된 거대 PDA를 흔들어보이며 대답했다.

"주웠어."

"주... 주웠다고요? 아무 길바닥에나 돌아다니는 물건이 아니라고요. 그거."

"알고 있어. 아무튼..."

레이븐은 성큼성큼 거대 기계 전갈에게 다가가선 가방에서 기계 해체에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꺼내놓고선 두 팔을 걷었다.

그러더니 데스 스토커의 두 팔에 달린 개틀링 건부터 시작해, 뚝딱뚝딱 해체하기 시작한 그를 보고 에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기... 뭐하시는 거예요?"

"뭐하긴 뭐해. 비싸 보이는 걸 뜯는 중이지. 분해 광선 쏘는 장치였나? 저거 좀 좋아 보이는데."

"진심이에요? 이걸 뜯어내서 어디다가 팔게요."

"살 만한 사람은 엄청 많을 걸? 고대 문명의 과학 기술이라면 환장하는 새끼들이 많거든. 내가 왼팔에 찬 이 소환기처럼."

그제야 에리스는 자신이 유리관에 갇히고 난 뒤, 전쟁이 벌어지고 200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을 다시 깨닫곤 레이븐 옆에 서 물었다.

아무래도, 나쁜 사람... 처럼 보이진 않는다. 조금 입이 거칠긴 하지만, 얼굴도 조금 호감 가게 생겼고, 처음 보는 자신을 아무런 대가가 없음에도 챙겨줬으니.

사실 레이븐은 의뢰인에게 에리스를 데려갈 때, 뭔가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그녀를 지켜준 것뿐이었지만, 에리스가 그걸 알 리는 없었다.

"저기... 레이븐. 이라고 했죠? 레이븐이 뭐죠?"

"뭐. 200년 동안 꽁꽁 얼어있었으니까. 모를 만도 한가."

그는 레이븐은 기계 해체 작업을 하다가, 주머니에서 명함 비슷한 걸 꺼내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레이븐즈... 로지스틱스. 로지스틱스? 그렇다면..."

"그래. 기본적으로, 레이븐은 배달부야. 물론, 하는 일은 배달 이상이지만.

작게는 단순한 물건의 배송. 크게는 황무지 곳곳에 있는 로그, 방사능 좀비들. 뮤턴트를 비롯한 '해충'들의 처리. 때때로 영체 상태로 침입해오는 환수, 악령, 정령, 영령, 신령의 퇴치. 등등.

뭐어, 일종의 용병이지. 돈을 받고 일하는. 속된 말로 총알 딸배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레이븐의 배달은 총알만큼 빠르기도 하고. 직접 총알을 배달해주기도 해서."

"몬스터의 처치. 악마 사냥... 심부름 같은 잡일... 모험가군요!"

"모험가...?"

자신의 시대에서 딱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던 걸 기억해낸 에리스가 외치자, 레이븐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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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를 배회하는 자네를 위한 생존강령 : 영체.

영체란, 은연 중에 존재하는 지성체의 대중 의식 속에 존재하는 관념이 마력의 영향을 받아 에테리얼의 형태로 고정된 것을 말한다.

그 종류에 따라 환수, 악령, 정령, 영령, 신령 등으로 나뉘며, 소환기를 통해 이들을 제어할 수 있다. 소환기를 통해서 제어되는 영체는 '서번트'라고 칭하며, 이러한 서번트를 다루는 소환사를 서머너라고 한다.

서번트 정보 : 악령형 잭 오 랜턴.

힘 : 5 마력 : 7 민첩 : 7

내구 : 3 지능 : 4 매력 : 6

화염 속성, 어둠 속성에 내성.

질풍 속성에 취약.

플레이버 텍스트 : 망자들의 혼을 랜턴에 가두며, 주변에 재앙의 불꽃을 흩뿌리는 호박 머리의 망령. 망령들의 영혼을 장작 삼아 불타는 불꽃은 그 어떤 불꽃보다도 뜨겁다고 한다.

주요 기술 : 소각, 폭발의 룬, 화염 마스터리, 망령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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