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격의 장(2)
2.
“···이야, 우리가 꼬맹이들에게 목숨을 구해지게 될 줄이야.”
“흠.”
28일만의 귀환.
혼잡한 환영식을 거친 지 어느덧 두 시진이 지났다.
동앗줄로 끌어올려져 폭포의 나락에서 빠져나오는 데 수 십분.
그리고 촌락까지 돌아오는 데 또 한 시간.
마을로 돌아오고 나서야 두 사람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팔자가 늘어지셨군요.”
“···아앙?”
저벅.
마을 입구의 아름드리나무에 등을 기댄 로이드에게 누군가가 다가온다.
시안이었다.
그녀는 휴식을 청하는 두 사람을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저와 나머지 아이들에게 달리 하실 말씀이 있을 텐데요?”
쌀쌀맞고 냉담한 태도.
그럼에도 당당히 감사인사를 듣고자 한다.
빅터는 소녀의 비꼼에 피식 웃더니.
“감사하지. 너희 덕분에 살았다.”
“그건 제가 바라는 대답이 아니군요.”
“그러면?”
“정중한 사과를 원합니다. 우리 부대의 능력을 무시하고 깔본 오만방자함에 대해서요.”
“인정한다. 너희는 쓸 만해. 과연 진융 전하가 믿고 맡길 만 한 인재들이다.”
“아직 우릴 내려다 볼 심산입니까!”
“천만에. 나는 칭찬하고 있는 거다.”
진심이었다.
빅터는 이미 상대에게 가진 편견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마멸살대가 유능하다는 사실을···.
그건 절벽에서의 격전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앳되어 보이는 소년소녀들은 시안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하늘에서 덮쳐오는 적들을 하나하나 쏴 맞추었다.
발아래가 불안정한데도 불구하고 총구가 향하는 방향이 흔들림이 없었어.
그 높은 명중률은 틀림없이 오래도록 이어졌을 훈련의 성과였으리라.
하물며 그들이 장비한 화포의 위력도 상상이상의 것···.
터져나가는 화약의 배합부터 그 탄환의 크기까지, 애초에 인간이 아닌 것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물처럼 보였다.
특히, 시안의 지휘체계는 절묘했어.
그녀는 남다른 병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최우선으로 노려야할 적의 선별 기준, 물러서야 할 때를 아는 전술···.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하고 적절한 판단이었다.
“너는 우수한 아이다. 지휘관의 자질이 엿보여.”
“그,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저에게 부대를 이끄는 중책이 일임된 만큼 ···.”
“책임감도 좋은 미덕이지. 너는 이끄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다.”
“읏.”
빅터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진중한 덕담을 이어가자, 반대로 시안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일어났다.
“···흥, 하찮아. 이제 와서 치켜세워봐야 제 실망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가?”
“댁들의 체면 따위 챙겨줄 생각은 버린 지 오래입니다. 기대도 하지 마시죠.”
“아쉽군. 난 너희에 대한 평가가 많이 좋아졌는데 말이지.”
“큿···.”
놀리는 것이 아니야.
덩치 큰 사냥꾼의 말에는 어쩐지 모를 강렬한 감정이 담겨있었기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자신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궁리했다.
좀 더 은인의 입장을 고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시안이 다른 핑계를 찾아냈다.
바로 후줄근한 로이드와 빅터의 복장이었다.
“우리가 탄 말들의 발목을 모조리 쳐낸 것치곤, 잠시 안 본 사이에 너덜너덜해졌네요. 왜 꼴이 그 모양이죠?”
상처투성이.
두 사람은 겉으로나 안으로나 엉망진창이었다.
로이드는 넝마가 된 옷가지만 제외하면 썩 멀쩡한 편이었으나···.
빅터의 경우, 오른팔은 분쇄 골절.
왼쪽 어깨의 삼각근과 상체의 대흉근이 찢겨졌어.
그밖에도 부러진 늑골이 일곱 개.
위에 구멍이 뚫리고, 대장의 일부가 뭉개졌다.
하나같이 안정이 강제되는 부상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의 결과물인지, 시안은 짐작조차 하지 못해.
그녀는 그저 떠오르는 대로 조롱거리를 찾아내려 했을 뿐이었다.
“하! 들개도 당신네들처럼 지저분하진 않을 겁니다.”
“야, 이 싸가지 없는 계집애···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실례, 사냥꾼 로이드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서방의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만 의도치 않게 오해 살 만한 발언을 하고 말았네요. 제 의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게 말실수였다고?”
“일말의 곡해 없이 설명 드리죠.”
시안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예우를 지키는 동방의 인사.
하지만 이어서 소녀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결코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잘난 척하던 것 치곤 별거 없잖아? 망할 사냥꾼 나으리들.”
“뭐라고?”
“아시겠나요? 저는 명백하게, 이 이상 설명이 무의할 정도로 당신네들을 비난하고 있는 거랍니다.”
