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마의 장(6)
9.
사람의 눈에 이븐 가지의 분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가루라고 부르고 있지만, 나로서는 그게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처음엔 의심부터 했었지.
뭔가 수상한 약이 아닌가?
아니, 레이는 지금도 그것이 차라리 독에 가깝다고 했다.
여전히 정체는 모른다.
대스승과 레이의 말에 의하면 그다지 이로운 물건은 아니겠지.
하지만 이젠 안다.
최소한의 이치와 섭리를···.
단지 우리의 시각 기관이 편협할 뿐이라는 걸.
본디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지 못할 만큼 인간의 정신은 불완전 것이란 사실을.
“···커윽!”
그것은 분명 소량일 것이다.
나를 염려하는 레이의 눈치를 보면, 충분히 조절해서 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효과는 언제나 그렇듯 확실하다.
독한 술을 뇌로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만일 누군가 바늘 같은 것을 귓속에 넣어 인정사정없이 휘젓는 다면 조금은 비교해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견딜만하다.
오히려, 곧 이어 엄습해오는 감정의 폭주 쪽이 더 참기가 힘들다.
목 아래가 타들어간다.
마치 불을 삼키는 것만 같은 감각이다.
“덩치?!”
내가 무릎을 꿇자, 레이가 급히 내 어깨에 손을 댔다.
하지만 나는 손바닥을 펼치며 그녀를 밀어냈다.
대답은 못해도 듣고 있다.
움직이는 걸로 거절의 표시 정돈 할 수 있다.
괜찮으냐고 재차 물어보고 싶은 모양이지만, 일언반구의 가치도 없었다.
그야 뻔 한 것 아닌가?
왜냐하면, 나는 항상 괜찮지 않았으니까.
‘그 날 이후로···!’
나는 도끼를 쥔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놀라울 지경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양손으로 겨우 지탱하던 것이, 지금은 속이 빈 갈대를 든 것 마냥 가볍게 느껴진다.
실험삼아 몇 번 휘둘러본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대로 언제든 제동이 걸린다.
그걸 확인하자 또 하나의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기쁨이다.
환희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당장 그 감정을 해소하고 싶었다.
“야!”
등 뒤로 레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마침 좋은 시기다.
하늘을 맴돌고 있던 마물 놈들이 나를 마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냐.
당장이라도 내 목에 가시 같은 이빨을 깊게 박아 넣어 동맥을 끊고 싶겠지.
그런 놈들의 흉포한 본능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보여선 안 되는 것들이 모조리 눈에 들어온다.
아니, 눈뿐만이 아니다.
오래된 피 냄새가 났다.
내장이 부글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놈들의 역겨운 숨결마저도 느껴질 정도다.
그것은 오감을 초월해 무시무시한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것이 가루의 효과···.
‘끝내주는군···.’
나 혼자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문득 고개를 드니,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그림자 하나가 덮쳐들고 있었다.
감각이 예민해져서 사각에서 날아오는 것까지도 알 수 있게 된 건가?
‘이건 눈만 깜빡해도 어깨가 도려 나가지게 생겼군.’
하지만 크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이상하게도 언제든 대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유로 충만하다.
왜 전에는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었지?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내 앞에 달려드는 놈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갸, 익!”
도끼날이 마물의 몸통을 가볍게 등분한다.
마치 도예용 찰흙에 슬쩍 칼을 가져다댄 것만 같이 부드럽게 쪼개졌다.
‘뭐냐, 이건···.’
손맛이 없었다.
제대로 베어낸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시시하군.
감질날 정도다.
나는 보다 확실하게 끊어냈다는 실감이 필요한데···.
“갸아아아!”
좋아, 마침 또 한 마리가 온다.
이번엔 정면에서 노려든다.
당장 도끼를 휘두르기엔 자세가 좋지 않다.
나는 상체를 숙였다.
그리곤 마물이 파고드는 방향에 풀어헤친 쇠사슬을 밧줄처럼 휘감았다.
내가 노린 대로다.
절묘하게 시커먼 마물에게 강철의 목줄을 채웠다.
아가리에서 피거품 같은 걸 토해내며 지상에 곤두박질치는 꼴을 보니, 날개 달린 강아지 같아서 웃음이 다 나왔다.
“갹! 갸갹! 갸아아아!”
버릇이 없는 개새끼다.
