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47화 (47/186)

기만의 장(6)

7.

그들은 흰 피부에 갈색 머리, 녹색 눈동자를 가진 이국적인 외모의 민족이었다.

선조는 아마 수 세기 전, 바다 너머의 섬나라에서 건너왔다고 추정된다.

자연스럽게 고립된 환경이 개성적인 문화를 꽃피웠고, 동시에 이질적인 언어를 발전시켰다.

타국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탓일까?

아니면 놀라울 정도로 서로에게 공감하는 신묘한 능력을 가진 덕이었을까?

좁아터진 섬 안에서 분쟁은 의미가 없어, 그래서 오래도록 전쟁을 의미하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평화와 사랑, 여유를 뜻하는 단어만이 늘어났다.

타인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모두가 기꺼이 축제에 참여했다.

모든 이웃과 마음이 이어진 평화로운 세계를 상상해보라.

그런 낙원이 아주 잠시 동안의 한때이지만 실제로 존재했다.

그러나 이런 민족의 특성이 부각될 무렵, 영토는 이미 인구의 수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매년마다 섬이 조금씩 가라앉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가 소금물에 좀 먹힌 탓이었다.

인근 깊숙한 바닷가에서 화산이 폭발한 뒤부터는 눈에 띌 정도로 어획량까지 줄어들었지.

‘결국 불행하게도 이 민족은 쫓겨나듯 섬을 떠나야만했다.’

그렇게 해서 오랜 방랑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예전처럼 안락의 영토를 갈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땅, 최초로 도달한 대지는 척박했다.

거의 사막에 가까운 환경이었으리라.

횡단에 도전한 것만으로도 이미 부족민은 절반 이상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여기서 주저 않으면 동포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되고 말아, 멈춰 설 수 없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고된 여행은 그 뒤로도 계속 되었다.’

그러나 모래의 지평선을 넘어서도,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잔혹한 것이었다.

자연은 물론 두려운 것이다.

그 현상은 웃거나 웃지 않아, 사람의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일어나지.

그러나 인간은 그보다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래, 그 어떤 마물보다도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니까.’

지성을 가진 자들은 악의를 가진다.

발달한 지혜는 노예를 탐내고, 무기를 휘두르도록 유도한다.

그들이 마주한 문명인들은 전부 약탈자였다.

예외는 없었다.

소통을 원하고 내민 손길에, 낯선 이들은 언제나 학살로 답했다.

싸움에 익숙하지 못했던 섬의 민족은 일방적인 폭력에 분열 당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대륙 각지에서 흩어져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수 세기가 지났다.

이제 그 후손들은 각 국에 팔려나가 노예의 삶을 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 아무 쓸모도 없었단 말인가?’

도움은 되었다.

그것은 눈치를 살피는데 있어서 그 무엇보다 훌륭한 생존기제였다.

고용주가 무엇을 바라는지, 어떤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지를 파악하는 것만큼은 어느 노예들도 따라가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게 그들은 평화와 온정, 그리고 사랑의 무력함을 몸소 깨달아갔다.

그러나 섬의 민족에게 복수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들의 선천적 정신감응Telepathy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미움조차도 허락되지 못한 것이다.

증오하는 이를 죽여도 그 아픔이 있는 그대로 흘러들어와 자신의 일부가 된다면 어떻겠는가?

의식의 저편에서 모든 걸 지켜본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그건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결국 세대가 지나면서 무기력은 학습되었다.

어느새 복종은 당연한 것으로 변모했다.

이제 이 민족에겐 미래가 없었다.

앞으로도 이대로라면 자유 따윈 영영 찾을 수 없겠지.

‘그래서 도망친 건가?’

민족 단위의 대 탈출이 시작되었다.

같은 혈통을 가진 민족이 가진 공통의 능력이 빛을 발할 때였다.

한 곳으로 집결하자.

아무도 원치 않는 구석진 땅에서, 우리만의 영토를 구축하자.

그 염원은 모든 섬의 부족들에게로 전달되었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난 끝에, 그들은 겨우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것이 이 바위산 아래의 마을···.’

그러나 싸움에서 도망친 이들이 모였다고 해서 과거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투쟁을 포기한 자들의 말로는 언제나 이런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자 이치인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인가, 그들은 여우를 섬기게 되었다.

약삭빠르고 영리하며, 언제나 숨어 지내면서도 교묘하게 음식을 훔쳐내는··· 그런 처신 좋은 동물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다른 포식자와 경쟁하기엔 너무나 약해, 그렇다면 도망치고 숨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좋았던 건 아니었어요.’

