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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34화 (134/184)

환생의 정석 134화

아넬린이 말했다.

“흐음. 너,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 아주 똑똑한 척을 다하는 것이 아슬란 그 재수 없는 녀석이랑 똑 닮았어.”

“제가 초대가주와 닮았습니까?”

“어. 말투나 분위기 같은 게 딱 아슬란이네.”

그 꼬맹이.

잘 컸군요.

그 말을 달리했다.

“영광이군요.”

“영광은 개뿔. 종말과 파괴의 흑염룡인 나랑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영광인 거지.”

“위대하신 종말과 파괴의 흑염룡께서는 인위적으로 천과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있지.”

인위적으로 천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존재한다고 했다.

“근데 그냥 그걸 하기는 싫고.”

그녀의 눈이 또다시 가늘어졌다.

미미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빈첸으로서도, 율리안으로서도, 그녀의 성격을 온전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 목숨 걸고 내기 하나 할까?”

“내기요?”

“천과를 맺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해. 네가 그 조건들을 만족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궁금해졌어. 500년 전 예언자와 내 친구들의 말대로 네가 정말 ‘진실을 추구하는 자’라면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아니라면 내 귀중하고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죄로 널 죽일 거야. 어때?”

“…….”

“아참, 반대로 천과를 맺게 만들면 나도 너한테 죽어줄게. 알지? 내 시체는 꽤 돈 된다? 네가 정말 [진실을 추구하는 자]라면, 그에게 천과를 건넨 나는 죽어도 될 것 같아.”

그녀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무척 즐거운 듯했다.

“어때? 쫄리면 그만두고.”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아넬린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살기가 옅어졌다.

“배짱이 제법이네. 안 하겠다고 했으면 그냥 죽였을 건데.”

아넬린의 가슴팍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내 그 빛은 아넬린의 전신을 덮었다.

아넬린이 용의 형태로 돌아갔다.

그녀는 전신이 묵색(墨色)이었다.

마치 영살자들이 용이 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렇게 거대한 용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동굴은 용의 크기에 맞추어 절로 확장이 된 것 같았다.

동굴 자체가 굉장히 컸는데, 용은 이 큰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렸다.

“자.”

그러고는 사람 주먹만 한 과실 하나를 뱉었다.

빛이 바랜 노란색이었다.

“이게 완성되지 않은 천과야. 베사툴은 이걸 신의 기적을 과실의 형태로 빚은 것이라고 표현했어.”

“……그렇군요.”

“이 천과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보다 많은 양의 응축된 신기가 필요해. 특별한 방식으로 정제되고 보관된 신기.”

“특별한 방식이 무엇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나는 베사툴이 아닌데. 그냥 나는 그릇 형태의 뭔가가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야.”

빈첸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특별한 방식’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신기를 통해 천과를 완성시킬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끝은 아니야. 사실 신의 기적을 과실의 형태로 빚는다는 것은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비정상적인 거잖아? 자연에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는.”

“예.”

“그 비정상적인 것을 만지는 도구가 필요하다고 했어. 아, 참고로 난 그 도구가 뭔지 모르니까 나한테 묻지 말고.”

“…….”

“어때? 뭔 소리인가 싶지? 이해해. 베사툴이 가르쳐줄 때, 나도 뭔 개소리인가 했어. 이제 나랑 내기한 걸 좀 후회하고 있으려나?”

“천과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게 끝입니까?”

“아니. 하나가 더 있어. 자연에 존재할 수 없는 기적에는 그만한 위험이 따라. 그게 당연한 법칙이지.”

“그래서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 도구를 다루는 특별한 사람이 필요해. 근데 뭐, 그 조건은 이미 갖춘 것 같으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아넬린의 커다란 눈동자가 옆으로 스르륵- 움직였다.

그 눈과 마주친 세리는 찔끔 놀랐다.

아넬린의 존재감이 세리를 짓눌렀다.

세리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고, 공자님은 이런 존재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거야?’

세리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압력.

용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지는 용압(龍壓)이었다.

빈첸이 슬쩍 걸음을 옮겨 세리 앞에 섰다.

