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25화 (25/186)

환마의 장(5)

8.

놈들은 당장이라도 덮쳐올 기세였다.

벌어진 입 사이로 누런 이빨들이 보인다.

고기와 내장을 어지간히도 씹었는지 인간 기름으로 번들거리는군.

‘이제 기현상의 전말을 알겠다.’

숲 속에서 말의 머리를 날려버린 놈들.

지붕 위로 사람의 일부를 찢어서 흩뿌리는 마물이 바로 저것들이겠지.

전부 하늘을 날아다니기 때문에 가능한 짓거리다.

‘그건 그렇고 한두 놈이 아니야. 설마하니 대스승과 레이는 매번 이런 싸움을 해왔던 걸까?’

나는 지금껏 그들이 사역마와 싸울 때 포위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때에 따라선 이렇게 다수의 괴물과 맞설 상황이 생기기도 하는 건가?

허나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마저도 극히 드문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그 증거로, 레이는 지금 약간 긴장한 모습이니까.

“골치 아프네. 수가 너무 많아.”

겁을 먹거나 물러설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듯 보인다.

녀석은 내 얼굴을 흘겨보더니.

“칫, 이 자리에 네가 아니라 대스승이 계셨더라면···.”

그거 미안하게 됐군.

아니나 다를까, 레이가 신경 쓰는 것은 내 쪽이었다.

“그거 미안하게 됐군.”

“까불지 마. 지금은 상황이 나빠도 너무 나쁘단 말이야. 나 혼자라면 몰라. 하지만 널 지켜가면서 싸울 자신은 없어.”

“내가 발목을 잡을까봐서 그러나?”

“자기 주제는 잘 아나 봐?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뭔지 알겠어? 바로, 당장 뒤돌아서 달아나는 거야.”

실은 레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과 별개로, 나 자신은 무력하니까.

강함, 정신력···.

그 무엇 하나 대스승에 미치지 못한다.

기술과 경험···.

이 또한 레이 사저를 따라갈 수 없다.

완력이라면 또 모르지만 그마저도 ‘가루’의 존재를 생각하면 큰 차이가 없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방금 레이는 나를 대놓고 지킨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든든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겠지.

한심하군.

갓 스무 살이 된 여자애 앞에서 다 큰 사내 입장이 말이 아니다.

허나 상관없다.

설사 그렇다할 지라도···.

“덩치, 너 지금 뭘 하려고?”

철컹.

나는 지금 막 오른팔의 쇠사슬을 풀었다.

애초에 이것은 팔꿈치 부분에 고리를 해제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있다.

거기다 도끼 손잡이 끝 부분의 둥근 링에 연결하는 구조이기도 하지.

출발 전날에 나는 아이라에게 부탁했다.

만에 하나, 내가 손에서 도끼를 놓치지 않게 해달라고.

‘나는 예전에··· 정말 간절한 순간에 무기를 품에서 멀리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변했을까?

미래를 바꿀 수 있었을까?

당시, 나는 안일했다.

그 클라리스를 앞에 두고 적의가 없다는 의사를 보여주기 위해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지.

그때 내가 했어야 했던 유일한 행동은··· 도끼로 클라리스의 표독스런 얼굴을 갈라버리는 것뿐이었다.

후회해봐야 늦다.

어떤 대가를 바쳐도 과거를 고쳐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다르다.

결코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건 내 몸의 일부다.’

허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기대하지도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거대한 도끼는 내 힘에 부치는 무기니까.

언제든 악력이 부족해서 튕겨나갈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면, 최소한 언제든 회수할 수 있도록 하리라.

나와 도끼를 떼어놓으려면 이 팔을 통째로 집어 뜯어야만 할 것이다.

열쇠조차 없이, 쇠 독이 퍼져서 염증이 생긴다 해도 절대 열지 못하도록···.

나는 이 쇠사슬을 수갑과 함께 내 팔에다 채우기로 한 것이다.

“너 말이야,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레이는 내게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고 무식해빠진 결의지.

“관두자, 어차피 내가 말린 다고 들어먹지도 않겠지.”

그러나 이건 비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나를 독려했다.

“그렇다면 그 모습이 단순한 겉멋이 아니길 바랄게.”

레이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잘 들어. 네가 충분히 각오했다는 걸 가정하고 말할 게.”

