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22화 (22/186)

환마의 장(2)

3.

귀족들의 일면식과는 달리, 변방의 예절은 다소 투박하다.

어지간해선 초면에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히지 않지.

불편을 느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알려주거나, 다른 사람을 사이에 두고 소개받는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전통이다.

딱히 고집이나 자존심 때문도 아닌데 다들 쉬쉬하며 지킨다.

이유는 단순하다.

원체 좁은 동네였기에 통성명이 불필요했던 탓도 있고, 뼛속까지 이방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밝혀지면 사교도의 저주를 받는다··· 대스승이 했던 말과도 일맥상통하지.

아이의 이름을 비슷하게 짓는 관습도 틀림없이 거기에 영향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교육받아왔으니까.

순전히 미신···.

오래도록 헛소리라고 생각했었다.

대스승과 레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마 저주는 실제로 있을 테고, 이름을 알리는 것도 경솔한 짓이겠지.

그러나 대스승은 나를 소개시켰다.

그 말인즉, 이 여자는 충분히 신뢰할만한 상대란 이야기다.

“안녕하세요? 빅터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방금 들어서 아시겠지만, 저는 아이라에요.”

여자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말하더니.

“잘 부탁드려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레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 문화였다.

“어라? 왜 그러시죠?”

“아이라, 그 친구는 조금 무뚝뚝한 면이 있지. 네 미모에 마음이 흔들린 걸 들키고 싶지 않은 게야.”

“···대스승, 그런 게 아닙니다.”

평소엔 사람의 본심을 들여다본 것처럼 파악하는 양반이, 무슨 영문인지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하고 있다.

“아! 부끄럼이 많은 분이시군요.”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나는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순간,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온기가 전해져왔다.

내가 계속 가만히 있으니, 그녀가 멋대로 내 손을 붙잡고 들어 올린 것이다.

그리곤 억지로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신기해라! 몸집만큼이나 손도 되게 크시네요.”

그러면서 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것과 비교해보더니, 손가락이 굵다든가 굳은살이 딱딱하다는 둥 감탄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 여자는?

머릿속에 떠오른 걸 그대로 말하는 건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크레이그 씨가 가문이니 영애라며 치켜세우시는데, 그거 농담이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면 곤란해요. 실은 예전부터도 이름 난 집안은 아니었거든요. 몰락한 지 오래라 큰 의미도 없으니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괜히 낯만 뜨거워서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아셨죠? 그리고 또···.”

잔뜩 들떠선 묻지도 않은 이야길 늘어놓는다.

정신없는 수다쟁이다.

정말 쉴 새도 없이 입을 떠들어대는군.

낯선 사내인 내 앞에서 부끄러움도 모르나?

아니면 어지간히도 겁이 없는 건가?

그런데 묘한 점이 있다.

‘흉터? 화상인가?’

여자의 손과 팔에 변색된 부분이 드문드문 보인다.

심지어 몇몇 부위는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듯했다.

상대는 내가 그걸 발견한 걸 눈치 채고는···.

“아, 이거요? 요전에 연마 작업을 하다가 불똥이 조금 튀었거든요.”

“연마?”

“가끔씩 있어요. 화력이 너무 쌔서 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무래도 제가 미숙한 탓이겠죠.”

“혹시 당신은 쇠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인가?”

마침 대스승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장인이라네, 빅터.”

그는 자신의 품에서 화승총을 꺼내 보였다.

“이건 아이라의 도움으로 만들어낸 거지. 레이의 쌍수도 마찬가지고.”

돌아보니 레이 녀석도 짐을 풀고 무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부탁할게, 아이라 언니. 날이 좀 많이 상했거든.”

“세상에··· 어쩌다 이렇게 됐니? 검으로 암석이라도 벤 거야?”

“사정이 좀 있었어.”

“이 정도면 녹이고 새로 만드는 게 더 났겠는데?”

레이는 아쉬운 눈치였다.

사마귀 괴물과 실랑이했을 때를 떠올렸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그 칼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네. 괜찮아, 내가 하는 데까지 복원해볼게.”

