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격의 장(3)
3.
정오가 되자 광장에 인파가 몰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중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리리 리가 먹을 것에 홀릴 만도 해.
다양하고 푸짐한 요리들과 함께, 흥겨운 곡조의 음악이 분위기를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월례행사는 아닌 듯 하다.
작은 마을치곤 꽤나 큰 규모.
수확 철 내내 준비해온 곡식과 기르던 가축을 모조리 잡아야만 마련할 수 있는 음식들이었다.
제물을 털어 화려하게 수놓은 지붕의 장식들도 하루 이틀 준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하루 사이 모든 걸 털어놓고 홀가분하게 없애버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기라도 한 것 마냥···.
사실 마을 주민들은 오래도록 어떤 행사에 대비하고 있었어.
바로 빅터와 로이드가 자기네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준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였다.
“아무래도, 그 무당 여인은 우리가 아침 사이 돌아올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켁? 설마 우리가 마을을 방문하기도 전부터?”
“그렇겠지.”
“모든 게 다 예지한 대로 흘러 간다라? 이거 뭔가 오싹한데···.”
눈에 비치는 마을의 풍경은 활기가 넘쳤지만, 로이드는 거림칙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 무당이 밝힌 사연에 따르면···.
마을의 해방이란 즉, 모든 주민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이게 다 마기가 만들어낸 비극이란 거지?”
“음.”
“참 기구한 운명도 다 있네. 마녀랑 직접적으로 관여되지 않아도 이런 비극이 있을 수 있다니···.”
마의 영향을 받아 수 세대에 걸쳐 이어받는 기억의 편린들.
원치 않는 이능력의 발현···.
자살을 해도, 다음 생에서 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는 어른이고 아이고 마찬가지.
평범한 삶을 바라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족쇄이자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바랐어.
그리고 이들의 소원을 이뤄준 것은 두 명의 사냥꾼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광장 한 켠에 자리 잡은 두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오. 귀인들이여, 그대들의 방문으로··· 우리들은 오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소.”
“경사로세. 수 백 년을 넘는 주박에서 겨우···.”
“모두 희나 님의 예지가 이뤄졌음이야.”
머지않아 호수 중앙에서 흘러나온 마기의 영향은 사라질 것이다.
실제로도 느껴지는 마기의 농도가 옅어지기 시작했어.
그리하면 마을 사람들은 서서히 기력을 잃어갈 것이다.
이윽고는 모두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벌이는 축제는 그들 스스로의 장례식이기도 했다.
“···난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군.”
“뭐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곧 죽을 자식들이··· 하나같이 좋다면서 실실 거리는 게 고깝기만 하다.”
“어쩔 수 없잖냐? 자기네들이 그걸 바라는 걸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어? 너도 알잖아, 이 이상은 우리가 좋고 싫고 할 문제가 아니란 걸.”
“망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단 격언은 다 엉터리였던 건가?”
분명 빅터는 마을의 사정을 이해했다.
그들이 다른 세계와 이어진 통로를 닫음으로서, 이 고을에 얽매인 영혼들에게 은혜로운 자비를 베풀었음을.
그러나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고난의 싸움이 결과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죽음으로 이어지다니···.
제아무리 안락사에 가까운 처치라 해도, 마냥 저항 없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뭐, 너무 그러진 마라. 입장에 따라선··· 불필요한 고통 없이 떠나는 게 구원일 수도 있겠지.”
“개소리.”
“이봐, 빅터. 모두가 너처럼 강한 건 아니야. 가끔은 약자의 기분도 좀 살피는 게 좋다고.”
로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빅터의 등짝에다 손바닥을 가볍게 휘둘렀다.
“웃어줘라, 영웅 형씨야. 다들 우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으니까. 괜히 인상 써봐야 떠나는 사람들한테 실례만 되잖아?”
“흠.”
“이미 상황은 우리 손을 떠났어. 너나 나는 최선을 다 했단 말이야. 나머진 하늘의 뜻 아니겠냐?”
“···운명이니, 정해진 미래니 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
“후, 그거라면 나도 동감이야. 멍청한 외래종 놈들에게 질리도록 듣던 소리니까.”
실언.
별 생각 없이 뱉어난 로이드의 말에 그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가 반응했다.
“멍청한 외래종이라 미안하게 됐네!”
“무, 물론 우리 아가씨는 예외지, 암!”
“싸잡아서 일반화하며 말해놓고 이제 와서?”
“오악!”
파직!
