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97화 (97/186)

착종의 장(3)

4.

소개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녀는 새로운 사냥꾼과 만나는 것에 시큰둥했다.

당장 리리 리의 관심사가 식도락에 있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그간 빅터와 함께 지내며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에도 익숙해졌기에.

“그럼 사부, 저는 저녁쯤 다시 돌아올게요!”

어지간히도 흥미가 없었던 것일까?

소녀는 빅터에게서 은전 몇 개를 받자마자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반면, 소년 쪽은 달랐다.

‘색목인들은 전부 다 키가 이렇게 큰 건가?’

싱글 거리는 얼굴이 위에서 내려다본다.

특징만 추려본다면 빅터와 닮았다.

회색발의 머리카락과 탁한 우측 눈동자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벼운 인상.

일견, 소년의 눈에 로이드는 도무지 전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든 면이 투박한 사부의 것과 달라.

마른 체구와 가느다란 손가락은, 사냥꾼보다 음유시인이나 서기에 어울리는 것이었기에.

“이 사내 녀석도 네 제자냐?”

그 물음에 빅터는 단호히 답했다.

“아니.”

물론 그것은 아랑이 모르는 나라의 말이었다.

“값싸게 일을 맡아준 마부 소년일 뿐이다.”

“그래? 잠깐 고용한 애라고 하기엔 방금 나간 여자애랑 꽤 친해 보이던 걸?”

“사정이 있어 동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흠, 그렇단 말이지. 아쉽네. 싹수는 있어 보이는데.”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로이드는 아랑의 이마에 있는 흉터를 보더니.

“워, 꼬맹이. 얼굴 한 번 멋지군. 좀 더 크면 아주 사내다워지겠어.”

그러나 역시 아랑은 알아듣지 못한다.

처음 들어보는 서방의 언어가 너무나 이질적이야.

덧붙여 로이드 특유의 말투도 오묘하기 짝이 없어서인지.

이어지는 휘파람 소리조차 불순하게 느껴졌다.

“사부, 방금 이 자가 저한테 무슨 소릴 한 거죠?”

“신경 쓰지 마라. 시덥잖은 농이니까.”

“어?”

“그보다 너는 리리 리와 같이 있도록 해라. 함께 도시 구경이라도 하면서···.”

“저는 괜찮아요. 리리 누나랑 하루 종일 있으면 오히려 더 피곤할 것 같거든요.”

그 반응에 빅터는 살짝 웃는다.

그도 동감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따라가거라. 이 또한 많은 공부가 될 테니.”

“음, 그럴까요?”

“가끔은 쉬는 것도 배움이다. 네 나이 때의 경험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의미가 있지.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하나라도 더 익히 거라. 그리고···.”

이어서 빅터는 중요한 한마디를 더 이었다.

“리리 리, 그 왈가닥을 혼자 내버려두기엔 너도 불안하지 않나?”

“음, 그건 그래요.”

“부탁하마. 네가 그 아이를 지켜봐다오.”

지시나 명령이 아닌 개인적인 요청.

이는 자신을 믿어준단 의미인가?

동경하는 자의 기대인 만큼, 아랑은 그걸 배신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부.”

먼저 나간 리리 리를 뒤쫓고자, 아랑은 서둘러 찻집을 나섰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슬쩍 한 쪽 눈을 감았다.

짓궂은 얼굴.

빅터를 놀릴 의도가 다분해보였다.

“아무래도 저 꼬맹이는 널 엄청 따르는 거 같은데?”

“착각이다.”

“···임마, 여전히 거짓말 한 번 못하네. 이 몸을 속이려면 미리 말이라도 맞춰두던가?”

알아챘던가?

로이드의 눈치만은 여전했다.

“다 들린다고. 마지막에 꼬마가 덧붙인 거, 분명 ‘사부’라고 했지?”

“···.”

“내가 아무리 동방의 말을 몰라도 그 정도는 알아들어.”

섭섭하구만, 하고 로이드는 팔짱을 꼈다.

“저 꼬맹이를 동료로 넣으면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냐?”

“아랑은 아직 어리다.”

“조기교육도 중요하지.”

“로이드···.”

빅터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소년의 처우를 어찌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몰인정하진 않았으니.

“안심해, 짜샤. 나도 꼬맹이들까지 사지로 몰아가는 건 사양이니까.”

“뭐?”

“오히려, 저 꼬마를 펜릴의 둥지에 보낼 셈이었다면··· 내가 얼굴에다 한 방 날려줬을 거야.”

그리곤 실실 웃는다.

자신도 같은 편이라고 덧붙이면서.

“뭘 놀라? 너와 내 사이 잖냐?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만에 하나 이 일이 대스승 알베르트에게 전해질 일은 없을 테니.”

어느 시대이건 사냥꾼은 인력이 부족하다.

