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20화
현대의 무인들은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마력회로를 유지한다.
꼭 필요한 마력회로가 아니라면 닫혀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옛 무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옛 무인들은 현대 무인들에 비하여 명상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잘 사용하지 않는 마력회로까지 늘 개방상태를 유지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현대 무인들의 관점에서 그것은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옛 무인들은 비효율을 넘어서 무모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설마 이미 막혀 있는 마력회로를 뚫어내려는 거예요?
이 방법은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장된 방식이었다.
굳이 막힌 회로를 뚫지 않아도, 현대에는 그를 대신하는 효율적인 방법이 많았으니까.
‘꾸준하고 집중도 있는 명상을 통하여 모든 마력회로가 자연스레 열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나,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 명상에 집중한다고 해도.
그래도 모든 마력회로를 개방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폐쇄된 마력회로를 강제로 뚫어내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네가 그토록 야만적이라 폄하하는 옛 방식들 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인 방법이었어.’
이미 막힌 마력회로를 뚫는 방식은 500년 전에도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이 작업만큼은 가문의 어른들이 도와주었다.’
500년 전.
무인들은 어지간하면 모든 위험을 스스로 지게 했었다.
그러나 마력회로 개방만큼은 가문의 어른들이 나서서 도와주었다.
‘사선을 많이 넘나들었을수록, 더 많은 죽음을 극복했을수록, 회로개통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죽음을 많이 극복한 어른이 왜 ‘회로개통’에 두각을 드러냈는지.
결과적으로 그랬다.
‘그것이 가문 어른들의 역할이었고, 신생 무가가 전통의 무가를 넘어설 수 없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명가(名家)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과 전통이 축적되어야 했었지.’
빈첸은 과거의 경험들을 떠올렸다.
그는 외팔이 데이븐으로 태어나 천재 카곤을 넘어서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했다.
남들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수련했고, 사선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어른’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수행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보아라, 내가 회로를 개통하는 방식을.’
거기까지는 빈첸의 방식이었다.
‘이후는 네게 맡기마.’
다음은 율리안의 방식으로.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론을 정립하여 달라는 요청이었다.
빈첸은 그 말을 끝으로 마나를 일으켰다.
막힌 마력회로를 향해 마나를 뿜어냈다.
쾅! 쾅!
몸속에서 폭발이 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전류.’
모든 것에 파괴적인 힘인 ‘뇌기’를 일으켰다.
막혀 있던 마력회로를 뚫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빈첸의 몸에서는 증기가 피어올랐고, 입가에서는 피가 새어 나왔다.
쾅! 쾅!
체내에서 계속해서 폭발이 일었다.
그 충격에 빈첸의 몸이 흔들렸고, 폭포수의 압력에 의해 기우뚱 중심이 흔들렸다.
무아지경에 빠진 빈첸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다시 중심을 되찾았다.
‘마력자전.’
계속해서 마력을 순환시켰다.
순환시킨 힘을 다시금 목덜미로 보내 막혀 있는 회로에 압력을 가했다.
힘을 주어 무식하게 뚫어냈다.
현대인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역용.’
그리고 회로 밖으로 터져 나오는 폭발력을 역용의 힘으로 감쌌다.
그 와중에 ‘백회혈’을 통해 수기(水氣)는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얼마 후.
빈첸의 목 주변에서 악취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마력회로를 가득 채우고 있던 노폐물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고통이 차츰 가라앉았다.
빈첸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것이 회로를 개통하는 방식이었다.’
생각보다는 훨씬 쉬웠다.
내장파열이나 실명같이 흔한 부작용도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죽음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이겠지.’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했을수록, 마력개통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니까.
쏴아아-!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폭포수와 완벽히 물아일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머리를 관통하여 수기가 밑으로 흘러내려 간다.’
새로운 기운이 전신을 가득 채웠다.
이것을 기존 가지고 있던 마나와 잘 융합시켜야 했다.
빈첸의 심장 언저리에 가상의 심상이 절로 생겨났다.
물결 모양의 심상이었다.
율리안도 그걸 느꼈다.
‘심상을 만들어서 마나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반대였다.
‘마나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제하는 과정에서 심상이 저절로 생겨나는 방식이네요.’
어쩌면,
훨씬 더 무학의 본질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빈첸은 마력자전에만 계속 집중했다.
회로개통에 따른 노폐물들을 계속해서 흘려보냈다.
정신이 훨씬 더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한참 후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 * *
세리는 빈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빈첸의 몸에서 노폐물들이 빠져나올 때에도.
빈첸이 계속해서 마력자전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끝내, 정신을 잃고 다시 하류까지 떠밀려 내려왔을 때에도.
세리는 숨죽여서 빈첸을 바라보기만 했다.
“공자님, 괜찮으신 거죠?”
“응.”
빈첸이 몸을 일으켰다.
따뜻한 침낭에 싸여 있는 상태.
세리가 이렇게 한 것 같았다.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세리가 빈첸을 와락 끌어안았다.
빈첸이 가볍게 웃었다.
“세리. 그사이 성장했네?”
“제가요?”
세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세리 스스로 이상함을 느꼈다.
‘어?’
어느새 그녀의 몸에 변화가 있었다.
“두 개의 고리가 만들어졌어요.”
“축하해.”
그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는 이환(二環)의 마법사가 되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글쎄. 정기가 워낙 충만한 곳이니 도움이 된 것 아닐까?”
빈첸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세리가 ‘마력체’이기 때문이다.
숨만 쉬어도 저절로 마력을 쌓는 체질.
