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의 장(1)
1.
하늘은 본래의 색체를 찾았다.
대지에 스며든 피는 그대로였지만, 최소한 기이한 심록의 빛깔에서 벗어났다.
결계가 해제된 것이다.
지금 이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유일한 마기는···.
짓뭉개진 살덩이 속에 숨은 마녀의 것 밖에 없었다.
“네놈들··· 대체 정체가 뭐지?”
용병단의 지도자, 니코가 사색이 된 얼굴로 물어왔다.
그의 갑옷은 사역마들의 피로 가득해, 반나절 동안 필사적인 사투를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가르쳐다오. 우리가 대체 무엇과 싸웠는지!”
“···미안하지만 나는 말제주가 별로 없다.”
“알게 뭐야, 내가 댁이랑 사이좋게 담소라도 나누고 싶어서 이러는 것 같나? 당신이 이 중에서 그나마 제일 말이 통할 것 같아서 묻는 거다!”
“···.”
“털어놔라, 우리는 피해가 심각해! 내 부하가 절반 이상 괴물들에게 당했단 말이다! 내 동생도··· 니엘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더 늘어났다. 그러니 무슨 말이라도, 최소한 납득이라도 시켜달라고!”
“나도 막내라서 해줄 말이 없다.”
“···뭐라고?”
“나는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 가장 아는 게 없어.”
아무래도, 그도 내 겉늙은 외견만보고서 사냥꾼들의 중역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해줄 말은 없다.
그들이 본 것이 전부니까.
오히려 이 복마전에서 살아남았으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두 배의 값을 받는 용병이군.
물론 앞으로도 그들이 제대로 밤에 잠을 잘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나는 경악하는 용병대 단장을 뒤로하고, 추락한 창공의 눈을 포위한 대스승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래, 이제 귀하신 분의 얼굴이라도 좀 보실까?”
대스승 크레이그는 익살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것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왜 그러지, 빅터? 표정이 어둡군. 아무리 봐도 그건 승리를 가져다준 영웅의 얼굴이 아니구나.”
“···대스승 크레이그, 정말 이걸로 끝난 것입니까?”
“달리 뭐가 걱정이라도 되느냐?”
되다마다.
놈은 육망성이다.
가장 오래된 마녀의 집회.
심록은 바로 그에 속한 자였으므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최후의 순간에 우리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함정을 파둔 것은···.
하지만 나머지 두 대스승의 반응도 미적지근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군, 빅터.”
”흥, 애송이 놈··· 가루를 너무 쓴 나머지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야.”
“···.”
어째서냐?
다들 왜 이토록 가볍게 굴고 있지?
물론 잔존하는 마기의 양은 미비하다.
당연한 결과지.
대지의 힘을 빨아들이던 마계의 숲은 이제 소멸되었고···.
모든 사역마를 총집결시킨 여러 개의 창공의 눈마저도 나와 유성이 짓뭉개 버렸으니까.
그러나 이걸로 충분한가?
정말로 우리는 승리한 것인가?
“빅터, 젊은 사냥꾼아. 설마하니··· 우리가 지금 여유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
그에게 빈틈은 없다.
긴장을 풀기는커녕···.
아직 대스승 크레이그는 단검과 화승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여차하면 언제라도 적에게 반응해서 머리를 날려버릴 준비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대스승 크레이그는 한껏 가벼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허나, 그의 마음속에는···.
“미안하구나. 너를 불안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나이를 먹고 주책이지. 하지만, 오래도록 참아왔던 걸 풀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큭, 큭큭.”
끓어오르는 즐거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는 기어이 천박한 실소를 흘렸다.
대스승 알베르트도 저절로 올라가는 입 꼬리를 주체하지 못한다.
심지어 대스승 베누다 마저 들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복수란··· 허무한 것이다.
언젠가 유명한 현자가 그런 소릴 했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의미는 짐작이 간다.
아주 교훈적이었지.
파멸이 약속된 짓거리다.
굳이 인생의 모든 걸 걸어가면서까지 실행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현명한 사람이란 손해를 매꿀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잃어버린 걸 되찾을 수 없다면 또 다른 가치를 찾으면 그만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살아간다.
자연스럽게 잊혀 질 때까지, 상처를 감추면서···.
비슷한 격언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저주를 하려면 무덤을 두 개 파라···.
가장 고귀한 복수란 관용을 일지니···.
잠깐의 복수보다 영원의 용서가 났다···.
···정말인가?
모든 걸 잊고 편해지는 것은 단지 도망이 아닌가?
평생 상처를 거머쥐고 견디는 것이 진정 미덕인가?
그런다고 인간이 고결해진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아니.
결단코 아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영리한 자들의 격언이 헛소리로만 느껴졌다.
