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23화 (23/186)

환마의 장(3)

5.

···무기의 성능을 확인할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그것은 내게 있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6.

아이라의 건물에서 지낸 지 나흘 정도가 지났을 무렵, 갑자기 아침부터 대스승이 내게 뭔가를 제안해온 것이다.

“빅터, 슬슬 도시를 둘러봐도 좋지 않은가?”

관광, 하다못해 구경이라도 해보라며 권한다.

나는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라고 운을 띠우고 정중히 거절했지.

“대스승, 저는 관심 없습니다.”

“젊은 친구가 꽉 막혔군.”

나는 반론하지 않았다.

그게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도시의 평온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런 건 아닙니다.”

“이해하네. 어둠의 세계를 엿본 자들에게 흔히들 나타나는 증상이니.”

증상이라니?

나는 딱히 병에 걸리거나 하진 않았을 터였다.

산을 타고 다녔던 때의 피로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대스승은 굳은 표정으로 턱을 괸다.

“몸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마음의 상처 탓이지.”

“···.”

“솔직히 말하게. 평화가 지속될수록 어쩐지 불안해지지 않나? 분위기가 누그러뜨려지면 지났던 일들이 떠오를 테지. 안 그런가?”

대스승의 말이 맞았다.

나는 최근 아이라와 대면할 때마다 원인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그 수다쟁이 여자는 언제나 내 긴장을 흐리게 만들어,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예전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래서 며칠간 아이라를 피했던 거군.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서.”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누구에게나 방어기제는 있기 마련이니까. 허나 자네는 그 정도가 지나친 것 같군.”

대스승은 설명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안정을 바라기 마련이라고.

그러나 지독한 경험을 겪은 뒤엔 오히려 휴식이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자네는 여기 머무는 동안에도 단련을 멈추지 않았지. 레이가 말해주더군. 낮에는 허공에 도끼를 휘두르고, 밤중에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파쇄권을 연습했다고?”

레이 녀석, 쓸데없는 소릴···.

나를 놀릴 거리랍시고 대스승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육체를 학대하는 걸로 마음의 아픔을 지우려고 했나? 그렇다면 실패로구나. 그건 어차피 순간을 잊는 것에 불과하지.”

“하지만 대스승, 당장 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도 감안하고 있다. 사실 이 도시에 들린 것은 단지 식량보급이나 정비 때문만이 아니었어. 자네의 치료와 휴식도 겸하기 위해서였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심신을 안정시킬 생각이었지.”

“···이제 본심을 알려주실 때도 됐지 않습니까?”

“다음 단계에 대해서 묻는 거라면 답해줄 수 없다.”

나는 살짝 울컥했다.

그렇다면 오갈 곳 없는 내 감정은 어찌해야 하는 거지?

그에겐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있어봐야 전혀 변하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차라리 두 사람과 함께 숲 속을 헤집는 편이 훨씬 나을 정도다.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는 휴식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네 뜻은 충분히 알겠네. 아무래도 내가 그쪽을 얕본 모양이군.”

대스승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구나, 빅터. 자네를 평범한 마녀 사건 피해자처럼 다루려 했던 내 판단이 틀렸다.”

그의 갑작스런 사과에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대스승.”

“아니, 이건 내 잘못일세. 자네라는 인재를 잃을까 싶어서 너무 곱게 대한 내 실책이지.”

그런데, 스스로의 실책을 고백하는 것치곤 뭔가 이상 했다.

어째서 그의 눈동자에는 기쁨의 기색이 엿보이는 것일까?

“마침 자네에게 좋은 기회가 있네. 아니, 멀리서 보면 비극인 사건이지만···.”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동남쪽 방향으로 말을 타고 이틀 정도 걸리는 장소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지. 인구는 약 400명···. 땅이 척박해서 농사는 무리지만 철광석이 나기 때문에 꽤 부유한 곳이야.”

왜 갑자기 타지의 이야기를 하는 거지?

묘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스승은 내가 짐작한 것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최근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네. 우리의 동료가 보내온 소식통에 의하면···.”

“마녀의 소행입니까?”

“진정하게나.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니니까. 확인하기 전까진 단언할 순 없네. 일단 들어나 보도록.”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그는 나보다도 의혹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두 달 전 쯤, 마을을 왕래하던 상인이 사고를 당했다지. 내용이 황당하기 그지없더군. 마차를 끌던 말의 머리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말이야. 그것도 두 마리가 동시에.”

기이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야기다.

“그 일로부터 이틀 뒤··· 잘만 날아다니던 철새 떼 수십 마리가 죽어서 추락했다지. 바로 다음 날엔 마른하늘에 개구리나 물고기가 지붕 위에서 떨어졌다더군.”

그야말로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마지막 정보에 의하면, 이제 하늘에서 내리는 건 짐승만이 아니게 된 모양이야.”

“그럼 또 뭡니까?”

“사람의 일부.”

대스승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상상해보게, 빅터. 전날 밤에 함께 침실로 들어간 아내가 아침에 보니 산산조각이 나서 앞마당에 뿌려진 광경을 말이야.”

“···.”

“다음 날에는 이웃에 사는 친구가 그렇게 되지. 그게 최근 일주일 사이의 일이라고 하네.”

이 시점에서 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부분은 다르지만, 내 고향에서 일어난 것들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상부에서 조사를 의뢰해왔네. 우수한 마녀 사냥꾼을 파견해 달라는군. 그러니···.”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그 마을인가?

허나, 대스승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자네와 레이, 둘이서 그 광산촌을 방문해보도록.”

