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장(7)
8.
“재미있는 제안이구나. 꽤나 솔깃하군.”
“그러면···.”
“정보의 가치에 따라서 네 년의 처형은 조금 더 미뤄두도록 하지.”
대스승이 마녀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은 의외였다.
오히려 클라리스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수작을 부리는 마녀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한 건 내 쪽이었지.
믿기 힘들다.
이렇게 금방 그녀에게 도달할 리 없다.
분명 속임수일 것이다.
그러니 마녀를 믿어선 안 된다.
무방비한 선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럴싸하고 예쁘장한 가면을 쓰는 것은 사기꾼의 기본 소양이니까.
분명 속내가 있을 테지.
의심을 해야 할 상황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다.
나는 토로했다.
거의 소리까지 지르면서 반대했을 터였다.
하지만 대스승에게서 돌아온 말은···.
“레이, 빅터··· 잠자코 있거라.”
나는 처음으로 그가 두렵게 느껴졌다.
비범한 노인, 존경스러운 연장자라고 속으로 경외하기는 했어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모자를 눌러쓰는 대스승의 눈가에 기쁨의 주름이 잡히자··· 숨겨진 본성이 일부 드러난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리곤 등과 어깨를 아주 잠깐 떨었다.
인간이 명백한 악의를 품었을 때의 얼굴을 아는가?
인생에서 가장 미워하는 자가 불행을 겪는 것을 볼 때 은연중에 드러나는 표정은?
지금 대스승은 딱 그런 모습이었다.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뒤섞여 불경하고도 무시무시한 인간의 어둠을 만들어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마녀보다도 꺼려지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오, 이런이런··· 안 돼. 나이 값도 못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군.”
다행히도 대스승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
나나 레이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은 없었지만, 스스로 억눌러 마음을 다잡은 듯 보였다.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기뻐하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금발의 마녀는 깊이 안도했다.
목소리의 긴장이 풀린 것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 결정에 레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을 보냈지만, 대스승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검을 레이에게 넘겼다.
그리곤 무방비한 모습으로 천천히 마녀에게 다가갔다.
“자, 그럼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실까?”
“장소를 옮기지 않아도 괜찮나요?”
“상관없다. 우리가 격식을 차릴 사이는 아닐 터.”
“예, 그렇다면 바로 말씀 드리지요. 자색의 마녀는 여기서···.”
그때였다.
사선에서 섬광이 번뜩인 것은···.
“···히, 커헉···!”
마녀의 새하얀 목에 핏빛 균열이 일었다.
대스승은 무방비하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모르는군.”
오히려 치명적인 독수를 숨긴 채였다.
단검 한 자루를 소매에 넣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순진한 것 아닌가, 아가씨?”
“어, 어극! 왜, 이런··· 쿨럭?!”
마녀는 갈라진 목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어떻게든 이음새를 붙이려 발악했다.
그러면서도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눈앞의 대스승과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놀랄 만도 하지, 나도 껌뻑 속았으니까.
“어리석구나. 실로 멍청하기 그지없어. 네년이 아는 건 세간에서 불리는 내 별명뿐이냐? 학살자 크레이그!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느냐? 아니었겠지.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딴 헛소리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을···.”
“이··· 이, 노옴···.”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잘 알아 두거라.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마녀 따위와 협상할 위인은 없다. 특히 나는 더욱 그렇고.”
대스승은 교활했다.
그가 마녀에게 다가가기 전에 보였던 광란의 흥분은··· 다름 아닌 상대가 자신에게 속았을 때 보일 반응을 상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저주··· 한다! 내 영혼을 걸고 네놈을 저주하겠다, 학살자 크레이그!”
마녀는 돌변하여 악귀의 얼굴로 각혈 섞인 외침을 토해냈다.
공기가 떨릴 정도로 원한이 서린 목소리이었다.
정말로 저주가 실존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에게로 닥치겠지.
하지만 대스승은 그에 실소로 화답했다.
아주 꼴좋다는 듯, 그러나 절제된 조소를 보냈다.
“이거 미안하군. 이 이상 저주를 받기엔 그간 쌓인 업이 많아서 말일세.”
업Karma.
허나 그건 단순한 비유도, 오직 비꼬기 위한 목적으로 꺼내든 단어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이 몸엔 일흔 개 이상의 저주가 걸려있다. 전부 너희 마녀들이 죽어가면서 남긴 선물이지. 하여간···.”
유명세 때문에 이름이 알려지는 건 곤란한 일이다.
···라고 말하며 대스승은 혀를 찼다.
“그러니 거기서 하나 더 늘어난다고 크게 변할 건 없네. 오히려 내겐 일종의 훈장이나 다름없으니.”
“악···마, 너야말로 진짜 악마다!”
“과찬의 말씀. 그보다 사역마의 육신을 빌렸다고 했나? 그거 편리하군. 이대로 몸뚱이가 사라져도 정신은 그대로 이어져서 기억이 남는 것 아닌가?”
“그··· 그래! 나는 몸을 숨길 것이다! 추적하지 못하게··· 오래도록 자취를 감추고 너희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면 그만···!”