그제야 세리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악취미를 지니셨군요.”

“오래 살아봐. 너도 이렇게 된다.”

아넬린은 키득키득 웃었다.

“아무튼,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는 이해했지?”

“예. 아무래도 반발체를 뜻하는 것 같군요.”

“아, 그래. 반발체. 맞아. 베사툴이 분명 반발체라고 말했던 것 같아. 저 여자애랑 같은 체질이었지.”

이전에 바르곤이 가르쳐줬었다.

-마법을 익히기에 더없이 좋은 신체라는 뜻이지. 신성력을 튕겨 낸다 하여 반발체라 부른다. 그걸 몰랐느냐?

세리는 마력체이자 반발체이다.

마력체는 스스로 마나를 받아들이는 체질.

반발체는 신성력을 튕겨내는 체질이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그래. 위대한 종말과 파괴의 흑염룡께서 들어주지.”

“…….”

어째 ‘위대한’이라는 수식어 하나가 더 붙었지만 빈첸은 딱히 짚지는 않았다.

“특별한 방식으로 가공된 신의 힘이 존재하고, 그 힘으로 천과를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천과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발체가 특별한 도구를 사용해서 천과를 집어야 한다. 맞습니까?”

“응. 맞아.”

아넬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하고 있으면 자꾸 아슬란이 떠올라. 그래서 재수가 없어. 그냥 죽일까?”

번쩍!

빛이 새어 나왔다.

아넬린이 인간의 형상으로 되돌아왔다.

용의 형상은 지나치게 마나를 많이 소모해서 피곤하다고 했다.

“뭐, 어차피 불가능한 조건들이니 나중에 죽이지 뭐. 시간은 얼마나 줄까? 걱정 마. 최대한 안 아프게 죽여줄게.”

“제 이동관문이 되어주실 수 있습니까? 시간은 하루면 충분할 듯합니다.”

“이동관문? 그게 뭐냐?”

“마법을 익히지 않은 자들도 워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도공학 장치입니다.”

“우와, 그런 게 생겼어? 어떤 용이 만든 거냐?”

“인간이 만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넬린은 깔깔대고 웃었다.

“이야, 500년간 진화했나 보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여길 찾아오는 애들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무인들은 죄다 퇴보했던데. 마법사들은 훨씬 똑똑해졌나 보네. 뭐. 아무튼 좋아. 까짓거 워프 해줄게. 어디로 갈래?”

* * *

베르사는 눈앞에 나타난 존재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당신은…….”

“날 알아?”

베르사가 보았던 아넬린은 ‘용의 형상’이었다.

당시 아넬린은 잠을 자고 있었으니까.

“아, 알겠다.”

아넬린이 쿡쿡대고 웃었다.

“오래전, 그 어린애가 너구나. 사르비나의 친구 중 한 명.”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엄청 강해진 것 같네.”

아넬린이 빈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무인들이 죄다 퇴보했다는 건 취소. 일부는 그 와중에도 잘 컸네. 얘도 그렇고, 멀리서 느껴지는 또 다른 애도 그렇고.”

아넬린이 느낀 기척은 칸의 것이었다.

칸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나, 아넬린은 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봤던 남자애의 기운이군.”

그녀가 피식 웃었다.

‘전성기 때의 나와 싸워도 부족하지 않겠어.’

이 정도의 기운을 가지는 인간들은 흔치 않다.

100년을 기준으로, 동시대에 한두 명 나오면 많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아아, 인간의 발전 가능성이란 진짜 놀랍단 말이야. 자, 아무튼 빈첸. 네가 하려는 게 뭐야?”

빈첸이 말했다.

“흑색금고에 출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성배를 찾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신기를 인위적으로 생성시켜 담는 그릇.

성왕이 안배한 잔.

빈첸은 그것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

흑색 등급의 금고를 관리하는 사람은 레일사 시종장.

그녀가 직접 성배를 꺼내왔다.

아넬린은 성배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라엔므고. 그 영감탱이의 작품이군. 어디서 났어?”

“성배라 불립니다. 성왕 라엔므고의 무덤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후,

빈첸은 다시금 워프를 부탁했다.

