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16화
“이야, 우리 고고한 1급 대표생도이신 헤나 생도께서 그렇게까지 말한단 말이야?”
헤르카는 기특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누님께서 저를 어여삐 봐주셨을 뿐입니다.”
“에이 그럴 리가. 헤나 그렇게 넉넉한 생도는 아냐. 네가 잘했으니까 헤나가 저렇게까지 해주는 거지. 아무튼, 얘기해 봐. 최종보고가 아닌 중간보고를 들어주겠어.”
“……알겠습니다.”
빈첸이 보고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하여 이동관문을 통하여 복귀하였습니다. 이상 보고를 완료합니다.”
헤르카가 피식 웃었다.
“어쨌든 이곳에 진짜 용왕의 은총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겠구만.”
품속에서 마정석을 하나 꺼냈다.
그것을 빈첸에게 넘겨주었다.
“자자, 이거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챙겨.”
“이게 뭡니까?”
“아까 광장에서 벌어졌던 기현상을 기록한 마정석이야.”
“광장에서 기현상이 있었다고요?”
“그래. 네가 말한 보고 시각과 얼추 비슷한 것 같네. 네가 폐쇄된 이동관문에서 특별한 힘을 썼다고 했지?”
거기서 해일의 신 포르세딘의 가호를 얻었다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폐쇄된 이동관문에서 기현상이 발생하였고, 이능이라 짐작한 빈첸이 그것을 베었다고만 보고했다.
“그때 바닥으로부터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의 연결로 인해 광장의 문양들이 변형되었어. 그걸 기록한 영상이야. 어디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넣어둬.”
“…….”
“어떠냐? 이 요새장 누님의 화끈한 지원이?”
빈첸은 직감할 수 있었다.
“바르곤 경에게, 사실 나는 농땡이를 피우지 않았다고 생색내려고 기록한 것이었겠지요?”
“이 쪼그만 녀석. 자꾸 사실로 뼈 때리는 못된 습관이 있단 말이야.”
헤르카가 빈첸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아픕니다. 요새장이 생도를 폭행해도 됩니까?”
“아이잉, 이건 폭행이 아니라 애정표현이지.”
그녀의 ‘아이잉’에 헤나마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아, 그리고, 베르사 언니가 너 찾더라. 얼른 가봐.”
“어머니께서요?”
“어. 이번 7급 승급과 관련된 얘기도 할 거 같고.”
헤르카는 잠시 입을 다물며 딴청을 피웠다.
“요 얄미운 녀석에게 다 가르쳐줄까 말까.”
“바르곤 경에게는 요새장께서 큰 도움을 주셨다 전하겠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가 구해준 용아인들과 관련된 얘기를 해줄 모양이야. 너도 알고 있지? 마지막 뒤처리는 베르사 언니가 한 거.”
* * *
베르사는 여전히 데르소나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로랑이 이끄는 시민 혁명대가 이곳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 돕는 중이었다.
시민 혁명대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점차 헬라임의 도시들을 안정화시키고 있었다.
로랑이 말했다.
“누님께서 버텨주시니 제가 이렇게라도 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마무리하려는 것뿐이다.”
베르사는 착잡한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참고인으로 저와 누님을 불러 달라 요청하는 중이라 합니다.”
“알고 있다.”
“외면하실 생각이신지요?”
“그자는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될 짓들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너도 마음 굳게 먹거라. 완벽하게 처벌해야만 네 입지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
로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덕분에 다른 기감들이 좀 더 예민해졌다.
목소리에 담긴 아주 미묘한 떨림과 호흡의 냄새를 통해 베르사의 마음을 읽어냈다.
‘씁쓸하시군요, 누님.’
제 손으로 제 가문을 몰락시켰으니 씁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베르사가 말을 이었다.
“눈은 치료할 생각이 없느냐?”
“치료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1급 신관들은 기적을 일으킨다. 네 눈을 회복시킬 수도 있어.”
“그 기적이 제 진의를 흐릴 것입니다.”
