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15화
헤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영살자?’
그녀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다스리는 자라니.
그러나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가 암살자 계열이라면…….’
이토록 어두운 공간에서는 더욱 상대하기 까다롭다.
어쩌면 ‘영살자’는 자신보다 더 강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긴장해야 한다.’
헤나가 경계심을 높이며 상대의 기척에 집중할 무렵,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에 대해 아십니까?”
“그림자를 다루는 자들. 아스비온 일족.”
“어떻게 제가 아스비온 일족이라 확신하십니까?”
예전,
율리안이 가르쳐주었던 것들이 있다.
[-마법횃불은 기본적으로 부동(不動) 마법이에요.]
마법으로 일으키는 빛들이 대부분 그렇다.
마법은 자연현상을 거스른 이능이다.
마정석을 통해 발현한 빛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자의 방향이 반대더군. 일전에 내가 만났던 아스비온 일족이 가르쳐주었다. 너희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일으킴으로써 아스비온의 특별한 힘을 증명한다고 하더군.”
목소리는 침묵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세계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비사에 너희가 얽혀 있다고 말해주었다.”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군요.”
그리고 순간,
살기가 느껴졌다.
빈첸이 중검첩방을 펼쳐 암기를 막아냈다.
챙!
홍련과 단도가 부딪쳐 땅에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단도는 그림자로 변해 녹아 없어졌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다른 아스비온 일족을 만났다고 하여, 당신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쉽게도 당신은 나를 다스리는 자가 아닙니다.”
“아니.”
성배를 획득할 때의 빈첸과 지금의 빈첸은 또 달랐다.
그때 이후로 많은 성장이 있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빈첸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심상이 없는 마나.
위험하지만 제약이 없는 마나.
빈첸은 그 마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동하여 예전의 힘을 끌어냈다.
비록 어둠 속에 있지만 헤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붉은 빛?’
저 빛은 분명히 사미온의 ‘적황미력’이었다.
‘네가 어찌 적황미력을 익히고 있느냐?’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묻지는 못했다.
‘그래서 빈첸이 비밀을 지켜 달라 부탁한 것인가.’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빈첸을 지켜만 보았다.
“옛 언약을 잊었나? 영살자는 무릎을 꿇어라.”
빈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의 옛 주인이시여.”
공손하게 빈첸에게 예를 취하는 듯했으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빈첸은 ‘주인’이 아니라 ‘옛 주인’이라는 표현에 이상함을 느꼈다.
빈첸에게 접근한 그는 빈첸을 기습했다.
그때.
헤나가 전력으로 발검했다.
헤나의 검이 남자의 몸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러나 피는 나지 않았다.
두 동강 난 몸은 그림자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감사합니다, 누님.”
“감사할 필요 없다.”
헤나는 그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네가 비밀을 꺼내 들었으나, 암살자를 제약하지는 못한 모양이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솔직히 헤나가 없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지금의 실력으로 영살자의 일격을 막아내기란 요원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빈첸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계속 말했다.
“너는 또 다른 맹약을 맺은 듯하군.”
아스비온 일족.
그들은 사미온의 힘에 굴종하는 일족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존재했다.
또 다른 맹약을 사미온과의 계약에 덧씌웠을 때였다.
“네 맹약이 무엇이냐? 어떤 맹약이 너와 사미온의 고리를 끊어냈지?”
“…….”
“답하라. 그 또한 옛 주인에 대한 너희의 자세이니.”
빈첸의 몸에서 사미온을 증명하는 힘.
적황미력이 피어올랐다.
이내 하아- 하고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덧씌운 맹약에 저희의 자세까지 언급하시니 제가 몹시 난처하군요.”
남자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아스비온 일족, 빌로암입니다.”
“아덴카의 칠공자, 빈첸이다.”
“아덴카의 공자가 어찌하여 사미온의 힘을 익히고 있습니까?”
“나는 네게 네 맹약이 무엇이냐 물었다.”
빌로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가 보는 빈첸은 열넷의 어린 소년이었건만, 느껴지는 기백은 그렇지 않았다.
‘저 힘은 적황미력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옛 주인에 대한 예의로서, 그가 묻는 말에 답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저 소년은 직접 자신이 아덴카의 칠공자라 말했다.
이런 경우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벌써부터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 없어. 내가 네 옛 주인을 사칭하는 것이라면, 내 목을 내어주지. 너희는 절대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자가 이미 어둠 속에서 내 목을 노리고 있지 않느냐?”
“…….”
“그러니 다시 묻겠다. 너희들에게 덧씌워진 맹약이 무엇이냐?”
빈첸의 태도가 하도 당당하여 빌로암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용왕 아벨탄과 맹약을 맺었습니다.”
“맹약의 내용은?”
“그에게 전해 받은 반지를 수호하여 진정한 주인에게 넘겨달라는 내용입니다.”
“반지?”
“예, 이것입니다.”
빌로암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품속에서 작은 반지를 하나 꺼냈다.
반으로 갈라진 반지였다.
“제게 주어진 이것이 반이고, 또 다른 반은 용아인들의 수장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용왕이 말했습니다. 자신의 후인들에게 반지를 선물 받은 자에게, 이 남은 반쪽짜리 반지를 전해주라고요. 그리하면 저도 자유를 얻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또 다른 반지가 이곳을 찾아오는 증표였겠군.”
“그렇습니다. 그 반지들은 서로에게 공명하여 스스로 빛을 낸다 합니다.”
빈첸은 그제야 상황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빈첸에게는 그 반지가 없었고, 따라서 빌로암이 지닌 반지는 빛을 내지 못했다.
