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종의 장(4)
5.
한편, 소년은 소녀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리리 누나, 이제 그만 좀···.”
“아씨, 넌 조용히 하고 있어!”
“하지만···.”
“왜 하필 가장 중요한 순간에 훼방을 놓는 거니?!”
일방적인 윽박···.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발악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연상의 누나가 칭얼거리는 동생을 꾸충하는 거라 여겼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든 걸 지켜봐온 아랑은 확신한다.
리리 리가 재정신이 아니라고.
‘눈이 맛이 갔어. 완전히 미쳤···.’
그도 그럴 것이.
리리 리는 지금 위험한 도박에 손을 댔다.
그것은 과장도, 비유도 아니야.
실제로 그녀는 현재 시장터의 야바위판에 돈을 걸고 있었다.
지하에 마련된 수상한 폐쇄 공간.
쉰 명이 넘어가는 어른들로 북적이는 열기의 전장···.
그곳에서 리리 리는 무모한 승부욕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분해, 그래도 다음은··· 이번만큼은 틀림없어!”
“···.”
“촉이 와! 분명히 여기 들어가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러나 전혀 신뢰가 않간다.
리리 리는 조금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기에.
‘이것도 벌써 열두 번째···.’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는가?
아랑의 탓은 아니야.
그는 시종일관 말리려 했다.
그럼 빅터가 건네준 용돈이 너무 적었던 것인가?
아니, 은화 세 닢은 노련한 장정이 이틀은 부리나케 일해야 벌 수 있는 액수다.
어린애 둘이 몇 끼니를 때우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다.
결국 리리 리의 자업자득.
모든 원인은 경솔한 소녀의 호기심에 있었다.
아랑이 기억하기에, 처음엔 분명 건전한 관광이었다.
리리 리도 은화를 전부 동전으로 바꾸어, 도시의 노점을 한 바퀴 돌 계획이었다.
눈여겨 본 길거리 음식들에 점수를 매길 셈으로···.
제 딴엔 순서까지 정해가며 깊게 궁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소년 소녀는 어느새 이곳에 당도해있었다.
‘돌이켜보면 옷가게에 들어간 것부터가 문제였어.’
처음에는 장난.
아랑의 차림이 너무 너저분한 것을, 리리 리 무신경하게 놀려버린 게 계기가 되었다.
분명 옷감이 다 닳았어.
넝마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하게 남은 고향의 흔적이기에···.
자연스레 소년이 울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랑은 자기도 좋아서 거지꼴을 하는 게 아니라며 성을 냈다.
뒤늦게 리리 리가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챈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허나 사죄의 의미로 새 옷을 사주겠다고 나선 건 엄연한 실수였다.
비극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선의에서 출발된다고 했던가?
‘사죄의 의미로 자기가 쏜다면서 괜한 객기만··· 결국 예산을 초과했지.’
아랑이 보기에, 때깔만 고운 서방풍의 연미복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리리 리는 자기 옆에 있을 사람이 추레한 옷차림인 게 용납이 되지 않는다며···.
기어이 그것을 사고 말 것이라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결론이, 손쉽게 돈을 불리겠다는 욕망의 종착지.
즉, 놀음이었다.
“누나, 이제 충분하잖아? 아무래도 이건 아냐. 난 적당히 망토면 만족해. 잃은 돈이 아까운 거면 차라리 내 몫을 줄 테니까, 이쯤하고 나가자. 응?”
“징징 거리지 말랬지? 그리고 네 용돈같은 건 이미···.”
“응?”
그러면서 어떤 주머니를 꺼내어 누군가에게 건넨다.
그것을 받아 든 인물은 이 도박장의 책임자이자, 야바위꾼을 맡는 중년 사내였다.
아랑은 그제야 리리 리가 건 판돈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니, 어느 틈에?!”
“웃겨! 사내놈이 그렇게 새가슴이면 커서 어떻게 할래? 쫄지 마!”
“···이 도둑!”
“잠깐 빌린 거야. 째째하게 굴지 말아주렴. 우린 운명 공동체잖아?”
“언제부터 그랬는데?!”
