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46화
“들어오십시오.”
“실례할게.”
제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사뿐사뿐 걸어오는 그녀의 몸동작은 무인답지 않게 살랑거렸다.
그녀의 손에는 쟁반이 하나 들려 있었는데, 그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향이 좋군요.”
“정말? 신경 써서 고른 향수인데. 향이 좋다면 하나 선물해 줄까?”
“아니, 차 말입니다.”
마리엘은 민망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고 창가 쪽으로 걸어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올려놓았다.
창을 등진 방향으로 앉았다.
“내 친구에 대한 사과도 하고 싶고. 구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표하고 싶고. 여러모로 빚을 갚고 싶어서 찾아왔어.”
“이 야밤에요?”
마리엘은 언제나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티 없이 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늦었어? 너무 늦었으면, 내일 다시 올까?”
“아닙니다, 앉으세요.”
“맞아. 밤은 무척 기니까. 나는 빈첸과 깊은 교류를 하고 싶어.”
마리엘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수많은 생도들의 첫사랑을 훔쳐 간 그 눈웃음이었다.
-진짜 예쁘긴 엄청 예쁘네요.
창문을 통해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역광이었으나, 그녀는 반짝반짝 빛났다.
율리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빈첸이 가까이 다가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창문 쪽을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마리엘 생도.”
“……응?”
마리엘은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마리엘 생도’라고 말을 했는데, 입 모양이 ‘마리엘 생도’가 아니었다.
역용을 활용하여 성대 근육과 입 모양을 다르게 움직여 소리를 다르게 내었다.
“요새는 장로들이 생도들의 소꿉장난에도 관여를 합니까?”
마리엘은 찔끔 놀랐다.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탁자 밑으로, 홍련의 예리한 검날이 그녀의 복부에 닿아 있었다.
빈첸이 차를 마시며 빙그레 웃었다.
“웃어, 평소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 모양과 말의 내용이 달랐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바깥에 나를 감시하는 눈이 있을 것 같아서.”
마리엘은 크게 당황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저 너와 친해지고 싶어서 찾아왔을 뿐인걸.”
“기회는 줄 때 잡는 거야.”
빈첸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빈첸은 마리엘이 장로원의 끄나풀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장로원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마리엘 생도는 꽤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해.”
홍련이 배에 닿아 있는데도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일부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러니 굳이 창가를 등지고 앉았겠지.”
그녀는 빈첸처럼 입 모양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창을 등지고 앉았다.
“이중 스파이라도 하라는 거야?”
“그건 마리엘 생도의 선택이지.”
“창가에 앉았다는 거 말고, 내가 장로원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야?”
“감.”
“푸흡!”
마리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이지?”
“…….”
“좋아, 알았어. 네 말대로 나는 장로원의 비밀스러운 임무를 부여받았어.”
그녀는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정치적인 수완도 좋아서 장로원과도 연이 닿았다.
파성무인이 된 이후, 장로원 예하 검대 소속으로 활동이 내정되어 있기도 했다.
“그게 어떤 임무였지?”
“말하면? 나를 품어줄 거야?”
“적어도 내 줄을 잡는 게 장로원보다는 나을 거야.”
“어째서?”
“머지않은 미래에 장로원을 부숴버릴 예정이라.”
마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최근 들어본 말 중에서 제일 허무맹랑해. 근데 또 존재 자체가 허무맹랑인 사람이 말을 하니까 그럴 법한 것 같기도 하고.”
“…….”
“내가 진짜 정말 너무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하나만 물어보면 안 될까?”
“뭐지?”
“너 혹시 게이야?”
빈첸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게이를 배척하지는 않지만, 그 스스로는 완벽히 이성애자였다.
“게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를 그렇게 돌처럼 대해? 아, 게이가 아니면 고자야?”
“그저 내 취향이 아닐 뿐이다.”
이건 딜레마였다.
데이븐의 기억을 온전히 지니고 있는 빈첸에게, 생도들은 아무리 예뻐 봐야 생도였다.
윌슨은 마리엘을 보고 아름답다 느꼈다면, 빈첸은 마리엘을 그저 귀엽게 보았다.
너무 어리기에,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몸으로 한참 연상의 여인을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나, 네 줄을 잡고 싶은데. 나한테 오늘 밤 하루만 시간을 주지 않겠어?”
마리엘이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였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빈첸을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바깥에서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눈을 의식한 것이었다.
“이건 장로원의 비밀스러운 임무이기도 해. 나는 너를 유혹하여 밤을 함께 보내라는 명을 받았거든.”
“추잡한 명령이군.”
“네가 순순히 유혹당해주면 차차 나한테 복종하게 만들려고 했어.”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런 건 이미 물 건너갔고. 그게 아니면 나는 네게 끔찍한 꼴을 당했다고 장로원에 신고하게 되어 있었거든.”
“…….”
“그러니까 내가 이중스파이짓을 하려면, 내가 너를 성공적으로 유혹한 것처럼 보여야 해.”
마리엘이 하얀 손가락을 내밀었다.
빈첸의 볼을 쓸어내리다가 입술에 손을 대었다.
“좀, 어떻게, 유혹당한 척 좀 해주면 안 될까?”
“유혹이 안 되는데 그런 척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럼 그냥 돌같이 가만히 있는 걸로 해. 경험이 너무 없어서 딱딱하게 굳은 설정으로 하자.”
빈첸은 하아- 한숨을 내쉬고서 차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차의 향이 무척 좋았다.
“그 차는 레녹서 꽃을 우려서 만든 차야.”
