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장(1)
1.
2주가 넘도록 뱃길은 평온하기만 했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이후로 바람의 세기가 안정화되었어.
한창 항해 중에도 선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잔잔한 파도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중합체와의 교전으로 수 톤짜리 닻을 잃어버린 것만 제외한다면 포르투나의 손상은 경미한 편이었다.
선주가 살짝 불만을 표하며 따져왔지만, 니엘의 기세 좋은 설득 앞에서 금방 흐지부지되었다.
‘무슨 헛소리야? 저 형씨들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쯤 바다 괴물에게 산채로 잡아먹혔을 텐데?’
과거 마녀 토벌전에서 눈을 잃은 경험이 있는 것치곤 굉장히 적극적인 변호였다.
니엘은 수년 만에 검을 마음껏 휘두를 기회를 얻은 것과 더불어, 어느덧 빅터 일행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알려지지 않은 바다의 마녀를 무찌른 지 보름이 다 지날 쯤, 니엘이 빅터에게 대뜸 무모한 요구를 해온 것은···.
“결심했어. 나도 데려가! 형씨들 같은 사냥꾼이 되고 싶어졌거든.”
고집불통, 다혈질에 날뛰길 좋아하는 성격.
거친 사내들 사이에서 자라온 탓에 니엘의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여장부의 것이었다.
점잖고 다소곳한 여인상을 원하는 시대의 흐름과는 반대로, 그녀는 철저한 여장부의 인생을 살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황당한 부탁에 빅터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마라, 니엘. 우리는 모험가나 탐험가 같은 게 아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 하지만 세계를 돌면서 괴물들을 처치하는 인생이란 게 말이야. 되게 멋지잖아?”
“자랑할 거리나 명예를 찾고 싶나? 그저 날뛰는 게 좋을 뿐이라면 차라리 용병단으로 돌아가라.”
‘그건 니코 형이 허락해주지 않으니까···.”
“사냥꾼이 되는 건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줄 것 같은가?”
“흥, 그거야 상관없지. 난 이제 어른이야. 내가 원하는 일을 선택할 권리가 있단 말씀이지.”
니엘은 멀찍이서 리리 리의 상대를 해주던 앙리를 가리키더니.
“나도 저 언니처럼 사냥꾼 복장이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아? 남장은 익숙하니까 코트만 입어도 썩 괜찮을 텐데. 내 입으로 말하는 게 좀 그렇지만, 보다시피 나는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갔거든.”
“천박하다. 우린 그런 식으로 눈에 띠면 곤란해.”
“에이, 그런 소리 말고. 눈동자가 하얗게 반짝이는 형씨들 보다 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탐나는가? 우리의 이 희멀건 눈깔이?”
“응, 사실 내가 노리는 것도 그거거든. 잃어버린 왼쪽 눈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면 뭐든 못하겠어?”
암안의 힘을 빌릴 것도 없이, 빅터는 단번에 니엘의 속셈을 알아챘다.
그녀는 자신이 용병단에서 버림받은 이유를 단순히 눈의 부상 때문이라고만 여기고 있었으니···.
다시 말해, 다시 온전한 상태가 되면 언제든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너는 모른다. 정안을 이식받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당연하게도 빅터는 거부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도박에, 마녀에게 달리 깊은 원한도 없는 외부인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어.
몸만 성장했을 뿐인 철없는 아가씨의 투정을 받아줄 정도로 사냥꾼의 사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니엘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었으니.
“날 너무 만만하게 여기지 말아줘, 형씨. 물론 배운 건 없고, 태생부터 똑똑하지도 않은 나이지만··· 그래도 그까짓 이유만으로 자존심 버리고 고개 숙이는 건 아니니까. 나도 일단 며칠 간 고민했거든?”
“그럼 뭔가? 달리 신념이라도 생겼나?”
“아니··· 그렇게 거창한 건 또 아닌데.”
부끄러운 표정으로 니엘은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곤 선미 쪽에다 슬쩍 시선을 옮기며, 이번엔 사격 연습에 한창인 아랑을 가리켰다.
“저 꼬맹이한테 자극을 받았다고 할까?”
니엘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마녀와의 싸움이 끝난 수 일 간, 자신이 아랑을 관찰해왔음을···.
처음에는 의지만 앞서는 어린애라고만 여겼다.
괴물 그 자체인 마녀를 진심으로 동정할 정도로 순진한 아이.
뭔가 사정이 있어서 사냥꾼이 되려는가보다 가볍게 넘겨왔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하루 이틀을 넘어서 나흘이 지나는 동안, 니엘은 어느새 소년에게서 찡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따로 지시가 없는데도 새벽부터 일어나 홀로 갑판 위에서 사격 훈련을 하고 있어.
배가 흔들리는 와중에 술병을 앞에 두고 몇 번씩이나 빈 엽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아닌가?
