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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35화 (135/184)

환생의 정석 135화

세리는 성왕이 남긴 유품인 지팡이로 천과를 들어 올렸다.

천과에서는 상서로운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Mequet Nirangdam Ileeias]

용언을 중얼거린 아넬린이 다시금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헤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아넬린을 보고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아넬린은 새까만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등이 완전히 파여 있었다.

뒤에서 바라보면 옷을 안 입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소년. 내기는 네가 이겼어.”

아넬린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사이, 아넬린의 등에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빈첸은 마나가 격동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 느낌은 마치 사슬식과 비슷하다.’

일종의 저주가 발동된 것 같았다.

율리안이 아넬린의 등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다.

-어머니의 등에 새겨진 문양과 같은 것이에요.

결국 사르비나의 목숨을 빼앗아갔던 그 문양.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해석하지 못했던 그것이 아넬린의 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문양을 알고 있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건 또 뭐야.”

“어머니는 저를 낳고 돌아가셨거든요.”

아넬린이 킥킥대고 웃었다.

“천과는 신의 기적을 담은 과실이야. 신이 그런 기적을 아무렇게나 막 내려주겠어? 당연히 마땅한 희생이 필요하지.”

그래서 용은 천과를 주기 위하여 히슬리가 아닌 인간들을 죽였다.

천과의 온전한 완성을 위하여.

“결국 누군가는 죽어야 해. 아, 그리고 네 이름이 세리라고 했지? 그거 이제 빈첸 줘도 돼. 이미 완성되었으니까 빈첸이 만져도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그사이,

제 몫을 다한 성왕의 지팡이는 부스스 사라졌다.

빈첸이 말했다.

“그래서 내기를 거신 겁니까?”

아무래도 이를 위하여 아넬린이 ‘목숨을 건 내기’를 제안했던 것 같았다.

천과를 정말로 완성시키기 위해서 누군가는 죽어야 하니까.

사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죽음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왕 죽을 거면 멋있게 죽고 싶었거든.”

“…….”

“네가 정말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맞다면, 나는 할 일을 다 한 거 아니겠어?”

아넬린이 빈첸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어때? 누나 좀 예쁘냐?”

“…….”

헤나가 빈첸 앞에 섰다.

마치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막는 것처럼 보였다.

아넬린은 재미있다는 듯 헤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희가 마음에 들었어. 그러니까 몇 가지 더 알려줄게. 하나. 그 천과는 인위적으로 만든 거니까 빨리 먹어야 할 거야. 1시간 내로 사라질 테니까.”

“…….”

“둘. 너희 둘이 나눠 가진 반지랑 관련된 건데. 당시 헬라임 녀석은 아벨탄을 몹시 사랑했었거든?”

“헬라임의 초대가주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그래. 아벨탄을 사랑한다고 한 10년쯤 쫓아다녔던 것 같아. 그러다가 그 반지를 만들었어. 헬라임 녀석은 거기에 특별한 기능을 하나 추가했거든.”

“그게 뭡니까?”

“줘봐.”

아넬린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헤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아넬린의 손 위에 반지를 올려놓았다.

아넬린이 반지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반지 정중앙에 새겨진 푸른 보석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헬라임 녀석은 아벨탄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는 녀석이었거든. 이 반지가 그런 용도야. 아벨탄에게 가해지는 모든 나쁜 것들을, 본인이 가져올 수 있어. 그것이 공격이든, 질병이든, 고통이든. 뭐, 한 번밖에는 못 쓰지만.”

아넬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의자가 하나 생성되었다.

아넬린은 다리를 꼬고 앉아 손에 턱을 괴었다.

“자. 그럼 두고 볼까? 내 무덤의 마지막 장면을.”

* * *

빈첸은 손에 들린 천과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천과를 얻었다.’

몇 년 후에나 가능하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천과를 얻고야 말았다.

-바로 먹을 거예요?

‘먹어야지.’

신의 기적을 빚은 과실이라고 했다.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그렇지만 많은 것을 고려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빈첸의 ‘천골’은 지나치게 오래 굶었고, 이를 방치하면 몇 년 내로 뼈가 삭아 죽을 것이다.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먹는다.’

빈첸이 천과를 입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천과는 녹아내려 빈첸의 식도를 타고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큭.”

빈첸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가슴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빈첸! 괜찮아?”

헤나가 황급히 빈첸을 부축했다.

순간,

빈첸은 무의식적으로 헤나를 밀쳐냈다.

헤나는 빈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에 떠서 저만치 멀리 벽에 부딪쳤다.

‘누님……!’

빈첸의 의도와는 상관 없었다.

그냥 몸이 절로 움직였고 그게 헤나를 다치게 만들었다.

헤나가 부딪친 벽에는 상당한 균열이 생겨 버렸다.

헤나의 입에서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나왔다.

“크아아악!”

빈첸은 비명을 질렀다.

율리안은 잠시 멍해졌다.

‘형님이 이렇게 비명을 질러?’

빈첸은 어지간한 고통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용압에 짓눌려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괴물이다.

그런 괴물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텨. 못 버티면 죽어.”

아넬린은 여전히 턱을 괸 채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발끝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네가 정말 진실을 추구하는 자라면, 살아야지. 그래야 내 마지막이 우습지 않지.”

빈첸은 비명을 질렀다.

뼈가 통째로 불타는 것 같았다.

지옥불에 던져진 것 같았다.

피부가 눌어붙으며 뼈가 녹고, 온몸이 재가 되어 바스러지는 기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심장에 검이 꽂혔을 때보다.

적황미력이 온몸의 마력회로를 파괴할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작열감이 빈첸의 온몸을 지배했다.

