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60화 (60/186)

용병의 장(4)

6.

며칠간은 무던한 하루를 보냈다.

지붕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었고, 간편식 대신에 매 끼니 성찬에 가까운 요리를 먹을 수 있었지.

아이라에게 감사한다.

그녀는 내가 혹여 불편하진 않을까 항시 신경을 써주었어, 가능한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주려 부단히 노력했다.

피로가 쌓였던 탓에 입 안이 조금 헐었다고 하니 곧바로 먹기 편한 죽으로 메뉴를 바꾸어 주었지.

‘레이 사저에게도 의외의 일면을 엿보았다.’

칼을 잘 다루니까 당연히 바느질도 수준급이겠거니 짐작은 했지만···.

자수를 놓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생전의 아내도 이 정도까지 코트를 손질할 실력은 못되었다.

불과 하루 사이, 너덜너덜했던 코트가 눈에 띌만큼 말끔해져 있었다.

가죽은 어디서 공수했는지를 묻자, 레이는 취미삼아 모아둔 옷감이 있었다며 적당히 말을 돌렸다.

‘어느 쪽이 취미였는지 말해주진 않았지만.’

왜 수선이 특기라는 걸 굳이 숨기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기가 센 여장부라 해도, 설마하니 수집품으로 조잡한 천이나 가죽을 모을 리는 없겠지.

하여간 이상한 구석에서 부끄러운 타는 녀석이다.

손수 공들여서 무두질을 한 흔적이 뻔히 보이는데, 이 정도면 당당히 으스대도 괜찮을 것을 말이다.

끝까지 레이는 내 감사인사에 별거 아니라며 괜한 고집을 피웠다.

‘클라르테는 여독에 취해 깊이 잠들었던가?’

무리도 아니지.

아무리 의사 일에 익숙해져 체력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이었다.

특히나 클라르테는 마음이 한계에 달해 있었어, 그 동안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으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클라르테는 아직 외지인 취급이라,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독방에서 휴식과 구금을 겸해야 한다 했으니까.

가뜩이나 대하기 어려운 그녀였기에, 나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지.

‘평소 그대로였던 건 로이드뿐이군.’

너무 멀쩡해서 문제였지.

어떤 임무인지는 몰라도, 지금 도리스가 자리를 비운 게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놈에게 처참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이틀째 저녁 시간 무렵이었다.

로이드는 대스승과 레이, 그리고 아이라의 앞에서 우리의 임무 진행 과정을 아주 과장해서 설명했다.

수다쟁이라 비하하기엔 언변이 화려하고, 떠벌이라 얕보기엔 묘사가 탁월했다.

만일 내가 그 이야기의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도 정신없이 녀석의 허풍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겠지.

덕분에 술맛은 살았지만, 무슨 영웅담처럼 지껄이는 통에 쓴웃음이 절로 났다.

결국 로이드가 멋대로 살을 붙인 부분을 내가 나서서 정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나는 뒤늦게 후회한다.

조금이라도 일찍 놈의 입을 닫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말이다.

녀석이 쓸데없이 자세한 부분까지 말해버렸기 때문에, 나는 대스승과 레이에게 ‘그림자’를 둘렀던 것을 들키고 말았다.

그래서 한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지.

“가루를 썼다고? 그걸 몸에 두르고 중합체와 싸웠어? 너 제정신이야? 그건···!”

“레이, 잠깐 진정하거라.”

“하지만 대스승!”

“잠자코 있거라. 그걸 타이를 역할은 나에게 있다. ···빅터여, 그림자를 두르는 건 아직 너에게 이르다.”

그것은 본디 이븐 가지의 분말을 다루는데 충분히 숙련된 사냥꾼에게만 허락된 비전의 시술이었다.

자칫하면 너무 많은 감정을 소모해 다시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다고···.

“명심하거라. 오랜 단련을 거쳐 심(心), 기(技), 체(體)··· 이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우리에겐 비로소 그것을 두를 자격이 주어진다.”

“하지만 대스승,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서 가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우쭐대지 마라.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다. 그게 자네의 온전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해. 너는 단지 정체모를 음습한 기술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지나치게 오만한 거다.”

“···.”

“내 경고를 허투루 듣지 말거라. 한 번 무사했다고 해서 다음도 그럴 거라곤 생각해선 안 된다. 지금껏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지. 하나같이 재능이 넘치는 훌륭한 사냥꾼들이었다. 하지만 빅터··· 자네와 같이 강한 무력에 매료된 자는 반드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아.”

분명 이해는 했다.

하지만 납득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묵묵히 이 길을 견뎌온 것은 전부···.

어둠에 숨어사는 놈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였으니까.

