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86화 (186/186)

쇄도의 장(1)

이형의 시체가 굴러다니는 언덕에서 빅터일행이 내려왔을 떄.

그들의 눈앞에는 여전히 잔불의 발악이 펼쳐지고 있었다.

"단장, 무사했군! ···아니, 자네 설마 등에 화살을 맞은 건가?"

"신경 쓸 것 없다. 살짝 스친 거니까. 그보다 상황은?"

"보다시피 엉망이야. 용 다음에는 용머리를 가진 놈들이라니···. 이 악몽은 대체 언제가 지나야 깰 수 있는 건가?"

화염에 주택가 절반이 날아갔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이 행방불명된 상태다.

다행이었으리라.

비극이 거기서 끝났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추정컨대 칼과 창을 든 리저드맨에게 살해당한 것은 그보다 많았기에.

당장 확인된 민간인의 시체만도 스무 명 남짓.

그들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용병은 최소 열이 넘었다.

타들어간 집들의 뼈대가 무너져 내린다.

가축을 위해 비축해둔 지푸라기 더미는 이웃한 건물까지 불꽃의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상처의 통증과 더불어, 많은 부하들을 잃은 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 봐둬라, 이 망할 새끼야. 이게 네놈이 저지른 짓거리다!"

당연히도, 니코의 증오는 그 원인이 된 책임자에게 향했다.

그는 목과 양손이 밧줄로 구속된 알데카의 뒤통수를 거머쥐었다.

그리곤 거칠게 지면에 처박는다.

새카맣게 숯덩이가 된 흙과 재가 아리따운 얼굴을 여지없이 망가뜨렸다.

"베른, 이 자를 구속하고 잘 감시해라."

"음? 누구야, 이 곱상한 자식은? 못 보던 얼굴인데 또 어디서 튀어나왔지?"

"놈이야말로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사방에서 비난의 눈초리를 받았지만, 알데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표정은 그저 수치와 굴욕으로 일그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 아니꼬운 얼굴은 뭐지? 달리 할 말이라도 있나?"

"별로···."

"불만이 많은가보군. 사죄할 생각은 없어보이는데."

"킥, 잘 맞추셨습니다. 정말 눈치가 빠르시군요."

"달리 변명도 하지 않을 셈인가?"

"뭘 말입니까? 저는 단지 분할 뿐인데."

"분하다고?"

"사냥꾼 코트를 입은 자들만 아니었다면, 좀 더 많이 죽일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이 새끼···."

"아직 모르겠습니까? 아까운 건 용인들이에요! 아아, 누님께서 내려주신 소중한 병력을 이토록 허무하게 잃다니··· 그에 비하면 인간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요, 암! 생산성없는 외지 마을이 뭐가 대수랍니까? 사람 같은 건 어차피 세상 여기저기에 남아 도는데 말이죠?!"

"정신을 못 차렸군."

"아뇨. 제 머리속은 언제나 맑습니다! 저기 있는 빨간 머리 여자가 허벅지에 잔뜩 칼집을 내준 덕분에 싫어도 눈이 번쩍 떠진다고요!"

충혈된 눈으로 떠올린 것을 그대로 내뱉는다.

알데카의 얼굴은 뭔가에 홀린 듯 달아올라 있었다.

리저드맨들의 주인, 또한 사건의 장본인이 일말의 반성이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아.

분노를 참지 못한 니코가 검을 뽑아들었다.

푹!

그는 그대로 칼날을 수직으로 세워서 옆으로 누운 청년의 뺨에다 찔러 넣었다.

"어디 계속 웃어보시지. 내가 도와주지. 아가리가 찢어지도록 멈추지 않도록 말이야."

이에 알데카가 비명으로 답한다.

청년은 입에 갈라지는 과정에서 혀까지 베였는지 버둥거리고 있었다.

"···당장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간단히 죽이진 않겠다. 네놈에겐 불운한 일이군.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사냥꾼은 물론, 나도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참수하진 않는다.

절묘한 솜씨로 생명에 지장이 없게 관통시켰다.

이마에 핏줄이 돋아날 만큼 열 받았다고 해도 니코는 역시 냉철했다.

그의 이성은 당장의 원한을 갚는 것보다 미래의 정보를 선택했다.

"베른, 나머지는··· 부탁한다."

"단장? 이봐, 정신차려!"

"생각보다 피를 좀··· 흘린 것 같군."

창백해진 얼굴로 니코가 베른의 가슴팍으로 쓰러진다.

사실 그는 적지 않게 무리하고 있었다.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고 해도, 여러 개의 화살이 박힌 채로 지열 없이 너무 움직인 탓이었다.