그런가?

이 허름한 집에 굳이 방문한 이유는 정비를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술집은 아마도 간판만 내놓은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이유로 숨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장간처럼 보이지 않는데.”

내가 묻자, 아이라라는 양손을 포개며 활짝 웃어보였다.

“작업실은 좀 더 안쪽에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구경하실래요?”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있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다.

영 미덥지가 않은데.

그런 나를 바라보며, 레이는 드물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아. 하지만 저리 보여도 아이라 언니는 솜씨가 좋거든.”

“아니, 그거 무슨 의미니? 나는 겉도 속도 알찬 여인인데?”

“큭큭, 입이 가벼운 게 탈이지만 일처리 하나만큼은 믿을만한 아가씨지.”

“크레이그 씨까지 그러기에요?”

대스승이나 레이, 두 사람 모두 상대와 웃고 떠들고 있다.

이들에게도 평범한 인간들과 같은 일면이 있었던가?

아니면 이 아이라라는 여자에겐 만인의 기분을 누그러뜨리는 힘이라도 있는 것일까?

적응이 안 된다.

최근 어둠의 것들을 경계하며 거의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왔던 탓인가?

지극히 정상적이어야 할 광경이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쁘진 않군.’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

저절로 그리운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아무리 말수가 적다곤 해도, 고향 친구들과 어울릴 때만큼은 어느 정도 풀어질 수 있었지.’

가끔은 농담도 건넸다.

놀리는 녀석도 있었고, 덕분에 사소한 시비가 붙기도 했지.

그래도 곡주에 취해 하룻밤을 함께 지새우다 보면, 어느새 모두와 사이가 좋아져 있었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이맘때쯤 장작을 패며 모임을 가졌을 것이다.

해가 지면 연례 행사였던 사소한 노름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속임수에 약하니까 금방 잃었을 테고.

기껏 잡아놓은 토끼 고기나 가죽을 빼앗기고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리곤 꼼짝없이 그레이스에게 혼이 나는 거지.

술 냄새를 풍기는 짐승이 돌아왔다면서 딸 아이 앞에서 매도를 당한다.

그러면···.

“빅터 씨? 왜 그러세요?”

아뿔싸, 나는 얼른 상념을 가슴 속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어느새 여자가 내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힘든 표정을 지으시던데,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니, 아무 것도.”

나는 가까스로 표정을 다시 굳혔다.

처음 만난 여자의 앞에서 본심을 드러내고 싶진 않아, 최대한 감정을 숨기려 했다.

“여독이 덜 풀린 모양입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흙이 아닌 땅을 밟은 것이 오랜 만이다.

목욕이 간절하기도 하고, 몸을 뉘일 수만 있다면 바로 잠이 들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나는 피로가 누적되어 있는 상태다.

“그래요? 그럼 얼른 쉬시는 게···.”

여자는 대스승에게 시선을 향했다.

혹시 자기가 우릴 멈춰 세운 것이 아닌지 넌지시 떠보는 듯 했다.

“빅터 씨는 아직 이식을 받지 않으신 거죠?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되겠네요.”

이식?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그래, 보다시피 이 친구는 아직 준비 단계에 머물러있는 상태지.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았어.”

아직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에게 물어봐야, 때가 오면 다 알게 될 것이라며 적당히 넘길 테지.

대스승은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하긴, 긴 여행이었으니 자네가 지쳤을 만도 하지. 괜찮다면 먼저 쉬고 있겠나? 아이라에게 말해서 방을 하나 내주지.”

“아닙니다.”

“뭣하면 나가서 시내 구경이라도 어떤가?”

나는 이 주변을 모른다.

가뜩이나 지나치게 넓은 도시는 사방이 미로처럼 전개되어 있다.

조금 전에 잠깐 둘러보면서도 길을 잃을지 모른단 걱정부터 들었다.

홀로 북적이는 사람들 속을 헤매야 하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흠, 그렇다면 조금만 더 어울려주게. 자네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테니.”