그 사실을 로이드가 모를 리 없어.

빅터는 그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허나 로이드의 의도는 순수한 것이었다.

“기의 유파가 하는 방식이 영 마음에 안 들거든.”

“···대스승 알베르트와 무슨 일이 있었나?”

“암, 있었고말고. 어떤 미치광이 같은 수술이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했으니까.”

그에 대해 로이드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역시나 도리스 누님의 친부라고 해야 할까? 아니, 적어도 그 누님은 의학의 발전이란 개똥철학을 걸진 않지. 어떤 의미에선 끔찍한 게 한 수 위란 말이야.”

로이드의 설명은 이러했다.

소수의 적합자를 뽑는 이식이 슬슬 구시대의 전통 비슷한 것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고.

좋게 말하자면 혁신.

나쁘게 표현하면 인륜을 벗어난 행위를 통해서.

“설마···.”

빅터는 이미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커틀러스.

팔시온.

매서.

과거에 가면을 쓴 삼형제가 받았던 금단의 개조.

육체를 마모시켜 정안을 이식받은 자 만큼의 잠재능력까지 끌어내는 무시무시한 수술에 대해···.

그것은 낙오되었으면서 끝내 마의 존재와 싸우길 바란 자에게 내려지는 가혹한 조치였다.

그들의 말로가 좋지 못했던 것을 기억해내자, 빅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빅터, 너도 뭔가 아는 눈치구만?”

“···음, 심록 토벌 당시에도 대스승 알베르트를 따르던 가면의 전사들이 있었지.”

“그래?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여러 가지가 있었어.”

지원자가 많아졌거든.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로이드의 심기는 불편해보였다.

“이식에 실패한 자··· 가능한 빠른 시일 내로 힘을 얻고 싶은 녀석들이 벌떼처럼 몰려든 거야.”

그만큼 마녀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란 의미이기도 했다.

“대스승 크레이그와 다르게, 대스승 알베르트는 오는 놈들을 전혀 막지 않더라. 오로지 보충에만 신경 쓰더라고, 그 미친 의사 할배는···.”

“···.”

“웃기지 말라 그래. 언제나 우리는 소수 정예 아니었냐고? 이제 와서 화난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 봐야 뭘 할 수 있는데? 이 상황에서 대체 뭘 대비한다는 건지···.”

그러면서 로이드는 이를 갈며 덧붙인다.

더는 어린애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꼴만큼은 보고 싶지 않다고.

“그 영감은 비겁해. 복수를 원하는 꼬마들에게 ‘힘이 필요하냐’면서 꼬시더군. 치가 떨려. 그건 지옥으로 순진한 애를 등 떠미는 악마나 다름없어. 안 그러냐?”

“···.”

“···그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말을 줄일게. 너무 개 같아서, 내 입으로 꺼내기조차 싫거든. 정 궁금하면 네 잘난 힘으로 읽어봐라.”

그 말에 따라···.

순간 빅터의 왼쪽 눈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빠르게 깨닫는다.

과연,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조정하는 것인가?

잠시 후.

빅터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랬나? 그 5년 사이에 서른 명이나 되는 아이가···.”

그러나 그 중 절반은 실패.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도 커틀러스 삼형제의 수준까지 도달한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어, 뭐야? 그새 벌써 다 본 거냐?”

“간단한 정보만이라면 눈 깜박할 사이에 얻을 수 있지.”

“질렸다. 완전히 귀신이 다 됐구만. ···뭐, 그럼 너도 이제 잘 알았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말이야.”

“전부는 아니다. 이 힘도 만능은 아니야. 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단막들뿐이다. 그러니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로이드.”

조금이나마 풀어져있던 빅터의 표정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도대체 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러자 로이드는 살짝 입가를 일그러뜨린다.

반은 미소.

나머지는 묘한 망설임이 섞인 얼굴이었다.

“···그래, 어차피 내가 바다를 건너온 것도 이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는 겨우 본론을 입에 올렸다.

“너도 짐작하겠지만 말이야. 5년 전, 네가 육망성 중 하나를 쓰러뜨린 덕분에 우리 쪽에선 한 차례 소동이 일어났다.”

“짐작이 안 가는군.”

“누가 예상했겠냐? 이름이 난 유명한 마녀가 죽었으니, 세상이 좀 잠잠해질 만도 하잖아? 하지만 반대였어. 오히려 평소엔 은둔해있던 놈들까지 한 번에 날뛰더라.”

모든 것은 육망석의 공석을 차지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육망성이라는 자리에 그만한 가치가 있단 말인가?”

“나도 모르지. 그런데 세상을 등진 마녀들에게도 권좌는 탐이 났던 모양이야.”

지금까지는 흔적을 드러내길 꺼렸던 마의 존재들이···.