장담컨대, 나는 지금만큼은 그 모든 걸 부정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세 사람에게 만큼은 그런 세간의 상식이 일절 통용되지 않았기에.
“실례하마, 빅터. 조금만 더 이 순간을 즐기게 해다오.”
그들은 너무 많이 잃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많은 걸 희생할 것이다.
그렇기에 남은 것은 복수뿐이다.
지고의 기쁨이란 이런 것인가?
이 희열은 평생을 마녀를 죽이기 위해 살아가는 자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즐거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다.
도의를 지키려는 사명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단지 지극히 개인적인 원한을 해소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내게로 전해져오는 이 감미로운 향락의 감정은···.
그들이 60년 이상 살아온 노인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 것이었다.
적지 않게 미쳐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광인이었다.
평소에 보여주던 굳세고 강인한 면모는 모두 초인적인 인내의 결과물이었다.
오래도록 가혹한 단련에도 굴하지 않았다.
몸에 늘어나는 상처를 당연하게 여겼겠지.
절친한 동지의 죽음에 조차 울 수 없을 정도의 부조리한 나날이었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수십 년의 시간동안 그걸 억지로 눌러 담아 견딘다는 것을?
그랬다.
대스승들은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왔다.
인간으로서의 행복 대신··· 돌이킬 수 없는 짐승의 길을 선택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차마 나는 대스승 크레이그 이상성을 추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비록 당장 그들이 지옥의 악귀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을지언정.
미움이 절정이 달해 악의 그 자체로 변질되었다 할지라도···.
나에겐 그저 안 쓰럽기만 하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이 쥐뿔도 안 되는 행복이···.
그 처절하고 가혹했을 세월의 유일한 보상이었기 때문에.
“···슬슬 시작하시지요. 저 요망한 것에게 심판을.”
“큭큭··· 너무 서둘지 말게나, 알베르트. 이미 30년이나 참은 것을, 고작 몇 분 더 걸린 다고 뭐가 변하지? 공교롭게도 우리 전원은 그 계집에게 원한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베누다에게 양보하고 싶네. 그도 그럴게··· 그가 이 길로 들어온 계기가 바로 그 심록이었으니. 가장 오랜 원한을 가진 자에게 돌리는 것이 옳겠지.”
“흥, 크레이그··· 웬일로 네가 기특한 소릴 하는구나.”
그러나 대스승 베누다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관두련다.”
“의외군. 자네라면 당장이라도 맨손을 써서 목을 비틀어버릴 줄 알았는데.”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겨울 내내 잠들지 못하는 곰이라고 보고 있네만.”
“유감이다. 네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나는 참을성이 많지. ···오늘 나는 아끼던 제자, 아니··· 아들 둘을 잃어버렸다. 허나, 그렇다고 애송이가 새운 공적까지 나이를 핑계 삼아 빼앗고 싶진 않다.”
그러더니 대스승 베누다는 내 쪽을 보았다.
그는 나머지 두 스승과는 다르게 광기의 희열에서 가까스로 진정된 눈치였다.
“칭찬이 때론 독이 된다곤 하지만··· 잘 했다. 이걸로 휘룡과 툴루이도 편히 잠들 수 있겠지.”
그에게 있어서 죽은 두 사람은 가족과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광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어느 누구보다 이성적이었고 동시에 가장 인간적이었다.
마녀에 대한 증오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지만, 당장은 소중한 이들을 잃은 슬픔이 강했던 것이었다.
반면, 대스승 알베르트는···.
“알베르트, 너에게 양도해도 상관없다. 내심 분하지만 그걸로 가면을 썼던 세 녀석의 죽음을 기리도록 하지. 어떤가?”
“아뇨, 그거라면 사양하겠습니다.”
“뭐라?”
“커틀러스, 팔시온, 매서··· 물론 그들은 썩 쓸 만한 수작이긴 했지요. 하지만 명작까진 아닙니다.”
“···이 개자식, 여전히 사람 새끼가 아니로군. 그래도 네 손으로 직접
가르친 제자였을 텐데 일말의 정도 없는가?”
“대스승 베누다. 당신이 너무 감정적인 것뿐입니다. 저에게도 당연히 정은 있지요.”
“그런데 왜?”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잘 드는 칼에나 품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검이었지요.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고 말이지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당장 앞으로 튀어나갈 뻔 했다.
대스승이고 나발이고···.
인정사정없이 그의 턱을 뭉개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전신에 스며든 가루의 부작용 때문만이 아니었다.
내 안에 남은 그들의 혼이··· 뒤에서 나의 팔과 다리를 필사적으로 막은 탓이었다.
괜찮다, 빅터.
그건 그의 본심이 아니니까.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이쯤에서 도리스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근본적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거짓말쟁이.
알베르트, 그는 만성적인 허언증 환자였기에.
“대스승 알베르트···.”
“그래, 빅터.”