마르의 정전기 응징은 아직도 유효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마르.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가능한 질문의 요지를 정리해서 말해주면 좋겠는 걸.”
빅터는 사당을 모시는 순백의 무당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힘, 정말 예언이란 정말 실존하는 건가?”
“그건 놀랍네. 나도 상당히 흥미가 생기는 걸.”
“설명해줄 수 있겠나? 내 짐작이 맞다면, 이건 너희 외래종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 보이는데?”
“역시 너는 인간치곤 감이 너무 좋은 편이야. 빅터란 개체.”
이에 대해서, 마르는 한 가지 재미있는 가설을 내놓았다.
“이 군집에서 일어나는 개체들의 특이한 성질··· 너희가 이능력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공통점? 그게 뭐지?”
“우리 종족이 다루는 장치들의 효과가 배치된 것처럼 보여.”
“엑조틱의 기술이었나?”
“아마도··· 너희 둘이 들어온 입구를 통해서 장시간에 걸쳐 유출된 모양이야.”
짐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엑조틱의 통역이 작용한 영향.
드물게 물체를 투시하는 심안을 가진 아이가 나온 이유도 비슷한 이유였다.
마기가 자꾸만 고인 까닭도 한 점으로 빨아들이는 중력병기의 파장 때문···.
세대에 걸쳐 기억이 축적되는 현상은 사념을 잡아놓던 자광석의 효과로 설명이 가능하다.
예지가 가능한 것도 시간과 관련된 어떤 무언가가 있을지 몰랐다.
“그밖에도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을 테지. 그래도 대부분 짐작 가는 것들이야.”
수수께끼가 풀리려 하고 있었다.
마르의 실험장과 일그러진 공간의 폭포···.
올비우스가 각인한 좌표까지.
모두가 절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기이하게 얽히고 뒤섞인 작용이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일견 초자연적으로만 보이는 사태.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이 설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치에 불과했으니···.
“고맙다, 마르. 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앞으로도 쭉 이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별 말씀을. 이것도 우수한 종의 의무인걸.”
“너만 괜찮다면, 며칠 여유를 두고 가르침을 받고 싶은데.”
“으음··· 미안해, 빅터라는 개체. 그건 좀 힘들겠어.”
“왜지?”
마르는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인간의 뇌가 소비하는 열량이 터무니없단 말을 남긴 채···.
“나는 한동안 사고 활동을 중지해야 해. 이대로는 견딜 수 없거든. 체중의 2퍼센트 밖에 안 되는 단백질 덩어리 주제에···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의 4할을 쓰고 있어. 왜 이렇담? 이렇게 신진대사를 낭비하다니! 하여간 너희들 호모 사피엔스는 너무 하자가 많은 생물이야.”
아쉽지만, 그마저도 빅터에겐 마르의 불평이 썩 재미있게 들렸다.
엑조틱이 보는 인간의 관점은 실로 흥미로워.
그것은 마치 과거에 클라리스가 자주 들려주던 이야기를 연상케끔 했기 때문에.
단, 로이드의 입장은 조금 달랐으니···.
“쳇··· 마르 녀석, 언제나 인간이 어쩌고 지껄인단 말이지. 외래종이 그렇게 잘 났냐고!”
“상대가 잠 들자마자 뒷담인가?”
“시끄러, 자식아! 내가 내 눈깔에 불평도 못해?”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두 말하면 잔소리, 네가 내 입장이 되면 어떤 기분이겠냐고!”
“하나, 마르는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거다. 오늘만 해도 너는 딱히 별다른 노력도 없이 동방의 말을 터득 했잖나? 하루아침 사이에 리리 리와 소통 할 수 있을 정도로.”
“허? 그럼 어디 나랑 바꿔볼래?”
“그건 사양하지.”
“거 보라고! 너도 질색하잖아?!”
로이드가 못마땅해 할만 한도 해.
하기야, 지금까지의 정안은 몸의 주인에게 사사건건 개입한 적이 없으니···.
“하위종이니 어쩌니 해도 예전이 좋았어! 잠자코 있던 내 눈깔이 그립단 말이다. 앞으로 평생 이 녀석과 함께 지내야 한다니··· 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
마을 사람들에게 닥칠 죽음에 대해 담담히 받아들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야.
로이드는 과장스런 태도로 질색하고 있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라. 너는 이제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게 되었으니.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건 네 오랜 꿈이었잖나? 이건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이다.”
“아니, 임마!? 내가 특별해지고 싶단 건 이런 의미가 아니거든?!”