오히려 지금껏 버틴 게 용할 정도···.

반나절 사이 핼쑥해진 니코의 모습에 베른이 기가 막힌 듯 실소를 터뜨렸다.

"자네도 징 하구만.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앞이라 너무 날뛰었어."

"···씨그럽다."

"부상자는 입 다물고 쉬기나 해. 언제나처럼 뒤는 내게 맡기라고."

한편, 저 멀리 강가에서 물을 길어오는 무리가 보인다.

주민들은 물론, 무기와 갑옷마저 벗어던진 용병들까지 양동이를 짊어지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으, 아무래도 승리의 여운에 잠길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니엘이 빅터의 눈치를 살피며 읊조린다.

그녀는 이 재앙이 자신들의 탓인 것만 같았다.

비록 그럴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빅터와의 모험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단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기에···.

"저, 이거··· 우리 탓은 아니겠죠?"

"음"

"만약 우리가 이곳에 들리지만 않았다면···."

소녀는 내심 스승이 자신의 죄악감을 해소해줄 거라 기대했지만.

빅터는 주먹을 쥐며, 그저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잠시후···.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온 것은 대답이 아닌, 당장 해야 할 일에 대한 주문이었다.

"···니엘, 너는 사람들을 피난시켜라. 힘쓰는 일은 내가 하겠다."

"괜찮겠어요, 사부님?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하신데···."

"문제없다."

니엘의 걱정은 그를 막지 못했다.

전투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았음에도 빅터는 몸을 움직였다.

본래 말이나 황소가 끌 수레를 번쩍 들어올리며, 거구의 사냥꾼은 순수한 완력만으로 족히 사내 다섯 이상의 몫을 해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르테와 도리스는 각각 염려와 호기심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빅터 씨···."

"후후, 저 사람은 여전하다니까. 괜한 무리를 하시네. 훌륭한 의인의 표본이야."

"우리도 돕죠."

"응? 어쨰서?"

"인력이 부족해요. 가능하면 한 명이라도 더 구해야죠?"

"내 아버지, 대스승 알베르트의 가르침을 벌써 잊어버렸니? 사냥꾼은 세간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법이란다."

"저는 사냥꾼 이전에 의사니까."

"어머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 걸?"

"그렇다면 저를 좀 더 이해해주시는 게?"

"나는 왕진을 다닐 정도로 착하지도, 성실하지도 않단다. 아픈 사람이 찾아오면 또 모를까?"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데도 말인가요? 그건 서약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기특해라. 순진할 정도로 의사의 선서를 잘 따르는구나?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너는 지나치게 환자에 목말라 있을 뿐이야.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항상 귀찮은 일에 매번 끼어들지."

"···."

"사정을 모르는 외부인은 불구경이나 하고있는 게 더 났지 않을까?"

"아무리 언니라도 이런 분위기에선 느긋하게 쉴 수도 없을 텐데요."

"후후, 그건 맞는 말이야. 나도 그을린 송장더미에서 잠을 청하는 건 사양이거든."

"그러면 어서···!"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니?"

"네?"

"아아, 내 사랑스런 동생. 애처로운 나의 클라르테."

도리스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는 클라르테의 손목울 부여잡았다.

그리곤 속으로 뭔가를 세더니···.

"역시 마음이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구나. 불안하고 가녀린 고동이 느껴져. 빅터 씨 때문일까? 아니면 이 불타는 마을이 네 상처를 자극해서?"

클라르테가 노려보자 도리스가 싱긋 웃는다.

그녀 나름대로의 사소한 심술이었다.

"감미로운 소리야. 숨김없이 솔직한 울림이네. 변함없이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너를 옭아 메고 있어."

"놓아주세요, 언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억이 퇴색되지 않는 모양이야. 그렇기에 스스로에게 엄격함을 놓지 않을 수 있구나? 후후, 나는 너의 그런면을 아주 좋아한단다."

클라르테의 뭔가가 도리스 특유의 변덕을 자극했던 것일까?

그녀는 이 이상 잔말 않고 부상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사냥꾼들의 함류로 구출 작전은 조금이나마 단축되었다.

니엘은 부단히 움직이는 인파의 흐름에 휘둘리는 내네 새삼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가혹한 일이란 것을···.

마지막 불씨가 잡힌 것은 그로부터 약 두시간이 지난 뒤였다.

새벽.

헌옷 쪼가리를 이어붙인 것으로 추정되는 허름한 움막이 광장 여기저기에 생겨났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집단 야영지.

