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의 장(4)
5.
태양이 자취를 감추었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밝았다.
하늘에 수놓아진 만월과 별빛이 만들어내는 미약한 반짝임···.
우리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식받은 눈, 정안精眼이 어둠 너머의 세계를 비추고 있었기에.
이제 밤은 나에게 어떠한 장애도 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늘진 세계가 더욱 적나라하게 보인다.
그야말로 백야白夜.
창공의 색이 반전된 잿빛이다.
‘이 숲은 이리도 절경이었단 말인가?’
밤에만 활동하는 동물들이 있다.
그것들은 결코 소수가 아냐, 꽤 많은 종들이 해가 저물어야만 눈을 뜨지.
이유는 많지만, 결정적인 몇 가지가 있지.
우선은 빛이 내리쬐는 시간에는 모든 것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숲의 생태계에서 모두가 강자일 순 없는 건 당연한 이치다.
또한 약자는 도망치고, 숨는 것이 섭리다.
그렇기에 태양이 있는 한 그들은 더욱 모습을 감춰야한다.
눈이 좋은 포식자가 언제나 사냥감을 노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밤에 깨어나는 것이다.
여우나 쥐를 생각하면 간단히 알 수 있지.
그늘과 굴속에 숨어서 더욱 무섭고 사나운 자들을 피해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어둠에 몸을 맡기는 것이 전부 약자 뿐은 아니지.
어두워질수록 눈을 번뜩이는 사냥꾼도 있다.
고양잇과 동물들이 그렇다.
늑대도 대표적이겠지.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준비는 끝났어. 이제 후배랑 같이 날뛰어 보실까?”
로이드는 살짝 들뜬 목소리였다.
놀라운 변화였다.
고작 계획을 짜고, 최대한 변수를 고쳐 함정을 짠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자신감이 붙을 수 있는 건가?
이렇게 나오면 반대로 내 쪽이 불안해진다.
“괜찮겠나? 고작 그런 장난질로?”
“장난질이 아니야. 이건 분명히 통한다고. 날 믿어라, 후배.”
“···.”
예감이 나쁘다.
서넛 시간 가까이 옆에서 지켜봤지만, 도무지 뭘 하는 지조차 알 수가 없었지.
아직 해가 지기 몇 시간 전, 나와 로이드는 어떤 계획을 짰다.
중합체에 대항하기 위해 산속을 전장으로 만들 셈이었지.
처음엔 덫을 준비했다.
로프 장치를 이용해서 꽤 그럴싸한 함정을 만들 수 있었지.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가?
내가 아는 함정은 기껏해야 작은 짐승들을 잡는 정도에 그친다.
사냥감은 덩치에 비례해 영리해지는 편이기 때문에, 그만큼 장치를 위장하는 것에도 수고가 들지.
특히 그 상대가 인간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존재를 모르는 무방비한 상태라면 모를까, 이미 나에게 한쪽 팔이 잘려나간 상황이라면···.
경계하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동물보다 깊은 의심을 품는다.
절대 가볍게 모습을 드러낼 리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 주변의 지형을 생각해볼 때, 요새와 같은 마을에 틀어박히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사역마, 중합체가 버티고 있지.
마녀가 덫에 걸려들 가능성은 한 없이 낮아질 뿐이다.
하지만 로이드는 단언했다.
“이거라면 할 수 있어. 우리는 이긴다.”
“무슨 방법이 있나?”
“일단 이걸로 놈들의 주위를 끌 거야.”
녀석이 말하는 것은 ‘퇴비堆肥’였다.
마을 어귀 인근에 박쥐 배설물 따위가 잔뜩 쌓여있기에, 대체 뭔가 싶었더니 결국 냄새만 고약할 뿐인 농사용 비료였다.
로이드는 거기다 마차에서 가져온 잡다한 것들을 가져와 버무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잡동사니 같아서 용도를 모르겠다.
고래기름, 화승총에 집어넣을 흑색화약까지 털어 넣는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귀한 설탕까지 죄다 뿌리는 이유는 뭐지?