“혼자만의 힘으로 오거급 중합체를 쓰러뜨린 것은··· 분명 놀라운 기지이다. 칭찬받아 마땅한 무공이지. 근래 어떤 용사나 선배 사냥꾼도 그런 결과를 내놓은 적은 없었다. 자네는 이미 우수한 전사다. 부족한 것은 경험과 지식뿐이지. 임무를 하나씩 마무리할 때마다 몰라볼 정도로 늠름해지고 있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실감하고 있네. 이 나이를 먹고 후진을 양성하는 즐거움이 새삼 느껴지는군. 허나···.”

그러나 대스승은 나의 이런 맹렬함이 기쁜 한 편, 무슨 어린애를 보는 것 마냥 염려하기도 했다.

“내가 자네의 진면목을 보았다면, 더욱 더 나는 말려야만 할 것이다. 성장을 억지로라도 늦출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른다.”

“어째서입니까?”

“불씨를 머금은 장작은 오래 타는 것이 좋다. 몸집이 클수록 천천히 온기를 전해주지. 하지만 같은 부피의 짚더미는 순식간에 타들어간다. 그 화력은 무시무시할 정도지.”

“···제가 짚이란 말입니까?”

“아니기 만을 빈다. 나는 자네가 오래도록 전우로서 싸워주길 바라네. 그리고 그건 네 사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레이여.”

“네, 대스승.”

“내가 이 이상 말해봐야 단순히 잔소리가 될 뿐이다. 나머지는 네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전해주거라. 이 사안에 대해 너 이상으로 간절한 사연을 가진 이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레이는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한 번 소모된 감정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랬지.”

“그게 전부 소진되어 버리면 어떤 최후가 기다리는 지는?”

“···모른다.”

“그럼 그 꽉 막힌 귀를 좀 열고 똑똑히 들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이야기니까, 하고 레이는 운부터 띄웠다.

표정이 심각해, 모든 마음의 힘을 이븐 가지의 분말로 승화시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만다는 걸까?

“···마음이 증발해버린 육체는 그와 함께 육체까지 존재를 잃어버리고 말아. 끝내는 망령이 되고 말지.”

“망령이라고?”

“그래. 기억이나 사고조차 하지 못하는 그림자의 괴물이지. 오로지 마기만을 쫓아 온 세상을 정처 없이 배회하고, 피아 식별은커녕 닥치는 대로 살육하는 마물과 다를 게 없어져.”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레이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마치, 그런 사례를 몇 번이나 지켜봤다는 듯이.

“우리는 그걸··· 게슈펜스트Gespenst라고 불러.”

일전에 잠깐 들어본 그 이름이다.

설마하니 이런 속사정이 있을 줄은···.

“잘 들어, 덩치. 이게 내가 손가락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림자를 두르지 않은 이유야. 우리가 끝없이 단련하는 건 전부 그것 때문이지. 우린 사냥꾼으로서, 인간으로서··· 가루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힘과 기술로 싸워야 해. 그게 대스승의 가르침이야. 그리고 너는 우리 문하에 속해있고!”

“진정해라, 레이. 대스승과 네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까.”

“아니, 넌 몰라. 나는 너를 만나기 전에도 선배 둘이 망령이 되는 꼴을 보았어.”

“나는 다르다. 서두르지 않고 이 힘을 다루는 법을 익혀 나갈 테니.”

“그리고 두 사람 다 너와 같은 소릴 했지.”

“···.”

“예외는 없어. 이븐 가지의 분말에 홀린 사냥꾼은 항상 그렇게 되고 말아. 그러니 널 막겠어. 허튼 짓거리로 또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두지 않을 거야.”

레이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감정이 북 받아쳐,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전해지는 감정에서도 과거의 후회와 한이 담겨있었다.

“빅터여, 토다르드가 파문당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예? 그도 그림자를···?”

“어리석은 놈이 억지를 부렸지. 녀석에겐 재능도 근성도 있었다네. 한때는 레이가 존경할 정도로 우수한 사내였지. 하지만 단 하나, 자신에게 지독할 정도로 가혹했던 게다.”

“···토드 선배는 무력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지금의 너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지. 나중엔 가루를 쓰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졌어.”

“하지만 최근에 만났을 땐 상태가 괜찮았지 않나?”

“그건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야. 마침 이 일대의 분란이 딱 멈춰준 덕이지.”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인솔자라는 건, 어디까지나 최전선에서 물러난 사냥꾼에게 주어지는 역할이야. 앞으로 그는 싸울 수 없다고 상부에서 판단한 거지. 아니, 싸워선 안 된다고.”

그녀는 은연중에 말하고 있었다.

나까지 그런 상태가 되어선 안 된다고.

“알겠느냐, 빅터여. 우리는 스스로의 몸을 좀먹어 가면서까지 마와 대항하고 있지만, 애초에 이것은 인간에게 허락되는 힘이 아니다. 절제가 없다면, 그건 쓰지 않는 것만 못하다.”