그래도 보금자리를 잃은 생존자들이 하룻밤 보내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후우, 이걸로 대충이나마 일단락된 것 같구만.'

베른히르트는 대략적인 인원파악이 마무리된 다음에서야 겨우 한 시름 돌릴 수 있었다.

'단장과 사냥꾼 양반들이 힘써준 덕분에 가볍게 이겼다··· 라고 말하기엔 너나 할 것 없이 잃은 게 너무 많아.'

상상이상으로 마을의 피해는 컸다.

민가에 노출된 화마가 열 채 이상의 집을 재로 만들었고, 화재현장에서 도망치지 못한 세 가족이 타죽었다.

개중에는 마을의 원로인 촌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빠져나올 사람들은 다 빠져나온 듯 했으나, 여전히 마을에는 음울함만 감돌았다.

무리는 아니었다.

저세상 사람이 된 이웃의 사정은 물론···.

한 해 동안 열심히 쌓아둔 식량창고가 날아갔단 사실이 한층 더 절망감을 배가 시켰기에.

이미 지킬 것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황···.

모두가 합의한 대로, 해가 뜨는 대로 용병단은 그대로 철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보시오, 부단장 씨."

누군가 그를 불러 세운다.

예순은 가벼이 넘긴 할머니였다.

베른하르트는 상대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고 살갑게 답했다.

"뭔가 불편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펠리시아 부인?"

"댁들의 배려 덕분에 큰 문제는 없지. 남들이랑 다르게 아직 절반이라도 내 집이 남아있으니 말이야."

"그거 다행이군요."

"하지만 죽은 미브린네 아이가 걱정일세. 이제 네 살 밖에 안 된 사내아이가 계속 울고 있다고."

"···이런, 하필 애엄마가 당했습니까?"

"괜찮다면 그 아이를 위해 먹거리를 좀 나눠주지 않겠나? 내 몫을 냈지만 아직 부족한것 같으이. 앞으로가 영 불안해서 말이야."

"죄송하지만 그건 좀 힘들겠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안 되겠나? 이틀 분량이라도···."

"이해해주십시오. 저희도 긴 여행을 떠나야 할 처지인지라."

"그렇구먼. 어쩔 수 없는 게로군."

"죄송합니다, 부인."

살찐 용병은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를 건냈다.

거절하는 게 여간 마음에 편치 않았는지,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슬슬 정이 들려고 했는데 이런 꼴이라니. 마음 같아선 이웃 마을에라도 들려서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용븡은 자원봉사자도, 그렇다고 구원자도 아니다.

더욱이 변방에서 동정은 때로 독이 된다.

소중한 것을 하룻밤사이 빼앗긴 이들에게 어중간한 위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매정한 소리일진 몰라도 다 같이 굶어죽는 것보다야 났지. 변방의 초목은 질기니까, 어떻게든 잘들 살아날 길을 찾아낼 테지.'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가능한 빨리 떨어지는 것이 나아.

그 편이 서로에게도 좋은 결정이라는 걸 베른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단호한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직후, 골목에서 튀어나온 작은 그림자가 노파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할매! 이거 육표야. 얼마 안 되지만 받아둬요."

"오오··· 고마우이. 꼭 복 받을게야, 참한 아가씨."

"헷··· 뭘, 이정도 가지고요."

니엘이었다.

소녀는 상대의 칭찬에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식량이 든 주머니를 건네다니, 베른은 심정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니엘의 결정을 탓하지 않아.

그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베른하르트는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가더니.

"꼬마 니엘.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안녕, 베른 아저씨."

"잠이 안 와?"

"···응, 그런 것도 있고. 안에서 기다리기 영 지루해서 잠깐 나와 봤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을 경험한 나머지 잠시나마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기에.

"하아··· 찝찝해 죽겠네."

"갑자기 웬 한숨이야?"

"들어봐, 베른 아저씨. 나 말이야. 간만에 목욕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들어온 건데··· 마을의 유일한 여관이 작살났다고 주인이 문전박대하지 뭐야? 기가 막혀. 괴물들 상대로 필사적으로 힘 쓴 나에게 무슨 원수처럼 쏘아보던데?"

"뭐, 이런 시기니 어쩔 수 없지."

"하여간 너무해. 내가 니코 형의 동생이라고 해도 하나도 안 통하더라니까."

"너··· 그런 시시콜콜한 일에 단장의 이름을 팍아먹으려 했던 거냐?"

"뭐, 어때? 받을 수 있는 콩고물은 다 받아야지. 눈치보고 점잖은 척 해봐야 손해만 봐. 내가 뭐 잃을 거 많은 귀족도 아니고."

