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61화 (61/186)

용병의 장(5)

9.

“들었냐, 후배? 동양이랜다.”

“그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흑안, 흑발이라는 거 아냐?”

레이가 대스승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로이드가 옆자리에서 시덥잖은 이야기를 속삭였다.

뭔가 지식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나는 산골 마을 출신 치곤 꽤 자세한 사정까지 동방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클라리스에게 들어온 이야기니까.

‘우리가 동양이라 부르는 대지에 몇 개의 나라가 있는 지, 그들의 독특한 문화와 신비한 종교관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로이드 자식보다 내 쪽이 더 많은 걸 알았을 지도 몰랐다.

“캬, 거기엔 레이 누님처럼 이국적인 미인들로 가득하겠지. ···그런데 대스승이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 심록인지 뭔지 하는 마녀는 꽤 거물인 거 같단 말이야?”

“그렇겠지.”

“사선을 넘어서 이렇게 돌아왔는데, 고난의 연속이라··· 이거 자칫하면 죽겠구만.”

“겁이라도 먹었나?”

“뭐, 임마?”

“두려움을 모르는 위대한 마술사 로이께서 도망칠 궁리부터 하다니.”

“멍청하긴, 두려움을 모르는 건 용감한 거랑 거리가 멀다. 무서움을 극복해야지만 진정한 용기인거라고.”

“의욕이 넘쳐서 보기 좋구나, 로이드여. 하지만 이번만은 빠지도록 하라.”

“예?”

허나, 로이드의 기대와는 달리··· 이어진 대스승의 선포에 나는 희비가 교차했다.

“로이드, 빅터. 너희 둘은 이 집결지에 남는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태한 휴식에 늘어져가는 몸이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임무에 들어갈 수 있기를 원했건만···.

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이 자리에 머물도록 지시하는 거지?

내가 불만 섞인 반문을 꺼내기도 전에, 레이가 입을 열었다.

“전력이 안 되는 애송이들은 가만히 있어.”

“뭐라고?”

“레이여. 그렇게 모가 난 말투로 말하면 후배들이 오해한다. 젊은 사냥꾼들아, 너희는 아직 생사의 고비에서 돌아온 지 며칠도 안 지났다. 제 아무리 초인적인 정신의 소유자라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다. 그와 같은 의미로, 레이는 너희들이 쉬어야 할 땐 쉬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스승, 저는 충분히 쉬었습니다.”

“아니다, 빅터여. 그건 착각일지니.”

“제 팔은 멀쩡합니다. 이렇게 잘 움직이지 않습니까? 불과 며칠 전에, 저는 이 손으로 마물의 목을 으깼습니다.”

“아무래도 그림자를 두른 영향이 남은 모양이군. 통증이 없어서 자각을 못한 것도 어쩔 수 없지만, 엄밀히 자네의 몸 상태는 완치가 덜 됐다네. 앞으로 일주일은 안정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일주일이라니?

그것은 마치 내게 주어지는 가혹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설마 멋대로 이븐 가지의 분말을 남용한 것에 대한 징계인가?

‘···아니다. 두 사람은 내 정신 상태를 모른다. 이건 단순한 배려에 불과해.’

너무 나갔어, 억측이 지나치다.

단지 내가 안달이 났을 뿐···.

“아, 이거 아쉽게 됐습니다. 기왕이면 이름 난 대륙 너머의 마녀를 사냥하는 데 참여해서 경험과 견문을 넓히고 싶었는데요.”

“로이드여. 네가 정 원한다면 동행시켜줄 수도 있다.”

“대스승 크레이그, 저는 심사숙고한 연장자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저따위가 나서봐야 짐짝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여전히 말은 잘 하는군.

하지만 허세를 부리는 녀석과는 달리, 나는 필사적이었다.

집결지 지하실에서 벽만 바라보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신물이 난다.

이 자리를 집과 같이 안락하게 느끼기 시작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겨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손에 힘을 얻었다.

이식을 받고나서 쓰러뜨린 마녀는 이제 고작 하나 뿐···.

부족하다.

턱없이 모자랐다.

좀 더 강해져야 한다.

몸도 마음도 보다 견고하게.

클라리스의 사역마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가루를 다루는데 익숙해져야만 한다.

‘성장은 실전에서 하면 충분해, 그러기 위해선 나에겐 적이 필요하다.’

이름이 알려진 마녀라면 그에 걸맞겠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스승, 그리고 레이와 동행한다면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니까.

“대스승,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덩치, 나한테 같은 소릴 하게 만들지 마.”

“부탁한다, 레이사저.”

