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82화 (82/186)

인계의 장(6)

6.

순식간에 공기가 말라붙는다.

이마 언저리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이 불씨에 말려들었다.

그러나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내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근육 사이사이, 혈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이븐 가지의 분말이 신경의 작용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가루를 남용한 대가란 말인가?

하필 지금 부작용이라고?

‘젠장할!’

여기까지 와서?

이토록 허무하게?

이게 내 죽음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아직, 아무 것도···.

“···크윽!”

번쩍!

시야가 멀어진다.

코트 끝이 타들어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통은··· 없었다.

남은 것은 코에 맴도는 매케한 냄새, 그리고···

“···뭐.”

아니, 아니다.

내 목숨은 아직 붙어있다.

뒤늦게 엄습하는 열기 탓에 온몸이 따갑지만, 적어도 살아는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유는···.

곧 내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너희가···.”

잿빛의 형상이 셋···.

확인할 필요도 없어, 그들은 검의 이름을 가진 대스승 알베르트의 세 제자.

커틀라스, 펄시온, 매서였다.

시커멓게 타들어간 몸뚱이에는 아직 불씨가 남아있다.

그들은 등을 적에게 향한 채, 나를 둘러싸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일하게 남겨진 색은 얼굴을 가린 백색의 가면 뿐.

“어···째서?”

달아날 틈은 충분했을 것이다.

섬광이 내리쬐기 직전까지, 세 사람은 나와 꽤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충분히 여유가 있었지.

그렇다면 서둘러 빛의 맹공을 피해서 몸을 사렸으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은근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수상한 가면을 쓴 이 삼인방은···.

“···무사한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커틀러스가 입을 열었다.

이런 처참한 꼬라지가 되어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오히려 내 신변을 걱정하고 자빠졌다.

나는 말문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의 왼쪽 어깨가 바스라지기 시작했기에.

펄시온과 매서는 그보다 더 심했다.

맨 뒤에 있던 매서는 이미 전신이 가루가 되었고···.

중간에서 방패의 역할을 대신한 펄시온 마저도 반신이 녹아있었다.

이 둘에겐 더 이상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다행이군. 겨우 시간에 맞출 수 있어서.”

그나마 형상이 온전하다 싶었던 커틀러스의 등짝도 척추가 다 드러날 정도로 융해된 상태였다.

이것은 그의 의지력인가?

아니면 단지 대스승 알베르트가 한 시술로 인해 쓰러지지 않도록 개조당한 것뿐일까?

어느 쪽이든 기적이다.

당장이라도 목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몰골임에도, 온전히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슨 짓이냐··· 왜 나를?”

빅터, 이 멍청한 새끼···.

어리석은 나는 은인에게 할 질문이 아님을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커틀러스는 힘겨운 웃음소리만을 흘릴 뿐이다.

차가운 가면 속에서, 그는 지극히 인간적인 숨결을 내뿜었다.

이어진 것은 터무니없는 대답이었다.

“우리는··· 대스승 알베르트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다.”

이해할 수 없다.

납득이 가질 않는다.

몰래 언질을 한 것이 아니라면, 마녀의 소굴까지 함께 동행하는 동안 그딴 소린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웃기지 마라! 그런 지시가 대체 어디 있었냐고!”

“빅터, 대스승 알베르트께선 목숨 걸고 수행하라 하셨다.”

“그러니까 뭘!?”

이어서 그는 힘없이 내게로 쓰러졌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들끓는 감정을 담아서 내게 말했다.

“우리의 희망을··· 지키라고.”

“뭐?”

“그리고 네가 희망이다.”

···그랬다.

잘 생각해보니, 우리가 유성의 벽으로 돌입하기 전에··· 분명 대스승 알베르트는 그런 명령을 내렸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성과 표류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유성의 파편을 채취하여 병기고를 가득 채우려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믿기지 않아, 나는 또 다시 그에게 상처가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너희들 착각이다.”

“아니. 우리가 옳았다.”

“말귀가 어두워서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다!”

“나와 내 형제들은 실수를 할지언정, 절대 그 지시를 혼동한 적이 없지.”