“예? 대스승께선 함께 가시지 않는 겁니까?”

“나는 몸 상태가 이 모양이라 말일세.”

그는 내가 부러뜨렸던 손목을 슬쩍 들어 올려 보였다.

6.

다음 날, 나는 새벽부터 레이의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대스승이 동행하지 않아서 인지, 녀석은 내 앞에서 언짢은 본심을 숨기지도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이 소리만 몇 번째인지.

평소엔 사저라고 자청하며 우쭐대던 주제에 전혀 진정하질 못하는군.

이쪽은 가뜩이나 짐이 무거워서 곤란한 상태인데, 도와주기는커녕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화를 내고 있다.

“대체 왜 내가 이런 애송이랑···.”

나라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마냥 늘어져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났다.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는 동안만큼은 무력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니까.

“덩치, 정말 다른 이야기 없었어? 대스승께서 사실은 뭔가···.”

“나는 모른다.”

정말이다.

나로서도 대스승이 무슨 의도로 레이와 나를 동행시킨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직도 납득을 못했는지.

“칫···.”

레이는 엄지손톱을 앞니로 물어뜯을 만큼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극성이군.

마치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 같다.

전부터 봐왔지만, 이 녀석은 대스승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심하다.

명령을 반드시 지키려는 건 제자의 덕목이라고 치자.

하지만 나에 대한 노골적인 시기와 질투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레이에게 있어서 대스승은 정신적 지주, 단순히 부모와 같은 존재를 넘어서···.

아예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혹시 대스승과 떨어진 게 이번이 처음인가?”

내가 묻자, 녀석은 나를 노려보았다.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었나?

아니, 그런 낌새는 아니다.

그렇군.

내가 실수했다.

나는 뒤늦게 호칭을 덧붙였다.

“···레이 사저.”

“흥.”

레이는 그제야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코웃음만 치고 마는가 싶었는데, 그녀는 이내 내 질문에 답을 해줬다.

“나는 수년간 대스승 크레이그의 곁을 지켜왔어. 수많은 조사와 마녀 토벌에서 함께 해왔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를 보좌했다.”

굉장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달라. 대스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녀는 굉장한 의젓하고 점잖은 여인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나에게서 사저라 불리기에 충분한 일면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미숙해.”

하지만 그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 실력이 모자란 내가, 반푼이 밖에 안 되는 사내를 데리고 단독 조사 임무를 맡다니.”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였던 모양이군.

자신이 없는 건가?

단신으로 마녀의 사역마를 상대할 정도의 강함을 가진 그녀가 미숙하다면, 대체 어느 수준까지 올라야 한단 말이지?

“잘은 모르지만, 나는 레이 사저가 모자라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뭐 잘못 먹었냐? 어울리지 않게 비위 맞추지 않아도 돼. 내 실력은 내가 더 잘 아니까.”

레이는 걱정이 많은 듯했다.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어, 검을 들고 싸우던 때와 비교하면 천지차이다.

의기소침해있으니 그 나이 대에 어울리는 얼굴이 보인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어던진 여자가 눈앞에 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은 제대로 입만 닫고 있으면 신비한 동방의 미인이다.

개인적으론 당분간 계속 우울한 채로 있어줬으면 좋겠군.

그러나 그래선 안 되겠지.

좋던 싫던 레이는 당장 나를 인솔해줄 선배이자 동반자다.

거기다···.

‘대스승은 이번에야말로 내 가치를 증명하라고 했었지.’

최소 조건은 살아 돌아가는 것이다.

사지가 멀쩡한 채로 귀환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합격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을 바란다.

대스승이 모든 걸 털어놓길, ‘다음 단계’니, ‘이식’이니 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말하도록···.

그러기 위해선 자격이 필요하다.

내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걸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다.

“레이 사저.”

“또 왜? 심심해서 지껄이는 거라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나는 몰라도 레이 사저를 그 마을에 보내기로 한 건 대스승의 결정이다.”

“그건 나도 알아.”

“그렇다면 지금은 의심하기보단 서두르는 게 좋지 않겠나?”

“···.”

“괴현상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저, 나는 이게 남일 같지가 않아. 어쩌면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른다.”

그건 내 진심이었다.

사실은 전날 대스승에게 그 마을의 사연을 들을 때부터 가슴 속이 답답했다.

비극을 막지 못했던 스스로가 떠올라, 뒤늦은 후회가 자꾸만 되살아나는 것이다.

나는 이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별 말 없이 지시에 따르도록 하자.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다. 대스승의 명령이야. 그 양반은 나름대로 레이 사저를 믿고 있으니 임무를 부탁한 것 아니겠냐고.”

여기서 레이는 잠깐 무방비한 표정이 되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얼굴을 빤히 본다.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너.”

“왜 그러지?”

“꽤나 건방진 소릴 할 수 있게 됐구나.”

그것은 언젠가 들어봤던 대사다.

아마 대스승이 레이에게 건넸던 것과 같은···.

“말수도 적은 놈이 웬일로 무슨 바람이 불었나? ···뭐, 좋아.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어.”

대스승의 식견을 믿도록 하지, 라며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겨우 봐줄만한 얼굴이 되었군.

“일단 가자. 직접 몸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겠네. 너도, 나도···.”

그 이후, 당분간 레이는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가끔 시덥잖게 내 키나 몸집에 대해 시비를 걸었지만, 기분 탓인지 그 수위가 예전보다 좀 나아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새 재앙이 벌어진 마을의 코앞까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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