대체 이딴 걸 어디에다···.
“그 여우 대가리 계집이 나오지 않는다면, 나오도록 만들어 주겠어.”
“무슨 수로?”
“보고만 있어.”
로이드의 작당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의욕을 보이니 한 번은 믿어주기로 했다.
설마하니 로이드 자식이 여기까지 와서 허튼 짓을 할 리는 없을 테지.
“좋아. 이걸로 준비는 끝났어.”
몇 시간씩이나 공을 들인 작업 끝에, 우리는 다섯 개의 구역에 걸쳐 함정의 설치를 마무리했다.
마을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대기한 채, 로이드는 기름을 먹인 로프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리곤 횃불을 집어드는군.
거기다 불을 붙일 셈이라는 건 알겠다.
그런데 이게 잘 될까?
설마하니 산불을 낼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거면 바로 건초를 구해서 횃불을 가져다대는 게 나을 것이다.
우리까지 위험에 빠질 가능성도 매우 높으니,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는 없다.
하지만 화승총의 화약이 조금 섞인 똥 무더기에 무슨···.
“왜 내가 마술사 로이라고 불리는 지 알려주지.”
로프를 타고 순식간에 횃불의 화염이 옮겨 붙는다.
이어서 퇴비 덩이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일순간, 흙무더기가 부풀더니···.
“어, 반응이 빨··· 엎드려어어어!”
퍼어어어어어엉!
이 망할 자식···.
말을 하려면 좀 일찍 하던가 했어야 할 것 아닌가?
일단 결론만 말하자면, 효과는 끝내줬다.
태어나서 그렇게 화려한 불꽃놀이는 처음 보았다.
밤하늘을 밝힐 정도의 대폭발이 땅을 파헤쳐 버렸다.
어이가 없군.
심지어 인접한 나무의 뿌리까지 전부 날려버렸어.
“하, 하하··· 내가 한 거지만 이거 끝내주는데?”
“어떻게 한 거지?”
“사정이 좀 있지. 어릴 때 중동에서 건너온 자칭 연금술사라는 늙은이 밑에서 자랐거든.”
“연금술사라고?”
“실상은 괴짜인 할아버지야. 별 희한한 지식을 다 알던 노인이었지. 이것저것 알려주긴 했는데··· 나는 머리가 그렇게 좋지 못해서 원리까지 이해하진 못했어. 하지만 이거 하나는 기억하고 있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던 거니까 잊을 수가 없었거든.”
“놀랍군. 너에게 이런 기술이 있을 줄이야.”
“나도 이렇게까지 위력이 클 거라곤 예상 못했어. 재미있지 않냐? 잘 숙성된 비료에 몇 가지를 버무리는 것만으로 이 정도의 위험한 물질이 된다니. 물론 이것 자체만으로는 터지지 않지만···.”
로이는 설명 도중에 자그마한 병을 꺼내 내 앞에서 흔들어보였다.
“여기다 반응성을 극대화하는 이 연금술의 비약을 섞으면 보다시피 장난이 아니게 되지.”
“진즉 귀띔 좀 해주지 그랬나?”
“미심쩍어하던 널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 그게 마술사의 본업이기도 하고.”
“네놈도 성격이 참 나쁘군.”
“뭐, 덕분에 도움이 됐잖아?”
그건 맞다.
덕분에 화끈한 선전포고가 되었다.
이걸로 마을에 꽁꽁 숨어있는 마녀가 반응하겠군.
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는데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오히려 겁쟁이일수록 반응할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 폭발이 마을에서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새겨졌을 테니까.
“봤냐, 후배? 내가··· 아니, 우리가 해냈다!”
로이드 녀석이 기뻐 날뛴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아래에서 꼼짝도 않던 중합체가 몸통을 들어올렸다.
동시에 하늘에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위의 꼭대기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설마 저것이···.
“뭐야, 바위산에 마기를 축적해둔건가?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는데···.”