가라앉고 점잖은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가시가 돋친 말투.
그녀는 로이드와 빅터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을 셈이었다.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깟 마물들에게 고전하는 주제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다느니 으스대는 게 말이죠.”
“야, 꼬마 아가씨. 쥐뿔도 모르면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마시지? 그간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꼴을 봤는지 알기나 해?”
“···입만 살았네요. 당신네들과 떨어진 지 고작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동안 무슨 일이 생겨봐야 얼마나 벌어 졌을라고요?”
“하, 하루?”
“그래요. 오히려 새 말을 구하느라 진땀을 뺀 이쪽이 훨씬 더 고생했을 겁니다.”
“빅터···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라냐?”
로이드가 급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나 얼떨떨한 것은 빅터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시안의 발언이 가진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시간의 흐름이 엇나가 있다?’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어.
머지않아 두 사람은 황당한 결론을 냈다.
“야, 설마···.”
“우리가 저 아래에서 보낸 수 십일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던 모양이군.”
“하, 이것 참··· 아직 우리가 더 놀랄 게 있는 건가?”
“···시간이란 개념의 깊은 본질을 알게되면, 너희 인간은 더욱 진저리치게 될 거야. 로이드란 개체.”
로이드의 읊조림을 질문이라 여긴 것일까?
한동안 침묵해있던 마르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빅터와 로이드가 짐작하는 것에 쐐기를 박았다.
“우리가 빠져나온 이 시대는 지정한 좌표에 고정되어 있어. 그러니 너희가 내 실험실에 방문한 이후로, 이 세계는 수 백 만 분의 1초도 지나지 않았던 거지.”
“마르, 그 말인 즉···.”
“맞아, 빅터란 개체. 이게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의 의미야.”
“음.”
“어렵게 생각하지 마. 우리 종족에겐 일상인 일이니까. ···물론, 이러고도 멀쩡히 살아있는 인간은 아마 너희가 처음일 테지만.”
“오호라! 그러면 우린 다른 곳에서 보낸 만큼, 수명을 온존한 거네? 완전 이득 아니냐?”
“그럴 리가 없잖아. 로이드란 개체.”
“으잉?”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네가 보낸 시간은 되돌려 받지 못해. 그건 모두에게 공평하지.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물리법칙이란 말이야.”
“아씨, 남들보다 한 달이나 나이를 더 먹었다고? 손해만 본 거잖아?”
“···슬슬 너희 호모 사피엔스들이 실득을 판단하는 기준이 혼란스러워지려 해.”
로이드가 절규한다.
빅터는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었지만, 어느 정도 그의 기분이 이해가 갔다.
기나긴 악몽을 꾼 것만 같은데, 현실 세계는 아무 변함이 없다니···.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자의 입장에선, 두 사람의 태도가 이해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또 저를 바보 취급하는 겁니까?”
찌릿.
당황과 짜증이 섞인 시선이 빅터와 로이드를 째려보고 있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영문 모를 소리만···.”
“그렇군. 시안이라고 했던가? 너에겐 생소하겠지만, 당장 로이드의 눈은 지금 별개의 존재와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거다.”
“눈··· 이라고요?”
“아, 거기서부턴 내가 소개하지! 야, 마르. 여기 꼬마 아가씨한테 인사해라. 네가 우리가 겪은 신박한 모험담을 들려줘야···.”
“소용없어, 로이드란 개체.”
“엉?”
“내 목소리는 너희 둘에게만 들리거든. 이 번역 장치는 어디까지나 하위종과 융합한 생물의 청각에만 영향을 미쳐. 가청주파수가 제한되지.”
“저 아이에게 따로 통역을 해줄 수 없다는 건가?”
“불가능해. 로이드의 시각기관에 의태한 이후로 나는 본연의 능력을 많이 잃었어.”
“···아니, 그럼 우리 모습은 이 여자애한테 혼잣말하는 걸로 밖에 안보인단 이야기냐?”
“응. 아마 간질을 앓고 있거나,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느껴지겠지?”
순간, 빅터의 어깨가 들썩여졌다.
마르가 딱히 농담할 의사가 없단 걸 알았지만 둘이 나누는 대화가 너무도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반면, 시안 쪽은 질겁했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당신··· 환청을 들을 정도로 미쳐있었을 줄이야.”
“오해하지 마, 이 아가씨야! 여기엔 다 이유가···.”
아니나 다를까.
시안의 눈초리는 이제 상대를 얕보기보다 꺼림칙한 태도로 돌변해있었다.
“됐습니다. 광인이랑 말을 섞어봐야 저만 손해죠.”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가 뚫린 입이라고···.”
“흥. 임무엔 따르겠지만, 앞으로 댁들에게 존경을 표할 일은 없을 테니 그렇게 알아두시길···.”