“오호, 그거 재밌군. 어디 한 번 해보려무나. 달리아, 아니 빙의의 마녀라고 불러줄까?”
“뭣···이?”
“네 정체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4년인가 5년 전쯤에 이 지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지? 혼자인 여행자만 노리는 겁쟁이 마녀가 하나 있다고, 마침 이쪽으로 파견 오기 전에 출신 사냥꾼들에게서 들었다. 그때에 비하면 재주는 조금 늘어난 모양이지만, 알맹이가 이래서야···.”
“이, 이익···!”
“나와 내기라도 하겠나? 내 앞에서 도망칠 수 있을지? 좋아, 나는 네 년을 죽이는 데 걸겠다. 내 약속하지, 네가 말하는 그 ‘소중한 것’이 무엇이든 확실하게 파멸시켜 주겠다.”
달이 구름에 잠겼을 때, 대스승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오직 그의 안광뿐이었다.
“네 목소리, 그 얼굴··· 어떤 걸 바꾸어도 소용없어. 이미 마기의 성질까지 전부 기억했다. 어디, 달아날 수 있다면 달아나 보거라.”
“히··· 히이익!”
마녀의 얼굴은 말 그대로 사색이 되었다.
고양이에게 물린 쥐라는 비유도 여기에 쓰기엔 모자라다.
이미 뱀에게 반쯤 잡아먹힌 생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가짜 몸이기에 능력이 제한되는가?
마녀는 마법이나 술법을 사용할 여유조차 없는 모양인지, 어색한 움직임으로 뒷걸음질 칠뿐이었다.
“왜 그러지? 저주 한다며? 왜? 주문을 외우지 못하겠나?”
아니, 사실은 아니었다.
마녀가 수작을 부리지 못한 것은 두려움이나 당황해서가 아니라···.
“잘 보거라, 빅터. 이 유성의 파편을···. 짤막한 단검이기에 쓸 기회가 많지는 않다만, 일단 베기만 한다면 보다시피 효과 만점이지.”
자세히 보니, 대스승이 들고 있는 날붙이에는 은은하게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저게 뭐지?
질문하기도 전에, 레이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저건 별똥별의 일부야. 바깥 세계에서 온 금속을 긁어내 만들었지. 원리는 모르지만, 신비하게도 모든 마기와 마법을 봉인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여자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거군.
그야말로 반마술의 극치··· 마녀를 상대하기 최적의 무기다.
하지만 왜 진즉 사용하지 않았지?
그렇게 효과가 좋다면 기회를 아낄 필요는 없을 텐데?
당연히 떠오르는 의문에 대해서도 레이는 설명을 이었다.
“주석이나 금강석보다 희귀하거든. 운석에서만 아주 드물게 채취하기 때문에··· 우리 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사냥꾼만이 소지를 허락받지. 뭐,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마녀에게 이만큼 거리를 좁힐 상황이 좀처럼 생기지 않기도 하고.”
“그런가··· 굉장하군.”
“그렇지? 대스승 크레이그 정도의 강자만이 쓸 수 있는 거야. 아니면 지급은커녕 신청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지.”
아니, 나는 저 단검의 효력에 대해서 감탄한 것인데···.
레이는 그걸 스승의 대단함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가슴을 활짝 펴면서까지 의기양양해한다.
자기가 칭찬을 받았을 때보다 기뻐하는 눈치다.
크레이그에 관한 일이라면 이처럼 앳된 얼굴에 어울리는 표정도 지을 수 있나보군.
그만큼 그녀가 대스승을 존경하고 있단 솔직한 마음이 눈에 뻔히 보인다.
“오늘 밤은 실로 기쁘구나.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보여줄 수 있으니..”
어느새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온화하게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빛에는 살기가 넘친다.
대스승은 출혈로 비틀거리는 마녀를 쫓아서 느긋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아아···.”
대스승의 그림자가 거리를 좁혀오자, 그 무시무시한 기척에 마녀는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떨리는 눈동자에 두려움이 스며있다.
그 순간, 나는 마녀를 동정했다.
삼라만상을 부정하는 마법을 쓰는 마의 권속에게도 대스승 그레이그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으리라.
“그럼, 다음에 또 보자꾸나!”
단검을 역수로 잡아 들어올린다.
그리곤 금발 마녀의 등짝에 깊이 찔러 넣는다.
그것이 열 댓 번 정도 이어진다.
대스승이 단검을 거둬들었을 쯤에는 이미··· 애처로이 울부짖던 비명과 비참한 신음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이제 마녀의 자아를 담고 있던 그릇은 그대로 널브러진 채 미동도 없었다.
“사역마의 몸을 이용하는 술법이라··· 써먹기에 따라선 굉장히 성가신 적이 되겠군. 흐음, 역시 다음에 만나면 무조건 죽여 놓는 게 좋겠어. 큭큭, 두려움을 제대로 각인시켜놨으니 당분간 나대거나 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마녀의 시신은 머잖아 몸에 기포 같은 것이 들끓기 시작했다,
정말로 만들어낸 육체인 모양인지, 금세 걸쭉하게 녹아선··· 이윽고 흙바닥에 스며들어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왠지 모르게 허망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왜 그러지, 빅터? 설마 정보를 듣지 못한게 마음에 걸리나? ‘자색의 마녀’에 대한 단서가 아쉬워서? 중요한 이야길 듣기도 전에 마녀를 죽여 버린 게 꽤나 불만인 얼굴이군?”