“사내놈이 사소한 걸로 징징거리지 마라. 자칫 리리 리가 널 보고 배울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술사 로이란 자가 부끄럽지도 않나?”
“맞아요! 부끄럽지도 않나요!”
“우앗! 깜짝이야!”
어느새 나타난 리리 리가 히죽 웃으며 옆에서 튀어나왔다.
한창 축제 중인 마을을 한 바퀴 돈 다음, 지금 막 사부의 곁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리리 리, 아랑은 어디에 두고 왜 너 혼자만 왔지?”
“걔요? 너무 굼뜨길래 버리고 왔어요!”
“···다시 데려 오거라.”
“에이, 제가 어린 애나 돌볼 나이냐고요!”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으스댄다.
제 딴엔 적당히 부풀어 올랐다고 몸매 자랑이라도 하는 것일까?
하나, 당연하게도···.
두 사람이 보기엔 그녀나 아랑이나 별 차이는 없었다.
“···아무튼. 부탁한다, 로이드.”
“부탁해요, 로이드!”
“야, 꼬마 아가씨··· 넌 왜 날 이름으로 막 부르는 거냐?”
“그치만 그쪽은 사부처럼 안 느껴지는 걸!”
빅터는 이마를 짚었다.
“···이걸 염려한 거다. 제발 모범을 좀 보여 다오.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는 내 선배의 입장에 놓인 사내이니.”
“체, 이럴 때만 편리하게 후배 타령이냐···.”
그러나 사정이 변했다.
이젠 로이드가 꺼내는 모든 경솔한 언변이 리리 리에게 전해질 것이기에.
하지만 빅터도 로이드의 체면이 마냥 깎기기 만을 바라진 않았다.
그는 리리 리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리리 리, 앞으론 너도 로이드에겐 나와 같은 수준의 예우를 갖추도록 하거라.”
“네?”
“더 이상 말이 안 통한다는 핑계는 용납하지 않겠다. 내 지시를 어기면 용돈 금지를 두 달로 연장할 테니···.”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로이드 사부!”
소녀가 단번에 경례와 함께 빠릿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실소를 뿜었다.
“어쩔시구,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이거보단 났겠다.”
“리리 리, 지금 로이드의 오른쪽 눈을 잘 봐둬라.”
“어? 그건 왜요, 사부?”
“저 모습이야말로, 용기 있는 자의 징표이니까.”
“야, 야. 듣는 사람 부끄럽게 시리 무슨···.”
“로이드. 나는 나름대로 너를 존경하고 있다. 그러니 너의 진가를 이 아이에게도 보여주려는 거야.”
리리 리는 빅터의 지시를 따라 로이드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맨 먼저 드러난 것은 영 미덥지 못한 인상의 얼굴···.
근엄 하다기 보단 친근해.
표정 자체는 서글서글하나, 살짝 처지고 찢어진 눈매가 묘하게 가벼운 생김새를 만들고 있었다.
리리 리는 의아했다.
어째서 자신의 스승은 이 뱀을 닮은 남자를 이렇게까지 고평가하는 것일까?
“자세히 보거라. 저 광체, 예사롭지 않지?”
“···어라, 정말이네? 사부의 눈동자보다 훨씬 반짝이고 있어요!”
“너 지금 순진한 아가씨를 이용해서 내 기를 살려줄 생각이라면···.”
“아니, 로이드. 지금 네 모습은 그만큼 범상치 않다.”
빅터에겐 놀릴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는 친구가 새로 손에 넣은 힘을 진심으로 축하할 셈이었다.
햇살이 비치는 와중에도 안광이 드러나.
녹내장과 구분이 가지 않던 탁하고 흐린 눈동자가 아니었다.
선명한 백색.
충만한 생명의 기운으로 넘치는 빛깔이었다.
“로이드, 그건 정안의 단계를 넘어섰다. 이미 휘안輝眼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
착각이었을까?
잠깐이었지만 로이드의 두 귀가 움찔거렸다.
참으로 알기 쉬운 반응이었다.
로이드는 턱을 괴더니.
“···휘안의 로이드라, 그거 어감이 나쁘지 않은데?”
“내가 지은 것 치곤 썩 멋드러진 이명이지.”
유치한 치켜세움이었지만, 겉멋을 중시하는 로이드에겐 먹혀들었다.
은근히 암안을 가진 빅터에게 대항심리를 불태우던 그였기에, 효과는 더욱 굉장했다.