“망할 자식! 이, 이 빌어먹을···!”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그의 자세가 무너졌다.

커틀러스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진다.

그러자 가면이 벗겨졌다.

지금껏 숨겨왔던 그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흉측했다.

도무지 인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두상···.

아니, 그렇게 가볍게 말하는 것조차 모자를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이것이 이식을 실패한 결과물인가?

코와 입이 붙어있었다.

콧대와 인중··· 입술을 찾아볼 수가 없다.

두 눈은 비어진 채 붉은 구멍만이 덩그러니 남겨져있고, 여기저기가 뭔가에 파 먹힌 흔적들로 가득하다.

벌어진 부분들은 억지로 박아 넣은 철 조각들로 매워져 있어, 이미 표정이라 부를만한 것조차 그들에게 남겨져 있지 않았다.

“···봐라. 대스승들을··· 저들까지 오직 널 위해 전장을 유지하고 있잖는가?”

하늘 너머로 또 다른 섬광이 번쩍인다.

그의 말처럼 아직 대스승들은 싸우고 있었다.

열 마리가 넘어가는 창공의 눈과, 열선을 내뿜는 거대한 중합체들과 대치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움직임은 나와 커틀러스가 있는 장소를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또 한 번 빛이 새어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릴, 아니 정확히는 나를···.

“이제 알겠는가, 빅터?”

“너희들은 대체 내가 뭐라고, 이딴···.”

“네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런 꾸며낸 소리 따윈 몇 번이고 들었다.

대스승 크레이그가 내 기를 살려주기 위해.

무력한 주제에 초조함만 가진 내가 주눅 들지 않도록 은연중에 레이가!

하지만 나는 안다.

특별한 적 따위 없었단 걸.

정신감응능력?

불편하기만 할 뿐이다.

망설임 없이 쳐죽여야만 하는 적에게 마저 동정해버리는 개 같은 힘이다!

그래, 엄밀히 말해서··· 이깟 시덥잖은 초능력이 없어도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 건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닌가?

조금만 배려하고 살핀다면, 누구나···.

“···울어주는 건가, 빅터? 우릴 위해?”

그들에게선 검술을 배우고 싶었다.

이 투박한 도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제대로 된 무기술을 배우길 바랐다.

따라할 염두가 나질 않는 레이의 것보다··· 커틀러스를 비롯한 두 사람이 휘두르는 시원스런 기병도 쪽이 훨씬 흥미가 갔다.

사내라면, 누구나 멋드러지게 날붙이를 휘두르는 무술에 흥미가 동하기 마련이니까.

그만큼 그들의 검술은 절도와 힘이 넘쳤으므로.

“괜찮다, 빅터.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본래부터 폐기만을 기다리던 불량품이야. 그러니···.”

“닥쳐! 입 다물어라, 커틀러스!”

불량품이 아니다.

그건 절대로 인간에게 붙일 만한 이름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그는 전사였다.

그들은 진정한 투사였다.

하지만 멍청이들이기도 하지.

정말이지 망할 바보자식들이다.

고작해야, 대스승 알베르트가 내린 모호한 명령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그 분을 너무 못마땅하게 여기지 말아라. 우린 대스승께 감사하고 있다.”

“그만···!”

“몇 번이고 이식에 실패한 우리 형제들을··· 그 분께선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회를 주셨지.”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미안하군. 아무리 몸을 뜯어고쳐도, 사족을 다는 이 성격만은 바꾸지 못했지.”

바닥에 닿은 커틀러스의 다리가 무너졌다.

종아리 아래는 이미 녹아내린 양초처럼 형태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게 기대는 자세가 되었다.

“···들어다오. 내 형제들의 이야기를. 어차피 너는 마음을 읽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내 목소리를 경청해주게.”

“···.”

“우리 세 쌍둥이는 본명을 버리기 전까지 남방의 한 농가에서 살았었다.”

또다.

멋대로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표류자에게 받은 유산의 영향인가?

이것은 더욱 강렬한 장면을 내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그들은 형제였다.

보기 드문 세 쌍둥이.

성격은 온후했고, 모난 구석이 없었으며 하나같이 근면 성실했지.

