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의 장(4)
4.
원치 않던 일행이 늘었다.
검은 옷의 무리가 마차 뒤를 따라오고 있어.
마부석의 아랑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빅터 사부, 저 사람들은?”
“···관군에서 붙여준 지원 병력이다.”
그런 것치곤 다들 어려 보이지 않나?
하지만 그건 아랑이 할 말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원은 자신일지도 몰라.
소년은 입을 닫고 눈치만 볼 뿐이었다.
“칫, 언제부터 우리가 탁아소가 됐냐고.”
사정을 들은 로이드는 연신 불평을 쏟아 냈다.
소년병이 드문 시대는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검과 총을 드는 것은 여전히 불만이야.
이렇게 될 거였다면 그가 전날 빅터와 나눈 대화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황태자란 놈도 제정신이 아니야. 우리가 순순히 나라에 따르지 않으니, 이번엔 사냥꾼의 모조품을 만들겠다고? 그것도 애들로만 이뤄진 군대? 완전히 돌았구만.”
하나, 로이드의 불평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마차 밖에서 그 목소리를 포착한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에.
“언변에 좀 더 신중해주시길. 이국의 사냥꾼이시여.”
“엇?”
놀랍게도 그것은 서양의 언어였다.
로이드가 놀라서 창밖을 보자, 싸늘한 시선과 눈이 마주친다.
단발에 눈썹까지 맞춰 자른 단정히 앞머리가 보여.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감정을 지운 소녀의 이름은 시안.
바로 요마멸살대의 리더였다.
“저 꼬맹이, 우리말을 할 줄··· 알아?”
“보시다시피. 저는 서방의 사냥꾼들과 접촉하기 위해 훈련받았습니다. 말은 물론, 문자도 읽을 수 있죠.”
“어··· 그거 참, 대단한데?”
“이 정도야 기본이죠.”
으스대듯 말하면서도 시안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아.
소녀는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전하에 대한 험담은 주의해주시면 좋겠군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여자아이치곤 굉장한 박력.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로이드는 살짝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례는 사과하지.”
이어서 빅터가 입을 열였다.
“하지만 로이드의 의견엔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 말마따나, 빅터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융이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는 태도 자체는 왕으로서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불가피해.
미래의 백성을 위해 현재의 백성을 소모하는 것과 마찬가지.
특히나 그 대상이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아이들이라니.
빅터가 그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너희는 돌아가라. 진융 전하에겐 내가 따로 전서를 올릴 테니.”
“칙명을 거역할 순 없습니다.”
“너도 우리와 동행하는 게 마음에 안 들지 않나?”
부정하지 않는다.
시안은 어째서인지 색목인인 빅터와 로이드를 고깝게 보고 있어.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본심이 드러날 정도였다.
거기다···.
“실은 전하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
“···.”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주군의 품으로 돌아가. 너희가 여태 한 단련을 헛되지 하지 마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허깨비와 싸우려하지 말고, 실존하는 전하를 지키란 말이다.”
하지만 시안은 고개를 돌린다.
고집을 부릴 셈.
아니, 시안은 처음부터 빅터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의 파동은 그저 맹목적인 충의뿐···.
“임무에 개인적인 감상은 불필요합니다.”
어째서 담담하게 말하는가?
보다 못한 로이드가 끼어들었다.
“···야, 빅터. 언제까지 이딴 궤변을 듣고 있을 거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너희가 마물이랑 싸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줄 알기나 해? 앙?”
“예. 모릅니다. 그렇기에 배워나갈 생각이죠.”
“허?”
“···전하께서 명하셨습니다. 당신들의 모든 것을 훔치라고. 그리고 그 기록을 남겨 2기단, 3기단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저와 제 동생들은 그를 위한 포석. 미래를 위한 양식입니다. 저희는 알아서 당신들을 보조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죽는다고, 이 애새끼야!”
“여의치 마시길. 오히려 과한 온정이 불편하거든요.”
여기서 빅터는 시안이란 아이를 파악했다.
가혹한 과거를 지닌 것을 본다면 리리 리나 아랑과 마찬가지.
하지만 본질이 다르다.
병사로 길러졌기에.
도구의 마음가짐이 주입되어 있다.
