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48화 (48/186)

기만의 장(7)

9.

로이드가 이탈한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그 자식에게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많이 혼란스럽겠죠. 제 기억과 경험과 뒤죽박죽이 되어서···. 온전히 받아들이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곧 납득하실 거예요.”

“···.”

“당신은 잃어버린 가족을 갈구했잖아요? 지키고 싶은 고향이 필요했고요. 저는 그 모든 걸 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 우리의 일원이 되세요.”

라비나에겐 정신감응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는 듯 보였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당장 라비나는 내가 반항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다.

완벽하게 세뇌가 먹혀 들었다고 여기고 있을 테지.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처음에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혀 그들을 진심으로 가족처럼 느꼈지만···.

결국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이 모든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섬의 민족과는 다르게, 나는 완벽하게 기억이 이식되지 않았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허술할 리 없다.

아니, 어쩌면 내가 특별한 것인지도 모르지.

정안과 결합한 마녀 사냥꾼의 두뇌는··· 이런 마술적인 공격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니, 드디어 라리네한테도 오라버니가 생긴 건가요?”

“그렇단다. 라리네. 빅터, 이 아이를 안아주세요. 자, 어서요.”

적의를 푼 커다란 눈동자가 무방비하게 내게 비춘다.

라리네.

이 소녀는 순진무구하다.

이방인에게는 마구 비명을 지르지만, 자신의 가족에겐 그 누구보다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인다.

라리네는 나에게 다가와, 허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완전히 경계를 풀었군.

마치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태도였다.

그리고 나도 그렇지.

라비나는 일곱 살이나 아래인 동생을 마치 딸처럼 길렀다.

라리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지.

어머니의 목숨을 대가로 태어난 미숙아였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빅터, 이로써 당신은 이제 우리의···.”

그녀의 표정에서 강한 갈망의 욕구를 느낀다.

가족, 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나를 일원으로 받아들일 셈인가?

라비나는 그것을 바란다.

내가 마녀 사냥꾼으로서의 모든 걸 내버리고 자신들과 함께하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 커, 아악!”

“라리네?!”

라비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지금 왼팔로 동생의 목을 거머쥐고 있으니까.

참으로 작고 가녀린 모가지다.

손아귀에 약간 힘을 준 것만으로도 바들거리며 떨어대는군.

팔을 베고, 배를 갈라 내장을 뜯어낼 때는 괜찮았어도 숨이 막히는 것까진 견딜 수 없나?

아, 그렇지.

라비나가 보여준 기억 속에서 단서가 있었다.

위대한 뭔가에게 뱃속의 장기를 바치는 순간까진 진통 효과가 있는 약을 대량으로 처먹었을 테니까···.

지금은 효과가 풀려 모든 아픔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라비나?! 어떻게 된 거야? 이방인을 설득하지 못한 건가?”

“이 자식, 무슨 짓을!”

동행한 부족의 전사들이 뒤늦게 소란을 떤다.

저 두 녀석의 이름은 알고 있다.

이것도 라비나의 기억을 통해서 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죠? 당장 그 아이를 내려놔요! 라리네는 내 하나뿐인···!”

우득.

나는 그 순간 라비나의 얼굴을 보았다.

넋이 나갔군.

나와 목이 부러진 아이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떤다.

이건 현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자의 표정이다.

그녀는 단지 허망한 얼굴로 내게 되물을 뿐이다.

“···왜?”

라비나의 뺨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담담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마녀 사냥꾼이다.”

슬픔이 몰려온다.

가혹할 정도의 무거운 감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녀와 같이 라리네의 모든 성장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이처럼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겠지.

그러나 이 와중에도 나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에게 흘러들어온 것은··· 섬의 민족의 슬픔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순물이 있었다.

그것은 나를 조종하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실수였다.

“당신은 봤을 거야! 우리의 아픔을 이제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을···.”

“물론이다. 가슴이 저며 올 만큼 잘 알아.”

“그런데 왜에에에에!”

“내 가족은 두 사람 뿐이다.”

“그딴 건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었어! 당신은 가족을 원해! 그리고 나와 그 아이에겐 든든한 오빠가 필요했다고! 우린, 우리는 서로 결핍된 것을 채워 줄 수 있었는데···.”

그랬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굉장히 평온한 삶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

예전의 나처럼···.

“어째서야? 감정을 공유하고, 마음이 이어졌는데도 왜 우리를 거부하는 거야아아아!?”

“···그래. 전부 받았다. 너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는 전부 내 가슴 속에 새겨졌어. 하지만 그 이상의 것도 받았지.”

“그럴 리···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중합체의 일부로 바쳐진 재료 속에 담긴 의식까지 함께 건네받았다. 바로, 지금껏 너희가 죽여 온 자들의···”

불행한 민족, 진심으로 동정한다.

복수조차 원만하게 하지 못하는 신기한 힘 때문에, 그들은 나락에 빠졌다.