“음.”

“이대로 싸우면 넌 십중팔구 죽어.”

그렇겠지.

방금도 한 놈의 머리를 작살내서 죽였지만, 그건 거의 요행이었다.

저 마물 놈들은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저돌적으로 땅에 망설임 없이 처박히는 것도 그렇고, 쇠사슬에 잇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력한 무는 힘을 지닌 괴물들이니까.

“지금이라도 후퇴하지? 대스승에게 받은 내 임무는 너를 무사히 데려오는 거거든?”

“그 무사하다는 기준은?”

“너도 사지 멀쩡히 돌아오란 이야기 정도는 들었을 텐데.”

그렇다면 힘든 조건이다.

일격에 끝내지 못하면 내 목숨이 위험하다.

두 마리가 동시에 공격해온다면 막아낼 자신이 없다.

하지만···.

“사저를 믿지.”

“···약았네. 이럴 때만 제대로 존칭을 붙여주는 거야?”

그래도 나에게 강자로 대우받는 게 싫진 않은 모양이다.

“후, 어쩔 수 없지. 죽지만 말아라, 덩치.”

레이는 이처럼 기대를 져 버리지 않는 성격이다.

그건 평소 대스승의 지시를 군말 없이 따르던 모습에서 이미 간파했지.

“나중에 제대로 한 턱 쏴야 할 거야.”

“내가 낼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오냐, 약속한 거다?”

레이가 자세를 잡음과 동시에, 마물의 군세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갸아아악!”

온다.

빠르게 한 놈이 내 머리를 노리고 최단거리로 접근한다.

자기 목숨의 안위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도 않는 추락이다.

그러나 그 궤도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속도조차 방금 상대한 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으득!”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도끼를 쥐었다.

이어서 마물의 송곳니가 나를 덮치기 직전, 나는 전신을 비틀었다.

요령은 장작을 패는 것과 같다.

도끼를 최적의 타이밍으로 내려찍는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퍼석, 아니면 으득하는 소리가 울렸다.

“갸, 악! 쿠에헥!”

명중이었다.

손끝에 끔찍하면서도 통쾌한 감각이 흘러들어왔다.

지금 막 하늘에서 급습한 마물의 머리는 둘로 쪼개진 채 바닥에 충돌했다.

검붉은 피가 사방에 튀고 지면에 뇌수가 섞인 진흙탕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것은 실수였다.

‘젠장!’

나는 힘 조절에 실패했다.

너무 흥분했던 것인지 필요 이상으로 내리쳐버렸다.

도끼날이 이렇게까지 예리할지도 몰랐지.

자루가 뽑히질 않아, 괴물의 골통을 파고든 상태로 땅에 박혀서 쉽사리 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 또 다른 그림자가 덮쳐온다.

“갸악!”

빌어먹을, 절묘한 시간차 공격이다.

이걸 노린 건가?

한 놈을 희생해서 승기를 잡는다고?

이것들은 어쩌면 까마귀를 닮은 만큼 머리가 좋았던 건가?

“뭘 멍하니 있어?”

순간 레이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겨우 도끼 자루에서 손을 떼고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그때, 레이가 뛰어 올랐다.

“하앗!”

그녀는 공중에서 하강한 마물의 목을 노리고 검을 쥔 팔을 뻗었다.

가공할 빠르기,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찌르기가 목표물을 꿰뚫었다.

“갸···!”

튀어 오르는 선혈과 함께 바람이 괴물의 비명 소리를 지워버렸다.

레이가 검을 회수하고 가볍게 착지한 반면, 날개 달린 마물은 균형을 잃었다.

가속만을 유지한 채 요상한 방향으로 날아가더니, 그대로 나무에 머리를 처박힌다.

마치 호박이 깨지듯, 그것은 산산조각 났다.

“···굉장하군.”

솔직한 감탄이었다.

내가 온 힘을 다해서 한 놈의 머리를 날리는 동안, 레이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적을 제압한 것이다.

“명심해. 언제나 최선은 회피하면서 치는 거야.”

과연, 대스승의 움직임도 그 철학에 정확히 일치했지.

“알겠어? 내가 하는 걸 잘 봐.”

레이는 이어서 공격해오는 검은 날개들을 상대했다.