새벽에 일을 나가, 해가 저물 때까지 일을 하는 것도 익숙해져 있었다.

더불어 마치 영혼이 하나인 것 마냥 손발도 잘 맞았고···.

그 장점이 농사에선 최대의 효율을 발휘했을 것이다.

“돌림병으로 사람들이 대부분 죽어서, 주민이라곤 땅의 주인과 경작민인 우리 가족이 전부였지. 영주의 징세 탓에 배불리 먹진 못했지만··· 그래도 행복했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여동생이 있었지.

“에스메랄다···.”

“···그래. 막내였어. 절세의 미인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쾌활한 성격을 가진 우리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그 사건을 시작으로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 순간, 커틀러스는 내 옷깃을 필사적으로 거머쥐었다.

강렬한 감정이 담긴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동생은 마을에 침입한 도적떼에게 윤간을 당했기에.

“···잠시 우리가 자릴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돌아왔을 때, 에스메랄다는 자길 죽여 달라고 애원하더군.”

‘그녀는 죽음을 바랐다. 마을에선 더러운 계집이라고 엇나간 소문이 돌고, 오랜 가난을 벗어날 수 있던 유일한 희망이었던 옆 마을의 도련님 혼인도 파탄이 났으니. 그래서 그 아이는 커틀러스 형제의 눈을 피해서 몇 번이나 자신의 입안을 씹었지. 더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혓바닥을 끊어냈지만, 그러나 언제나 오빠들이 구해줬기에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이었다.

“···그렇게 여동생은 마녀가 되었다.”

절망의 빈틈을 파고들어 인간의 유혹하는 마의 존재.

아스트랄이 그들의 여동생 에스메랄다에게 깃들었다.

가족의 사랑과 격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영혼을 판 복수를 선택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자신을 덮쳤던 산적.

다음은 그런 자신을 구해주지 않고 외면한 마을 사람들을.

나아가선 자길 내쳤던 옛 연인마저도.

“우리는 끝내 그 아이를 막지 못했지.”

그랬나?

이들이 마녀 사냥꾼이 된 까닭은··· 바로 혈육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빅터. 목숨을 구해준 값이라고 하면 염치없지만··· 부탁한다. 나와 펄시온, 그리고 매서를 대신해서···.”

커틀러스는 내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남아있지도 않은··· 더는 검을 쥘 수조차도 없는 비어있는 손을 뻗어왔다.

나는 망설인다.

그것을 잡아버린 순간, 커틀러스의 목숨이 다할 것만 같아서.

당장 그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오직 과거의 집념뿐이었기에.

그런데 그 순간···.

“···잡아주세요.”

어느새 뒤늦게 따라온 앙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내 등을 떠밀었다.

“받아들이세요. 그는 앞으로도 계속 당신과 함께 싸우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의미지?”

“그대에게 깃 들길 바라는 겁니다.”

“나에게 그런 재주는 없다.”

“아뇨.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 정신감응 능력은 그걸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뭐?”

“설명할 시간이···.”

쿨럭.

갑자기 앙리는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토혈이 보여, 창백한 얼굴과 더불어 상태가 나빠 보였다.

“···저는 압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표류자의 목소리를 냈던 자로서. 당신의 힘이야말로 이 모든 비극을 끊을 수 있는 돌파구라는 걸.”

“그게 대체 뭐냔 말이다!”

“당신은 특별합니다.”

또다.

또 지긋지긋한 타령이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만큼은 생환시켜야만 합니다.”

“개소리!”

“사실입니다. 사실은 그대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표류자의 유산이 뭘 의미하는 지를···.”

이런 식은 아니었다.

나는 앙리가 말하는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이 힘을 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사역마 이상 생명을 모욕하는 일일지도 몰랐기에.

“빅터···.”

“커틀러스.”

“망설일 것 없다. 해다오. 우리의 혼을···.”

영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망상.

우리가 특별하다고 자위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바람을 인정하지 못한다.

“빅터, 너는 강하다.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니··· 살아다오. 우리를 대신해···.”

신파극은 질색이다.

나는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고맙···다.”