남을 죽이면 그 고통까지 빨아들여 업보를 쌓고 말지.

“애써 외면했겠지. 목숨이 끊어져가는 그 순간까지 너희를 원망한 자들의 외침을···. 하지만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너희의 이 힘은 어떤 감정도 예외 없이 받아들일 테니까.”

그들은 어느 시점에서 인간의 문드러진 증오까지도 공유하기 시작했다.

아스트랄과 이어지면서, 자신들이 그렇게 혐오하던 살육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이 정신감응은 저주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수확한 이들의 마음까지 짊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지금도 내 안에서 네가 죽인 자들이 말하고 있다. 너흴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아, 아아···.”

“그 격노는, 너희의 오랜 슬픔을 넘어설 정도로 크다. 그리고 주입된 애정마저 찢어버릴 만큼 날카롭지.”

“그만해!”

라비나는 다시금 나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나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다시금 마음을 안정시키는 기억과, 그윽한 애정이 흘러들어왔다.

이것은 그녀의 오라비가 가지고 있었던 기억의 단면들이겠지.

그리운 모습이 펼쳐진다.

그것은 내가 예전에 가족에게 품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애절한 무엇인가였다.

덧씌울 생각이군.

그레이스의 얼굴을 라비나로.

그녀의 손을 잡을 아델을 라리네의 것으로 수정하려 한다.

용서할 셈인가?

방금 여동생의 목을 분지른 나를?

아니, 그것에는 보다 안쓰러운 속셈이 있었다.

“당신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로잡고 말겠어. 조종해줄 거야. 곱게 끝내지 않겠어. 죽는 순간까지 죄책감을 주입해서 언제까지고!”

“···소용없다.”

나는 내 몸에 닿은 라비나의 손목을 도끼로 잘라냈다.

“아아아악!”

“라비나!”

“이방인 새끼!”

여기서 안락을 바라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걸 부정해버리고 만다.

대스승과 약속했다.

레이와의 유대를 나누었다.

다시 한 번 토드와 술자리에서 떠들고 싶군.

도리스는 끔찍했지만 어떻게든 이식을 끝마쳤다.

로이드··· 나는 녀석과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를 살린 빌헬미나의 죽음을 허투루 돌릴 순 없지 않은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 지금까지 모든 고난을 견뎌냈다.

이제 와서 그걸 내다버릴 순 없는 것이다.

“거짓말쟁이, 당신은 가족을 사랑 하는 게 아니야! 그 때문에 복수를 자청하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다.

스스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내가 말해줄까? 당신의 머릿속 깊은 곳엔 가족 이상의 것이 있었지. 자신조차 모르는 이성의 이면 어두운 곳에···.”

“상관없어.”

라비나는 나와 마주하며 겁에 질렸다.

그 잘나신 정신감응 능력으로 어떤 걸 제대로 본 모양이군.

짐작이 간다.

뭘 보았는지 알만하다.

“그 붉은 머리의 여자··· 그게 당신에게 남은 전부? 내가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집념은··· 전부 거기서 나오는 거야?”

라비나는 겨우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에게 더 이상 그깟 힘이 통하지 않는단 것을.

“이제 알았어··· 당신은 처음부터 망가졌던 거야. 고향을 잃어버린 그 순간,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공감하는 마음이 고장나버린 거였어.”

“멋대로 떠들어라.”

“괴물··· 당신은 괴물이야!”

라비나의 절규와 함께, 주변을 포위한 녀석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다.

화살의 비가 덮쳐든다.

하지만 내 수중에는 그것들을 막아낼 방법이 있었다.

힘을 잃고 축 늘어진 라리네의 몸은 그 용도에 쓰기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만!”

동생에게 사정없이 화살이 박히자, 라비나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 틈을 노려, 바로 도끼를 휘두른다.

하지만 냉정을 잃은 라비나는 거리와 상관없이 거미신의 힘을 지면에 내리고 있었다.

“큭!”

눈앞에서 공기가 일그러진다.

이건 피할 수 없어.

급히 몸을 숙였지만 왼쪽 어깨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도려 나가졌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라리네를 손에서 놓아야만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다시 한 번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보이지 않는 폭발이 라리네의 몸을 산산조각 내어, 그 아이의 몸을 이루던 체액과 내장이 라비나에게 흩뿌려졌다.

그녀는 그것으로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 아아아아아아아아!”

라비나에겐 심한 짓을 했다.

이렇게까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것을 돌이킬 순 없다.

라비나는 잘린 손으로 나를 겨냥한다.

콰앙!

콰과광!

바위산 너머에서 정밀한 포격이 나에게로 때려 박힌다.

한 걸음 떼자마자 아슬아슬하게 바닥이 폭발한다.

이젠 다리를 멈출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줄이면 나도 으깨진 고기가 되고 말 것이다.

‘아뿔사!’

하필 뒤편에서 활을 겨누는 놈이 있다.

