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55화
가이아 신전에서 최근 가장 주목하고 있는 신관은 바로 둘란이었다.
그는 가이아 내에서 가장 젊은 1급 신관이기도 했다.
그가 성왕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소문은, 그가 성배의 선택을 받게 되면서부터 -세상에는 그렇게만 알려졌다- 더욱 신빙성을 얻었고, 그것은 둘란의 정통성을 증명해 주었다.
“뭐니 뭐니 해도 둘란 신관이 이토록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사실 멀린 경의 합류였지.”
“맞아. 결국 신관의 힘은 신성력과 성기사단의 무력에서 나오는 거니까.”
아덴카의 전대 12검 중 한 명이었던 멀린의 합류로 인하여 그는 가이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성기사단을 꾸릴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빈첸과의 오랜 우정이 알려지게 되면서 둘란은 젊은 신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획득하기도 했다.
둘란은 바람소리를 통해 공식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가이아는 아덴카의 오랜 친우로서 빈첸 공자와 함께하겠습니다.”
가이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1급 신관.
그의 공식적인 성명은 꽤 큰 파장을 일으켰다.
둘란을 아끼는 은퇴 신관들은 걱정했다.
“장로원이든, 마탑이든, 제대로 된 것들이 나오지 않으면 어쩔 참이냐?”
“나올 것입니다. 부랑자 수용소부터 시작하여 작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황들이 장로원과 마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정황일 뿐이다. 물증이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없는 거야.”
은퇴 신관들 또한 둘란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너는 벌써 어느 정도 입지를 갖추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몸을 사리면서 천천히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하는 거야. 빈첸처럼 급진적인 인물과는 더 이상 교류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둘란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빈첸 공자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의 신념을 행동으로 증명해 왔으며, 저는 그의 신념을 지지합니다.”
은퇴신관들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둘란의 표정과 말투에서 진심을 읽었다.
“진심이구나.”
“예, 진심입니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무모하게 만드는 것이냐?”
“그가 꿈꾸는 정의가 저를 뜨겁게 만듭니다.”
은퇴신관들은 한참 동안이나 둘란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들도 둘란을 말릴 수 없었다.
은색 갑옷을 입은, 둘란의 성기사단장 멀린이 명령을 내렸다.
“기수는 깃발을 들어라.”
기수가 가이아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었다.
12명으로 이루어진 성기사단이 아덴카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 * *
빈첸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저를 돕기 위하여 모여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빈첸은 왼쪽부터 차근차근 이름을 부르며 예의를 표했다.
“용아인들의 어머니, 나이메르 경과 휘하의 용아인 친우들과.”
나이메르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가 이끄는 용아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들 무리 가운데 한 소녀가 끼어 있었는데 그녀가 빈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용아인들이 인간세상에서 겪을 불편함을 방지하기 위하여 파견된 자유연합 측 가이드였다.
빈첸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유리나. 오랜만이군.’
빈첸과 함께 고지점령전을 치렀던 아룡검대원 유리나였다.
이제는 로랑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빈첸의 모습을 보자마자 심장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멋있었는데 그새 더 멋있어졌네.’
이제는 훤칠한 청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훌쩍 컸다.
예전보다 키 차이가 훨씬 많이 났다.
‘우리의 위치도 많이 달라졌고.’
그때는 한 고지를 향해 함께 경쟁했던 사이였으나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빈첸은 그사이 3공녀와 6성 무인을 꺾고, 정식으로 아덴카의 무인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빈첸이 옆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붉은 요새의 부요새장 바르곤 경과 예하의 많은 탑 외 마법사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통성을 직접 나서 검증해 주신 용병길드의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꽤 많은 자들이 단상 아래에서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소문이 꽤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실력자였고, 빈첸의 기백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보통은 실제보다 소문이 과하기 마련인데 말이야.’
그러나 직접 본 빈첸은 소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은 결코 열여섯 어린 무인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저를 돕기 위해 먼길을 달려와 주신 방계의 혈족들에게도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합니다.”
과거,
빈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레반 아덴카를 비롯하여 그가 규합한 방계의 혈족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일전에 레반 아덴카가 마력체에 관한 단서를 알고 있었듯, 각자 빈첸을 도울 만한 실마리들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제 친우인 둘란 경과, 제 스승이신 멀린 경.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성기사 여러분들께도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한 무리가 남았다.
“그리고 저는 백색검대의 선임 검대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선임 검대장은 부검대장 다음 직책이었다.
파성무인이 되자마자 한 검대의 셋째 자리를 맡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저와 함께 해주실 백색검대의 검대원분들께도 미리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자리를 기록하는 사람은 마리아 최고 수석 기자였다.
그녀는 단독으로 이 자리에 초청되었으며 최선을 다해 이 모든 순간을 기록했다.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일부러 백색검대를 선택했겠구나!’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파성무인이 되면, 보통 아덴카 내의 검대를 선택해서 갈 수 있다.
아마도 빈첸이 스스로 백색검대를 선택했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높은 직책을 받았더라도, 당장의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어려워.’
경험 많은 무인들 중에는 빈첸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꽤 많았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을 노력해 온 자들 위에, 새파랗게 어린 자가 상관으로 임명받은 거니까.
빈첸에게 거품이 끼어 있다 생각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특히 빈첸을 직접 보지 못한 자들은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이 합동조사단에는…… 백색검대의 실질적 리더였던 멀린 경이 포함되어 있지.’