“시끄러! 이건 자존심 문제야!”
틀린 말은 아니야.
지극히 리리 리의 개인적인 자존심이기도 했다.
“방해할거면 너 혼자 돌아가! 하여간··· 이게 다 누굴 위해서 하는 짓인데!”
“계속 지기만 하면서···.”
“벌써 사부한테 받은 돈의 7할 넘게 써버렸단 말이야!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소년은 기억한다.
소녀가 일을 벌이기 전에 자신만만하게 내뱉었던 것을.
‘잘 보렴, 아랑! 이 누님이 모든 속임수를 간파하는 걸 보여줄 테니까! 이 사냥꾼의 눈을 믿어!’
물론 빅터와 달리 리리 리는 이식을 받지 않았다.
몽마의 시선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렇기에 눈의 구조 자체는 평범한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
단, 그녀에겐 특별한 힘이 있어.
어떤 특수한 태생 탓에···.
리리 리는 마기를 느끼며,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리 누나가 뭔가 대단하다는 건 알겠지만, 그게 과연 여기에서도 통할까?’
야바위의 방식은 간단하다.
탁상 위에 올려 진 납작한 그릇 세 개로 이뤄지는 돈 따먹기.
그릇 밑에다 조약돌을 넣고 섞는 것만으로 준비는 끝이 나.
그러면 3분의 1 확률로 찍기만 하면 된다.
원채 단순하기에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즐길 수 있는 놀이.
하지만 단순한 만큼 속이는 수법도 가지각색.
어리석은 리리 리는 그 교묘한 장난질에 넘어가고 말았다.
“좋아! 파악했어! 집중한 내 눈은 절대로 못 속여!”
소녀는 아직도 자신을 과신한다.
처음엔 아랑도 리리 리가 싸울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를 응원했다.
초인적인 동체시력.
야성의 감각을 총 동원하면, 어줍잖은 속임수쯤 잡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결과···.
“···중앙에! 10전!”
“오! 꼬마 아가씨, 쌔게 나오는데? 그런데 정말 여기로 괜찮은가? 아까부터 잃고만 있는데 말이야.”
“괘, 괜한 참견이시네!”
“킥킥, 지금이라면 다시 한 번 고를 기회를 줄 수 있는데?”
“흥, 질까봐 내빼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 난 이걸로 여태 잃은 것까지 전부 본전 찾아서 돌아갈 거니까!”
하지만 지금껏 실패한 게 분한 나머지, 주먹쥔 손마저 부들부들 떠는 소녀였다.
콧수염을 가진 중년 야바위꾼은 그런 리리 리가 어지간히도 우스운 지.
“옳거니! 그럼 후회해도 모른다?”
“시끄러워요. 두 말은 필요 없으니, 얼른 열기나 해요!”
“오냐! 자···.”
남자가 들어 올린 그릇 아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연하게도 그 밑은 비어 있었다.
“땡이올시다.”
“···기야.”
“엉? 뭐라?”
“사기야아아아! 이거 완전 사기라고!”
“우왓!”
리리 리가 야바위꾼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누, 누나?!”
“내가 못 본 사이에 바꿔치기 한 거지?! 그거 내가 고른 거 아니잖아아!”
“이, 이 꼬마가 미쳤나?! 다들 이것 좀 떼어내!”
광란.
소녀가 날뛰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어른들이 달려들었지만, 소녀는 재빠르게 야바위꾼이 쥔 그릇을 억지로 빼앗아 들 수 있었다.
이어서 리리 리는 그걸 보란 듯이 들어올렸다.
“다들 이것 봐! 역시 속임수!”
하지만 그 손아귀에는 선명한 글씨로 ‘二’라 쓰여 있다.
본래 중간에 있었던 그릇.
리리 리가 지목한 그대로였다.
“후, 이제 알았지? 그냥 아가씨 운이 엄청 나빴던 거라고!”
“우, 으···.”
한차례의 난동이 멈추자, 구경꾼들은 앞뒤를 다투며 두 사람을 밀어냈다.