그것은 조금 전 표류자가 건넸던 말과 의미가 완벽하게 일치했다.

커틀러스의 들숨이 멈추었을 때, 나는 겨우 그의 손을 감싸 쥘 수 있었다.

“···커틀러스, 팔시온, 매서···.”

그들의 이름을 읊조린다.

“휘룡, 툴루이···!”

이어서 조금 더 빨리 저세상으로 갔던 동지들까지.

나는 기도문 따위 모른다.

어차피 거기에 망자의 비원을 기리는 의미 외에 다른 것은···.

“너희는, 내 안에 함께···!”

있다.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보다 명확한 가치가 존재한다.

이것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다.

시덥잖은 진혼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빨아들였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최후에 남은 그들의 완고한 의지를.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변에 잔류하는 강렬한 원한조차도···!

“빅터··· 역시 당신은!”

이변을 눈치 채고 앙리가 경탄한다.

그 기대에 보답하듯, 나는 팔을 위로 향했다.

그러자··· 본디 유성의, 표류자의 배를 가동시킬 동력이 내부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사념死念.

나는 죽은 자의 유지, 그들이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있는 그대로 주입했다.

그러자 지면에 파묻힌 유산이 다시금 반응하기 시작했다.

쪼개져라.

더 잘게.

더 많이.

천 개를 넘어서 만 개까지.

가늘게, 더욱 날카롭게!

···이윽고 내가 손을 뻗은 하늘에는, 무수히 나눠진 유성의 창이 머무르고 있었다.

외전 : 헥센냥크트

1.

···아,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중요한 이야길 할게.

우선 내가 사람이 아니란 걸 밝혀둬야 하겠다.

나는 고양이야.

그것도 아주 특별한 고양이지.

너희들이 보기에 나는 그저 하찮은 미물처럼 보일 테지만.

얼추 수 백 년을 살았거든.

스스로 밝히는 것도 우습지만 일단 요물인 셈이야.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일국의 왕권이 교체되는 것부터 시작해서 역사에 크게 남을 사건들을 몇 번이나 목격해왔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계의 흥망성쇠 따윌 설명하진 않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고양이니까.

멍청한 인간들의 영토 분쟁 따위 관심 없다.

나는 사람의 말을 하진 못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어.

그냥 오래도록 산 것 말고도 지혜가 있다는 소리다.

허나 그래도 착각해선 곤란해.

나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신기한 힘을 얻을 것이 아니야.

날 때부터 이런 똑똑함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거야.

어떻게 한낱 축생에 불과한 내가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냐고?

그거야 다들 궁금할 만도 하지.

그런데 나로써도 그에 대해 만족스런 해답을 줄 순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스스로도 그걸 알지 못하거든.

그저 나는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다.

만일 내가 인간의 몸이었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것을 이뤘을지 몰라.

영웅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거나, 현자의 지혜를 여기저기 흩뿌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다보면···.

그런 것들은 모두 의미 없이 느껴지게 되더라.

굳이 무언가 큰 업적이나 공을 세우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해.

결국 나에게 제일이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맑은 날 지붕 위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 불사의 고양이가 마냥 아무 생각 없이 이 질긴 목숨을 연명한 것은 아니야.

고양이라고 얕보지 말지어다.

나는 너희가 상상도 못할 세계의 비밀을 직접보고 경험했으니.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여행을 통해 얻어낸 여러 가지 사건들을 무엇 하나 잊지 않았어.

이것이 나의 자랑거리이다.

나는 머리가 좋아.

너희 기준으로 봐도 썩 영리한 편이지.

경험은 절대 잊지 않거든.

이 기억을 되짚어봄으로서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

···지금부터 이 고양이는 내가 체험했던 몇 가지를 이야기로 풀어내려 해.

웃음이 나올 만큼 유쾌한 것들.

신비하고도 기이한 이야기도 있지만 마냥 기분이 나빠지고 무시무시한 세상의 모습도 있어.

모두 재미있고 신나는 모험담이지.

쳇.

사실 너희가 이런 데 관심을 가질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고양이가 하는 이야기 따위 듣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

불평 하지 마.

갈 사람은 얼른 가버려라.