빈첸은 레녹서 꽃잎차를 한 입 마셨다.
-형님, 레녹서 꽃잎차라는데요?
‘알아.’
-알아요?
‘그래. 나 때는 미약으로 불렸다.’
-근데 왜 이렇게 태연해요?
‘태연하지 않을 이유라도 있느냐?’
-미약이라는 건, 약학적 의미로 성욕을 일으키거나 상대편에게 연정을 일으킨다는 뜻이거든요.
마리엘이 은근한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심장이 뛸 텐데.”
“…….”
“어때? 이제 좀 유혹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
마리엘은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빈첸 같은 타입은 처음 봤다.
“너 진짜 고자야?”
율리안도 물었다.
-형님, 내 몸, 고자 된 거 아니죠? 몸도 정신 따라간다던데, 영감님의 정신이 소중한 건강을 노쇠하게 만들고, 그런 거 아니죠?
그만큼 빈첸은 평온 그 자체였다.
“레녹서 꽃잎차. 그리고 비엘라 향수. 무척 고전적인 방법이군.”
“…….”
이번에는 마리엘이 입을 다물었다.
빈첸은 허허- 웃고 말았다.
‘어떻게 500년이 지나도 똑같단 말이냐?’
500년 전에도 존재하던 방법이었다.
비엘라 향수 내음과 레녹서 꽃잎차는 시너지 작용을 일으킨다.
특히,
마나를 가진 무인에게는 더 큰 효과를 일으켜 강력한 미약효과를 발휘한다.
“고, 고전적이라니?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사실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
사실 이 방법은 히슬리가에서 알아낸 방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방법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취지였다.
‘히슬리가가 사라졌고, 역사가 왜곡되었으니, 이 방법도 사장되었던 것 같군. 최근에 다시 발견된 방법인 것 같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진짜 하나도 안 통하는 거야?”
“애석하게도.”
마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에 다가가 커튼을 쳤다.
“불은 좀 꺼도 되지?”
빈첸이 허락했고 방은 어두워졌다.
마리엘이 먼저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나는 너를 완벽히 유혹했다고 보고를 올릴 거야.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야 해. 그래야 장로원에서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리엘을 살포시 안아서 들어 올렸다.
“이제야 날 유혹할 마음이 생긴 거야?”
“여긴 내 침대다.”
빈첸은 무성의하게 마리엘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마리엘 또한 3급 생도이니, 이 정도로는 다칠 일이 없었다.
“야, 빈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를 맨바닥에 재우려고?”
“난 더운 게 싫어.”
1인용 침대였다.
두 명이 함께 자기에는 비좁았다.
마리엘은 화가 나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나.”
마리엘이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불을 덮고 등을 돌린 빈첸에게 손을 댔다.
그녀의 손이 미꾸라지처럼 움직여 빈첸을 안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콧소리가 가득 담겼다.
“찬 바닥에서 자기 싫어. 같이 자자. 응?”
“더운 침대에서 자는 게 더 싫다.”
“이잉, 내가 마사지도 해줄게.”
“꺼져.”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갔다.
빈첸은 실제로 조금 더워졌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면 좋잖아.”
빈첸은 귀찮다는 듯 마리엘을 발로 툭 쳐냈다.
간단한 동작이었으나 마리엘은 그 발을 피해내지 못했다.
눈치 빠른 마리엘은 이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빈첸과 자신 사이에 큰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악!”
그녀는 침대 밑으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이씨.”
마리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왜? 가게?”
“갈 거야.”
“그럼 유혹에 실패한 걸로 보고해야겠네?”
“너한테 심한 꼴 당했다고 보고할 건데.”
“눈치가 빠른 건지, 느린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장로원이 네게만 비밀스러운 임무를 내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는 않겠지. 나를 감시하고 있는 눈도 있을 거고.”
“그리고?”
마리엘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모르겠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너는 그냥 장로원이 쓰고 버리는 카드일 뿐이야.”
빈첸이 무슨 말을 해도 생긋 웃던 마리엘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미약까지 준비해서 내 방을 찾아온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만 나는 결국 네 줄을 잡기로 했어. 그렇다면 내게도 최소한의 존중은 보여줘야지.”
“최소한의 존중으로 널 안 죽였잖아.”
“…….”
마리엘은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눈앞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빈첸의 체구는 아까와 똑같았는데, 지금은 거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 압박감은…….’
그녀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가주 칸을 만났을 때.
그때 느꼈던 압박감과 비슷했다.
콰직-
빈첸의 몸에서 푸른 뇌기가 일렁거렸다.
예전,
미전류를 운용할 때와는 격이 다른 뇌력이었다.
파직!
침대 밑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그 냄새 가운데 미묘한 독향이 났다.
마리엘은 황급히 소매로 코를 가렸다.
‘이건…….’
그녀는 독에 관해서 많은 공부를 했다.
이 냄새는 분명 1급 절지종 극독전갈의 독 냄새였다.
빈첸이 이불 밑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사람의 팔뚝만 한 전갈의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빈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극독전갈의 몸통과 꼬리를 분리한 뒤, 몸통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마리엘은 직감했다.
‘내가 빈첸을 유혹하여 침대로 가면, 나와 빈첸을 동시에 죽이려고 했던 거야!’
솜털이 바짝 섰다.
이건 장로원의 소행이 분명했다.
빈첸이 입을 열었다.
“최소한의 존중으로 널 안 죽였다고 했다.”
마리엘에게 했던 말이 아니었다.
빈첸은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3초의 시간을 줄 테니 들어와. 네게 주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다, 테이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