내 의식에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건··· 그 여우 머리를 쓴 여자인가?

‘그래요. 저는 라비나라고 합니다. 이름 없는 부족의 딸이자, 우리 무리 중에 가장 강한 정신감응 능력을 가진 자이기도 해요.’

나는 그녀에게 묻는다.

나에게 어째서 이런 것들 보여주었느냐고.

‘당신이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길 바랐어요. 지금껏 이런 일은 없었으니까. 그대는 잿빛늑대이면서도··· 우리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힘이라고 하면 쓸데없이 감정에 공감하는 이걸 말하는 건가?

‘그렇답니다. 우리는 그걸 연결Link이라고 부르지만요. 그리고 당신은··· 예전에도 이것과 같은 경험은 한 것이 있는 것 같군요. 본래부터 미약한 힘이 있었지만, 그걸 계기로 감응력이 점점 강해진 거겠죠.’

그딴 건 관심없다.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이나 말해.

나는 너 따위와 소통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 봤을 겁니다. 우리 민족의 슬픔과 고통을···.’

이것이 일종의 정신공격이라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누적되어 온 것일까?

그들의 역사는 단지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찌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공감했을 것이다.

그들이 침략자들에게 가졌을 분노가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당신, 아내와 딸을 잃었네요. 친구에게 배신당해, 모든 걸 빼앗겼어.’

그래.

라비나라는 여자도 나의 기억을 엿본 모양이군.

‘그래서 늑대가 되기로 한 거군요. 가여운 사람, 아직 자신에게 남아있을 안락마저도 모두 내다버리고···.’

닥쳐.

나를 동정하지 마라.

단막적인 기억만으로 얻은 걸로 날 판단할 셈이냐?

고작 그걸로 나의 증오를 이해한다고?

‘힘들겠죠. 이 능력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단지 아는 것뿐. 그래서 우리는 언제까지고 고립당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집어치워.

이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마녀와는 다릅니다.’

개소리.

나는 너희의 중합체를 보았다.

수많은 사람의 시체로 만들었을 그 끔찍한 괴물을···.

그동안 얼마나 무고한 자들의 생명을 빼앗은 거지?

역시 네놈들은 사악하다.

그렇게 때문에 가장 중요한 기억을 차단하고 나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내 말이 틀린가?

‘그건··· 당신의 의식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마음을 조금만 연다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당장 보여 봐라!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역사는 불과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이 보금자리로 삼은 바위산 아래의 마을이 막 번성해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떻게든 농사를 했군.

땅이 많이 비옥해졌다.

그 동안 개척하느라 죽은 주민이 많아, 뒷산에는 묘지까지 생겼다.

‘그래요. 당신의 고향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비극이 일어났다.

마을의 존재를 알아차린 산적들이 급습해온 것이다.

‘저는 그때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덧붙여 열 살 위의 오빠까지···.’

이제 기억의 흐름은 라비나의 것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부족의 어느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과묵했지만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고··· 그래요. 그쪽과 묘하게 닮았어요.’

멋대로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지 마라.

‘미안하군요. 하지만 정말이랍니다. ···오빠는 마을 내에서 유일하게 적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기도 했죠.’

그런데 사람들이 그 말을 듣지 않았군.

‘네. 우리 민족은 모두가 겁쟁이에요. 오래도록 도망치고 숨는 것에만 치중해왔습니다.’

마치 여우처럼.

‘그래요. 그렇기에 우리는 여우를 상징으로 섬겨왔죠.’

이제 아니시다?

‘···지쳤답니다. 오빠가 산적과 침략자들에게 난도질당했을 때, 저는 그런 삶의 방식에 진저리가 났어요.’

그래서 힘을 썼군.

‘제 감응능력은 뛰어났답니다. 부족 내 역사상 가장 뛰어났죠. 그걸로 마을 사람들을 감화시켰어요.’

정확히는 세뇌겠지.

너는 그들의 기억을 강제로 바꾸고 과잉된 억지 감정을 쑤셔 박았어.

‘···당신의 정신은 굉장히 뛰어나군요. 거기까지 간파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더 뭘 숨기고 있나?

‘그 다음부턴 별 거 없어요. 제 증오를 받아들인 모두의 간절한 마음이··· 그 분을 불렀죠.’

그분?