로랑은 스스로 두 눈을 벰으로써 시민 혁명대의 결기를 다졌다.
“이제 와서 눈을 치료한다면 제 꼴이 우스워질 것입니다.”
“…….”
베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느새 훌륭히 자랐구나.”
“감사합니다, 누님.”
베르사가 밖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누님을 가족이라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누님의 존재가 그 무엇보다 든든하군요. 제 누님으로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그 기대에 부응하여 바른길로 걷겠습니다.”
베르사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빈첸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어머니.”
“그래.”
베르사는 자리에 앉았다.
시종을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
그녀는 따뜻한 녹차를 한 입 마신 뒤,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가 ‘지하’에 잠입했을 때 말이다. 책임 연구원은 이미 죽어 있었고, 연구원들의 손목은 모두 잘려 있었으며, 연구자료는 다 파괴되어 있었지.”
“…….”
“그 잽싼 녀석이 연구원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가늠이 되느냐?”
빈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베르사가 말하는 ‘그 잽싼 녀석’은 빈첸 자신이었다.
“그 녀석은 어머니의 역할을 제가 빼앗은 것이라면 죄송합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었지. 사실은 제가 일부러 내게 뒤처리를 떠넘긴 것이면서 말이다.”
“어머니께서 그것을 원한다 판단하였습니다.”
베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빈첸의 선택은 훌륭했다.
재빠르게 움직여 빈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으면서도, 확실한 마무리는 베르사에게 넘겼으니까.
“지나치게 겁이 많은 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신감이 가득한 자는 실수가 있는 법이다. 너는 지나치게 겁이 많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자신감이 많지도 않았으니, 좋은 과실을 맺을 수 있던 것이다.”
빈첸이 씨익 웃었다.
베르사가 갑자기 이렇게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 제게 칭찬을 내리시는 이유는, 또 다른 무언가를 하사하기 위함인지요?”
베르사는 절대 아무 이유 없이 보상을 내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건 또 다른 보상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헤르카가 가르쳐주었느냐?”
“용아인을 언급하였습니다.”
베르사는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예나 지금이나 입이 가볍군.’
베르사는 알고 있었다.
헤르카가 일부러 ‘용아인’을 언급했다는 것을.
혹시라도 베르사의 마음이 바뀔 것을 대비해 미리 선수를 친 것이었다.
“용아인들이 네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 한다.”
“어머니가 아닌 제게요?”
“네가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네가 주가 되어 움직였기에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 아버지는 방심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므로 구출된 용아인들이 네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테지.”
베르사가 각종 마법 문양이 새겨진 스크롤을 건네주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 지하에 이동관문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예, 마침 그것을 발견하고 오는 길입니다.”
“이동관문과 파장을 맞추어 스크롤을 찢으면 일시적으로 이동좌표가 재설정될 것이다.”
이동관문에서 새어 나오는 특유의 마나파장과 스크롤의 마나파장을 맞추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큰 문제는 없었다.
‘세리에게 부탁을 해야겠군.’
실제로 이동마법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파장만 맞추어 스크롤을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세리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서 네가 그들을 지켜낸 빈첸임을 알리고, 용아인들의 수장을 만나고 오너라.”
* * *
윌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나가 가는데 이 몸이 안 갈 수는 없지!”
윌슨은 자신이 함께 가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빈첸의 시중을 드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임무라는 것이 주된 논지였다.
“용아인들은 음식솜씨도 끝내준대. 수십 년 전에 유명 쉐프는 전부다 용아인 출신이었다 하더라고.”
“…….”
“그리고 내가 딱 가서, 마! 내가 위대한 공자님의 시종이시다! 딱 선포하고 와줘야지, 공자님의 위신이 살지 않겠어?”
“……그런 건 공자님의 체통을 떨어뜨리는 일 같은데.”
“아무튼 누나. 나는 무조건, 절대로, 어쨌든, 함께 가서 공자님 시중을 들 거야.”
그는 흐흐, 웃었다.