“하, 그렇게까지 말해준다면 어쩔 수 없지. 참아줄게. 성가신 파트너가 달렸지만, 이것도 먼 미래에 널리 퍼질 대전설의 한 과정라면서야···.”
세삼스럽지만, 빅터는 속으로 눈에 얽힌 악연을 떠올렸다.
‘···인간의 시각기관은 비효율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고 했던가?’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눈에서 시작되었다.
스스로의 안구를 짓뭉개던 적발의 여인···.
그녀는 사람이 신의 육체를 본 따 만들었다는 주교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했었다.
맹금류나 두족류에 비하면, 사람은 너무도 조잡한 구조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바로 절친한 이가 남겨준 최후의 가르침···.
결코 유쾌하지 않은 악몽의 기억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부정할 수도 없다.
그 결함을 인정하기에, 빅터는 비로소 지금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이형의 눈을 이식받았다.
어둠과 맞서기 위해 육체를 단련했다.
모든 고난에 견뎌내기 위해 지혜와 지식과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승리.
가히 초월적 존재라 부를 수 있는 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물론 혼자만의 성과는 아니야.
로이드의 협력이 더해졌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이처럼 스스로가 모자란 만큼 그 단점을 매우기 위해 발악하는 존재···.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
그 때문에 더더욱 발전을 갈망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동물은 항상 배운다.
경험을 통해 나아간다.
설사 뭔가를 잃어버리더라도.
얼핏 후퇴하는 듯 보이는 일일지라도.
심지어 제자리만 빙빙 도는 의미 없는 헛수고조차 예외가 아니야.
수많은 기억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빅터는 믿고 싶었다.
그것은 이번 싸움도 마찬가지이리라고···.
그런데.
“···아니?!”
이변이 벌어진 것과 빅터가 몸을 일으킨 것은 동시였다.
그는 무방비한 리리 리의 몸을 감싸며 등을 보였다.
왜냐하면, 산등성이 너머에서 강렬한 선홍빛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쿠과아아아앙!
화산이 터진 것만 같은 거대한 굉음.
그것은 요마멸살대의 화포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천지가 다 울릴 정도의 폭발이었다.
수초 후···.
불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비탈길이 불탄다.
언덕에 있던 무당의 보금자리가 보이지 않아.
사당이 송두리째 날아가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잠깐의 휴식을 누릴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불만을 토로할 여유도 없이, 빅터는 곧장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 위에서 불길한 인기척이 느껴져, 그의 암안이 존재할 리 없는 사람의 형상을 포착했다.
순간, 빅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빨간··· 머리?’
마침 그녀를 떠올린 시기에 나타나다니?
이 무슨 사악한 조화란 말인가?
하지만 틀림없어.
공중에 부유한 채 뒤돌아선 여자가 보인다.
기다랗게 흘러내린 주홍색 머리칼···.
펑퍼짐한 회색 옷감의 로브까지.
“클라아아아아리스···!”
포효.
마을 사람들의 비명소리마저 뒤덮을 정도의 처절한 외침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 무시무시한 부름을 상대가 듣지 못했을 린 없었다.
“···흐응? 그거 혹시 날 부르는 거?”
앞머리를 쓸어내리며, 하늘에 선 여인이 아래쪽에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얼굴이 드러났다.
빅터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클라리스···.’
그의 확장된 동공에 실루엣이 비춰졌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져.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로 합쳐졌다.
하지만···.
‘···가 아니야.’
일치하지 않는다.
잘못 보았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표정이 가관이네? 혹시 날 자색 계집애랑 착각하기라도 했어?”
머리의 색깔만 비슷할 뿐···.
자세히 보니 곱슬이 진 형태에다, 얼굴도 처음 보는 생김새였다.
좀 더 날카롭고 사나운 눈빛.
그녀는 클라리스는 물론, 5년 전의 클라르테 보다도 어려보이는 외모의 소녀였던 것이다.
실망과 허탈감.
순식간에 감정이 가라앉은 나머지 빅터는 크게 동요했다.
그런 그가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옆에 선 로이드가 경악하며 목소리를 내준 덕분이었다.
“미, 미친··· 장난 치냐? 어째서 저게 바다 건너 동방에 있는 거냐고?”
“아는 마녀인가?”
“알다 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냐? 저 녀석은 최악이야! 돌아가신 빌헬미나 누님의 원수란 말이다!”
이어서 로이드는 읊조렸다.
눈앞의 상대의 정체에 대해···.
“육망성의 악명높은 미친 방화광··· 홍련紅蓮의 마녀가 바로 저 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