이젠 일반 사람들이나 국가 기관의 앞에까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기에.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제물의 수확에 들어간 것이었다.

“수도가 발칵 뒤집어졌겠군.”

“말도 마라. 이걸로 우리가 수 세기 동안 비밀을 지켜온 것도 무의미해질 판이라니까. 반대로 종교쟁이들은 살판났지. 무슨, 종말의 시기가 다가온다나? 선과 악의 거대한 싸움이 마침내 결판을 앞두고 계신 댄다. ···웃기지도 않는 작자들이야.”

“하긴, 이단 심문을 전문적으로 하는 놈들에겐 좋은 명분이 생겼을 테니까.”

“바로 그거지. 헌데, 걔네들 눈깔엔 우리까지 비슷한 부류로 보이나 보더라고.”

“직접적인 충돌이 있었나?”

“물론이지. 각지에서 흩어져 활동하던 동료들이 큰 피해를 봤어.”

“심각하군.”

“그나마 우리 집결지 쪽까지 마수를 뻗히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야. 뭐, 놈들도 별 수 없었겠지. 중앙 정부에 자금을 대주는 크로이 가문이 우리의 신원을 보증해주고 있으니,”

결국은 돈의 논리.

막대한 이윤 앞에선 성스러운 신의 말씀도 주춤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시간문제야.”

“또 뭐가 곤란해졌나?”

“우리가 주둔하는 도르프하임 지방은 괜찮아. 북반구의 프로스트 공국까지도 아직까진 어떻게든 활동할 순 있어. 문제는 남쪽이지.”

“···베가시아인가?”

“그래. 자칭 성국聖國.”

“흠.”

로이드의 발언에 빅터는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신성국가 베가시아.

그것은 남단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대한 종교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광신도들에겐 크로이가의 제력도 의미를 잃어버리지. 무리도 아니야. 세계 각지에서 거둬들이는 교단의 헌금이 있으니, 현존하는 국가들 중에,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놈들이니까.”

로이드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야.

그들의 세력은 동방을 제외한 서양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수도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는 교단조차도 엄밀히는 그들에게 속해있었기에.

“뭐, 나머지는 뻔한 이야기야. 세계 최대의 신도를 가진 주류 종교 지배자가 우릴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그 말씀.”

결국 그것은 사냥꾼들의 활동이 남부지역에선 극도로 제한된단 의미였다.

“···그래도 적을 놓칠 걱정은 없을 지도 모르겠군.”

“그야··· 정신이 제대로 박힌 마녀라면 베가시아로 향하진 않겠지. 거기선 매일 같이 자체적으로 마녀 사냥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들의 판별기준은 단호하면서도 잔혹하다.

수상하다면 구속.

친인척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수감된다.

이민족이라면 신체말단을 분지르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사지마저 뭉개버린다.

그러나 가장 최악은 이교도와 불신자 처우로···.

그에 걸 맞는 형벌은 성스러운 불꽃에 의한 정화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교리를 신봉하는 자일수록 빅터를 비롯한 사냥꾼들 전부를 적대한단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암흑세기의 부활인가?”

“이 백 년 전의 재림이지.”

“···역사란 놈은 어지간히도 되풀이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그것도 전부 어리석은 인간의 업이 아니겠어?”

“로이드···.”

“알아. 나도 안다고.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후배. 나도 속상하니까. 그래도 말이야, 솔직히 전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

“지금껏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언제나 필사적으로··· 전력을 다 했지. 그런데 놈들은 그런 사정은 아랑곳 않고··· 제기랄!”

로이드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었다.

근래, 본토의 사정을 모른 채로 베가시아에 파견된 베테랑들이 둘 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 다 10년 이상을 마와 맞서온 역전의 용사들···.

그러나 성국의 이단심문관Inquisitor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단지 수상한 마술을 쓰는 불온한 자들에 불과했다.

“공개처형 당했지. 그 나라 한정이지만, 은발에 회색 눈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잡아서 매달란 신성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다더라.”

빅터는 예전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대스승 크레이그에게서 전해들은 바로는,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오래도록 어둠의 존재들과 싸우며, 음지에서 인류를 수호하던 사냥꾼들을 당대의 주류 종교가 탄압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자의 수는···.

가히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을 정도라고.

‘우리는 무력하다.’

어둠에 맞서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곤 하나,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인간.

시대를 지배하는 종교나, 국가 단위의 권력에겐 저항할 수 없다.

특히나 인간이 가진 끝없는 악의의 수렁 앞에선 더욱 더 무력한 것이다.

“···네가 동방에 남은 건 정답이었어. 그 파란에 휘말렸다면 너도 지금처럼 지내진 못했을 거야.”

그간 고생이 많았던 것일까?