“엄청 놀랐어. 밥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계속 그러고 있더라니까? 질린다는 관념 자체가 아예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대충 열흘쯤 지나니까 여자애랑 투덕거리기 시작하던데, 알고 보니까 그것도 격투술 훈련이더라? 상대가 안 되는데도 자꾸 일어나는 모습이 참···.”
“아랑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다. 당장 자신을 갈고 닦는 것만 생각하는 기특한 녀석이지.”
“그 기분 알아. 예전에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가?”
“조금이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어. 니코 형이나 용병단 식구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했으니까. 그래서 시간만 나면 대검을 휘둘렀지. 이렇게 말이야.”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양손이 허공을 가른다.
그러나 어색함 없이 깔끔한 동작.
비록 아류이지만, 이는 긴 시간 동안 그녀의 몸에 베인 검격의 자세였다.
“모두에게 바보 취급당해도 계속했어. 요령이 생기기 전까진 매일 근육통에 시달리기도 했고··· 뭐, 지금에 와서는 다 헛수고가 되어버렸지만. 아, 혹시 그거 알아? 정작 전장에선 엽총이나 창처럼 멀리서 다루는 무기가 훨씬 좋다는 거? 내가 어릴 땐 대검이 가장 크고 강해보였는데, 실전에 좀처럼 휘두를 기회가 없더라니까? 죄다 갑옷이랑 방패로 무장해서 빗나가면 끝장이지···.”
“잡설이 길군.”
“아, 미안. 여하튼 결론만 말하면··· 나는 싸우고 싶다 그거야. 가능하면 세상에 이로운 방향으로!”
“상처 입는 게 무섭지도 않나?”
“흥, 눈깔이 하나 빠져도 이 모양이야. 이 성미는 평생 못 고치지. 용병 시절의 버릇이랄까?”
철이 들 무렵부터 전장에서 싸우는 혈육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온 소녀, 니엘에게 미래의 선택지는 달리 없었다.
그런 그녀가 전사의 삶을 동경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니엘,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대가를 받고 마녀와 싸우지 않는다. 어디에 정착하지도 못한 채, 외딴 장소에서 묘비도 없이 죽어갈 뿐이지. 그래도 괜찮나?”
“아아! 그거 나도 생각해 봤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있지, 내가 말이야! 실은 용병단에서 자금관리랑 가계부 작성도 도맡아했거든? 그 경험을 적극 살리는 거지!”
“···.”
“마물 퇴치를 의뢰받는 거야. 항구도시는 뒷골목에 소식통이 많으니까, 수상한 사건을 해결해준다고 살짝 소문만 내줘도 돈벌이가 쏠쏠할 할 거라고! 어때? 괜찮지 않아?”
“더는 못 들어주겠군.”
“아, 왜에에?! 댁들도 언제까지 상단에 빌붙어서 먹고 살 순 없잖아? 목숨걸고 싸운 만큼 대가를 받는 건 상식이야. 다 큰 어른들이 왜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
알기 쉽고 요령 좋은 장사치의 논리.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음직도 하지만, 욕망의 화신인 마녀와 맞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수도사처럼 살아가는 사냥꾼들에게 있어서···.
이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네 멋대로 해라.”
이쯤에서 빅터는 반쯤 상대를 설득하길 포기했다.
“앗, 그건 허락한다는 의미지?”
“뒤를 따라오는 건 자유다. 하지만 희망한다고 모든 이가 우리의 일원이 되는 건 아니니.”
“자격이 필요하시다?”
“어느 정도는.”
“흥, 그렇다면 낙승이겠네. 저 어설픈 멀대 형씨도 가능할 정도인데, 설마하니 앞길 창창한 내가 못할까봐?”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그런데 앞으로 형씨를 뭐라고 부르면 좋지? 응? 사부님인가? 빅터 사부?”
애써 리리 리의 말투를 흉내 내는 니엘.
다 큰 여자가 억지로 꾸며낸 코맹맹이 소리를 내자, 빅터의 입가에 곡선이 그려졌다.
“아! 지금 웃었지? 피식하고 뿜은 거지? 그럼 이 승부는 내가 이긴 거? 날 제자로 인정한 거라고 봐도 될까?”
“다 큰 처녀가 나잇값을 못하는 것만큼 우스운 꼴이 달리 있겠나?”
“예이,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아주 미안하게 됐수다.”
“내 제자가 되려면 그 상스러운 말투부터 고쳐야 할 거다. 자칫 리리 리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니까.”
“예의처럼 고리타분한 건 질색인데?”
“그럼 다른 곳에 가서 알아봐라.”
“다른 곳이 어디 있는데?”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빅터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는 선실 입구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로이드의 앞까지 걸어가더니.
“이건 다 네가 무게 없이 처신하고 다녀서 생긴 일이다.”