‘증표’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진심으로 죽이려 들지 않았다.”
물론 헤나가 기를 쓰고 막아주지 않았다면 위험할 뻔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빈첸은 여러 번의 전장을 경험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차례 드나들었다.
심지어 한 번은 실제로 죽어보았다.
그래서 살기와 죽음의 기운에 누구보다도 익숙했다.
“네 살기는 진짜가 아니었다. 틀렸나?”
“……틀리지 않았습니다.”
“왜 진심을 다해 나를 찌르지 않았지?”
빌로암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 모든 것을 가르쳐주어도 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때,
율리안이 빠르게 말했다.
-그건 형님이 얻은 힘 때문인 게 틀림없어요. 용왕이 지녔던 가호. 해일의 신 포르세딘의 가호요.
“용왕이 지녔던 힘. 포르세딘의 가호를 가졌기 때문이겠군.”
“그건 또 어찌 아셨습니까?”
“용왕과 맹약을 맺었고, 용왕의 후인을 기다리고 있다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
빌로암은 200년 전, 용왕과 맹약을 맺은 아스비온 일족.
빈첸만큼은 아니더라도 현대무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일부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빈첸이 홍련으로 빌로암을 겨누었다.
“네 눈이 트여 있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가호.
대치 상황에도 느꼈으니, 대놓고 느끼려 시도한다면 보다 정확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홍련에 새겨진 포르세딘의 가호를.
“죄송합니다. 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분명 용왕 특유의 파장이 느껴지기는 합니다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네게 제안을 하나 하지.”
“어떤 제안입니까?”
“나는 용왕의 진전을 잇기는 했으나.”
율리안으로서도 금시초문이었다.
-형님이 용왕의 진전을 이었다고요? 언제요?
빈첸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영살자가 있다는 말은 전해 듣지 못했다. 그 영살자가 반쪽짜리 반지를 증표로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200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벌써 200년의 시간이 흘렀군요.”
“그러니 내가 밖으로 나가 증표를 구해오겠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격이 없는 자를 살려 보낸 대가로 나는 소멸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맹약입니다.”
순간,
헤나는 조금 더 긴장했다.
그녀가 보는 영살자는 위험했다.
언제 튀어 오를지 모를 용수철 같았다.
그 마음을 읽은 빈첸이 입을 열었다.
“누님.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서 빌로암에게 말했다.
500년 전.
사미온 일족이 아스비온 일족에게 했던 명령 그대로.
“그림자에 맹세한다. 너는 너의 검을 들어 나의 그림자를 취하라.”
이것은 아스비온 일족과 사미온가의 특별한 계약이었다.
그림자에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맹세한 상대는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
오로지 사미온의 힘을 이은 자들만이 그림자에 맹세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내가 너의 옛 주인임을 증명하겠다.”
“…….”
“단, 너는 너의 옛 주인을 끊임없이 의심하였으므로 내게 충성을 맹세해라. 내가 약속을 어기지 않는 한, 너는 나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빌로암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빈첸이 시선을 돌려 헤나 쪽을 바라보았다.
“누님. 저자가 칼을 들어 제 그림자를 찌를 것입니다. 짙은 살기가 방출될 것이나 저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니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헤나는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녀는 빈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암살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주도권이 네게 있구나.’
이곳에서 무력으로만 따지면 가장 열세인 빈첸이, 이곳의 상황을 통솔하고 있었다.
헤나에게는 무척이나 신선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윽고 빈첸의 말대로 빌로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득한 살기가 새어 나왔다.
헤나는 몇 번이나 검을 뽑을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기다려주었다.
“그림자 맹세가 완료되었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아까와는 달리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었다.
“저희들의 옛 주인임을 인정합니다. 큰 무례를 범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로써 너는 일곱 번째 그믐달이 뜰 때까지, 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곱 번째 그믐달이 뜨기 이전에 돌아오겠다.”
* * *
헤나와 빈첸은 문을 열고 나섰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 이동관문 앞에 섰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까?”
“내가 네게 무엇을 물어야 하느냐?”
“이상한 것들이 많다고 느끼시지 않았습니까?”
“네가 내게 부탁했었다.”
헤나는 빈첸의 부탁을 기억했다.
-그때부터 제가 하는 모든 것들에 관하여 비밀을 지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헤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나는 약속을 지킬 뿐이다.”
“……고맙습니다.”
“네가 고마울 일이 아니다.”
헤나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으나 빈첸은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꼈다.
“아까 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그 또한 내가 할 일을 했을 뿐.”
이동관문을 타고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 1층으로 되돌아왔을 때, 빈첸은 그곳에서 헤르카를 발견했다.
“요새장님, 뭐하십니까?”
“아이씨 깜짝이야! 왜 벽에서 나와?”
“여기 특별한 통로가 있었습니다. 임무수행에 관하여 보고 드릴까요?”
헤르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최종보고야? 벌써 임무 다 끝난 거 아니지? 아니라고 해줄 거지?”
“아닙니다.”
“좋아, 훌륭한 우리의 생도들! 중간보고를 듣겠다. 보고는 누가 할 거야? 헤나? 빈첸? 그야 당연히 헤나 생도가 하겠지?”
“아닙니다.”
“응? 그럼?”
헤나는 빈첸을 한 번 힐끗 쳐다본 뒤 덤덤히 말을 이었다.
“빈첸이 모든 상황을 통솔하였습니다.”
“응? 그래?”
“예. 저는 빈첸의 지휘를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게는 발언권이 없습니다. 중간보고는 빈첸이 대표하여 올릴 것입니다.”
모든 공로를 빈첸에게 돌리는 모양새였다.