어울리지 않게 로이드의 얼굴에 그늘이 져, 고뇌의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곧 능청스레 본래의 모습을 되찾더니.

“···아, 그렇다고 네가 편한 시간을 보냈단 의미는 절대 아냐. 그 초연해진 모습을 보니 짐작이 가네. 마흔 명 이상의 마녀를 격파하는 동안··· 너도 우리 이상으로 가혹한 일을 겪었겠지. 그러니까 내 말을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물론 알지. 신경 쓰지 마라.”

“젠장, 괜히 우울해지는 이야기만 했네. 역시 이런 날엔 술이 필요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주제에.”

“···야, 그런 것까지 엿보진 말라고.”

부끄럽게시리.

핀잔을 주면서도 로이드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것에는 말로 표현 못할 피로가 스며있어.

아마도 그로써는, 긴 시간 동안 이런 하소연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아직 빅터는 상대가 아직 뭔가를 감추고 있단 사실을 알았다.

“로이드.”

“왜, 또 뭘로 놀리려고?”

“···할 이야기가 그것 뿐만은 아닐 텐데.”

침묵.

로이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전부 읽지는 못한다더니?”

“거짓말은 아니다.”

“쳇, 이 소식은 좀 더 천천히 알려주고 싶었는데.”

“볼일은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아, 예! 우리의 빅터 사부님께선 제아무리 성가신 일이라 해도 미루지 않는 성미란 걸, 소인이 잠시 잊고 있었지 말입니다!”

“본론만 말해다오.”

“어쩔 수 없구만.”

허나 떠버리 로이드가 이렇게까지 말하길 주저한단 것은, 거기 담긴 내용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빅터. 너는 심, 기, 체의 대스승들을 모두 알고 있을 테지?”

“그래.”

“하지만 나머지 유파들의 대스승은 아직 일거야. 다들 활동 영역이 다르니까. 아무튼 그들의 이름을 이번 기회에 내가 가르쳐 줘야겠지.”

“음.”

“네 번째는 대스승 갈라테아. 검은 대륙에서 활동 중인 분이지.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분은 다섯 대스승 중에서도 유일한 여성이자, 영靈의 유파라고 해. 아니, 그 사람은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다음이거든.”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대스승 이스마엘.”

로이드의 장황한 설명에 의하면, 그는 대규모 중합체 무리와 싸우는데 특화된 자들이라 했다.

“마치 군대처럼, 다수의 집단 전술로 마녀를 무찌르는 패覇의 유파라던가? 그 규모는 우리들 중 최대, 수 천 명에 달한다고 하더군.”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

빅터는 턱을 괴면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특이하군. 그 유파는 정안을 가진 이식자가 남아 돌기라도 하나?”

“그럴 리가. 대부분은 보통 사람이겠지. 단지, 전문적으로 군사 교육을 받은 거 말곤.”

“···그래서?”

그는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로이드는 어느새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있었다.

“얼마 전에 당했어. 그들이 패배했다.”

“뭐?”

“대스승 이스마엘과 그 휘하의 사냥꾼들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소리지.”

“···그걸 묻는 게 아니다. 무엇에게?”

또 다른 육망성인가?

되묻는 빅터에게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면, 수천이나 되는 사냥꾼들이 전멸하는 경우가 또 있단 말이냐?”

“그래. 나도 믿기 어렵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냐?”

이어서 로이드는 설명한다.

대스승 이스마엘이 주로 활동하던 지역이 어디였는지를.

“그들은 베가시가의 국경 지대에 주둔하고 있었지.”

동시에 빅터의 뇌리로 로이드가 전해오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올랐다.

파견.

대스승 크레이그의 심부름으로 타 지역의 사냥꾼들에게 명령을 전하려던 길이었던가?

아무래도 그들의 최후를 직접 확인한 것이 로이드 본인이었던 모양이었다.

무수한 시체···.

하나같이 사냥꾼의 복장을 한 자들이 땅을 나뒹군다.

모두가 목을 베였어.

멀쩡한 시신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묻어줄 생각조차 보이지 않아, 썩어가도록 방치당한 듯 보였다.

불경한 무신론자에겐 자에겐 무덤조차도 허락되지 못하는가?

대체 어떤 자들인가?

어떤 무시무시한 무력이 이러한 학살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곧 잔학무도한 자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전신을 두른 청색 갑주?’

그랬다.

육중한 몸집을 가진 거구의 판금 갑옷들···.

그것들은 석양을 등 진 채, 각자 냉병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또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에 커다란 깃발이 보여.

바람에 휘날리는 그 천 조각에는 섬뜩하게 일그러진 용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기사Knight?”

빅터는 자기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에 로이드는 동조하더니.

“그래. 성국 베가시아 소속, 창룡기사단.”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을 격하게 쥐며 말했다.

“놈들이··· 우리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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