“어림없어. 절대로 안··· 야, 너 갑자기 머리는 왜 숙이는데?!”

내 말주변으론 설명이 힘들다.

주저앉으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이 조바심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상처 치료란 명목으로 풀어지고 싶지 않다.

차라리 혹독한 싸움을 이어나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레이는 웃기지 말라면서 호통을 쳤지만, 다행히 대스승은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술을 마셔도, 명상을 해도 항상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대스승을 바라보자, 그는 탄식에 가깝게 읊조렸다.

“전장의 공기가 아니면 이제 선잠조차 청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는가? 기구한 운명이군. 고집불통에 호전적인 성격마저··· 마치 토다르드를 처음 가르치던 시절이 떠오르는구나.”

“대스승, 설마 이 녀석을 데려갈 생각은 아니시겠죠?!”

“이 사내는 내버려두면 토드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지도 모른다. 홀로 튀어나가 싸우고, 멋대로 궁지에 몰려 가루에 손을 대겠지.”

“설마···.”

“어려운 문제다. 위험한 임무에 동행시켜서 감시하며 관리하느냐, 아니면 혈기를 참지 못하는 놈을 억지로 머물게 하느냐? 미숙한지고. 빅터, 자네는 정말 다루기 힘든 제자로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만큼 간절한 것이냐? 앞으로도 기회가 많을 것을, 그토록 지체되는 게 두려운가, 젊은 사냥꾼이여?”

“···.”

“나는 분명히 말했다. 그 상처는 최소한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건···.”

“그리고 우리의 뱃길은 꽤나 오래 걸릴 것이다.”

나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대스승의 표정을 풀었어, 그는 허락의 의사를 내보일 때 보이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사이에 어떻게든 완치해보도록 하라.”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나를 이 이상 실망시키진 말거라.”

단언할 순 없다.

나 또한 이것이 철없는 억지라는 걸 알기에.

레이는 대스승의 결정이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예전에 보이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대스승의 입에서 토다르드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어쩐지 불안한 기색을 내비춘다.

입술을 깨무는 것도 그렇고 평소보다 감정적인 상태로 보였다.

“괜찮다, 레이 사저. 무리하진 않을 테니.”

“이미 충분히 무리하고 자빠졌거든? 이번 임무는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지금까지 네가 상대했던 약해빠진 풋내기 마녀들과는 차원이 달라! 심록은 100년 이상 살아온 영악한 녀석이라고! 그런 것도 모르고, 이 등신 같은 게···.”

“그렇군. 미안하다.”

“사과는 나 말고 대스승께 하라고!”

그러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내게로 집어 던진다.

그것이 얼굴을 향해 그대로 날아왔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빠각!

컵 모서리가 이마에 부딪혔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흘러내렸다.

“네 한심한 면상을 보니까 밥맛이 떨어졌어. ···대스승,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저는 먼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마음을 추스르질 못하는구나. 그건 내 말에 불복하겠다는 뜻이냐, 레이 엔쯔이여?”

“결코 아닙니다!”

대스승은 딱히 위협적인 말투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는 순식간에 예를 차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은혜로운 대스승께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해는 한다. 심록은 강대한 적이다. 그런 것에게 소중한 사제를 대동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게다가 네가 평생 쫓아온 철전지 원수를 드디어 처단할 기회가 왔으니, 냉정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거라. 그런 상황일수록 지금까지의 수련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너의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레이여.”

“명심··· 하겠습니다.”

“쯧, 아침부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 이제 전달할 사항은 없으니 다들 쉬도록 하라. 나는 부두로 나가 바람을 좀 쐬야겠다. 그리고 빅터여, 예정대로라면 출발은 내일이다. 그 동안 채비를 해두도록 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대스승은 묵묵히 일어나 술집을 나섰다.

빌어먹을···.

내가 부린 고집 때문에 모처럼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칫···.”

레이는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대로 화가 난 모양이군.

남겨진 그릇을 살펴보니 제대로 식사조차 못한 듯하다.

하지만 그건 유독 나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대스승이 말했던 것처럼, 레이는 흔들리고 있었다.

나에게 잔을 던진 그 순간, 그녀의 손끝이 떨릴 정도로.

‘심록의 마녀, 레이의 원수라···.’

생각해보면 남 말할 처지가 아니야.

불과 며칠 전, 클라르테를 클라리스로 착각하고 마주한 그때를 떠올리면···.

나 또한 눈이 뒤집혀서 앞뒤 가리지 않고 튀어나갔으니 말이다.

레이의 입장에선 열이 뻗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기회가 되면 제대로 사과하는 것이 도리겠지.