듣고 싶은 사람만 모이라고.

흥, 누가 남아달라고 빌었나?

······.

흠, 좋아.

경청할 준비는 된 모양이로군.

그럼 이쯤에서 시작하도록 할게.

이는 내 길고 길었던 묘생(猫生)의 작은 편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이지.

2.

세계의 비밀을 엿본다는 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야.

탐구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여기는 학자들에게 그것은 굉장한 행운일 테지만, 안타깝게도 고양이인 내 입장에서 그건 그저 두려운 현실일 뿐이지.

나는 그저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알고 싶지 않은 세상의 본질을 목격하고 말았어.

그것도 아주 무시무시한 진실을 말이야.

당시 나는 막 백년 남짓 살았었다.

머리는 좋았지만 그걸 써먹으려고 시도하지 않던 시기였지.

그저 하루하루 지붕 위에서 낮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곤 했어.

왜 좀 더 성실하지 않았던 걸까?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늦었지.

그때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적어도 나를 키워준 주인의 목숨 정도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나의 어린 주인은 수도의 영지에서 살아가는 평민의 딸이었다.

밝은 성격에 순진하고 동물에게 친절한 아이라 나도 주인을 많이 좋아했어.

가끔 귀찮게 끌어안기도 했지만 참 착한 아이였지.

자기 저녁 반찬을 굳이 나한테 상납하려고 숨겨왔다니까?

그 때문에 자기 부모님한테 호되게 혼이 나는 걸 감수하면서 까지.

···문제의 그날은 여왕의 즉위식이었지.

내 주인은 꿈만은 소녀라 그런지 공주에 대한 동경으로 어여쁘게 꾸민 그 모습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야.

결국 부모를 보채 광장으로 나갔는데, 잔뜩 들뜬 그 표정만으로도 그 행사를 기대했는지 지 알 수 있을 정도였지.

그때 나는 잔뜩 밥을 먹고 나른해진 몸으로 지붕 위에 늘어져있었는데.

하도 인간들이 몰려들어 북적대는 통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더라.

그래서 다소 곤두서서 아래를 쭉 관찰하고 있었지.

한참을 그렇게 있으니 갑자기 환소성이 들리더라.

공주의 등장인가 했지.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서 잔뜩 화려하게 치장한 한 여자애가 호위를 대동하고 납시더군.

나는 사람들의 옷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게 얼마나 가치가 있었는지 몰랐어.

하지만 우리 어린 주인은 그걸 보고 되게 기뻐하더라?

자기도 저런 옷을 입어보고 싶다, 느니.

대충 뭐 그런 표정이었어.

사실 저런 옷이 아니어도 우리 어린 주인은 충분히 귀여웠으니 나는 별 생각 없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그때였다.

어쩐지 모르게 털이 곤두서더라.

망령이 내 꼬리를 움켜쥔 것 같은 기분이었지.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오한이었어.

나는 곧 그게 무엇인 지 깨달았다.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알아채고 말았지.

시선이 마주쳤어.

그것이랑.

아주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떠받들고 있는 광장 중심의 그것과 말이야.

그래, 맞아.

바로 공주였어.

그 계집애였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지.

그런데 수백 미터나 넘게 떨어진 저 멀리에서 그게 날 보더니 입가에 표독스런 초승달을 그리더군.

나는 내 눈을 의심했지.

열일곱 댓살 정도 먹었을 것 같은 호리호리한 여자애가 말이야.

창백한 피부에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가진 공주님이란 계집애한테서 말로는 표현 못할 흉흉한 기운을 느꼈으니까.

나는 생각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속으로 대뇌었지.

너희들 제정신이냐?

대체 뭘 떠받들고 있는 거야?

왜 환호하고 자빠진 건데?

무서워졌어.

저 공주인지 뭔지가 사람의 모양은 하고 있어도 전혀 다른 어떤 존재란 걸 직감했거든.

유순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사람들의 시선에 화답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 그건 마귀의 조소로만 보였다.

나는 지붕에서 쏜살같이 내려왔다.

도망쳐야 해, 하고 속으로 몇 번이나 말하면서 자리를 피하려 했지.