모두가 소녀가 날린 판돈을 따내기 위해, 다음 차례에 끼어들기로 한 것이었다.
“흑···.”
그리고 순식간에 울상.
리리 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랑을 쳐다보았다.
“···미안.”
약속을 못 지켜서.
···라며 처량한 꼴로 리리 리는 덧붙였다.
“그러게 진즉 그만두랬잖아, 누나.”
“응···.”
소녀는 울었다.
시시한 일에 돈을 낭비한 것.
더욱이 한심하게도 패배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울분이었다.
“하아, 이 사실을 사부님이 아시게 된다면 엄청 큰일 나겠지?”
“바, 바보야! 그런 당연한 소릴···.”
“바보? 누나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입장이야?”
뭔가 싸한 기분.
아랑은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쭉 싸늘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둔한 리리 리였지만, 당장 자신의 잘못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나까지 빈털터리로 만들어가면서 아직 당당하네.”
“···잘못했어.”
그러나 리리 리의 폭주를 끝까지 말리지 못한 자신의 탓도 있다.
아랑은 빅터가 한 부탁을 끝내 지키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미 상황이 끝난 걸, 뒤늦게 따져봐야 의미도 없을 터.
“비밀로 해줄까?”
“으, 응?”
“솔직함은 사람의 미덕이잖아? 누나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마, 말하면 안 돼!”
“역시 그렇지?”
“응응!”
“하지만 맨 입으론 좀···.”
아랑은 천연덕스레 미소 지었다.
진지한 소년으로선 드물게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었다.
그런 모습이 의외야.
리리 리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비, 비겁하게 조건을 걸 셈이야?”
“그럼. 우리 누나가 누누이 말했거든. 손해 볼 일이 생기면, 최소한 뭐라도 하나 얻어내라고.”
“씨이···.”
“그러니 리리 누나도 이건 비밀로 해주라.”
“뭐어?”
슬쩍.
아랑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리리 리에게 자신의 상의 아래를 가볍게 들추어 보였다.
거기에는 분명, 리리 리가 야바위꾼에게 넘겼던 주머니가 감추어져 있었다.
좀 전의 소란을 틈타 빼돌린 모양이었다.
“너, 너어?!”
“쉿!”
다행히 사람들이 다음 호구가 당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어.
아랑은 그 사이, 서둘러 리리 리의 손을 잡아 바깥으로 이끌었다.
거의 전력질주.
앙증맞은 도둑들은 괜히 자신들의 행동에 지레 겁먹고는, 지하 도박장에서 벗어나는 동안까지 필사적으로 뜀박질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겨우 인적이 드문 골목에 들어서고 나서야···.
“헥, 헤엑··· 아랑, 너···.”
“후우, 후··· 왜, 리리 누나?”
“은근··· 제법이다, 짜식?”
“그럼 아까 새가슴이라고 했던 거 취소해줄래?”
“···흥, 그건 고려해볼게.”
“짠순이.”
“뭐야?”
“본전 보다 훨씬 벌었는 데도 점수가 너무 짜.”
“본전 보다? 무슨 소리야?”
그러더니 아랑을 리리 리에게 주머니를 던졌다.
매듭을 풀어서 열자, 그 안에는 예상 밖의 물건들이 튀어 나왔다.
“손에 잡히는 족족 다 넣어왔거든.”
은화들을 비롯해서 드문드문 반짝이는 광물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새빨간 광택의 손톱 크기만 한··· 각진 돌멩이 같은 것.
두 사람으로선 처음 보는 보석이었다.
“야, 이거···.”
“생각보다 대박이지?”
“아랑, 이 멍청아! 이러다 우리 감옥에 갈지도 모른단 말이야!”
큰일 났어.
리리 리는 눈에 띌 정도로 동요했다.
적은 돈이라면 어떻게든 무마가 될지 모르나, 그 안에 값비싼 물건이 끼어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칫하면 큰일로 번진다.
무엇보다 빅터에게선 남의 재물을 탐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짓이라 배웠기 때문에.
하지만 아랑 쪽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에이, 쓸데없는 걱정하긴. 리리 누나는 좀 진정해.”