“바르곤 경에게 명상을 배웠겠지?”
“네?”
“명상 말이야.”
“네. 배웠어요.”
“그럼 내가 지켜줄 테니까, 여기서 명상을 좀 하도록 해. 이곳은 명상터라 불리는 곳이야. 네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숨만 쉬어도 2고리가 완성되었다.
제대로 된 명상으로 호흡하면 더 단단하고 완숙한 경지의 2고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아니, 괜찮아요. 제 역할은 공자님을 시중드는 것인걸요.”
“명령이야.”
“하지만 공자님께서 제 호법을 서주신다는 건…….”
“얼른.”
그 말에 세리는 가부좌를 틀었다.
빈첸의 말대로 명상을 시작했고, 더욱 단단한 2고리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빈첸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용림 바깥에는 명상터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더군.’
-명상터라는 말도 지금은 사라진 말이에요.
‘예전보다 정령술사도 훨씬 희귀해졌고 말이야.’
그러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마도공학의 발전. 그 때문인 것 같구나.’
그래서 정기가 흐르는 땅과 자연의 기운이 많이 훼손되었다.
어차피 심상이론을 통해 빠른 성장이 가능하니, ‘명상’의 중요성도 많이 퇴색되었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도공학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어마어마한 편의를 누리게 되었지만, 잃어버린 것들도 많이 생긴 것 같아요.
다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수많은 업적을 남겼던 히슬리가는 그 이름조차 남지 않게 되었고, 역사는 완전히 왜곡되었다. 무학은 본질을 잃어 갔고, 정기가 사라진 땅에 정령술사도 없어졌지.’
그 사이,
마법과 마도공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다시 말해, 마법을 익힌 자들은 비상했고, 다른 것을 익힌 자들은 추락했다.
‘그에 반해 저주와 흑마법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카진이 사용했던, 정령을 활용한 사슬식이 그랬다.
강제로 악령계약을 맺게 만드는 마법진.
헬라임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은총.
그리고 악령군대까지.
‘흑마법이 이토록 발전하게 된 이유는 그저, 대악마 데이븐이 남긴 잔재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모두가 납득하더군.’
그것은 거의 절대적인 이유였다.
모든 화살을 ‘대악마 데이븐’에게 돌리면 모든 것의 명분이 되어주었다.
마치 이를 위하여 역사가 ‘왜곡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왜곡은 마도공학의 발전에 따라 벌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냐? 그게 아니면 이러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조작해낸 일들이냐?’
율리안도 당장은 답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더 많은 답을 찾아야 할 것 같구나.’
대악마 데이븐과 관련한 역사 왜곡.
처음에는 사미온이 직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벌인 치졸하고 더러운 짓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왠지, 그게 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빈첸은 마차에 올라타고 세리와 함께 ‘천년수’로 돌아왔다.
나이메르는 빈첸의 변화를 순식간에 읽어냈다.
“용왕의 기운이 짙어졌군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빈첸의 뺨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빈첸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아벨탄 폭포로 향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주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빈첸에게서 느껴지는 건 분명 아벨탄의 냄새였다.
“아벨탄의 냄새가 이렇게 짙게 날 줄이야.”
“그의 냄새를 느낄 수 있습니까?”
“네. 그 또한 제 아들이니까요.”
나이메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은 분명 그리움이었다.
그녀의 팔에 비늘이 돋아났다.
용피(龍皮)였다.
“다른 용아인들도 나이메르 경만큼 느낄 수 있습니까? 제게서 새어 나오는 용왕의 흔적을요.”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먼저 용왕의 진전을 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순서겠군요.”
그래서 나이메르에게 요청했다.
“용아인의 전사들 중 가장 용맹한 자를 선별하여 주십시오.”
“무슨 생각이죠?”
“그와의 약속대련을 요구합니다.”
약속대련은 서로 합을 짜고, 그에 맞추어 시범을 보이는 대련이다.
서로의 자웅을 가린다기보다는, 서로 보여줄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펼치는 대련.
“용왕이 생전에 익혔던 것을 제가 직접 보이겠습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빈첸 공자의 실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벨탄의 힘은 다루기가 무척 까다로운 힘으로 알고 있어요.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힘으로 용아인들 앞에서 그 힘을 온전히 꺼낼 수 있을지 걱정스럽군요.”
나이메르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나이메르에게 있어서 빈첸의 존재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 열쇠가 용아인들 앞에서 제대로 된 힘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 마지막 기회마저 날아가 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나이메르 경 앞에서 먼저 보이겠습니다. 용아인들의 어머니께서, 제가 이은 진전을 확인하여 주십시오.”
어쩐지 나이메르는 아벨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메르라면 용왕의 힘을 확인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빈첸과 나이메르는 천년수 밖으로 나갔다.
빈첸이 홍련을 뽑았다.
“용왕에게는 특별한 특징이 하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나이메르의 시선이 홍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빈첸이 마나를 일으켰다.
그에 따라 절로 심상이 생성되었다.
물결 모양의 심상.
그로부터 뿜어져 나온 마나가 빈첸의 몸을 감싸고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제가 익힌, 용왕의 힘입니다.”
나이메르가 눈을 크게 떴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용아인들의 어머니가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홍련의 검날 내에서 옅은 물기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물이 흐르는 성벽.
용림(龍林)의 성벽과 흡사한 모양새였다.
“아벨탄의 권능이 틀림없군요.”
그와 동시에, 팔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비늘이 번지기 시작했다.
용피(龍皮)가 그녀의 온몸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