그런데 차마 안 되겠더라.

나를 돌봐준 꼬마 주인만큼은 내버리고 갈 수가 없었어.

나는 가족들을 찾았지.

그리고 주인의 치맛자락을 물고 당겼어.

필사적으로 울면서 주인을 불렀지.

하지만 무리였다.

나는 나름의 꾀를 생각해서 할퀴어 가면서까지 가족을 피신시키려고 했지만···.

주인은 단지 내가 배가 고파서 보채는 걸로 생각했나봐.

막막하더라.

내가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람 거죽을 쓴 요사스런 것에게 홀려있었어.

왜야?

어째서야?

왜 너희들은 저것의 정체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거야?

저 공주한테서 느껴지는 무서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거야?

그때만큼 내가 한낱 축생이란 사실이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지.

이만큼 초조한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내 자신의 무력감을 통감하던 사이, 즉위식은 막바지에 다다랐어.

신관인지 뭔지 하는 놈이 그것의 정체도 모르고 왕관을 건네려 하고 있었지.

나는 그만두라고 외쳤지만 역시나 통하지 않았다.

그대로 왕관은 공주의 머리 위로 올라갔지.

그리고 그 순간, 지옥이 펼쳐졌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거야.

그 순간 공주의 입술을 통해 전해진 그 한마디를.

그 섬뜩한 목소리를.

공주는 광장 아래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더니.

“너희들은···.”

사악하고 불길한 음성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너무 많아.”

그리고 하늘이 찢어졌다.

쪽빛이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진홍으로 물들었지.

태양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 사이로 거대한 눈이 대지를 경멸하듯이 깜빡였어.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야.

시뻘건 하늘에서 뭔가 스물 스물 기어 나오더니 사람들을 낚아채갔어.

당시엔 그게 뭔지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아.

그건 문어의 촉각이랑 비슷했어.

빨판대신 가시가 달렸단 걸 빼고 말이야.

헌데 그것만으로도 사람들한테 절망을 선사하는 게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야.

이어서 땅이 갈라졌어.

그 틈으로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짐승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지.

아니, 그게 아니야.

사실은 그게 주둥이였어.

커다란, 그것도 아주 거대한 아가리였다고!

팟.

갈라진 부분에서 산만한 송곳니가 튀어나와 맞물렸어.

잠깐이라도 좋으니 상상해 봐.

하늘은 검붉게 변하더니 사람들을 잡아먹고 성벽보다 높은 이빨이 사방에서 덮쳐오고 있는 광경을.

그건 마치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어.

아비규환이었지.

마(磨)가 세상을 집어 삼켰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그제야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것 깨닫곤 비명을 질러댔다.

그치만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지.

그 다음은···.

순식간이었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죄다 쓸려가 버렸어.

성도.

집도.

사람들도.

내가 좋아하던 가족들 모두 그대로.

그게 전부야.

한 나라가 그걸로 멸망했거든.

무력했지.

고작 고양이에 불과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그런 상황인데도 나는 살아남았어.

하늘에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어째서인지 나만은 건들지 않더라.

성을 통째로 삼켜버린 아가리에서도 벗어났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면···.

그건 내가 구출 받았기 때문이야.

이 지옥을 만든 장본인에게, 바로 공주한테서 말이야.

“안심하렴, 작은 동물아. 너는 우리의 권속이 아닐지니.”

눈을 떠보니 나는 그것의 품속에 안겨 있었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드니 초연한 미소를 지은 입이 보이더라.

하지만 입뿐이었어.

얼굴이 없었거든.

머리 위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공주였던 뭔가의 두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들이랑 이어져있었어.

무슨 신경다발인 것 같았는데, 엄청나게 섬뜩했어.

“떨고 있구나, 귀여운 것···. 괜찮단다. 너는 잡아먹지 않아요.”

놈은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진정할 리 없었지.

나는 나도 모르게 발톱을 세워서 공주의 손을 그어버렸다.

그때, 나는 죽음을 각오했어.

그랬는데 그 괴물이 갑자기 소녀의 목소리로 가녀린 신음 소릴 내더라.

“요놈, 못써요.”