자아보다는 명령을 우선시 하는가?
상황에 따라선 자신의 목숨마저 내다버릴 정도로?
“···너희는 불합격이다.”
빅터는 모자를 눌러썼다.
역하게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네?”
“착각하지 마라. 우리는 병사가 아니라.”
순간, 빅터는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움켜쥐었다.
“···마녀 사냥꾼이다!”
마차 내부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아랑은 몰랐지만, 그것은 마차를 끌던 두 마리의 말에게 닿았다.
“앗?!”
히이이잉!
고삐를 당기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말들이 가속한다.
저지하기엔 기세가 너무 격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을 추월하며, 마차는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캬하! 그래야지, 빅터! 네가 언제 날뛸지 기대하고 있었다고!”
“역시 진즉 이랬어야 했나?”
“두 말하면 잔소리지, 짜샤!”
“꺄아! 뭐야, 뭐야, 뭐야! 겁나 빨라! 너무 신나요!”
“리리 리, 입부터 닫아라. 혀 깨문다.”
“빅터 사부?!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뒤늦게 이변을 눈치 챈 아랑에게, 이어서 빅터가 고함을 쳤다.
“당황하지 마라, 아랑. 너는 마차가 길을 이탈하지 않게 신경 써라.”
“네, 네!”
뭔지는 몰라도 그가 손을 쓴 모양이야.
아랑은 최대한 힘을 실어 그의 기대를 따르고자 했다.
“큭!? 잡아! 저들을 놓치지 마!”
갑작스런 상황.
급히 시안이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날 얕보다니···. 우리에게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고속 승마술까지 익힌 것인가?
순식간에 따라붙는다.
살짝 거리가 벌어졌어도 이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야.
애초에 바퀴가 달린 짐짝을 끄는 쪽보다, 사람 하나를 태운 말이 빠른 게 당연한 이치였기에.
하지만···.
“로이드, 네 차례다.”
“뭐야? 역시 알고 있었냐?”
“네 생각이야 뻔하지.”
“쳇, 기분 나쁜 자식···.”
빅터가 자신의 능력으로 마음을 읽은 것인가?
아니면 로이드의 재주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좋아.
로이드가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바로 지난 몇 년간의 성과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에게 쓸 기술은 아니지만!”
외침과 함께 로이드가 마차의 창밖으로 양손을 펼친다.
그는 이미 열 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였다.
파앗!
그 순간, 빅터는 보았다.
로이드가 손끝으로 흘려보낸 이븐 가지의 분말이 은사에 스며드는 것을.
“훌륭하군.”
“야야, 말 시키지 마! 이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그림자를 물질과 융화시키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야.
가루의 조절이 조금만 엇나가도, 물을 빨아드는 마른 천 조각처럼 심각한 삼투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얇고 가느다란 물체.
심지어 그것이 수 십, 수 백 가닥이라면?
“좋았어, 간다!”
이윽고 그림자를 머금은 실이 흩뿌려졌다.
“은 안개Silberne Nebel!”
그 이름과 같이.
마차가 지나간 길을 따라 번쩍이는 박무薄霧가 펼쳐졌다.
정안으로도 전부 간파하지 못할 정도의 예리한 입자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나누고 있어.
이는 로이드가 만들어낸 신묘한 작품임과 동시에, 거대한 덫이기도 했다.
“하하! 우리의 기술과 지식을 배우시겠다? 어디 이것도 한 번 따라 해봐라! 물론 할 수 있다면 말이야!”
“로이드, 좀 심하지 않나?”
“괜찮아. 강도는 적당히 조절했으니. 말도, 꼬마들도 무사할 거야.”
그렇게까지 미세한 조작이 가능한가?
그러나 빅터의 감탄은 곧 경악으로 변했다.
요마멸살대가 타고 있던 말들의 발목이 모조리 산산조각 났기에.
“으, 으아악!”
“꺄아악!”
대규모 낙마.
따라붙은 후미가 무너져 내리고, 비명소리가 울렸다.
“···아, 아마도?”
“너, 이자식···.”
바닥을 구르는 소년소녀들을 바라보며, 빅터는 혀를 찼다.
“그래도 봐라! 결과가 좋으니 다행이잖아?”