“역시 저게 마기라는 거였군.”
“처음 보냐?”
“난 이번 임무가 이식한 이후로 처음이거든.”
“아, 그랬었지.”
“저게 사역마들을 움직이는 건가?”
“잘 봤네. 그래서 마기가 없거나 결계 속이 아니라면, 놈들은 무력하지. ···라고 빌헬미나 누님이 가르쳐줬어.”
”아무튼 이걸로 반격할 수 있겠군.”
“아직 너무 앞서가진 마. 누님도 그렇고, 그 제리온이라는 선배까지 당할 정도니까.”
“온다.”
“야,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
“시끄럽다. 놈이 온다니까.”
마기를 빨아들인 거체의 다리가 앞으로 뻗어나간다.
놈은 폭발이 일어난 방향을 향해 육중한 몸을 옮겼다.
단, 한 놈만이···.
“쳇, 역시 두 마리를 전부 끌어들이는 건 무리였나? 마녀가 조심성이 많은 모양이야.”
“상관없다. 찾아내서 끌어내주지.”
“야, 임마. 계획대로 하자고.”
“물론이다.”
“제대로 이해한 건 맞고?”
“마녀를 죽인다.”
“아니, 그건 중합체를 각개격파하고 나서라고!”
나도 그렇게 되길 빈다.
하지만 로이드의 바람은 일이 잘 풀릴 때의 이야기지.
그리고 내 경험상, 아무리 고심한 계획이라해도 반드시 틀어지기 마련이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 그렇지. 여기까진 잘 되가고 있어.”
중합체는 그 거대한 몸뚱이만큼이나 거리를 좁혀오는 게 빨랐다.
한 발자국 내딛는 것만으로 보통 사람이 내딛는 걸음의 열 배, 스무 배를 가볍게 넘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로이드, 앞장서라.”
“명령하지 마. 하여간 이 선배를 뭐같이 안단 말이지.”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로이드의 입가는 웃고 있었다.
녀석은 자신이 짠 큰 그림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걸 즐기는 눈치였다.
로이드는 초인적인 힘으로 도약하더니, 고목 사이를 타고 날아올랐다.
그가 가장 높은 꼭대기에 오르기까지는 십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어서, 그는 일부러 잘 보이는 위치에서 중합체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이쪽이다, 더러운 시체 거미 놈아!”
타아앙!
하늘을 향해 화승총을 쏜다.
그것은 내가 가진 대스승의 총이 아닌, 빌헬미나의 물건이었다.
“옳지.”
로이드의 소란에 거대 거미의 주위가 끌렸다.
콰직, 콰지직!
중합체는 앞을 가로막는 나무를 모조리 박살내며, 로이드가 있는 방향으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정 거리 안에 놈이 발을 들였을 때···.
“간다아아아!”
투콰아아아아앙!
다시 한 번, 폭발음과 함께 숲을 환히 밝히는 큰 불꽃이 일었다.
로이드가 중합체를 끌어들일 동안, 내가 불을 붙인 것이었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중합체의 몸까지 들썩였을 정도다.
저 하늘 높이까지 흙먼지와 파편이 튄다.
이윽고 거대한 몸체의 일부가 땅을 나뒹군다.
나는 속으로 로이드를 칭찬했다.
이만하면 녀석을 선배로 인정할만 하다 싶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폭발로 백 명분의 피와 살로 이뤄진 중합체의 반신이 꼴좋게 날아갔으니까.
“하하, 봤냐! 이게 바로 나의 저력이··· 끄악!”
하지만 마무리가 나빴다.
한쪽 면의 다리가 전부 작살났다고 해도, 괴물은 여전히 건재했다.
중합체는 남은 다리를 튕기는 것으로 거체를 굴렸다.
그것이 주변의 나무를 통째로 뿌리 뽑자, 하필 착지 직전이었던 로이드에게까지 영향이 미쳤다.
발을 헛디뎌 그대로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지.
거기다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였다.
중합체가 기둥과도 같은 다리 하나를 높이 들어 올린 것이다.