진심어린 걱정과 신뢰···.

두 사람의 감정은 흡사 거대한 파도와도 같았다.

나를 가족처럼 여기고 있어, 이들은 내가 첫인상에서 느낀 것과는 달리 너무도 다정한 감성의 소유자들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진다.

마녀 사냥꾼이란··· 사실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자들의 모임이 아닌가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결국 나는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그들의 앞에서까지 억지를 부릴 정도로, 나는 아직 마음의 잔량이 넉넉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속내를 숨긴다.

본심을 차마 드러낼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내가 토드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당장 레이는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겠지.’

두 사람의 의도는 안다.

게슈펜스트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지했다.

그러나 내 마음 한편에선 그마저도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내 진심이었겠지.

나는 파멸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아내와 딸을 찢어발긴 그 마물을 처단할 수만 있다면, 클라리스의 숨통을 내 손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르리라고.

그래서 깊이 생각했다.

클라르테 앞에서 보인 나의 주저함이 단지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이길.

동시에 바랐다.

부디 내가 겁을 먹었거나 망설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를.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저녁 식사를 끝내고서···.

나는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7.

자각몽.

한 눈에 꿈이란 것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현상을 의심한다는 마음가짐이 몽환의 세계에 까지 이어졌던 것일까?

아니, 그것은 그만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이게 현실일 리 없다.’

우선 참수된 아이라의 시체가 있었다.

발가벗겨진 채, 홀의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였다.

그녀의 머리는 꼬챙이에 꿰뚫린 상태로 보란 듯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지.

다음은 레이였다.

사저의 시신이 사지가 잘린 채 복도를 굴러다닌다.

애처롭게도 자신이 애용하던 칼날이 가슴을 관통당해 숨이 끊어져 있었다.

도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방에 육편이 있다.

처참한 악몽인 만큼, 그 살점들이 그녀의 파편이란 상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쓰러진 대스승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끊임없이 뭔가를 쑤셔 박는 붉은 머리의 그림자가 보인다.

클라르테였다.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뒤를 돌아본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다.

클라르테가 아니다.

그것은 두 눈을 스스로 파낸 클라리스의 얼굴로 변했다.

녀석은 표독스러운 미소와 함께 속삭인다.

찌꺼기야.

평생 악몽에 시달리길 바라.

···거기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8.

이른 새벽.

눈을 뜨자마자 나는 침대에 토악질을 했다.

“빌어먹을···.”

내가 게워낸 음식물과 전날의 술 때문에 이부자리가 엉망이 되었다.

이래선 시트를 갈아준 아이라에게 면목이 없군.

나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찬물로 머리를 식힐 셈으로 방을 나섰다.

‘왜 이제 와서 이딴 개 같은 꿈을···.’

사실은 알고 있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다.

몸이, 마음이··· 나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삼일 정도 쉰 것만으로 이 지경인가? 한심하군.’

위기감이 들었다.

대스승과 레이에게 받는 안락이 거북하다.

로이드에게 느끼는 친밀함에 속이 뒤틀린다.

나는 행복을 원하지 않아.

그래서는 안 된다.

여기서 안주해버리면, 클라리스에 대한 증오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것이 부작용인가? 이게 이븐 가지의 분말을 남용한 결과란 말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이건 단지 나의 나태함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내 분노가 이 정도로 하찮을 리 없다.

그 증거로 아직 나는 악몽을 꿀 수 있어.

내 복수자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증오의 활시위를 클라리스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뒤숭숭한 꿈자리 덕분에 나는 겨우 삶의 목표를 되새겼다.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지.

나는 휴식을 바라지 않는다.

세상을 떠돌며 마의 존재와 싸우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게슈펜스트라, 그게 지금의 나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군.

···상황은 나에게 좋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날이 밝자, 대스승은 우리를 불러 모아 무거운 주제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집결지에 날아온 한 통의 편지를 보여주더니.

“동방에서 소란이 일어났다고 하는군.”

동방.

클라리스가 한때 방문한 대륙···.

동시에 레이의 고향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바로 되물었다.

“대스승, 대체 무슨 일이···.”

“대스승 알베르트와 그쪽의 동지들이 한곳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예?”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심록의 마녀가 나타났다고 한다.”

“정말 입니까!?”

심록, 그 단어에 레이가 격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대스승의 앞이라는 것마저 잊은 듯, 테이블이 요동칠 만큼 거칠게 일어섰다.

“···드디어!”

“그렇다, 레이여.”

그때, 대스승은 입가에 미묘한 곡선을 그렸다.

약간의 기쁨, 그리고 은근한 희열···.

그것은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마녀 사냥꾼의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의 제자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네가 복수를 할 기회가 찾아왔구나.”

노쇠한 늑대가 내뱉는 숨결처럼, 흉포함을 억누른 목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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