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85화 (185/186)

재림의 장(6)

인간의 표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시선처리.

미간의 떨림.

입가가 그리고 있는 곡선의 완만함 등···.

복잡한 온갖 감정을 담아낼 수 있게 안면 근육이 이뤄져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개체와의 소통을 위한 창구로 쓰이기 위한 진화의 결과물···.

보다 진심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성이었다.

그리고 지금, 빅터는 근래의 어떤 때보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가움과 난처함.

기쁨과 거북함.

피로감과 흥분.

분노와 애처로움이 동시에 공존한다.

빅터에게 있어 도리스와 클라르테의 등장은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으니···.

거구의 사냥꾼은 그만 한탄 섞인 물음까지 내뱉고 말았다.

"결국 이식까지 받고 말았나···."

가장 증오하는 원수와 닮은 얼굴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만에 만난 적발 여인에겐 눈에 띠는 변화가 있었다.

"네. 벌써 4년 전 일이죠."

닳아빠진 코트는 그와 얼추 비슷한 세월을 함께했으리라.

붉은 머리칼 사이에 회색빛이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오른쪽 눈에는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정안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클라르테는 완전한 사냥꾼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후후, 두 사람 다 애틋하기도 해라. 보는 내가 질투가 다 날 정도네. 하지만 당장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게 좋지 않을까요?"

또 한 번 덮쳐오는 화살비를 신묘한 기술로 막아내며 도리스가 제안한다.

"언니 말씀이 옳아요.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두 여인은 교대로 검은 방패를 전개했다.

도리스가 암막을 치우며 이어서 클라르테가 사각을 메꾼다.

그녀들의 빈틈없는 움직임에 다발사격은 의미를 잃었다.

"완전 끝내주네. 저 언니야들, 둘 다 엄청 세잖아?!"

기대하지도 않았던 아군의 등장에 니엘이 탄성을 질렀다.

소녀는 도리스와 클라르테의 현란한 움직임에 눈을 떼지 못했다.

"사부님도 참! 이런 든든한 지원이 올 줄 알았다면 미리 좀 말해주지 그랬어요? 괜히 쫄았잖아, 진짜!"

"···나도 확신하진 못했다."

정말이었다.

빅터조차 이 근방에 자기 외에 마녀 사냥꾼이 있을 리 없으리라 여겼기에.

그나마 짐작 가는 부분이라곤, 주기마다 위치를 보고하기 위해 보낸 지령 정도였다.

"마지막 신호를 남긴 게 이틀이나 지났을텐데, 용케 날 찾아냈군"

"후후, 그만한 마기의 폭발을 눈치 채지 못해서야 사냥꾼이라 할 수 없죠."

슬쩍 돌아보며 도리스가 여유롭게 답한다.

한눈을 팔아도 될 만큼 화살의 기세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방해꾼이 또···."

알데카가 사격 중지 신호를 보냈다.

이 이상 쏴바야 화살만 낭비란 걸 깨달은 눈치였다.

인상을 찌푸린 채, 언덕 위의 청년은 리저드맨들에게 다른 명령을 내렸다.

장창과 더불어 아래로 길고 뾰족한 방패를 든 열 댓 마리가 접근해온다.

수적으로 우위인 상황을 최대한 써먹을 셈이야.

그들은 인해전술로 압박해 빅터 일행을 몰아세우려 했다.

지극히 정석적이며 이치에 맞는 판단이었다.

그 전술은 분명 통했으리라.

어디까지나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말이다.

"어머, 육탄전으로 나오시게요? 그러면 저야 좋죠."

후후후···.

나지막하게 울리는 불길한 조소.

왼쪽에 드러난 도리스의 옅은 하늘색 눈동자가 빤짝였다.

파앗!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진을 앞세우고 몰래 뒤에서 장전하던 몇마리의 리저드맨이 돌연 선혈을 뿜으며 쓰러진 것이다.

어느새 도마뱀 마물들의 이마와 눈구멍에는 단도가 박혀있었다.

정황상 도리스가 날린 것이 틀림없었다.

"바보같이, 시선을 분산시키고 배후에서 저격할 생각이셨나요?"

윤기 흐르는 새치 섞인 금발과 펑퍼짐한 코트가 동시에 들썩인다.