그뿐이었어.

녀석은 놀랍게도 그저 내 머리를 툭하고 건들더니 그대로 쓰다듬기만 했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지.

공포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어.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고도 황당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엔 죽고 싶었어.

그런데 그때였지.

나는 내 머리 속으로 작은 정보들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꼈어.

그게 바로 내 특별한 능력이거든.

날 건드린 사람의 감정 같은 걸 받아들이는 거야.

사람이 아닌 다른 것한테서도 통할 줄은 몰랐지만···.

여하튼 그 덕분에 나는 그 괴물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지.

놈들은 이름은 귀족.

어째서 그렇게 불리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세계에 존재해왔던 것 같다.

몇 번인가 이렇게 나타나서 그때마다 나라를, 수많은 인간을 잡아먹어왔어.

이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있는데도 지금껏 사람들이 몰랐던 건, 지금껏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기 때문이겠지.

놈들은 어떤 임무를 띤 것 같아.

우리로선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한테서 명을 받고 그걸 그대로 수행하는 모양이야.

그리고 그 목적이란 아주 단순하게도 인간의 수를 관리하는 거였지.

잡아먹는 것으로.

귀족은 한 시대에 가장 부강하고 부유한 나라에 나타나 그 나라에서 비범한 위인으로 활동하지.

그 나라를 집어 삼키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있는 모양인데, 일단 목표가 된 국가의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 같더라.

지도자가 되어야지 사람들을 잡아먹을 수 있나보더군.

읽어 들인 기억이 적어서 왜 그렇게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거기까지였어.

놈들이 딱히 인간에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었지.

그저 내가 태어난 이 나라가 표적이 된 연유도 그 시대에 가장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곳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녀석들에겐 그게 당연한 일이었던 거지.

하지만 그래도···.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놈들을 용서할 수 없었어.

내 꼬마 주인은 고작 열 살이었다고.

공주님을 보겠다고 밤잠을 설칠 정도로 순진해빠진 아이였단 말이야.

내가 마지막까지 경계를 풀지 않자, 괴물 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날 풀어줬지.

아쉽다는 목소리로 가증스럽게 작별인사까지 덧붙이면서.

그리곤 사라졌어.

아지랑이처럼 홀연히.

모습이 희미하게 변하더니 그대로.

곧 하늘은 어느새 원래의 푸른 모습으로 돌아갔고.

그 흉악한 이빨도 맞물려서 대지에 거짓말처럼 녹아들었어.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지.

처음부터 이 곳에 성이나 도시 같은 건 없었다는 듯이 말이야.

주인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쳤고,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하지만 놈들은 몰랐을 거다.

내가 다른 고양이들보다 영리하다는 걸.

이 기억을 후세에 다른 인간에게 전달할 거란 사실을.

그리고 그거야말로 놈들의 치명적인 실수였지.

머지않아 놈들이 나타날 기색이 보인다.

대륙 너머 어느 강대국이 전쟁을 시작했거든.

정복이란 명분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있다고 해.

곧 그 나라의 영토는 불어날 테지.

그때를 노리는 거야.

놈들의 정체를 까발려서 반격의 기회를 만들 거야.

···으, 물론 당장은 아무 대책도 떠오르지 않지만.

실패도 많이 했고···.

귀족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면, 마치 세계가 간섭하는 것처럼 그걸 지워버려서 말이야.

글자는 거짓말처럼 증발하고, 벽에 남긴 발톱 자국도 금방 흐려져 버려.

아마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한다 해도 당장 잊어버리고 말 걸?

그밖에도 여러 가지 시도해보긴 했는데···.

그 정도론 어림도 없더라고.

응.

그래, 맞아.

내 방랑은 거기에서 시작되었어.

어떻게든 너희 인간들에게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언젠가 복수를 반드시 해내고 말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난 절대로 죽을 수 없어.

···뭐, 어차피 죽으려 해도 쉽사리 죽을 수 없는 몸이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그리워.

햇살 아래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 아이의 손길이 말이야.

순진한 어린애는 참 좋지?

진짜 다시 보기 힘든 착한 꼬마였어.

정말로, 따뜻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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