“커틀러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에게 감사했습니다.”
“호오, 그랬었나?”
“기대에 충족시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덧붙였을 정도로.”
“하하하, 그 녀석들. 불량품 주제에 기특한 소릴 다 하는군.”
“···.”
“아, 설마 자네··· 지금 내 마음을 읽으려 하는 겐가?”
그래.
표류자를 거치고 난 뒤, 내 힘은 더욱 강해졌지.
애써 숨기려하는 사람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
대스승 알베르트···.
그는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삼인방에게 검의 이름을, 도구를 빙자해 불러놓고선···.
마음 속 깊게 그들을 진짜 제자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슬퍼한다.
그 가혹한 마음은 대스승 베누다의 상실감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 또한 커틀러스 형제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뭘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연장자를 부끄럽게 하진 말아주게. 부디 모른 척 넘어가줬음 좋겠군.”
그러면서 실실 웃는다.
얼핏 자연스럽게 보이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자신의 몸 여기저기에 손을 봤다는 걸.
개조한 것은 안면근육도 포함된단 사실을.
성대를 조절해 목소리를 위장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렇기에 대스승 알베르트에게 감정의 위장이란 실로 간단한 일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그건··· 사실은 그가 본심을 감추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그러나 대스승의 직책까지 올라간 자가 경거망동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므로···.
대스승 알베르트는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해가며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이제 나에게는··· 그가 억지로 만들어낸 미소의 가면을 쓴 슬픈 광대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하,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그보다 대스승 크레이그, 대스승 베누다. 두 분이 전부 양보하신다면, 차라리 그녀에게 권하는 것은 어떤지?”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한다.
대스승 알베르트가 말하는 그녀란, 다름 아닌 레이였다.
“···제가 어찌 감히.”
레이는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이번 싸움을 계기로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금 상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선뜩 ‘기회’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신보다도 오래도록 심록을 추적해왔을 대스승들에 비하면, 자신이 품어온 10년의 세월은 미비한 것이었기에···.
“시끄럽다, 련희여. 두 말은 필요 없다.”
“레이 엔쯔이여, 나도 그의 의견에 동감이다. 거절할 것 없다. 너를 이 저주스런 운명으로 끌어들인 원수가 바로 저기에 있지 않느냐?”
“대스승 크레이그, 당신까지···.”
“하하하, 만장일치군요. 그럼 검희 레이에게 심록의 처분을 맡기도록 합시다.”
“안 될 말씀입니다! 아무리 세 분께서 권리를 양도하셔도, 이건 제 주제를 넘어선 일입니다. 역시 대스승 베누다께서···!”
하지만 대스승 베누다는 선언한다.
레이가 거부할 수 없도록 단호하게.
“네가 해라, 련희.”
“하, 하지만!”
“이건 명령이다.”
“···.”
“꼬맹이 주제에 건방지게 내 생각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 나는 너무 오래도록 이 짓거리를 했어. 증오도, 분노도 너무 오래도록 묵혀버렸다. 감정도 50씩이나 삭히면 썩어버리고 말지.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온전하게 심록을 미워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네가 하는 거다.”
“대스승 베누다···.”
“10년간 힘 들었지 않느냐? 분명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을 테지. 그걸 막으려고 나는 예전에 네가 사냥꾼이 되는 걸 결사반대했다. 허나··· 이미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끊어야만 한다. 자, 하거라! 너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 네 손으로 가증스런 마녀의 목을 치는 거다!”
고지식한 그녀는 대스승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
“알겠···습니다.”
결국 레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창공의 눈에 이변이 벌어졌다.
부글거리는 기포와 함께 껍질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형의 과실이 벌어졌다.
꽃잎의 봉우리를 닮은 시뻘건 껍데기가 펼쳐 치자, 그 안에서 무릎을 모아 웅크린 알몸의 여체가 나타났다.
심록의 마녀···.
비로소 핏덩이를 뒤집어쓴 창백한 피부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그래, 처형자는 결정했느냐?”
혼탁하고 역겨운 눈동자를 우리에게 비추었다.
이어서 과거에 들어본 적이 없는 사악하고 표독스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다리느라 지루해 죽을 뻔 했느니라.”
히죽.
상대를 도발하는 고혹적인 그 미소에, 레이는 망설임을 버렸다.
조금 전의 의기소침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칼집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레이가 내지른 거합居合은, 여지없이 마녀의 얼굴을 날려버렸다.
귀를 중심으로 윗머리가 깔끔하게 토막 났어, 피조차 튀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솜씨였다.
그러나···.
“···이걸로 한 번.”
남겨진 마녀의 입이 벌어졌다.
동시에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용병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꼴을 비웃기라도 하듯, 진홍빛 혓바닥이 입술을 핥았다.
“아직 열일곱 번 더 남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