빈첸의 의식이 멀어졌다.

-형님, 정신차려요, 제발!

아넬린은 흐음,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눈에는 가벼운 실망이 담겨 있었다.

“쯧, 아무리 그래도…… 저 육체로는 무리였나?”

그리고 율리안은 생각했다.

‘내가 고통을 일부라도 가져와야 해.’

율리안은 이제 빈첸을 믿었다.

빈첸이라면, 그 어떤 역경이라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아주 조금만, 딱 한 스푼 정도의 고통만 가져오면 돼.’

그러면 나머지는 빈첸이 알아서 할 것이다.

율리안은 신기를 점검했다.

다행히 신기는 충분히 있었다.

신기를 머금은 천과를 먹어서 그런 것 같았다.

‘후우. 가져온다……!’

율리안은 빈첸만큼 고통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척 겁이 났다.

‘으아아아아악!’

율리안은 신기를 일으켜 빈첸과의 동조율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렸다.

빈첸이 느끼고 있는 고통의 일부를 가져왔다.

빈첸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소, 소멸해 버릴 것 같아.’

극히 일부의 고통만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율리안은 소멸의 공포를 느꼈다.

자신 같은 잡신 정도는 일거에 소멸시켜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강대한 고통이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헤나가 입을 열었다.

“고통도 가져올 수 있다고 했습니까?”

“그래.”

“그렇군요.”

“왜? 가져오게?”

“예.”

“그러다 너도 같이 죽어. 쟤 정도 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저렇게 버티고 있는 거지, 일반적인 애들이었으면 이미 불타 죽었어.”

“제 동생입니다.”

헤나는 빈첸이 자신을 밀친 것이 고의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반지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아, 그거, 반지에 키스해.”

헤나가 반지에 입술을 맞췄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뻥이야.”

“…….”

“그냥 평범하게 마나를 불어넣어봐. 네가 마나를 많이 일으킬수록, 고통도 많이 가져올 거야.”

헤나가 마나를 일으켰다.

그녀의 모든 심상이 마나를 맹렬히 뿜어냈다.

그녀가 가용 가능한 최대한도의 마나를 활성화시켰다.

헬라임 초대 가주의 반지가 그 마나를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헤나가 비명을 질렀다.

울컥!

피를 토했다.

‘나는, 참아야 한다.’

빈첸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보다는 더 큰 고통을 견디고 있으리라.

그녀는 손윗누이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 했다.

아넬린은 발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세리의 몸을 붕 띄워 제 옆으로 오게 만든 뒤 어깨를 토닥였다.

“아주 난리지?”

“…….”

세리는 울고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빈첸을 보자 괴로웠다.

“베사툴의 후예가 맞구나.”

세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울었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사무치게 힘들었다.

“베사툴도 너랑 같았거든. 아슬란이 괴로워할 때, 본인이 더 괴로워했어.”

세리가 무릎 꿇고 빌었다.

“저도 돕고 싶어요. 제발요. 제가 공자님의 고통을 덜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자자. 베사툴의 아이야. 진정하렴.”

아넬린은 의자에서 내려와 몸을 낮추었다.

세리와 눈을 마주쳤다.

“내 눈을 봐.”

세리는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듯 아넬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리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나와 베사툴이 잊혀졌다면, 네 특별한 신체도 잊혀졌겠지. 그렇지?”

“……네에.”

“네 특별한 신체는 아주 오래전부터 히슬리가가 연구해 왔던 신체야. 마력체라고 부르며, 인위적으로 생성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내 말 알아듣고 있지?”

“……네에.”

“마력체라는 건 사실 간단해. 저절로 마나를 받아들이는 신체야. 그런 특성이 사실은 어디서부터 왔겠어?”

“…….”

세리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용. 마법의 종주.”

아넬린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용의 특성을 히슬리의 인간들이 배워간 거야. 그러니까 베사툴의 아이는 잘 들어. 이게 바로 마력체를 활성화시키는 술식이야.”

아넬린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세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인간들에게 잊혀져도 그만이지만 베사툴과 히슬리가 잊혀지면 안 되지.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준 거 절대 잊지 말고. 나중에 잘 자라서 저 녀석과 함께 히슬리의 명예를 드높여. 사람들이 베사툴을 기억하게 만들어. 알겠니?”

그리고 그때.

빈첸이 몸을 일으켰다.

아넬린이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빈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흐으음.”

빈첸은 천과를 성공적으로 섭취했다.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멀쩡히 살아났다.

“기도가 많이 달라졌네.”

빈첸은 아넬린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빈첸은 제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명상식에 빠져들었다.

고통은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몸속에서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 천골(天骨)이었구나. 500년 만에 보는 거라 잊고 있었어.”

아넬린이 흐흐흐 웃었다.

빈첸의 골격이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장성한 청년이었다.

“심상이 아닌 마나를 다루는 천골이 천과를 흡수했다라. 옛 생각이 많이 나네.”

빈첸이 눈을 떴다.

빈첸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아-”

숨을 쉬어 보았다.

전보다 훨씬 더 충만한 기운이 느껴졌다.

온몸에 활력이 돋았다.

외팔이 데이븐이었던 시절조차,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동감이었다.

마력자전을 시키는 동안 느낄 수 있었다.

천골이 회복되었다.

빈첸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넬린이 말했다.

“내가 장담할게.”

지금의 빈첸은 그녀가 보았던 그 어떤 열넷의 무인보다 강했다.

굳이 열넷으로 한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의 용생을 전부 통틀어서 말이다.

“네가 정말로 진실을 추구하는 자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 무덤에서 영웅이 태어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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