“···.”
“큭큭, 안심하시게. 그 정도 소식통 정도는 우리에게도 있으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 실제로 이 주변에는 과거에 ‘자색의 마녀’가 사용했을 걸로 추측되는 은신처가 하나 있었다. 허나 조사는 충분히 했고, 오래 전에 매몰도 끝났지. 이제와 찾아가봐야 헛수고야.”
어쩐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투···.
내가 진의를 묻자, 스승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망할 것 없다. 그곳에 만에 하나라도 네가 찾는 클라리스란 마녀는 없었을 테니.”
“그렇습니까···.”
“고개를 들거라. 주눅들 필요 없다. 그래도 성과가 좋지 않으냐? 자네는 하룻밤 사이 마녀를 둘이나 목격했다. 그럼에도 사지가 멀쩡하지. 얻은 것은 있지만 잃은 것은 없어. 공기 중에 떠도는 마기에도 충분히 익숙해졌을 터다. 자네의 육체와 정신은 이처럼 조금씩 다음 단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가고 있네.”
“다음··· 단계?”
“기뻐하도록. 이렇게 단 시간에 많은 경험을 쌓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
대스승은 유쾌하게 말했지만, 나는 심정이 복잡했다.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반대로 너무 많은 것들을 목격한 나머지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보여주었던 그 행태들···.
마녀를 향한 참혹하리만큼 일방적인 폭력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왜 그토록 증오하는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대스승, 당신은 대체 어떤 과거를 살아온 겁니까?’
어렴풋이 짐작만 해볼 뿐이다.
그가 오래도록 나이를 먹은 만큼, 수도 없이 상처받고 이겨내며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을···.
그 결과, 그는 사람의 길을 벗어났다.
인간을 버리고, 두 발로 걷는 마물의 길을 선택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랬다.
그는 정말 늑대였다.
회색 털가죽을 두르고, 마녀에게 송곳니를 드러내 물어뜯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짐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자를 스승으로 삼고 말았다.
“아직 망설이느냐?”
대스승은 내게 묻는다.
고작 하룻밤, 순간에 불과한 공포와 대면한 감상을···.
동시에 자신을 따라올 수 있겠느냐고 넌지시 떠보는 것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원한이 없는 자를 미워할 자신이 없기 때문인가?”
“···.”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자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예?”
“나도 예전에는 그랬지. 심약하고 무력했다. 선배 사냥꾼들과 동행하기라도 하면, 밤마다 토악질과 오열을 반복했지.”
“정말입니까? 당신이나 되는 인물이···.”
“하지만 그것도 언젠가 견딜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가 되면 그렇게 변하고 말지. 놈들에 대한 금단의 지식, 싸우는 방법과 지혜로 터득하고 나면··· 일면식도 없는 상대를 그저 마녀란 이유만으로 웃으며 쳐 죽일 수 있게 된다.”
“그럴 수가···.”
“그리고 빅터, 너도 그렇게 될 것이다. 자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지.”
그러면서 스승은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슬프면서, 동시에 기쁜 듯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어쩌면 나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비춰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반면, 나는 대스승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엿보았다.
상념 속에는 그의 광기와 가학성을 물려받은 내가 있다.
모가지가 잘린 마녀의 머리칼을 쥐고, 다른 한손으로 살점이 붙은 도끼를 털어내는 한 사내의 모습이···.
언제까지고 복수의 대상을 찾아 처절한 싸움을 이어나가는 방랑자, 미치광이 마녀 사냥꾼이 바로 나다.
만일 대스승의 최후가 비참하다면, 그건 나의 마지막 또한 마찬가지일 테 지.
‘···하지만, 이제 나는 돌이킬 수 없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과거의 미련과 슬픔뿐이다.
여기서 멈춰서봐야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평생 후회할 뿐이겠지.
내일 따윈 없어, 더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대스승 크레이그는 말한다.
나는 강해질 것이라고.
내가 원하는 바, 복수를 이룰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거라며 계속 격려해온다.
아주 교묘하면서도 매력적인 제안이다.
희망을 잃은 나 같은 이에겐 그 무엇보다 강한 유혹이겠지.
허나 그 말로가 뻔히 보인다.
나는 끝내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몇 번이나 괴로워하고 절망해야할지···.
지금 내 앞에는 거대한 수렁이 있다.
그것은 발을 들이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과 이어진··· 아주 깊은 나락의 입구이다.
각오는 했다.
애초에 나는 죽은 자다.
마을이 먹혔을 때, 이미 내 목숨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너는 마물이 되어라. 마녀 사냥꾼이라는 이름의 마물이···!’
무언가가 귓가에 속삭인다.
그것은 대스승의 얼굴로, 때로는 아버지의··· 혹은 클라리스의 목소리로 직접 마음속에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