우연이라곤 하나 로이드의 의도대로 되었다.
훈련을 잘 받은 모양인지.
시안을 비롯한 모든 이가 낙법에 성공했기에.
거리가 멀어져, 쓰러진 요마멸살대의 모습은 곧 작은 점처럼 흐려졌다.
“아랑, 이제 속도를 줄여도 된다.”
“네!”
이미 이븐 가지의 가루는 회수한 지 오래.
말들에게 건 흥분의 암시도 이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에이, 벌써 끝이에요? 한참 재미있었는데?”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자, 리리 리가 아쉬운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 상황이 그저 격한 장난이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시안이 여태 서방의 언어로 말했기에 리리 리가 못 알아들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빅터 사부! 뭔진 몰라도 우리가 이긴 거죠? 그렇죠?”
“리리 누나, 이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소리니, 아랑! 보나마나 경주로 승부한 거잖아? 하여간, 너는 정말 눈치가 없다니까!”
“뭐? 내, 내가 이상한거야!?”
“아휴, 아랑··· 이 누나는 걱정이란다. 이 험한 세상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진짜로 눈치가 없는 게 어느 쪽인지···.
마냥 신이 난 리리 리의 모습에 빅터는 말문을 잃었다.
“그보다 빅터 사부! 아까 했던 거 한 번 더 하죠! 그 기세라면 목적지까지 금방 도착할 텐데!”
“아서라, 리리 리. 말들이 불쌍하지도 않나?”
“그치만 재미있는 걸!”
“···.”
지나치게 천진난만해.
이쯤 되면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던 시안의 총명함과 영민한 면이 비교된다.
빅터는 순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혹여 자신이 리리 리의 교육을 잘못한 게 아닐까하고.
“뭐, 어떠냐? 활기차고 좋기만 한데. 어린애들은 이 정도로 떠들썩한 게 딱이야.”
고충을 알았는지, 로이드가 빅터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무렴. 귀염성 없는 건방진 꼬맹이들 보다는 살짝 모자란 아가씨가 났지.”
리리 리를 묘하게 정박아 취급하는 것 같은 발언이었지만, 로이드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이다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도 너무 걱정하진 마라. 애들은 다 이렇게 크는 거라고. 아니, 오히려 기억을 잃은 걸 감안하면 요 아가씨는 영리한 편이지 않나?”
“···그런가?”
“날 믿어. 예전에 만난 시골 처녀 중에 더 왈가닥인 여자도 본 적이 있으니까. 그에 비하면 네 제자는 얌전한 편에 속한다고.”
“흠.”
“너, 임마··· 완전 딸의 장래를 생각하는 애 아빠의 표정이구만.”
안 어울린다며 질색하면서도, 로이드는 유쾌하게 좌석에 등을 기댔다.
“후, 그건 그렇다 치고···. 귀찮은 것들을 때놓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좀 전엔 아이들이 다쳤을까 걱정하지 않았나?”
“웃기지 마. 난 그런 적 없어.”
하지만 빅터는 알았다.
그 말에 담긴 진의를.
어린 딸을 잃었기에 아이들의 죽음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빅터처럼···.
로이드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는 걸.
어떤 의미에서, 로이드는 빅터 이상으로 소년병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였기에.
사실 그의 경박함과 가벼움은 어떤 감정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에 불과해.
그 속에는 좀 더 진중한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죄의식.
혹은 그에 기반한 강박관념.
너무도 견고한 마음의 벽이야.
그것은 심지어 빅터의 능력으로도 파고들지 못할 정도였다.
“야, 징그럽게 뭘 그렇게 그윽하게 봐? 아까 선보인 내 기술에 반하기라도 한 거냐?”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싱겁기는. ···뭐, 이제 당분간 조용할 거 같으니 나는 눈 좀 붙여야겠어. 사실 어제 마신 술이 좀 덜 깬 거 같거든.”
히죽.
얼버무리려는 로이드의 태도에, 빅터는 모른 척 속아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어.
그러나 애써 심문까지 할 필요는 없을 터.
분명, 언젠가 로이드는 스스로의 입으로 모든 걸 털어 놓으리라.
빅터는 그렇게 자신의 전우를 믿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