“엉? 그건 갑자기 뭔 소리냐? 내가 뭘?”
“니엘이 마녀 사냥꾼이 되고 싶다더군.”
“켁! 진짜로? 애꾸 아가씨가?”
“나는 모른다. 그녀는 네가 맡던가 해라.”
“너, 지금 귀찮다고 나한테 넘기는 거냐?”
“나는 리리 리와 아랑만 돌봐도 벅차다.”
“아니, 사양할래. 애들은 최소한 귀엽기라도 하지. 사냥꾼이 될 수 있는 소질은 둘째치더라도, 애초에 저 선머슴 같은 여자는 내 취향이 아니···.”
“···선머슴? 그거 날더러 그렇게 부르는 거? 응? 멀대 형씨?”
“우악!”
팟!
빅터의 등 뒤에 숨어 쫓아온 니엘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로이드와 눈을 맞추더니 얼굴을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튼 그렇게 된 모양이야. 앞으로 잘 부탁할게, 로이드 사부님?”
“누, 누누누누가 네 사부야, 대체 누가?!”
“얼라리? 멀대 형씨 쪽이 좋아? 그럼 계속 그렇게 불러줄까? 존경받지 못하는 선배처럼 대하면서?”
“···기왕이면 사부로 해주시지요. 그걸로 만족할 랍니다.”
“진즉 그럴 것이지!”
아무래도 로이드는 기가 센 연하의 여성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잘 어울리는군. 수준이 맞는 것 같아 다행이다.”
“빅터, 너 이 자식···.”
“이걸로 너도 조금은 가르치는 입장의 고충을 알 수 있겠지.”
얼빠진 대화를 뒤로한 채, 빅터의 시선은 배의 꼬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이동하는 표적에 반응하는 훈련 중인 아랑과, 앙리에게 몇 번이나 뒤집어지면서도 신이 나서 날뛰는 리리 리의 모습이 있었다.
‘스승이라···.’
빅터는 새삼스레 자신이 아이들을 이끄는 생활에 익숙해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예전에 딸을 키울 때의 같은 감각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달라.
엄밀히 말해··· 어른이 된 미래에 누릴 행복의 지혜를 알려주는 게 아닌, 눈앞에 닥친 싸움에서 살아남는 병법에 치우친 교육이었다.
그럼에도 빅터는 기원했다.
가능하면 저 아이들이 마녀를 살육하는 인생에서 벗어나, 보다 가치 있는 삶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이 모든 비극을 내 세대에서 끝낼 수 있길.’
이때, 빅터는 한 가지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이전부터 고민하던 궁리하던 것.
마르가 열어준 시공의 통로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구상한 거대한 흐름에 대해서···.
로이드나 앙리는 그의 무리를 결코 바라지 않았으나, 정작 빅터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만을 희생하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승리의 대가.
육망성을 물리치기 위해 바쳐야 할 최소한의 제물.
그 첫걸음에, 빅터는 스스로의 심장을 바칠 각오를 오래 전에 굳힌 상태였다.
2.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 후.
포르투나는 비로소 길고 길었던 대륙횡단을 마쳤다.
배를 고정시키는 강철의 갈고리를 잃어버렸기에, 정박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다른 어선의 도움의 도움을 받아, 인양의 형태로서 항구에 들어올 수 있었다.
수 분 뒤···.
포르투나가 항만에 도착하자, 수많은 행인들 사이로 선착장에 통일된 복장의 무리가 보였다.
일곱 명의 남녀가 행과 열을 맞춘 채 멀뚱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어.
그들은 모두가 사냥꾼 코트와 모자를 쓴 자들이었다.
“야, 빅터. 갸륵한 신입들이 우리를 환대해주러 나온 모양인데?”
과연, 그래서 다들 앳된 얼굴이었던가?
빅터는 어째 못마땅한 눈치였다.
“요란한 마중이군.”
“그래도 반기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섭섭하잖냐?”
“놀러온 게 아니다. 낯선 놈들에게 환영받아봐야 기분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오, 그래도 아는 사람도 있는데? 저기 보라고.”
가볍게 낄낄거리는 로이드, 반면 항구를 바라보던 빅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순간, 그가 선두에 선 아담한 몸집의 누군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키와 가느다란 몸매.
챙이 넓은 모자로도 전부 숨기지 못할 만큼 예리한 눈동자가 포르투나의 갑판을 주시한다.
언제든 검을 뽑아낼 수 있게 허리춤에 채워진 칼집은 예전에 빅터가 인상 깊게 봤던 동방의 장식품.
거기에 흑색과 은빛이 동시에 공존하는 윤기의 머리칼까지 더해지면···.
이제 연상되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
‘레이.’
빅터는 자기도 모르게 그 그리운 이름을 속으로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