"그거 웃자고 하는 소리야? 단장에게 이야기를 다 들은 거 아니었어?"

"아아아, 맞다. 사실 나 귀족이었지. 몸에서 나는 꾀죄죄한 냄새 때문에 잊고 있었네."

"하긴, 누가 그 몰골을 보고 고귀한 가문의 영애라고 생각하겠냐?"

"어허! 무례하도다! 이 하이데 가의 니엘의 앞에서, 어디서 감히 불경한 발언을 입에 올리는가!"

"오··· 흉내치고 본새는 썩 그럴듯한데?"

"헤헤, 지르고 나니까 좀 부끄럽당."

어울리지 않게 횡설수설.

베른은 니엘이 뭔가를 숨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애써 추궁하진 않았다.

가뜩이나 오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 소녀를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베른은 대화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 덩치 큰 사냥꾼 양반은 어디서 뭘 하고 있대?"

"빅터 사부는 왜?"

"감사 인사정도는 해야지"

"감사? 이 와중에 뜬금없이?"

"뜬금없긴?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기에 너무 늦은 거야. 다들 정신이 나가서 말 꺼낼 떄를 놓친 것뿐이지. 니엘, 네 사부는 말이다. 나의··· 아니, 지금 이 마을에서 숨 쉬고 있는 모두의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고마워? 은인? 정말로?"

소녀의 표정에 변화가 인다.

어째서인지, 니엘은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모두 베른 아저씨랑 같은 기분일까? 우릴 원망하는 게 아니라··· 다들 고맙게 여긴다고?"

"이크, 내가 무슨 말 실수라도 한 거냐?"

베른은 아차 싶었다.

최대한 민감한 이야기를 피하려 했던 것이 그만 지뢰를 밟고 말았기에.

하지만 그는 곧 어른의 여유를 되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엘이 신경 쓰는게 무엇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은근한 불안감 너머에 숨어있는 죄의식.

겉으로 드러나는 밝은 모습은 그것을 숨기기 위한 위장일 뿐이라는 걸···.

설마하니, 이 소녀는 마을에서 벌어진 일연의 모든 게 자신의 탓처럼 여기고 있었던게 아닐까?

결국 그녀도 아무리 강한 척을 해봐야 스무살도 되지 않은 아이였던 것이다.

"이제 알겠다. 비극에 대해서 누가 책망할까봐 지레 겁먹은 거로구만?"

"겁먹다니? 누, 누가?!"

"건방지게, 벌써부터 어른의 책임 같이 무거운 걸 짊어지려고?"

"···."

"멍청아, 누가 너와 네 사부에게 뭐라고 한다고 그래? 하긴, 누가 용을 단신으로 쓰러트린 용사에게 시비를 걸겠냐만··· 만에 하나라도 걱정할 건 없지. 혹여 은혜도 모르는 멍청한 자식들이 시비를 건다 해도, 우리 고블린즈는 모두 네 편이야. 누가 너나 그 덩치에게 뭐라고 한다면 내가 맨 먼저 있는 힘껏 후려패주지."

살집에 가려진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기세 등등하게 장담하는 베른.

살짝 험상궂으면서도 온화한 그 표정에 니엘은 그만 눈물 섞인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소녀에게, 베른은 좀 더 일찍 해줬어야할 말을 비로서 건넸다.

"그러니 어깨 좀 펴, 이 아가씨야. 궁상맞게 훌쩍거려봐야 하나도 안 통하니까."

"궁상이라니, 말이 심하시네!"

"그래. 바로 그거야. 차라리 버럭 화를 내라고. 왜 영웅 대접해주지 않냐면서 이를 가는게 보기 좋지."

"그럴···까?"

"넌 할 만큼 했어. 단장도 널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라고."

길고 긴 밤이 이어지는 사이···.

니엘은 베른의 입담 덕분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난받지 않게 되어서가 아니야.

적어도 한 명은 자신을 온전하게 인정해줬단 사실이 기뻤기에.

"···응, 그거 하나는 다행이네."

하지만, 소녀는 이내 또 다른 상념에 빠진다.

그것은 니엘이 빅터가 있던 방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들었던 문제의 한 마디 때문이었으니.

니엘은 기억해냈다.

소름끼치게 차가운 미소와 함께, 도리스란 이름을 가진 금발의 여의사가 빅터에게 속삭인 불길한 내용에 대해서···.

'당신, 이대로 가면 확실하게 죽어요.'

마치 사신이 내리는 선고 같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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