“예?”

“아이라, 수집품들 상태는 어떤가?”

대스승의 물음에 여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히 최상이죠.”

“훌륭하군. 그럼 이 친구가 쓸 만한 녀석을 찾을 수 있게 좀 도와주게나.”

“물론이죠.”

아이라라는 여자는 내게로 손짓하더니.

“자, 빅터 씨. 이쪽으로 따라와 주세요.”

어떤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4.

이 건물은 위장이었다.

바깥에서 보았을 땐 허름하고, 규모도 작아보였지만···.

여자의 뒤를 따라 망치와 모루가 있는 방을 지나자,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왔다.

땅 속 아래에 꽤나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건 대체···.’

그 안은 무기고 그 자체였다.

자그마한 날붙이부터 수도의 기사들이 쓸 법한 넓은 검에 고급스런 기병창··· 심지어 화포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뭐든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가세요.”

뭐든 집어들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대부분이 진품처럼 보인다.

이 정도라면··· 이미 개인의 수집품이라 부를 수준은 아니었다.

“뭐하고 있나? 아이라의 말처럼 무엇이든 상관없다네.”

“어서요. 한 번씩 휘둘러봐도 괜찮으니까.”

두 사람이 재촉해온다.

어째서인지 약간 신이 난 듯하다.

그러나 나는 병기에 일가견이 없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것들은 어디까지나 짐승을 상대하는 무기들뿐이었지.

고작해야 무두질용 단검이나 토끼 덫, 쇠뇌 정도가 익숙하다.

‘하지만 그딴 걸론···.’

나는 무의식적으로 강대한 적을 떠올린다.

이전에 만난 괴물들···.

특히 전신이 태아로 이뤄진 거인 같은 놈이 생각난다.

대스승은 기지를 발휘해서 그것과 정면에서 맞섰지만, 과연 내가 상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화승총을 쏴봤자 바로 주먹에 뭉개졌을 것이다.

작은 주머니칼론 생채기만 남기고서 사지가 찢겨졌을 지도 모른다.

검을 든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레이가 쓰는 품격 높은 칼부림 같은 건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렇다면 뭐가 있을까?

‘다루기 쉽고 단순한 것··· 그러면서도 강력한 위력을 지닌 무기가 간절하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거대한 물건 쪽으로 향한다.

기준은 잡혔다.

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놈으로.

그것은 내 분노를 전부 소진해도 파괴되지 않을 만큼 견고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한참이나 사방을 둘러보다, 결국 그 조건을 만족하는 녀석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호오, 그거 괜찮은 선택이군.”

대스승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레이는 질겁하면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딱 지 같은 걸 골랐네.”

“심려치 말게나. 레이는 자네와 잘 어울린다고 말하고 있는 거네.”

그래, 나도 그 의견에 동감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증오를 그대로 증명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무기다.

“너무 큰 거 아닌가요? 엄청 무거울 텐데···.”

아이라라는 여자가 염려한다.

그럴 만도 하지.

나라고 어지간한 각오로 뽑아 든 것은 아니다.

“아니, 이걸로 딱 좋습니다.”

나는 천천히 그것을 들어올렸다.

차가운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묵직하군.

나무 손잡이에 철심이라고 들어가 있나?

그 무게는 양손으로 겨우 지탱해야 할 정도다.

내리쳤을 때의 위력이 벌써부터 짐작된다.

“큭큭, 모양새가 익숙하군. 예전에 다뤄본 적이 있나?”

물론 살아있는 것을 상대로는 없다.

이 반월 모양의 날붙이는 기껏해야 장작을 팰 때 조금 휘둘러봤을 뿐이다.

그랬다.

내 손아귀에 쥐여진 것은 폭력과 야만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절대 나무토막 따윌 쪼개거나 손질하는 도구가 아니다.

살점을 베고, 근육을 절단하고, 뼈까지 토막 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흉포한 병기지.

그것은 크고 납작하고 넓은 칼날이 박힌 전투용 도끼Battle Axe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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