자신을 구속하는 쇠사슬의 주인이 나란걸 눈치 채자마자 달려든다.
나는 놈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두어 바퀴를 구르며 튕겨나가지만, 그냥 내버려둘 내가 아니었다.
“어딜.”
오른손으로 쇠사슬을 잡아당긴다.
그것만으로도 모가지가 이어진 마물이 내게로 끌려왔다.
허나 그것은 이내 상체와 분리 되어 바닥을 구른다.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찢겨져버린 것이다.
나는 급격하게 실망감이 들었다.
너무도 허망한 나머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빌어먹을···.”
이어서 나는 몇 놈인가를 더 썰었을 것이다.
머리를 날려버리고, 사지를 뜯고, 날개를 찢어발겼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조금만 건드렸을 뿐인데도 뒈지고 자빠졌다.
어째서 저것들의 거죽은 이토록 물렁하고 약해빠진 거지?
어이가 없군.
이젠 습격해오지도 않는다.
하늘을 나는 놈들끼리 눈치를 보며 선뜻 나서지도 못하고 있다.
설마하니 나한테 겁이라도 먹은 건가?
‘웃기지 마라. 괴물 새끼들 주제에···.’
나는 사방을 둘러본다.
그리곤 좀 더 뭉갤만한 놈을 찾는다.
적이 간절했다.
내 분노를 온전히 받아낼 자식이 필요하다.
이 도끼로 찍어 누를 가치가 있는 고기를 가진 마물이···!
“그래··· 거기에 있었나?”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늑대의 머리와 까마귀의 몸을 지닌 마물들이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놈들은 역겨운 자신의 몸을 겹치고 섞으며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온몸이 아가리다.
또한 전신이 깃털투성이···.
저런 덩치론 이제 더 이상 하늘을 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것은 내게 커다란 선물상자에 불과했다.
자그마한 놈들보다 때려눕히는 재미가 있어 보였다.
조각낼 고기가 많아서 분명 즐거울 거다.
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땅을 박찼겠지.
생각할 틈도 없이 거체의 품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선 짐작할 수밖에 없다.
검은 그림자에게 도끼를 휘두른 그 순간, 기억이 끊어졌기에···.
10.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니, 의식이 무겁게 가라앉아버렸다.
그 사이 잠이라도 들었던 건가?
결국 모든 것이 꿈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얼마나 지난 걸까?
나는 대체 언제···.
“···덩치, 넌 정말로···.”
익숙한 목소리에 겨우 눈이 떠졌다.
“길들이기 힘든 짐승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코앞에 흙바닥이 있다.
레이는 바닥에 엎드린 등 위에 올라타 나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망할 자식, 이제 머리가 좀 돌아?”
모자가 보이지 않는다.
레이의 장발이 바람에 헝클어지며 휘날리고 있었다.
얼굴이 피투성이다.
심지어 한쪽 뺨에 베인 상처까지 있다.
검은 부러진 상태···.
그녀의 사냥용 코트는 너덜너덜해져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묻기도 전에, 레이는 내 뒤통수를 팔꿈치로 후려 갈겼다.
통증이 크다.
작정하고 날린 모양이었다.
“그 표정은 또 뭐야? 이건 네놈 작품이란 말이야!”
“···내가, 그랬다고?”
“그럼 또 누가 있는데?”
레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 그녀의 이변을 눈치 챘다.
“레이?”
“집어치워.”
“하지만 그 손···.”
“입 다물어. 이건 분명히 네가 한 거지만, 네 탓이 아니야. 전부 내가 미숙한 탓이니까!”
왼손이 이상했다.
레이의 손가락 몇 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도려 나가져 있었다.
“아윽!”
뒤늦게 지혈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아,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설마···.
“됐어. 나는 괜찮아.”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것도 내가···.”
“괜찮다니까!”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본 레이의 약한 모습이었다.
나는 뻔뻔하게도, 그녀에게 사실 여부를 물어야만 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별 거 아니야. 어떤 무시하게 힘만 쌘 놈이 자아를 잃고 날뛴 것뿐이지.”
“뭐···.”
“주변을 둘러 봐.”
레이의 말대로 시선을 돌리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가장 위험한 마물이 한 마리 더 나타났거든.”
피와 살로 된 비라도 내렸단 말인가?
여기저기에 오물의 웅덩이가 보인다.
