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54화
칸의 파격적인 인사에 장로원은 즉각 반발했다.
지금은 은퇴하였으나 한때 장로원의 수장이었던, 명예장로 라센느가 칸을 찾았다.
“가주. 가주가 장로원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너무 과했소.”
라센느는 어린 시절 칸의 교관이었다.
사실 교관이라기보다는 거의 유모에 가까웠고, 실제로 라센느는 칸을 상당히 예뻐했었다.
칸의 성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원로가 되어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덴카 내에서 칸이 예의를 차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무엇이 과했습니까?”
“상황을 보아하니 장로원의 실책이 분명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조사를 빈첸 같은 어린애에게 맡기는 것은…….”
라센느 또한 한때 장로원의 수장이었다.
장로원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이 세계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많았고, 빛보다는 어둠이 많았다.
장로원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며 아덴카의 뒷배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전례 없는 특혜요.”
“전례 없는 성취를 보인 자에게 전례 없는 특혜를 주는 것이 잘못되었습니까?”
“…….”
라센느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칸이 저렇게까지 자식을 두둔하는 모습을 여지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가주가 보는 빈첸이 정말로 그 정도란 말이오?”
“두고 보면 알게 될 일입니다.”
라센느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왼쪽 가슴에 달고 있던 하얀 배지를 풀어 땅에 내려놓았다.
하얀 배지는 명예 장로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배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명예 장로를 포기하겠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낮추었다.
“칸. 정말로 장로원과 전쟁을 하려는 게냐?”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뿐. 전쟁이 아닙니다.”
라센느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이러한 날이 올 줄 알았다. 그간 참은 것이 용할 정도지. 칸. 하나만 묻자. 내가 다스리던 시절의 장로원이, 지금보다는 나았느냐?”
“그때는 저도 어려서 잘 모릅니다만, 아버지께서는 그렇다 하셨습니다. 어린 날의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라센느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많이 유치한 질문이었다.
지금보다는 그때가 나았다는, 가주의 인정 한마디를 갈구하는 꼴이라니.
‘나도 많이 늙었구나.’
스스로 사리분별이 잘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지를 내려놓은 것이었다.
“칸. 나는 아덴카에서 멀리 떠날 예정이다.”
그녀는 여전히 장로원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상황이 더 악화되면, 장로들은 라센느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장로들과 너무 많은 인연과 관계를 맺어왔어.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울 게다.”
그래서 떠나야 했다.
그게 칸을 돕는 일이었다.
“거처는 정하셨습니까?”
“그저 발이 닿는 곳이 내 집이겠지.”
그녀는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떠나는 입장에서 염치없는 말이겠지만…….”
“말씀하십시오. 그 정도 자격은 됩니다, 라센느.”
일부러 이름을 불렀다.
이제 직책이 없는, 사람 라센느로 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어린 시절의 유모이자 교관이었던 라센느로 말이다.
그 마음을 읽은 라센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젊은 날의 내가 꿈꿨던 아덴카를 향해 나아가다오.”
발걸음을 돌려 나가다가 문득 멈춰 섰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아, 그리고 빈첸 말인데. 그 아이의 모습이 어린 날의 너와 꼭 닮았더구나.”
“저도 그렇게 느낍니다.”
“그렇지만 말이야.”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네가 가지지 못한 것들까지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그게 뭐죠?”
“그를 돕는 사람들. 그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자들.”
라센느는 어린 시절 칸을 보며 늘 안타까워했었다.
칸은 너무 뛰어났고, 홀로 강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운 좋게도 베르사라는 좋은 사람을 만나, 지금껏 잘해오고는 있었지만 베르사 한 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우리의 다음 세대를,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겠다.”
정말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했다.
‘칸.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했다. 내 친아들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녀는 아덴카를 떠났다.
* * *
붉은 요새의 요새장 헤르카는 펄쩍 뛰었다.
“안 돼애애애! 바르곤 경 없으면 붉은 요새는 무너진다고!”
“안 무너집니다.”
“아 제발, 다시 생각해 줘.”
“영영 떠나는 게 아니라니까요? 마법 조사단으로서 파견되었다가 다시 돌아올 겁니다.”
“아. 그런 거야? 난 또 완전히 그만둔다고.”
바르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아까 뭘 들은 급느끄?”
“아니, 나는 그만큼 바르곤 경을 사랑한다 이 말이지. 음, 바르곤 경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혐르곤 2세라고?”
“예?”
“빈첸 말이야.”
대니얼 딸의 사체에는 분명히 마법 술식이 존재했다.
그를 조사하기 위하여 빈첸은 바르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갔다와! 진짜 돌아와야 해, 안 돌아오면 나 잉잉 운다?”
바르곤은 대답하지 않고 붉은 요새를 떠나 아덴카 본가로 향했다.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바르곤은 빈첸을 찾았다.
“무슨 생각입니까?”
“말 편히 하십시오. 그게 편합니다.”
“무슨 생각이냐? 나는 마탑 소속의 마법사도 아니다.”
마탑 소속의 마법사가 아닌데 어찌 이런 큰 일을 맡는단 말인가.
마탑 소속이라는 것은 곧 검증된 마법사라는 뜻이다.
반대로,
마탑 소속이 아니라는 말은 마탑에서 도태된 마법사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탑을 믿을 수가 없어서요. 좀 도와주십시오.”
이 또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바르곤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혼자서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비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을 규합해 주십시오.”
“뭐?”
“세상에는 마탑 소속이 아니어도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들이 많지 않습니까?”
마탑은 거대한 기득권 세력이었다.
그 안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실력만 있어서는 안 됐다.