“아직 신기가 부족합니다. 저는 이 신기를 채워줄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둘란이 꽤 고생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라면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다.

빈첸이 둘란의 명패를 꺼냈다.

“이 명패의 주인이, 신기를 채워줄 것입니다.”

다행히 둘란은 현재 가이아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는 중이라고 했다.

빈첸과 아넬린은 신전으로 워프했다.

기도하는 공간으로 바로 도약하지는 못했다.

“에이씨, 그 늙은이는 쓸데없이 신성막을 둘러놔서는.”

신전 입구에 도착했다.

2급 신관이 명패를 내보이자 어렵지 않게 둘란과 만날 수 있었다.

“빈첸 공자!”

둘란 뒤로는 멀린이 보였다.

멀린은 빈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고, 빈첸은 둘란과 멀린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넬린은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었다.

“라엔므고가 떠오르는 녀석이네.”

둘란이 성왕의 힘을 이었다는 사실을 단박에 깨달았다.

“한 놈은 아슬란을 닮았고, 또 한 놈은 라엔므고를 닮았네. 네 시녀는 베사툴을 닮았고. 아주 재미있어. 좋아. 뭐, 계속 해봐.”

둘란의 방으로 이동한 뒤, 빈첸은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죠.”

그간 신성력이 더욱 높아진 둘란은 성배에 신성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둘란은 탈진해서 쓰러졌다.

멀린은 탈진한 둘란 옆에 서서 그를 호위했다.

“스승님. 둘란 경을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라. 나는 나의 일을 할 터이니, 너는 네 일을 하여라.”

멀린 덕분에 빈첸은 마음 놓고 신전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금 나일 폭포에 숨겨진 동굴로 이동해왔다.

“아, 피곤해. 이 정도로 용을 부려먹었는데 제대로 못하면 진짜 너 죽일 거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넬린은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서 빈첸을 관찰했다.

“세리. 부탁할게.”

“네.”

세리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저 용이 마냥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실수라도 하면…… 저 용은 공자님을 정말로 죽일 거야.’

그러니 실수가 있으면 안 됐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빈첸이 그녀에게 지팡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걸 사용해서 천과를 성배 안에 넣은 뒤, 다시 꺼내줘.”

아넬린은 잠자코 빈첸과 세리를 바라보다가 은근슬쩍 헤나 옆으로 갔다.

“얘.”

“…….”

“위대한 종식과 파괴의 흑염룡께서 말씀하시는데 대답해야지?”

“위대한 종말과 파괴 아니었습니까?”

“……아. 맞다.”

아넬린은 관자놀이를 살살 긁었다.

“어허, 어른이 말씀하시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것이지.”

“말씀하십시오.”

“근데 너는 왜 따라왔어? 사실 그냥 구경꾼이잖아. 아까 워프했을 때 그냥 집에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편이 헤나에게는 안전했다.

그곳에는 베르사와 칸이 있었으니까.

아넬린이라고 할지라도, 아덴카의 본가에서 헤나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니 그렇잖아. 만약에 저 녀석이 천과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면 나는 쟤를 죽일 건데. 그렇게 되면 쟤만 죽이겠어?”

헤나는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짊어져야 할 것은 오로지 위험 부담뿐이었다.

“왜? 왜 여기 있는 거야?”

헤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에, 곁을 지키는 자가 한 사람쯤은 있어야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하였습니다.

헤나는 그러한 말이 낯간지럽다 생각하여 달리 말했다.

“답은 저 아이가 했습니다.”

제 누이입니다.

빈첸이 이렇게 말했었다.

헤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저 아이가 제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흐음, 그래?”

그녀가 작게 말했다.

“조금 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예?”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넬린이 활짝 웃었다.

“무척 즐거웠다, 아이들아. 세상에나 마상에나. 나도 잘 몰랐던 걸 쟤가 해버리네.”

천과에서는 황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곳의 모두가 직감했다.

천과가 완성되었음을.

그때.

번쩍!

빛이 터져 나왔다.

동굴이 확장되고,

아넬린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Mequet Nirangdam Ileeias]

그녀의 입에서 인간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용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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