백색검대원들은 빈첸을 못마땅하게 여길지언정, 멀린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멀린이 빈첸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백색검대원들은 빈첸에게 복종해야 했다.
‘세상은 빈첸 공자의 무위에만 집중하고 있지만, 그게 다가 아냐.’
그녀는 약간 다른 시선에서 빈첸을 파악하고 기록했다.
빈첸의 무력적 성장은 물론 놀랍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 * *
조사가 시작되었다.
며칠이 지난 뒤.
마리아가 빈첸의 방을 찾았다.
“장로원과 마탑이 극심한 압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금방 흐지부지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일이 점점 커지니 당황한 듯하네요.”
안타깝게도 빈첸에게는 마리아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바람소리의 막강한 영향력을 통하여, 이번 사건은 매일매일 대서특필되고 있는 상황.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자들은 대부분 이번 사건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마리아는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뭐, 대단한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공치사는 그냥 생략할게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장로원과 6마탑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마리아 기자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저도 생각하는 게 있기는 한데…….”
빈첸이 빙그레 웃으며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우리가 같은 것을 생각하는지 한 번 확인해 볼까요?”
“좋아요.”
빈첸과 마리아가 종이에 무엇인가를 써 내려갔다.
마리아는 약간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말했다.
“자. 하나, 둘, 셋, 하면 글자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 둘. 셋.”
빈첸과 마리아가 동시에 자신의 종이를 내밀었다.
두 종이에는 모두 ‘단미(斷尾)’라고 적혀 있었다.
마리아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죠. 꼬리를 자르겠죠. 델백 장로는 이미 죽었으니까 델백 장로한테 모조리 뒤집어씌울 거고. 6마탑에서도 그럴듯한 인물을 내세울 거예요.”
“누가 있겠습니까?”
마리아의 정보력이 곧 바람소리의 정보력.
바람소리는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지닌 단체였다.
마리아와의 대화는 빈첸에게도 유익했다.
“공자는 누구라고 생각해요? 우리 이번에도 적어볼까요?”
“좋습니다.”
둘은 동시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하나. 둘. 셋.”
종이에는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르넬리]
바르넬리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 정확한 의미로는 바르넬리의 제자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명분도 좋았다.
바르넬리는 무려 부탑주였고, 그녀가 키우던 제자들이 이런 짓을 벌였다고 뒤집어씌우면 일이 편해지니까.
마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야 바람소리의 정보력과 정세를 분석해 주는 전문가들의 조언이 있다지만, 빈첸 공자는 도대체 뭐예요? 어떻게 검만 판 무인이 그럴 수가 있어요? 옆에 뭐 귀신이라도 있어요?”
율리안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귀신 아니고 잡신이거든요!
‘머리 아프다. 소리 지르지 마라.’
-아니 형님, 귀신이라고 하잖아요. 신에도 격이 있단 말이에요.
‘귀신이나 잡신이나.’
-어어? 귀신이라니? 귀신이 나처럼 똑똑한 거 봤어요? 봤냐구요!
‘…….’
-말을 좀 해봐요!
‘말.’
-이 영감님이……!
‘사명이 뭐였더라.’
-물론 훌륭한 귀신도 있기 마련이죠. 헤헤.
빈첸이 말했다.
“그들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
마리아도 이제 더 이상 놀라기는 포기하기로 했다.
빈첸은 자신이 보는 것보다 늘 한 단계 이상을 더 보고 있었으니까.
“좋아요. 어떤 그림을 그려줄지 벌써부터 엄청 기대되네요.”
며칠 후.
결국 빈첸과 마리아의 예측대로 움직였다.
장로원의 4대 장로 중 한 명인 피다넬이 직접 빈첸을 찾아와서 말했다.
“나도 몰랐다. 이것은 델백 장로의 일탈이었다.”
“그렇습니까?”
델백 장로의 침대 밑에서 일기장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 안에는 빈첸을 저주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이메르가 이끄는 정령술사까지 동원된
“오른팔을 잃은 이후로 네게 큰 앙심을 품은 모양이더군. 그래서 이렇게 부정한 짓을 저질러 대니얼을 움직인 것 같다. 하여 장로원은 델백의 장로 직책을 영원히 박탈하고 시체를 꺼내어 불태울까 한다.”
“피다넬 장로님은 이번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셨습니까?”
“나는 전혀 몰랐다. 대외적인 시선과 장로원의 명예가 있으니 이쯤 하자꾸나.”
빈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500년이 지나도 똑같구나.’
사람과 내용이 바뀔 뿐, 본질은 같았다.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피다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엇이 그리 웃기단 말이냐?”
슬쩍, 저만치 옆에서 조용히 기록하고 있는 마리아를 훔쳐보았다.
바람소리의 최고 수석기자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목소리를 낮추어 작게 속삭였다.
“네가 무슨 장로원을 상대로 승리라도 한 것 같으냐?”
“장로원에도 명예가 남아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요.”
“뭐?”
피다넬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 말은, 장로원 전체를 모욕하겠다는 것이냐?”
“적어도 피다넬 장로님께서 명예를 운운하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가려 하거라. 내가 아덴카에 몸담은 햇수만 60년이 넘는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이 이런 짓을 반복하셨을까요?”
빈첸이 피다넬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시종장. 내가 부탁한 것을 가지고 오도록.”
시종장 레일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시꺼먼 물체가 하나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