묘한 보법으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괴물의 아가리를 피하더니, 동시에 뒤통수에 검날을 쑤셔 박는다.

그리고 괴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반동을 이용해 몸을 한 바퀴 회전···.

다른 각도에서 날아오는 마물의 턱을 무릎으로 날려버렸다.

어느새 칼을 다시 챙겨서 널브러진 놈의 목을 긋는 것으로 깔끔히 마무리한다.

‘그 찰나의 순간에 두 마리를 더 처리하다니···.’

절도가 넘치는 검무劍舞였다.

쓸모없는 동작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

레이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봤지? 아무리 빨라봐야 저것들 움직임이 뻔히 보이잖아? 이 정도는 어린애라도 할 수 있어.”

어이가 없군.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그만 실없이 웃어버렸다.

말은 쉽지.

그런 걸 간단히 해낼 수 있다면 아무도 이런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에 반응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거기다 몸을 움직이는 유연성까지 길어야하겠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레이는 이만한 움직임을 손에 넣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하지만 질 수 없지.’

나보다 한참 어린 여자에게 언제까지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순 없다.

그딴 하찮은 생각을 할 틈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발버둥치는 게 훨씬 났다.

“레이 사저, 부탁이 있다.”

나는 마물의 시체에서 도끼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레이에게로 다가갔다.

“뭐, 뭐야? 갑자기 또···.”

내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자 레이는 어울리지 않게 당황했다.

여유가 좀 더 있었다면 놀려줄 기회라 생각했겠지만, 언제 또 하늘을 나는 놈들이 덮쳐들지 모르는 상황이다.

나는 여의치 않고 바로 볼일을 말했다.

“내게 이븐 가지의 분말을.”

“뭐?”

“그 가루 말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상관없어.”

“···너, 그게 무슨 의미인 줄은 알고 지껄이는 거야?”

“물론이다.”

“물론은 개뿔, 너는 가루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마법의 일종이라고 여기고 있다.

들이 마시면 머리가 녹을 것처럼 스며들고, 어째서인지 어떤 감정이 미친 듯이 끓어오르지.

자칫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흥분하게 된다.

그리고 근력이 평소의 갑절 이상으로 강해지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확실히 있는 모양이지만···.

“부작용이 있다는 건 알아.”

“그런데 잘도 그딴 소릴···.”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다.”

놈들이 포위망을 좁혀온다.

전열을 짜고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앞서 죽은 몇 마리를 통해 우리의 전력을 분석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얼핏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기분이다.

“사저, 이미 도망치는 건 늦었다.”

“그런 것··· 같네. 하아, 내 팔자야.”

레이는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답답한 표정, 어딘지 모르게 못마땅해서 짜증을 부리는 얼굴이었다.

“덩치, 넌 뭐가 그렇게 초조한 거지?”

“미안하군.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그런 말이 아니야! 어차피 순서대로 하나하나 배우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알아서 우리처럼 될 텐데···.”

그걸론 부족하다.

기다릴 수 없어, 조금만 지체되어도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이따금씩 숙면을 취하는 것조차 두려울 때가 있다.

안락에 몸을 뉘이고 과거의 모습들이 흐려질까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긴장을 풀지 못하면 항상 악몽을 꾸지.

대스승이 옳았다.

이것은 지옥이다.

죽은 것만 못한 생지옥이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증오를 풀어낼 존재를 찾는다.

그리고 죽이는 것이다.

이 몸뚱이를 혹사시켜 눈앞에 있는 마의 존재를 찢어 뭉갤 수만 있다면···.

나는 당장 그 외에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여간, 고집불통···. 말을 제대로 듣는 게 없다니까.”

레이는 내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마지못해서 한숨을 쉬었다.

“대스승에겐 비밀로 해. 이건 어디까지나 내 독단이니까. 그리고···.”

아직도 레이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가루의 힘에 너무 기대지 마. 이건··· 네 몸과 정신을 좀 먹는 독이기도 하니까.”

“상관없어.”

“다들 그렇게 말하지.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간 다음에까지···.”

나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어떤 슬픔을 보았다.

뭔가를 염려하는 듯 끝내 내가 마음을 바꿔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부탁한다.”

“···넌 절대로 곱게 못 죽을 거야.”

마물들이 다시금 저공비행을 시작할 쯤, 레이는 내 앞에서 가루를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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