그 안에는 아직도 여러 개의 날붙이가 남아 있었다.

"제 앞에서 그런 눈속임은 안 통한 답니다."

도리스가 두 팔을 펼친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엔 각각 네 개의 단검이 쥐여진 상태였다.

새빨간 입술에 아래로 휘어진 초승달같은 미소가 그려지자, 이어서 또 다른 희생자의 급소를 노리고 칼날이 파고든다.

마치 귀신의 솜씨.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투척이었다.

"허억!"

알데카는 경악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방금 날아든 단도가 소름끼치는 각도로 날아왔기에.

바로 앞에 리저드맨 하나가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목이 관통 당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청년이 두려워해야할 상대는 또 한명 남아 있었으니···.

"···머리를 제외하면 육체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어. 그렇다면 살아있는 상태로 조재한 거군요."

갑작스런 인기척에 알데카가 고개를 뒤로 향한다.

그곳에는 슬픈 눈빛으로 리저드맨의 사체를 살피는 빨간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뭐, 뭡니까? 당신은 또 언제 이곳까지···."

"인체기반의 마기 내장형 사역마라니. 이 정도의 완성도까지 이르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목숨을 희생시킨 거죠?"

클라르테는 오른손에 길고 가느다란 검을 쥐고 있었다.

그 이름은 에페 라피에르Espee Rapiere.

말 그대로 찌르는 검을 뜻하는 무기였다.

알데카는 잠깐 넋을 잃었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당장 공격 해오진 않아.

그녀는 단지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 시간을 끌기 위해, 청년은 뒷걸음질치며 나오는 대로 떠들었다.

"이거 웃기는군요. 방금 저한테 물은 겁니까? 하필 그딴 시시한 이야기를?"

"시시하다고요?"

"하, 하하!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저 용인을 만든 재료는 구제가 불가능한 쓰레기들이었다고요?"

클라르테의 시선이 변했다.

어리석게도, 알데카는 그게 자신의 언변이 통한 것이라 착각했다.

"어째 요변술妖變術에 작게나마 소양이 있으신 듯한데, 그럼 이게 얼마나 효율적인 지도 잘 아실 테죠? 노상골목에 굴러다니는 더러운 빈민 따위 민폐 아닙니까? 노예 같은 건 사라져도 상관없지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버러지들! 그렇다면 충실한 하인의육체로 새로이 가공하는 게 훨씬 도움이··· 케헥!"

그떄, 알데카는 말을 끝마치지도 못하고서 나자빠졌다.

코끝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은 아픔이 일렁여.

그러나 정작 손을 더듬어도 있어야할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청년의 코는 사라져있었다.

"더러운 입은 다무세요. 귀가 썩을 것 같으니까."

한때 소외된 약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의료전선에서 싸우던 여인이 걸어 나온다.

클라르테는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살기가 서려있었다.

"다, 당장 이 여자를 막아! 어서 이 몸을 보호하란 말이다!"

호들갑떠는 알데카의 지시에 합류한 리저드맨들이 대응한다.

마물의 창끝이 여지없이 클라르테의 몸을 노렸다.

그떄, 알데카는 보았다.

적발의 여인이 유연하고 세련된 동작으로 찌르기를 흘려보낸 모습을···.

화려하진 않지만 절도가 넘친다.

그것은 방어가 그대로 공격으로 이어지는 최속의 검술이었다.

파앗!

칼끝이 월광에 반사되어 섬광으로 변한다.

목을 베고, 뇌에 닿도록 찔러 넣는다.

클라르테는 눈 깜빡할 사이에 리저드맨 두마리를 쓰러트렸다.

의사의 지식 덕분이었을까?

그녀가 노린 부위는 하나같이 치명적인 급소였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당신 같은 자들은 지금껏 어디에 숨어 있다가···?"

적발의 사냥꾼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의 숨통을 끊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데카를 보호하던 고기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클라르테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온다.

그녀는 여전히 검을 겨누고 있었다.

"어둠에 속한 사역마들을 이끄는 주제에, 당신은 우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나요?"

우리.

클라르테의 언급에 알데카는 질려버린다.

주의해야할 상대는 거구의 남나뿐이 아니었단 말인가?

설마 사냥용 코트로 복장을 통일한 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초인이라고?