‘당신들 늑대는 아스트랄이라고 부르는 모양이군요. ···아아, 그분의 은혜는 이루 다 말 할 수가 없어요. 가혹한 제물 대신 우리의 내장 일부를 바치는 것만으로도··· 그분께선 자비롭게 우리에게 가호를 내려주셨으니까.’

가호라고?

‘힘의 원천을 숨기는 방법이죠. 당신들이 마기라 부르는 그것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몸속에 품고 있었어요. 다른 자들은 그걸 뿜어내며 써먹고 있나요? 비효율적이에요. 우리는 그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써먹을 수 있죠.’

역시 너는 마녀였군.

‘좋을 대로 불러주세요. 하지만 그건 저 혼자만이 아닐 테니.’

뭐라고?

‘우리는 무리 그 자체랍니다. 저와 정신이 이어진 자들은 모두 그 분의 권속입니다. 그 위대하신 분은 우리에게 복수할 힘과 지혜를 내려 주셨어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여우 따위를 숭배하지 않아요.’

거미가 되기로 했단 말인가?

‘숨는 다는 것까지는 똑같아요. 하지만 꼼짝없이 당하지 않죠. 오히려 끌어들일 거야. 침략자에게 덫을 짜고, 들어온 순간 독액을 머금은 송곳니로 숨통을 끊어줄 겁니다. 그래요. 우리는 거미가 되기로 했어요.’

사역마가 가지는 형태가 마녀의 정신에 영향을 받는 건 이미 안다.

그건 몇 번이고 경험했지.

이번 중합체가 거미의 모습인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우리의 사역마는 다르죠. 소중한 부족민을 희생시킬 순 없었어요. 그래서 예전에 오빠를 죽인 산적들을, 선조들을 노예로 부렸던 상인들을··· 마지막으로 수시로 침략해온 인근에 사는 벌레들을 전부 끌어들였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게 100인 이상의 부피를 가진 오거급 중합체라고?

‘허나 이제 그들은 우리의 수호신입니다. 침략자의 살점과 피는 성스러운 거미신 아라크노아로 현신했습니다.’

비극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낀다.

이게 녀석이 말하는 정신감응 능력의 힘인가?

나는 어느새 그들을 동정하고 있었다.

저편의 존재가 그녀에게 손을 건넨 것이 이해가 가, 그들 민족에게 어떤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요. 우리에겐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필요해요. 어느 침략자들에게도 지지 않을 강대한 힘이···.’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8.

“···이제 아셨겠지요?”

알다마다.

나는 반쯤 녀석의 꾀에 넘어가버렸다.

그것은 그레이스나 아델라이드에 대한 추억만큼이나 강렬한 기억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눈앞의 라비나가 마치 오래도록 함께 지내온 가족처럼 느껴진다.

주변에 있는 모든 녀석들의 이름조차 하나하나 기억해낼 정도다.

정신감응이라고···.

빌어먹을, 이건 정말이지 끔찍한 능력이다.

그야말로 최악이다.

세뇌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해해주세요. 우리에겐 이유가 있다는 걸.”

“나에게··· 감히 이딴 짓을!”

“우리의 새 가족이 된 걸 환영해요, 빅터.”

라비나란 여자는 나에게 고혹적인 미소를 흘렸다.

치가 떨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또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나 자신이 있었다.

“라리네. 이리 나오렴.”

그녀는 주변을 둘러싸던 누군가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낮에 내가 팔을 베어냈던 그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입된 기억에 의하면 그 아이의 이름은 라리네.

라비나의 동생이자 오늘 막 성인식을 마친 부족의 새 전사이기도 했다.

자매를 이렇게 나란히 두고 비교하니, 확실히 닮았군.

두 사람 다 어머니를 닮아 아리따운 미모의 소유자들이다.

“인사해. 그는 빅터···. 오늘부터 너와 나를 지켜줄 새 오라버니란다.”

내 도끼에 팔이 잘렸던 사실은 금방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라리네가 수줍은 얼굴로 내게로 다가온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대체 뭐냐?

이 빌어먹을 그리움은···.

마음 한편이 뜨거워지는 감정은?

저절로 살의가 일어난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 있는 두 년의 목을 집어 뜯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것과 같은 무게의 애정 또한 생겨나고 만다.

라비나와 라리네, 이 둘과 함께 살아왔던 고난의 시간들이 여지없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다.

‘거미··· 이것들은 진짜 거미였다.’

위장된 여우의 가죽 속은 이미 벌레의 무리로 가득했다.

놈들은 치명적인 무기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가공된 추억이라는 이름의 맹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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