그것이 내려찍히는 지면에는··· 쓰러진 로이드가 있었다.
“크···윽!”
망할, 내가 달려가기엔 너무 늦다.
나는 로이드가 급히 일어던지, 몸을 굴러서라도 피하길 바랐다.
하지만 거미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라, 피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헷, 딱 좋구만.”
로이드가 순간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어서 녀석은 양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곤 전력을 다해 팔을 휘둘렀다.
동시에 뭔가가 달빛에 번쩍였다.
로이드의 손가락에 여러 개의 은빛 반지가, 그리고 그 끝에서 이어진 보일락 말락 한 실선 같은 것이 팽팽히 당겨졌다.
그것은 내리꽂히는 거미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파파팟!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사람의 몸통 굵기 정도는 넘어 보이는 마물의 다리가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정말로 마술 같은 광경이었다.
“로이드!”
“어, 어때? 이제 날 좀 존경할 마음이 생겼냐?”
“너, 손가락이···.”
“별거 아냐. 다 예상한 거라고. 저 괴물 놈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니까 이렇게 될 거 같긴 했거든.”
반지를 낀 마디를 기준으로, 로이드의 모든 손가락이 역 방향으로 부러져있었다.
“쳇, 마무리는 너한테 양보해야겠어.”
로이드에게 다리 하나를 더 잃은 중합체는 이제 균형을 잃고 옆을 굴렀다.
나는 도끼를 들어올려, 양팔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후우···.”
순간 폭발시키듯 호흡을 내뿜는다.
내가 서있던 바닥이 움푹 파이며, 내 몸을 앞으로 밀어냈다.
이것은 레이가 적과의 거리를 좁힐 때 사용하는 보법으로, 파쇄권의 기본이 되는 동작이었다.
비록 어설프긴 하지만, 그것도 써먹기 나름이다.
나는 전신을 비틀어 도끼날을 휘둘렀다.
그러자 중합체의 몸통에 넓고 긴 상처가 터졌다.
적어도 도끼날의 두께만큼은 파고든 것처럼 보인다.
이식을 통해 발현된 나의 힘은, 어느새 괴력의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흠!”
거미 놈은 나를 튕겨내기 위해 남은 발을 휘둘렀지만, 그것마저도 내 공격을 막아낼 순 없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다리 끝이 내려온 순간, 그대로 도끼로 쳐내서 대응했다.
콰쾅!
자루를 잡은 손을 통해 어깨까지 저릿한 충격이 전해져온다.
하지만 시시한 수준이다.
나는 자세를 잡고, 다시금 괴물의 몸통을 난도질했다.
그것이 몇 십 번 정도 반복된 끝에, 오거Ogre급 중합체는 겨우 경련만할 뿐인 고깃덩이로 변했다.
“하아, 하아···.”
“짐승 같은 놈. 후배, 너는 괴물이냐?”
“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비위도 참 좋으셔. 무식한 게 힘만 쌔가지고.”
“일어나기라 해라, 망할 선배.”
나는 녀석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피해, 이 멍청···!”
팟.
로이드가 나를 어깨로 밀어낸 그 순간, 녀석 가슴과 배에 뭔가가 박혀들었다.
화살?
급히 놀라서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자, 여러 개의 그림자들이 서 있었다.
내 정안이 저 멀리에 여우머리를 뒤집어 쓴 여자를 포착했다.
또 그 마녀의 짓인가?
빌헬미나를 쓰러뜨렸던 그 계집이 한 것인가?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수가 많아, 대략 스무 명 이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뭐지, 어떻게 된···.’
내 눈앞에 있는 건, 그때 강가에서 본 마녀가 아니다.
미묘하게 체구가 달라, 아예 잘랐던 팔까지도 멀쩡하다.
‘빌어먹을, 무슨 악몽을 꾸는 것 같군.’
그도 그럴 것이···.
심지어 우리를 포위하며 둘러싼 모든 놈들이 여우의 대가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