"모릅니다! 알 리가 있나요? 이해 못할 요술을 부리고, 사람 같지도 않은 작자들만 모인 수장한 조직이라니, 대체 그런 걸 누가 말해준다는 겁니까!"

"그러셨나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용서 할 수 없어"

푸욱!

클라르테의 자검이 허벅지에 박히자 알데카의 표정에서 유아가 사라졌다.

"···아흑?!"

고작 피부 한 겹.

근육 몇 줄기가 관통된 것만으로도 청년이 꼴사납게 땅을 구른다.

그 모습을 아랑곳 않고, 붉은 머리의 사냥꾼은 그 뒤를 추적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찌른다.

이번엔 반대쪽 정강이였다.

다음엔 발목과 무릎···.

여인은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때마다 알데카는 애절하게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그만해! 이제 제발 그만···!"

그는 이제 위기를 넘어 굴욕과 수치까지 느끼는 지경까지 왔다.

"누군가 도와줘! 아무나 좋으니까 나부터 구하란 말이야!"

살아남은 리저드맨을 필사적으로 찾지만, 주변에는 시체들뿐이었다.

잠깐사이 아군의 수가 눈에 띠게 줄었다.

전세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불리하게 기울어져있었다.

'쇠뇌 부대는 아까부터 뭘 하고 있는거야? 왜 한 발도 저들을 맞추지 못하냐고!'

안타깝게도 그 원인은 알데카 본인에게 있었다.

리저드맨들은 목숨을 잃는 것도 마다않는 충직한 부하였지만, 고차원적인 사고가 태생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지휘관이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지 않는 한 보통 인간보다 조금 더 강할 뿐인 짐승에 불과해.

그렇다면 처음부터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자들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악몽이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고작 다섯에게 이 대군이 패배할 수 있냔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잔혹한 법.

이 와중에도 어디선가 단도가 계속 날아온다.

도리스가 집요하게 전선을 흩뜨려놓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 배치시킨 방패병들은 빅터에게 접근하는 족족 머리가 갈라지고 있다.

우회해서 파고들어도 눈치가 빠른 니코가 응전한다.

부상당한 몸으로도 그의 검술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 옆에서 장검을 휘두르는 애꾸눈의 소녀도 보통은 아니야.

능숙하게 창을 막아내고 반격하는 모양새가 어른들 못지않았다.

"드디어 끝났군."

그런 싸움이 수 분 쯤 지난 시점에서, 니코는 자신이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주변이 휑해졌어.

몰려오는 적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 이걸로 마지막 놈이다."

콰직!

지금 막 최후의 리저드맨이 빅터에 의해 참수되었다.

"헤, 헤헤··· 니코 형, 봤어? 나 되게 열심히 싸운거."

"너 치곤 나쁘지 않았다."

"에이, 이왕 칭찬할 거면 좀 더 거하게 해달라고!"

땅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버둥거리는 니엘.

니코는 그런 여동생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실소했다.

그 만큼 유쾌할 정도의 대승리였기에.

반면, 압도적인 패배를 경험한 지휘관 쪽은 죽을 맛이었다.

"크아아악!"

퍼벅!

피로 물든 망토가 넘실거리며 날아가는 가운데, 청년의 몸이 굴러 떨어진다.

클라르테가 언덕 위에서 알데카를 인정사정없이 걷어찬 것이었다.

적발의 여인은 그 뒤를 쫓아 가볍게 착지했다.

"나머지 심문은 맏길게요, 도리스 언니."

무슨 조화였을까?

그녀의 발이 지면에 닿자마자 등 뒤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형상은 순식간에 도리스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그대로 클라르테를 끌어안았다.

"기특하기도 하지. 넌 정말 좋은 동생이야. 가장 맛있는 걸 내게 양보해주었구나?"

다정하면서도 어쩐지 모르게 끈적한 목소리.

도리스는 부담스러울 만큼 클라르테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분걸까? 평소엔 자비롭게 굴던 착한 아이가 어울리지 않게 내 흉내까지 다 내고?"

"···."

"혹시 빅터 씨를 신경 쓰는 거니? 그이에게 네가 이만큼 강하게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후후··· 나야 즐길 수만 있으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분홍빛으로 상기된 얼굴이 아래로 내려다본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와 같은 시선···.

그 눈길은 틀림없이 알데카의 고통을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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