심지어 최근에는 전통있는 가문 출신이 아니면 마탑 소속으로 받아주지 않는 경향도 강해졌다.
빈첸이 말했다.
“이제는 바뀔 때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
바르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몇 년 전의 빈첸과 지금의 빈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바르곤 경에게만 말씀드리는 건데, 6마탑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중점을 두고 조사해 주십시오.”
헬라임의 ‘고지’에서 분명 헬리오스와 만났었다.
헬리오스가 헬라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으나, 물증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대니얼과 만났던 곳 또한 6마탑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도시였다.
그리고 대니얼의 딸에게는 강력한 마법술식이 새겨져 있었고.
여러모로 6마탑이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내게 너무 무거운 짐을 떠넘기는구나.”
“……그렇습니까?”
“그러나 네게 고맙다, 진심으로.”
바르곤은 진심이었다.
그는 누이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다.
잘나가던 부탑주가 왜 급사했는가.
건강했던 누이가 왜.
온몸에 마나가 충만했었던, 천재라 불리던 누이가 왜.
“빈첸 아덴카가 내게 내려준 기회를 헛되이 쓰지 않으마.”
바르곤은 탑 외 마법사로서, 용병생활을 오래했다.
덕분에 다른 탑 외 마법사들과 연결고리들이 존재했고, 그가 주체가 되어 마법사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바람소리에 의하여 제법 상세하게 세상에 전해졌다.
당연히 마탑을 비롯한 마탑의 추종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검증되지도 않은 마법사들에게 조사를 맡기다니 미개하기 짝이 없는 처사요!”
“이런 식으로 일을 꾸미는 건, 마탑을 노린 표적수사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언론을 총동원하여 여론을 이끌었다.
여론은 마탑의 편인 것 같았다.
그러한 내용들을 접한 레일사 시종장이 빈첸을 찾았다.
“일이 상당히 시끄러워지고 있습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걱정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빈첸은 빙그레 웃었다.
“시종장이 왜 내게 호의적인지 알고 있다.”
“…….”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나?”
“무엇입니까?”
빈첸의 부탁을 들은 레일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요.”
그 자리에서 레일사는 빈첸의 부탁을 수락했다.
한편,
탑 외 마법사들과 빈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여론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탑 외 마법사들 또한 훌륭한 마법사라는 것을 우리가 보증한다.]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만이 뛰어난 마법사들이 아니다. 우리 마법사들 또한 수많은 실전을 통하여 그 가치와 능력을 증명해 왔다.]
이번에 적극적으로 나선 곳은 ‘용병 길드’였다.
빈첸과 잠깐의 티타임을 갖게 된 베르사가 물었다.
“용병 길드가 적극적으로 나서리라는 것을 예상하였느냐?”
“예. 그들 스스로가 보증하면서 탑 외 마법사들의 격을 높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곧 다시금 용병길드의 격을 높이게 될 터이니. 당연한 수순이라 판단했습니다. 용병길드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일을 정말 크게 벌이는구나.”
과거에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가문 내에서 조용히 처리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이번에 벌어진 일련의 납치사건과 살해사건은 아덴카의 수치이기도 했으므로.
“썩은 건 확실히 도려내야지요.”
“그래.”
베르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첸을 만나보니 확실히 알겠다.
대책 없이 일을 크게 벌이는 게 아니었다.
“이제 시험은 끝났다. 네 뜻대로 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 말에 율리안은 또 펑펑 울었다.
‘사내자식이 뭘 또 그렇게 운단 말이냐?’
-우헤에에에에엥!
율리안은 감동에 젖어 한참이나 울었다.
시험이 끝났다니.
네 뜻대로 하라니.
과장 조금 보태면 이건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한참이나 운 이후에 율리안은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내자식은 뭐 울면 안 되나요? 영감님 같은 소리 좀 그만하세요.
빈첸을 필두로 한 합동 조사단은 그간 장로원의 행적을 조금씩 파고들기 시작했다.
빈첸은 열여섯답지 않은 모습으로 그들을 지휘했다.
바르곤의 요청으로 합세한 탑 외 마법사들은 빈첸을 보며 감탄했다.
“저놈, 저거 진짜 물건이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마법사들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을 존중하기는 하나, 기세는 밀리지 않았다.
“바르곤이 그렇게나 빨아재끼는 이유가 있었구만.”
그런데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간 인간세계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않았던 용아인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용아인들의 어머니, 모습을 드러내다.]
용아인들의 어머니 ‘나이메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세력의 등장에 사람들은 일순간 긴장하는 듯 했으나 그 긴장은 금방 풀렸다.
전 시민혁명대.
현 자유연합의 수장인 로랑이 나이메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들을 필두로 하여 인류와 용아인간의 평화협정이 타결되었다.
일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수 있었던 건, 이미 물밑작업이 완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시민혁명대의 수장이었으며, 현재는 자유연합의 연합장이 된 로랑 헬라임이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아덴카의 빈첸 공자가 저희의 연결고리였습니다. 빈첸 공자가 나와 나이메르 경을 신뢰하고, 우리도 빈첸 공자를 신뢰하니, 우리는 서로를 신뢰한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와 용아인 사이의 공식적인 평화협정이 맺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나이메르도 말했다.
“저희가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용아인들의 은인이자 용왕의 진전을 이은 빈첸 공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녀는 스스로가 뛰어난 정령술사였다.
또한 용아인들 중에는 실력 있는 정령술사가 많았다.
나이메르가 직접 정령술사들을 이끌고 아덴카 본가로 향했다.
그런데,
빈첸을 돕고자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