그녀는 등을 돌리더니, 주변을 에워싼 자신의 동료들에게 되돌아갔다.
오해를 풀기엔 너무 늦었어, 두 사람에겐 그간의 일을 일일이 설명해줄 여력이 없었다.
“괜찮다, 로이드. 저 애가 멋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지.”
“미쳤냐? 그럼 애송이들한테 얕보인다고!”
“뭐 어때? 상대가 고까워해서 나가떨어지면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아, 생각해보니 그건 그렇네. 그래도 좀 약 오르는데?”
“어차피 어린 애들 장난질이다. 비위맞추려 애 써봐야 우리만 손해지.”
빅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말해봐야 당장 시안의 못마땅한 감정을 해소할 방법은 없다.
그만큼 소녀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의 파동이 고집불통이었기에.
“후, 하기야 너한텐 따로 보듬어 줄 애들이 따로 있으니···.”
“으음?”
“저길 봐. 마침 오고 있네. 귀여운 진짜 제자님이···.”
“···사부! 빅터 사부!”
시안과는 다른 정다운 목소리.
서양풍의 사냥꾼 코트를 입은 작은 키의 소녀가 달려온다.
리리 리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뭐에요? 왜 벌써 오셨어요? 위험한 토벌이라고 저더러 대기하라고 하셔놓곤!”
“음, 그렇게 됐다.”
빅터는 따로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을 셈이었다.
영민한 시안조차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정신연령이 떨어지는 리리 리가 그 모든 걸 받아들일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
“피,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왕창···.”
“왕창? 뭘 말이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헤, 에헤헷.”
“···싱겁게 웃는 버릇은 고치라고 했을 텐데.”
“네에, 네에!”
“대답은 한 번만 해라.”
“넵.”
리리 리는 여전하다.
언제나처럼 철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빅터는 여전히 무방비한 그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자신이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헤어지기 전의 모습과 그대로였지만, 엇갈린 시간대를 보낸 빅터에겐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기 때문에.
그는 천천히 리리 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나마 온전한 왼손을 들어올렸다.
오랜 만에 제자의 머리를 스다듬어 주기 위해서였다.
하나···.
“···이 놈!”
“으앗!”
입가에 부스러기가 뻔히 보여, 빅터의 손은 소녀의 뺨을 꼬집었다.
큼지막한 전병 조각이 가득해, 군것질의 흔적이 명백했다.
빅터와 로이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곧장 시장터에서 간식거리에 집중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식탐을 부린 거냐?”
“조, 조금 밖에 못 먹었···.”
“반성의 기색이 없군. 당분간 용돈은 압수다.”
그 말에 리리 리가 순식간에 울상을 짓는다.
여기서 빅터는 확신했다.
역시 내버려둘 수 없어. 아직 리리 리에겐 엄격한 사부의 역할을 해 줄 보호자가 필요하단 걸···.
자신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이 아이는 길을 잃고 만다.
반드시 지켜줄 존재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그 누구도 아닌 빅터의 몫···.
이는 어떤 의미에서, 빅터가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앗, 그런데 빅터 사부! 그 팔··· 혹시 다치신 거예요?”
“별 것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또 저번처럼 호랑이를 맨손으로 처리하신 건 아니죠?”
“헛소리.”
“아, 그러면 표범?”
“···빅터, 너 대체 그 동안 뭘 하고 다녔던 거냐? 호, 호랑이랑 뭘 해?”
“있죠! 일전에 숲을 헤매는데, 황소만한 범이 나타난 거예요! 그때 사부가 성가시다면서 그 짐승의 목을 뒤에서 낚아챈 다음 우득 하고···.”
“멍청한 소리! 난 예나 지금이나 그런 적 없다. 꿈에서 본 걸 진짜처럼 떠들지 말아라, 리리 리!”
“꿈? 우응, 그런 거 치곤 엄청 실감났는데··· 하지만, 사부라면 실제로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하하, 아가씨가 말 한 번 잘했네! 저 덩치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지!”
“아니, 잠깐만. ···로이드!”
“응, 갑자기 왜?”
“너 방금··· 리리 리의 말을 알아 들은 거냐?”
“으잉?”
“그리고 리리 리, 너도 로이드가 하는 소릴 이해했지?”
“어, 얼레?”
리리 리와 로이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곤 겨우 자신들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챘다.
“멀대 아저씨, 언제 우리말을 배운 거죠?”
“너야 말로··· 갑자기 서방의 언어로 유창하게 떠들고 있는데?”
신기한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
뒤이어, 그 까닭을 마르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벨 기관이야.”
“바, 어쩌고··· 그게 뭔데?”
“번역 장치를 조금 손 봤어. 미약하게 남은 내 능력으로 네 언어중추를 자극해서 활성화했지.”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이제 너는 출신불문, 소통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어떤 문화권의 언어라도 할 수 있는 몸이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