사방에 동강난 주검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굉장했어. 아주 질려버렸다고. 그 동안 얼마나 깊은 증오를 품어 온 거야, 이 미치광이 자식아. 중합체가 된 사역마를 난도질하고, 피떡을 만들다니···. 지금껏 대스승이 널 탐낸 이유를 조금이지만 알 것 같네.”
“이걸, 내가 했다고?”
“어디 한 번 맞춰볼래? 피에 굶주린 광인이 죽일 것이 사라지면 누굴 노릴까? 자, 이제 좀 감이 잡히지? 하, 널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게 예상 밖으로 좀 힘들더라, 역시 아직 수행이 부족했던 거지. 그래도 제법이더라. 가루에 광분했다고 하지만 나를 이 꼴로 만들다니.”
“···.”
“집어치워, 등신아. 웃자고 하는 농담이니까. 네 탓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결국 대스승이 없는 곳에서 내 멋대로 가루를 쓴 내 잘못이래도.”
그러면서 피식 웃어 보인다.
“오히려 약발이 잘 듣는 후배를 둬서 기쁠 정도야. 네 진가를 알아본 대가치곤 이 정도면 싼 거지.”
이 와중에도 비꼴 수 있다니, 새삼 그녀의 강한 정신력이 실감된다.
하지만 납득이 안 간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뭘?”
“미쳐 날뛰는 날 그냥 내버려뒀다면···.”
“그게 가능했다면 나서지도 않았지. 너 같은 애송이가 스스로 진정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아닌가?”
“가루 때문에 일어난 광증은 가루로만 중화할 수 있어. 그건 한도 끝도 없이 네 감정을 연료로 타오르지. 몸이 산산조각 날 때까지 싸우려 할 걸? 제대로 제어할 수 없다면, 결국 누군가가 죽을 각오로 막아 줘야해.”
그랬던 건가?
이븐 가지의 분말은, 이토록 위험한 것이었단 말인가?
“미안하다.”
“하?”
“내 고집에 어울려주다 결국 네가···.”
“착각하지 마. 난 널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니까.”
레이는 기가 찬다는 듯.
“아까 말했지? 대스승께선 내게 명령했어. 너를 반드시 살려서 데려오라고. 다시 말해, 널 지키는 게 내 사명이었던 것 뿐이야.”
하지만 나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대스승의 뜻이라 단언하지만, 어째서인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무튼 넌 성가신 사내야. 손이 많이 가는 사제라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코트를 벗어 나에게 던진다.
레이는 여벌로 챙겨온 천 옷을 입으로 찢더니, 자신의 왼손과 상처가 난 부위를 휘감았다.
한 팔이 불편한 상태임에도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천을 붕대 삼아 쓰는 게 한 두 번이 아닌가?
돌아선 모습이지만 몸 여기저기에 흉터 자국이 보였다.
등과 어깨, 엉덩이 선을 타고 커다란 손톱자국 같은 것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대부분 오래된 상처처럼 보였다.
“고개 돌려. 음흉하게 쳐다보지 말고!”
도우려했지만, 그 행동이 너무 재빨라서 결국 순식간에 처치가 끝나버렸다.
나에게서 다시 코트를 빼앗아 든 그녀는, 어느새 가슴을 셔츠로 묶어 조끼처럼 가리고 있었다.
“그보다 앞장이나 서. 아직 우리한텐 진짜 볼일이 남았잖아?”
“그랬지.”
“뭐, 상황을 보아하니 이 마을은 오래 전에 끝장났을 게 뻔하지만···.”
달관하는 말투와는 다르게 아직 목소리에는 의지가 남아있다.
레이는 지금 막 코트의 소매에 양팔을 집어넣고 만전의 준비를 갖췄다.
“그래도 전말을 확인하지 않으면 뒤가 찝찝할 거야.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이상,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겠지.”
“결국 우리가 너무 늦고만 건가?”
“너도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걸. 이웃마을이나 먼 도시까지 기이한 소문이 퍼질 정도라면 대부분 이런 결말이 나오거든.”
“그런가···.”
“하지만 주눅 들 거 없어. 원흉을 제거하면 적어도 다음 희생자는 구할 수 있을 테니. 마침 방해되는 건 우리가 전부 해치웠잖아?”
그렇지.
사역마는 전부 쓰러뜨렸다.
이제 남은 건··· 마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