“그, 그러는 넌 뭐가 그렇게 침착한데?!”
“우린 당당한 쪽이란 말야. 그야 아까 그 아저씨도 내내 누나를 속였으니까.”
“어? 그럴··· 리가?”
리리 리가 납득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기에.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그럼?”
“탁자에 묘한 장치가 되어 있더라고.”
아랑은 야바위꾼의 수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나가 있던 방향에선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야바위꾼 아저씨는 그릇을 들어올리기 전에 몇 번인가 무릎으로 탁자를 들썩였거든.”
“아?”
“보나마나 미리 균열이나 구멍 같은 걸 내놨던 거지. 애초부터 아래에서 열고 닫을 수 있도록. 일종의 개폐장치랄까? 아무튼 그렇게 하면···.”
“···언제든 조약돌을 내뺄 수 있겠네?”
“이제 알았지? 도둑질 따위 사소한 일이라는 거. 못된 사기꾼한테서 좀 훔친 게 뭐가 나빠?”
그때, 리리 리는 히죽하며 웃는 소년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은근히 늠름해.
세상물정 모르는 것치곤 굉장히 당차 보였다.
남의 것을 가져와버린 데에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 소녀는 소년의 논리에 자기도 모르게 회유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어느 쪽이 연상인지 모호해질 지경···.
리리 리는 새빨개진 얼굴을 급히 숙이더니.
“건방지긴.”
“앗?”
“네까짓 게 누굴 가르치려고!”
쭈욱.
소녀는 양손으로 소년의 뺨을 잡아 당겼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그들의 행동은 노략질에 불과해.
장난이라 치부하기엔 범죄.
반성 없이 마무리하기에도 선을 넘긴 것이다.
그러나 잘잘못을 따지자면, 애초에 도박에 손을 댄 시점부터 그녀에게 할 말은 없었다.
“흥, 그래도··· 이번만큼은 사부에겐 비밀로 해줄게.”
이걸로 비긴거야.
결국 리리 리는 멋쩍게 말을 건네면서, 아랑이 제시한 거래를 받아들였다.
소녀는 소년과 이마를 맞대더니.
“자, 그러면! 아까 봐둔 네 옷을 사러 가자!”
“아니, 나는 필요 없대도 그러네···.”
“문답무용! 동생은 누나만 믿어! 내가 아주 멋있게 꾸며 줄 테니까!”
얼굴이 너무 가까워, 아랑은 견디지 못하고 리리 리를 뿌리쳤다.
“···대체 무슨 깡이야? 아까까지만 해도 잡혀갈까봐 지레 겁먹었으면서.”
아랑이 조금은 몸을 사리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자.
짝, 리리 리는 순식간에 바뀐 태도로 가볍게 박수까지 쳤다.
“쉽게 얻은 돈은 쉽게 쓰는 거라고 사부가 그랬어!”
미심쩍어.
엄격하고 완고한 빅터가 그런 말을 했을 리 만무했다.
“···그거 정말이야?”
“몰라. 아마 그럴 걸?”
“···.”
“아무렴 어때? 어차피 우린 곧 이 도시를 떠날 텐데. 잠깐 씀씀이가 헤퍼지는 것도 좋지 않아?”
“누나가 어디에 시집을 가면, 그 집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덜 날 거 같네.”
“어쭈, 못된 소릴 하는 건 이 주둥이냐! 요 얄미운 꼬맹···!”
흠칫.
그때였다.
리리 리의 표정이 굳은 것은.
“···누나?”
“잠깐, 조용히 해.”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아.
뒤를 돌아본 소녀의 눈동자가 급속도로 수축했다.
마치 고양잇과 동물이 먹잇감을 발견한 것만 같은 형상.
그것은 똬리를 튼 뱀이 보일 법한 흉흉한 시선이었다.
순간, 리리 리는 눈치 챘다.
인근 골목에서 풍겨오는 요사스런 향취를.
“어째서, 여기에 마기魔氣가···.”
흉포한 기운이 가까워.
그것은 본래 어둠 속에 있어야할 존재의 기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