사수의 입장에선 절묘한 각도와 거리였다.

녀석은 내 동선을 노리고 시위를 당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순간···.

“크··· 케겍!”

선혈, 여우머리 가죽과 함께 활잡이의 목이 떨어졌다.

놈의 등 뒤에는 달빛에 빛나는 희미한 실선이 일렁이고 있었다.

머리를 잃은 사수를 언덕 아래로 차버리며, 키가 큰 그림자가 나타났다.

“여우 대가리 놈들, 벌써부터 날 잊으면 섭섭한데?”

로이드 자식, 겨우 떨어뜨려놨더니··· 기어이 다시 돌아왔군.

녀석은 몸을 날리더니, 나를 포위한 무리를 배후에서 기습하기 시작했다.

작살이 난 열 개의 손가락으로 모자랐나?

아예 팔찌에 은사銀絲를 달아서 휘두르는군.

하지만 그 솜씨는 절묘했다.

가공할 각력을 이용해 적에게 접근한 다음, 양손으로 은빛 실을 목에 휘감아 그대로 떨어뜨려버린다.

“후배, 여긴 내가 맡는다!”

그러니 나더러 마녀를 어떻게든 해보라는 거군.

중합체의 장거리 지원을 받고 있는 라비나를 처리할 역할을 맡긴 것이다.

망할 자식, 무리한 주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허나, 덕분에 포격을 피하는데 여유가 생겼다.

슬슬 조준의 정확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는군.

로이드의 등장에 꽤나 동요한 눈치다.

그래서 였을까?

라비나는 전략을 바꾸었다.

“아라크노아!”

지금까지 숨겨왔던 라비나의 마기가 해방되었다.

그것은 바위산 꼭대기까지 치솟더니, 이윽고 거대한 마물을 불러들였다.

오거급 중합체···.

성스러운 거미신, 두 마리째의 아라크노아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마기를 집약했나?

비료더미 폭발로 쓰러뜨렸던 놈보다 움직임이 훨씬 빠르다.

이대로라면 채 오십을 새기도 전에 코앞까지 닿겠군.

‘하지만 포격은 멈췄다!’

이 틈에 마녀를 친다.

중합체가 이 자리까지 도달하기 전에, 조종하는 라비나만 무찌른 다면···!

하지만 필사적인 것은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아악!”

“보낼 거 같으냐!”

라비나를 지키기 위해 두 놈이 내 앞을 막아섰다.

둘 다 기억에 있다.

라미오와 라기엘이다.

“꺼져라!”

한 녀석이 내가 휘두른 일격에 머리가 깨부숴지는 사이, 다른 하나가 내 오른팔에 매달렸다.

같잖은 발악이다.

하지만 정신감응을 통해 세뇌된 놈들에게 망설임은 없다.

이어서 몇 놈이 더 달려 나온다.

제기랄, 목숨이 아까운 지도 모르고!

“라비나아아아!”

이게 네년이 원하던 건가?

너는 소중한 동족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게 아니었단 말이냐?

“이젠 상관없어. 너희를 없앨 수만 있다면, 뭐든···.”

라비나의 입가가 달관한 듯 허망하게 웃는다.

동시에 울고 있었다.

그녀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어떤 희생이라도 치룰 셈이었다.

“이제 포기하란 말이다!”

언덕의 사수들은 로이가 처리 중이다.

나는 눈앞의 방해꾼들을 모두 토막 낼 수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 승산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라비나는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마기를 자신의 불경한 피조물에게 쏟아부었어, 결국 가속한 중합체가 들이닥쳤다.

“기어이 끝장을 보자는 거냐?”

“···당신과 할 이야기는 더 이상 없어.”

그녀는 아직 멀쩡한 손끝을 내게로 향한다.

보나마나 공격 명령이겠지.

이렇게 되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제리온, 빌헬미나···. 나에게 저것을 쓰러뜨릴 용기를···!’

라비나에게 전달 받은 기억 속에는, 놈들과 맞서다 전사한 제리온의 최후도 있었다.

사실 본래 이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던 중합체는 둘이 아니라 다섯 마리였다.

제리온은 그 중 세 마리를 쓰러뜨렸지.

단신으로.

어떤 기술을 사용해서.

“후배, 너 설마?!”

멀리서 경악하는 로이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녀석은 역시 눈치가 빠르다.

그래, 너의 짐작이 맞았다.

“그만둬, 이 미친 자식아!”

늦었다.

나는 이미 내 가슴 정중앙으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정안을 집중시키자, 이어서 명치 주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음을 확인한다.

이것은 나에게만 보이는, 본디 존재하지 않는 허상···.

즉,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다.

하지만 분명 뭔가가 있다.

가슴의 구멍을 통해 칠흑과 같은 아지랑이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한 움큼 쥔다.

그리고 예전에 대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기억 속의 제리온이 보여준 것과 같이···.

나는 그림자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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