빈첸과 함께 가면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고 온갖 공치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세리는 최대한 부드럽게 설명해 주었다.
“미안하지만 그곳은 얼마 전까지 폐쇄되어 있었던 이동관문이야.”
“그런데?”
“함께 가기 곤란하다는 뜻이지.”
“그게 왜? 누나, 솔직히 말해.”
“뭘?”
“괜히 나 못생겨서 그러는 거지? 데리고 다니기 쪽팔려서 그런 거지?”
“그건 네 피해의식이고.”
“이럴 땐 안 못생겼다고 해줘야지!”
“…….”
“어? 끝까지 안 못생겼다고는 안 하네. 안 되겠다. 난 무조건 따라가서 공자님 시중을 들어야겠어. 혹시 알아? 용아인들에게는 먹히는 미모일지.”
세리는 잠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마법에 대해 완전히 문외한인 윌슨을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지 고민했다.
‘이동관문에 가해지는 마력하중값은 보통 6승의 그래프를 그려. 그리고 피시전 대상자의 마력 절댓값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어. 따라서 네가 한 명 더해지면 마력하중값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오차율이 높아져서 이동에 제약이 생길지도 몰라. 그러니까 넌 빠져야 해.’
그러나 세리는 길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빈첸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
“윌슨. 넌 여기서 짐을 지켜라.”
“네, 공자님. 알겠습니다.”
결단코 함께하겠다던 기세는 빈첸의 한마디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윌슨은 하얀색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을 콕콕 닦아내며 -눈물은 나지 않았다-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십시오, 공자님의 충실한 시종 윌! 슨! 은 공자님의 짐을 지키라는 신성한 명을 받들고 있겠습니다요!”
한편, 빈첸과 세리는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에 도착했다.
입구 앞 광장.
빈첸이 말했다.
“세리. 부양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어?”
“공자님만 부양시키는 거라면…… 음, 3분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부탁해.”
세리가 수인을 맺었다.
빈첸의 몸이 두둥실 뜨기 시작했다.
빈첸은 광장 위에 떠서 여러 문양들을 살펴보았다.
약 3분 뒤.
빈첸은 다시금 땅에 내려섰다.
세리의 온몸은 땀범벅이었다.
빈첸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착륙할 수 있도록 마력저항을 온몸으로 받아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이륙시키는 것보다 조심히, 천천히 착륙시키는 게 배는 더 힘들었다.
“수고했어. 다음부터는 대충 착지시켜도 돼.”
빈첸은 그렇게 말한 뒤 나무 그늘을 찾아 잠시 앉았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려는 듯한 태도에, 세리는 방해하지 않고 그 옆에 조심히 섰다.
율리안이 말했다.
-차라리 체공시간을 늘려주지. 우리 형님은 야만적인 영감님이라 그냥 떨궈도 지장 없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도 마음이 따뜻하지 않느냐?’
-흥, 따뜻한 마음이 밥 먹여 주나요?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율리안은 꼭 마음과 말이 따로 놀았다.
‘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아주 싹퉁머리 없는 놈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남의 감정 자꾸 읽지 마요!
‘네가 그만큼 격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 나도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럼 네가 네 감정 감수를 잘 하든지.’
-하아, 이 영감님 시간이 지날수록 말빨만 느는 것 같다니까.
빈첸이 물었다.
‘그래서? 헤르카 요새장님이 주신 영상석과 비교해서 분석해 보면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나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있는 것 같으냐?’
-놀려먹을 건 다 놀려먹고. 어렵고 복잡한 건 꼭 날 시키더라. 형님 양심이란 게 있기는 한 거죠?
‘사명 이루기 딱 좋은 날씨구나.’
-이곳에 있는 문양들. 그리고 영상석에 기록된 빛에 의해 변형된 문양들. 이건 특별한 흐름을 구성하고 있어요. 만약 미리 경험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그러한 형태를 구성하고 있어요.
‘미리 경험했다고?’
-네. 형님이 예전부터 해왔던 거요.
율리안에게서 놀라운 말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