“···야, 후배. 이거 어떻게 할 거냐?”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로이드 녀석이 밉살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옆에 있었던 건가?

놈의 수다까지 상대할 여력은 없다.

나는 한마디 해줄 생각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퉤엣! 너랑 어울리면 되는 일이 없다니까, 젠장!”

녀석의 입 주변은 피 투성이었다.

로이드는 입에서 뭔가를 뱉어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이마에 부딪혀 깨진 잔의 파편이었다.

하필 그게 먹던 음식 속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너도 참 모를 놈이다. 임무에서 제외되면 목숨 부지했다고 좋아해야지, 괜히 끼워달라고 대스승의 눈에 나? 하여간 머저리 같은 놈. 요령이 없구만. 하, 그래도 내가 따라가 줄 거라곤 기대하지 마라. 나는 여기서 느긋하게 몸을 치료할 테니까 말이지. 아리따운 아이라, 클라르테 아가씨랑 함께 지내면서 눈 호강이나 하겠다, 이 말씀이야.”

로이드는 한 동안 입에서 피거품을 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 꼴이 어이가 없어서, 나는 녀석이 아직 눈치 채지 못한 사실에 대해 힌트를 주었다.

“그 뿐만이 아닐 텐데.”

“엉?” “한 사람이 더 있지 않나?”

“어? 어··· 어?!”

“그래. 너는 그 동안 도리스와도 함께 지내야 할 거다.”

로이드는 그제야 절규했다.

덕분에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가라앉은 마음을 풀 수 있었다.

10.

저녁 무렵, 아이라에게 부탁했던 도끼의 재련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찰나···.

드디어 일전의 볼일을 끝마친 도리스가 돌아왔다.

그녀는 귀환과 동시에 당장 지하실에 모여있던 우리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대스승 크레이그, 명하신대로 도펠죌트너Doppelsöldner들과 합의를 봤습니다.”

“그래, 도리스여. 마침 잘 와주었다. 거래에 이변은 없었는가?”

“처음에 제시한 액수보다 더 많은 금화를 원하더군요. 뭐가 그리도 욕심이 많던지.”

“이미 상정한 바다. 그들은 그만한 가치를 하지.”

“후후, 하긴 평범한 인간 치고는 제법이기 하죠.”

“언제부터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나?”

“언제라도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호오?”

“그런 농담을 하더군요. 내일 아침이라도 좋다던가?”

그러나 도리스는 농담을 싫어한다.

대스승도 나와 같은 불길함을 느꼈는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설마 거래 상대에게 심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설마요. 저라도 그 정도 인내심은 있답니다.”

“다행이군.”

“쓸모없는 매부리코를 잘라준 것뿐이에요. 덧붙여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도.”

“도리스여···.”

“어차피 대금은 무사히 용병들에게 돌아갈 테니 문제없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아참, 그 중개인이 제 엉덩이와 어깨를 슬쩍 더듬었다는 걸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흐음.”

“예의를 모르는 사내들은 질색이에요. 그런 것들은 살 가치가 없죠. 후후후···.”

도리스는 입가를 슬쩍 가리면서 미소를 숨겼다.

잔혹무도한 면은 여전하군.

벽에 기대고 있던 로이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치부터 살폈다.

만에 하나라도 허튼 짓을 하면 자신에게 돌아올 대가를 상상하기라도 했나?

그건 그렇고 방금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 대화중에 생소한 단어가 끼어 있었다.

“로이드. 혹시 도펠죌··· 어쩌고가 뭔지 아나?”

“아아, 그거 말이야? 급료가 더럽게 쌘 전투 집단 이름이지.”

“용병 말인가?”

“그래. 우리들 마녀 사냥꾼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임무가 있으면 이따금씩 고용하기도 해.”

“어둠의 존재와 싸우는데 보통 사람을 끌어 들인다고···.”

“보통은 아니지. 도펠죌트너Doppelsöldner란 이름이 장식이 아니라면 말이야.”

“대단한 자들인가?”

“용병에게 유명세는 즉 실력이야. 어떤 의미에선 우리보다 경험이 풍부하지. 하지만 말이야, 내 경험상 대체로 그런 놈들 중에 제대로 된 자식은 없더라.”

로이드는 팔짱을 꼈다.

이것은 녀석이 뭔가 마음이 안 들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는 예전에, 클라르테를 만난 경유지 마을에서 경비단장을 대면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놈들은 남들보다 금화를 두 배 더 받는 만큼, 목숨도 남들보다 두 배 헤프게 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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